제66화. 탐색 (1)
강주 전역에서의 패배는 동방 원정군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소풍 정도로 생각했던 전투에서 본 쓴맛은 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장 금포 주변으로 지상군 병력의 대부분이 집결하여 혹시나 모를 적의 공세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부 군함의 함포를 탈거하여 지상군의 화력을 배가하는 조처까지 취했다.
연합왕국이 패배에 놀라 부산을 떠는 동안 오승도의 군대는 휴지기를 가지며 전력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강주 관리사 임경문의 양해 하에 강주를 지킬 의지를 가진 장정 천 명을 새로 뽑아 단련에 편입시켜 기초 군사 훈련을 시켰다.
한편으로 북쪽에 있는 양호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이 같은 정세 변화에 대해 연합왕국이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그들도 척후를 풀어 이쪽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고, 일부 신국인들을 매수하여 ‘소문’을 부지런히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강주 일대에 있는 ‘정확한’ 적의 군세와 그 동향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같은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1. 신이 강주 남쪽에 집결시키거나 혹은 증원 예정에 있는 병력은 모두 1만을 넘는 대규모 병력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신식 서역 무기로 무장하고 있으며 훈련도도 상당한 수준이다.
2. 이 병력의 상당수는 여문에 집중된 상태이며, 그 배치는 정확히 금포를 겨냥하고 있다.
그들의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군함의 사거리가 미치지 않는 거리에 포대를 배치하려는 의도에서 대포를 옮겨오고 있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그 시도를 막으려면 현재보다 많은 숫자의 지상군 병력이 필요하다.
3. 적의 정확한 공세 시점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길어도 2주 이내에 실행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원정군으로서는 이 시도를 저지하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사실 관계를 토대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 연합왕국의 지휘관들은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병력을 좀 더 증강하여 강주를 공격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체면’과 ‘기선 제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고육책으로써 충분히 검토할 만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게 되자 그들의 생각도 달라졌다.
적이 금포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한 마당에 군사적 가치도 없는 강주로 진공한다는 것은 전술적으로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1만 정도의 적과 맞설 경우 입을 손실은 연대 규모 이상의 사상자를 지불해도 모자랐다. 전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피해였다.
설령 그만한 피해를 감수한다고 해도 전략적 견지에서 쓸모없는 희생이다.
단순히 자국 대중들에게 선전을 하고 신에 약간의 위협을 가하는 목적에서 제1차 원정군이 보유한 지상군 병력 태반을 소진하는 행위 어디에 전략이 끼어들 여지가 있겠는가. 말 그대로 전력 낭비이며 불필요한 지출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동방 원정군은 강주에 대한 공세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같은 작전 선회를 결정하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때문에 동방 원정군은 다소간의 설욕전을 통해 적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기 위한 제한적인 목적의 작전을 수립했다.
작전 계획명은 ‘충격과 공포’, 말 그대로 적에게 쓴맛을 보여 줌으로써 왕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작전이다.
작전의 주된 타깃은 금포 인근까지 전진한 것으로 알려진 강주 군. 이들 병력을 단 일격에 날려 버림으로써 왕국군대가 결코 능력이 없어서 강주를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만방에 과시하고 금포로부터 재빠르게 철수하는 것이 작전의 주 내용이었다.
왕국은 이 공세를 위해 해군으로부터 탈거시킨 대포를 포함한 중포 240문, 로열 아크 연대 및 로열 노섬브랜드 연대, 해병대를 포함한 2,500명의 지상군을 투입할 예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공격 의도를 숨기기 위해 금포강 하구에 머무르던 기병대를 움직여 아문 주변에서 활동을 늘리는 조처도 취했다. 기만 전을 포함한 공격 준비인 셈이다.
장교의 명령에 붉은 코트들이 일제히 열과 오를 맞추어 발을 내딛었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보폭을 맞추어 움직이는 병사들의 열병식은 과연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척척 소리를 내며 무표정하게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병사들은 장교의 한마디에 서고 움직이고를 반복했다.
그 정밀한 움직임은 신의 오합지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군기는 칼날처럼 반듯했고, 장교와 병사 모두 기율이 잡혀 있어 전혀 우스운 느낌을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원이 같은 복장에 같은 무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컸다.
반면, 오랜 평화에 찌들어 부패한 신의 군대는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무기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통일된 복장도 제공하지 못한 지 오래된 처지.
따라서 통일된 복장과 무기를 가진 군대가 주는 느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 하나만 해도 신과 연합왕국군의 차이는 명백하게 보이고도 남았다.
연합왕국이 새삼 시가행진을 하며 금포 시민들을 위압한 것도 바로 이런 차이를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소수로서 다수를 지배하는 첫 번째 수단은 바로 공포. 다수가 소수를 두렵게 만듦으로써 통치의 편의성을 꾀하는 것은 상식에 속했다. 다양한 국가와 민족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지배하고 있는 연합왕국에게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들의 무력시위를 지켜보고 있던 신의 주민들은 다소 생경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금 수백 년간 대륙을 다스려 온 제국보다 강한 새로운 이민족들을 목격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받들어야 할 통치자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런 시각으로 홍모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강주에서 홍모귀들이 패했다는 말이 돌고는 있으나, 그래도 저들의 강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총검은 현실로,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홍모귀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
“적의 생각이 달라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휘 막사에서 척후의 보고를 받은 승도가 꺼낸 첫마디였다. 그 말에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소 놀란 눈을 했다. 특히 임경문의 동요가 컸다. 오승도가 헛소리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그는 당혹감이 실린 목소리로 물었다.
“홍모귀들이 다시 강주를 노린다, 그 말인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강주를 노리기엔 저들의 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들의 오판이지만 말입니다.”
승도의 말에 임경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관리사가 안도하는 사이, 이 대인이 승도에게 물었다. 적이 강주를 노리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적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까닭이다.
“하면 대인. 저들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한 번 정도는 전투를 걸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래도 저들이 설욕전을 한 번 하고 싶어진 모양입니다.”
승도는 적의 의도에 대한 추측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정확하게 적의 의도를 통찰해온 그의 의견이었기에 장내의 모든 이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설욕전이라.”
그 말을 내뱉으며 이 대인은 낯빛을 찌푸렸다. 희생자도 적게 본 홍모귀들이 무엇이 그리 화가 나서 설욕전을 걸어온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리어 설욕전을 한다면 이쪽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들 홍모귀들은 자신들을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는 자들. 그렇기에 저들은 사소한 후퇴 하나, 조그만 피해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입니다. 그저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다면 저 또한 우려하지 않았을 것이나, 저렇게 공공연히 부대를 전개하는 모습을 보인다 함은 그냥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승도는 오랜 경험으로 연합왕국의 생리를 통찰하고 있었다. 때로는 자존심 하나로 무익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홍모귀들이 싸움을 걸어온다면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상징적인 전투를 한 번 내주는 수밖에요. 적당한 곳에 진지를 세우고 적이 재미를 볼 수 있게 해준 다음 뒤로 빠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적은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싸움이니 그것에 져주는 것 이상의 계책은 없습니다.”
승도의 말에 임경문이 다소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끼었다. 일부러 져준다는 말을 들었으니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고의로 패전을 하겠다는 말이오?”
“물론입니다. 저들이 물러날 명분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강(强)으로 나가기엔 우리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양이들에게 굽히다니. 썩 내키지 않는 일이 아닐세.”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대로 된 교전이 벌어지면 우리 쪽의 허세가 폭로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에겐 우수한 대포와 병사가 모자랍니다. 정면으로 격돌한다면 금포에 모인 적에게 일방적으로 패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승도는 냉정하게 군의 전력을 평했다. 실제 여문과 그 주위에 집결한 병력은 모두 4천 남짓. 그나마도 제대로 훈련을 한 병력은 1천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들 병력조차 홍모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다. 개인 화기의 면에서도 홍모귀와 대등한 수준의 무장을 갖춘 병사의 수는 연대 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숙련도까지 고려한다면 일방적으로 쓸려나갈 정도의 격차라 할 수 있었다.
포병도 격차가 컸다. 연합왕국으로부터 44문의 신식 대포를 노획하긴 했지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수리를 할 기술과 시간이 없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대포에 쓸 포탄도 전투에서 거의 소진했다.
결국 가용할 화포는 구식 대포가 전부인데 그것으로 수백 문에 달하는 연합왕국의 포병 세력과 맞싸우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 행위였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이쪽의 전력을 적과 비교선상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거야 그렇지만 적도 이쪽의 실력을 두려워하지 않던가.”
“그것도 실력이 폭로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차라리 진지 하나를 내주어 적을 만족시키는 편이 낫습니다. 물론 희생을 크게 치를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소 냉정한 이야기다. 하지만 때로는 아군의 일부를 덫에 던져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전사에 드문 일이 아니다.
“적은 희생으로 적을 만족시켜 이쪽을 공격하는 것을 막는다?”
“그렇습니다. 병법에서도 종종 사용하는 기예입니다.”
잠깐의 승리를 거둔 약자들이 상대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강화를 청하는 상투적 수단으로, 고의적 패배를 겪어주는 것.
이 같은 기책은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에 그럭저럭 쓸 만한 수법이었다.
“병법에 자주 나오는 기예라. 그러고 보면 자네가 말하는 병법은 전통의 병법서와는 차이가 많음이야.”
“서역의 병법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승도는 임경문의 말을 받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다소 일정을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한 번 가볍게 패해 적의 사기를 올려주면 일시적으로 적이 고압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시기를 다시 골라야겠습니다.”
“홍모귀들과의 협상 말인가?”
“당장은 보름 후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시기를 정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홍모귀들이 한 차례 설욕을 하고 난 다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지켜본 다음, 시기를 가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임경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승도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적의 기를 올려준 상태에서 하는 협상은 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에게 그냥 승리를 선물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습니다, 오 대인.”
이 대인의 말에 승도도 동의했다.
“물론 거저 승리를 줄 생각은 없습니다. 금포강 중류 쪽에 아직 우리가 남긴 부대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기억하십니까?”
“깃발을 흔드는 이들이라면 기억합니다.”
이 대인이 생각났다는 듯 말을 받았다. 오승도는 일전에 금포강 연안에 적이 부대를 배치하도록 강요하려는 목적에서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을 모아둔 적이 있었다.
봉화를 올리는 목적을 겸한 자들로, 금포강을 따라 움직이는 연합왕국의 동태를 살피는데 유용했다.
“그들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연합왕국이 잠깐의 승리를 맛보는 동안, 강 연안으로 통나무나 몇 번 옮길 생각입니다.”
그 말에 임경문과 이 대인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행상에서 온 자들만이 그 말을 이해했다.
“설마, 염화 포대 전투와 같은 수법을 쓰시려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승도의 대답에 행상 사람들이 감탄사를 냈다. 적이 금포 주변에서 소소한 체면치레 승리를 거두는 동안, 적의 보급선을 한 번 위협함으로써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격을 구사하겠다는 뜻이니, ‘승리’를 그냥 주지 않겠다는 말이 공염불은 아닌 셈이다.
이런 공격이 가능한 것도 강 연안을 커버하던 연합왕국 육해군이 전력의 많은 부분을 금포로 집중하여 강변 방어에 공백이 생긴 탓이었다. 원정군 입장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위험한 허세도 없었다.
이렇듯 가벼운 승리도 이처럼 비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왕국으로서는 두 번, 세 번의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염화 포대 전투라니요?”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승도는 웃으며 이야기를 흘렸다. 어느 전쟁이든 그렇지만 이쪽이 맞을 약점보다 저쪽이 맞을 약점이 더 아프면, 더 아픈 쪽이 굽힐 수밖에 없게 된다.
상징적인 승리를 주어 자존심을 주면서 동시에 저쪽의 약점을 찌를 능력이 있음을 과시한다면 연합왕국이 마냥 뻣뻣하게 나올 수는 없을 터. 승도는 거기까지 계산했다.
그렇게 된다면 적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건 협상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승도는 깍지를 낀 손아래 놓인 금포강 유역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