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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스의 반지-75화 (75/425)

제75화. 수습 (2)

승도는 동방 원정군이 당분간 강주로 재진공할 뜻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말을 돌려 강주로 돌아왔다. 그가 걱정한 것과 달리 연합왕국 측은 이쪽의 무력함을 보고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의외라면 의외의 상황이었지만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도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었다. 하나는 천둥 장군의 군대와 강주의 군대를 별개의 조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었다.

두 번째는 상당히 약화된 자신들의 역량을 고려하여 전선을 확장하기를 부담스러워할 가능성이었다.

어느 쪽이든 승도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런 일인데. 꼭 좋은 징조라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 생각해보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움직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판단한다면 역시 적은 증원을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

승도는 쓰디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녀가 쓴맛을 줄일 설탕을 넣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불현듯 치민 생각이 그를 두렵게 한 까닭이다.

이 위협에서 강주를 지키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승도는 생각에 잠겼다. 적을 알고 나를 안다면 이길 수 있다는 고대의 병략을 음미해 본다면 적이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북경과 상경을 칠 것이라는 미래의 선택지는 알지만 강주를 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모두가 그놈의 천둥 장군 육영평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던 승도의 머릿속에 우선 생각 하나가 스쳤다.

‘증원을 한다면 회사군이 동원될 가능성이 크다. 십중팔구는 회사군이 주력으로 동원될 터. 회사군이 동원된다면 강주의 능력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승도는 그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회사군이 비록 왕국의 2선급 식민지 군대라곤 하지만 그 기강과 훈련 도는 이쪽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허접한 2선 군대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에우로페 기준이고, 동양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은 충분히 막강한 강병이었다. 강주 쪽 군대와 제대로 겨룬다는 가정 하에 교환 비는 1 대 4 이상 나올 가능성이 컸다.

그 정도의 교환 비율이 나오면 전쟁은 볼 것도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숫자 하나만큼은 엄청난 회사군이다. 만 단위가 몰려오기만 해도 강주를 수에서 능가할 것인데 교환 비까지 앞서버리면 말 그대로 패전은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저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천둥 장군 때문에 협상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야.’

승도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의 기세가 팽배한 상태에서 굽히고 들어가는 협상은 도리어 이쪽을 만만하게 보게 만들 공산이 컸다.

아문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적당한 시기를 골라 협상을 시도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사정이 달랐다.

승도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는 차에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오유도였다. 그런데 기척이 하나가 아닌 것이 여럿이 온 모양이었다.

승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긴히 알려줄 일이 있어 내 급히 걸음을 했다.”

오유도의 옆에는 반진유가 서 있었다. 승도는 안으로 자리를 권했다. 원래라면 그가 승도를 불러야 할 일이었지만 아들의 집무가 많다는 것을 알고 배려를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오유도와 반진유가 자리에 앉자 승도도 뒤따라 자리에 앉았다.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 겁니까?”

“다른 일이 아니라 네가 강주를 비운 사이에 조정에서 서찰이 왔다. 전혀 뜻밖의 일이다만, 네 승전보가 조정에 올라간 모양이더구나. 해서 네게 염해의 방어를 맡긴다는 명이 떨어졌다.”

오유도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반진유도 한마디 덧붙였다.

“염해라면 너도 알겠지만 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속하는 곳이다. 조정은 네게 강주에서 한 일을 다시 해주기를 기대하는 모양이더구나. 하나 그 일이 어렵다는 것은 네 아버지와 내가 모두 아는 일이다. 해서 네가 원한다면 뇌물을 써서라도 이 일을 무마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에 승도는 크게 놀랐다. 당장 강주를 지킬 걱정을 하기에도 바쁜 차에 염해를 지키라니.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소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다.

단순히 사람만 가서 지키라는 것은 아닐 터. 승도는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서찰의 내용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래 가져왔으니 한 번 보거라.”

오유도가 서찰을 건네주자 승도가 조정의 교지를 펼쳐 한 글자 한 글자를 세심하게 훑어 내렸다.

사실 교지는 본인에게 전달되어야 옳았지만 오승도가 전쟁터에 갔다는 말에 기겁한 황실의 사자가 오유도에게 그것을 전한 까닭이니, 오유도의 품에 서찰이 있었다.

한참 글귀를 훑던 승도가 그것을 접고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관위를 높여주는 것이군요. 제게 정이품의 염해 방어사 지위에 전봉 좌익 통령을 겸하게 해준다니. 조정에서 내려준 벼슬치고는 파격이란 생각이 듭니다.”

“조정의 권신들이 제국의 심장부에 속하는 상경까지는 난리가 번지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다 네 이름을 떠올린 것이 아니겠더냐. 거기다 홍모귀들을 물리쳤다 하니 그런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지.”

승전보가 올라가고 서찰이 다시 내려오기까지의 시간을 감안하면 조정의 결정에 반영된 승도의 전공은 크게 세 가지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여문 전투와 천지회 진압, 그 전의 염화 포대 전투. 이만큼의 전공만으로 본다면 승도가 받은 자리는 다소 과한 자리였다.

“네 생각은 어떠냐. 교지를 받아 염해로 가는 것이 좋겠느냐?”

반진유가 묻자 승도가 고개를 저었다.

“매력적이지만 강주를 비우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정의 교지를 거부하는 것 역시 모양새가 좋지 않은 일. 모르긴 몰라도 뇌물을 쓴다면 한두 푼이 들지 않을 겁니다.”

승도의 답에 오유도가 수염을 매만졌다.

“하면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이문을 따져서 결정할 일입니다.”

“이문?”

오유도가 반문하자 승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가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상인들이기에 통하는 대화였다.

“먼저 염해로 갈 경우에 생기는 득과 실을 따져 보겠습니다. 염해로 가면 저는 군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전봉 좌익 통령에 염해 방어사라면 2만 군세는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야 지극히 옳다만 그것이 무슨 이문이 된다는 것이더냐?”

“힘입니다. 난세는 결국 군권을 가진 자가 권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승도는 그것을 이문으로 생각했다.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삼켜 본 경력이 있으니 그 같은 계산은 당연한 것이다.

오유도와 반진유는 그 대답에 다소 어안이 벙벙해진 듯했다. 승도는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제국 동부 연안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용이해집니다. 일정 기간이라도 제가 그 지위에 앉으면 우리 행상이 그 자리에 세를 뻗치기 유리한 법. 지역의 지방관들은 제 눈치를 보아서라도 우리의 확장에 손을 대지 못할 겁니다.”

“그 말은 옳다. 다른 이문도 있느냐?”

“세 번째가 가장 큽니다. 염해의 옆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신안. 아, 염상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승도의 말에 반진유와 오유도 모두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가장 큰 라이벌 집단의 심장부가 코앞에 있다는 느낌은 역시 심장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염상 역시 제 영향력 아래에 넣을 수 있습니다. 전쟁을 빌미로 장작을 못 쓰게 만든다면 그들이 제게 굽히겠습니까? 굽히지 못하겠습니까?”

그 말에 두 거상이 무릎을 쳤다. 관점을 바꾸면 염상의 목줄을 잡을 수도 있는 위치인 것이다. 배를 건조한다는 구실로 목재를 쓰지 못하게 만들면 염상은 앉은 자리에서 소금 생산을 집어치울 수밖에 없었다.

일시적이지만 염상조차 영향력 하에 둘 수 있다는 의미이니, 파격적인 이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문이 실로 대단하구나. 그 정도면 이 상계를 네 발아래 두고도 남음이 있음이다.”

“네 번째로, 뇌물을 쓸 필요가 없으니 수만 냥의 재물을 아낄 수 있습니다.”

“그 같은 이문이 있다면 실로 매력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하지만 곧 승도가 꺼낸 말에 그들의 표정은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 염해로 가는 것은 실도 큽니다. 하나는 제가 중앙 관계에 발을 딛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전봉 통령은 곧 팔기의 고위직. 바꾸어 말하면 조정의 실력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특별한 파벌이 없는 제가 그 정치 싸움을 해나간다는 것은 언제든 가문에 위험을 가져올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물론 그런 문제는 부정할 수 없다.”

“강주를 비움으로써 생기는 문제도 역시 실입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면 홍모귀들이 움직일 때 즉각 대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문의 기반인 강주를 두고 움직이는 것은 그래서 위험 부담이 큽니다.”

두 거상은 그 말에도 수긍했다. 행상의 사업 기반을 넓히는 일도 좋지만, 역시 그 근간이 흔들리는 일은 좋지 않았다. 안정성을 담보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상인들이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는 염해에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벼슬을 받아 그곳에 간다는 것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의미이니, 진다면 패전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득과 실입니다. 말 그대로 얻는 것이 큰 만큼 잃는 것도 큰 도박입니다.”

“과연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이문과 실이 이처럼 대비된다면 실로 어려운 문제다.”

오유도와 반진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만 풀린다면 천하 상계의 장악은 물론이요, 날개를 다는 것은 여반장이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가문이 통째로 파멸할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아버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승도가 묻자 오유도가 수염을 쓰다듬다 너털웃음을 지었다.

“네가 그리 깊게 생각하고 있으니 내 생각을 들어 무엇을 하겠느냐? 그래도 이 늙은 아비의 생각이 필요하다면 한마디만 해보마. 상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이더냐?”

“위험입니다.”

“그 위험을 따질 때는 무엇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쳤더냐?”

“잃어서 안 될 것이 걸려 있는지 따져보라 하셨습니다.”

“이미 네 스스로 답을 말하지 않았느냐. 네 답은 무엇이냐?”

오유도의 물음에 승도가 포권하며 답했다.

“강주입니다.”

“맞다. 천하의 부를 쓸어 담는 것도 좋고 야심을 불태우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나 제 손을 흥정의 대상으로 올려놓고 도박을 하는 자는 뒤끝이 좋지 않다.”

반진유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네게 황금이 필요하다면 내가 도와주마. 하니 염상의 부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물론입니다, 장인어른.”

“하면 서찰 건은 우리가 뒤처리를 해도 되겠느냐?”

“그래도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알겠다. 하면 우리는 이만 물러가보마.”

반진유와 오유도가 헛기침을 하며 방을 나섰다. 그러다 반진유가 걸음을 잠시 멈추고 승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도 좋다만 신혼 아니냐. 네 아내를 독수공방시키는 일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송구합니다.”

승도가 부끄러운 표정을 짓자 반진유가 껄껄 웃으며 멀어져 갔다. 그들이 방을 나서자 반은비가 대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듯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짓다 조심스레 방으로 발을 디뎠다. 그녀의 당혜가 부드러운 양탄자를 밟자 승도가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승도에게 말을 건넸다.

“일을 보시는데 소첩이 찾아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승도가 자리를 권하자 반은비가 치맛자락을 가볍게 걷고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활동에 편한 치파오를 입은 까닭에 그녀의 우윳빛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승도는 잠깐 그것에 한눈을 팔다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낮 시간에 집무실을 찾은 걸 보니 할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네. 긴히 드릴 말도 있고.”

반은비는 가볍게 답하며 배를 가볍게 쓸었다. 승도는 그 뜻 모를 행동에 잠깐 눈길을 주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일입니까? 혹여 은자라도 필요한 것입니까? 은자가 필요하면….”

“그건 당연히 아닙니다.”

반은비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무심한 제 남편에게 조금은 골이 난 듯 볼이 절로 부풀었다. 사람이 이렇게 무심할 수가!

그래도 눈치는 빠르다고 생각한 남편인데 이럴 때는 소가 따로 없었다. 머리가 좋으면 뭘 하나. 집에서는 소만도 못 한 것을.

승도는 그녀가 갑자기 기분이 상한 이유를 몰라 조금 당황했다. 혹시 장인이 말한 것처럼 독수공방을 시켜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며칠 만에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니 사실 회가 동하기도 했다. 뼈가 녹아내린다는 신혼의 재미가 꺼지지도 않은 시기가 아니던가.

“하면 오늘은 조금 일찍 침전에 드시겠습니까?”

승도가 던진 적나라한 말에 반은비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지금 이 멍청한 남편이 착각을 하고 있어서 기가 막혀 그런 것뿐이었다. 그녀는 승도를 보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이. 아이가 생겼단 말입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아, 아이요?”

승도는 그 말에 놀라 반은비의 배를 보았다. 하지만 반은비처럼 호리호리한 여성은 임신을 해도 배가 부푸는 정도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하물며 여성들의 배가 눈에 띌 정도로 부풀어 오르는 것은 임신 7개월이 지나서이니 표가 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네. 아이입니다. 달거리가 끊겨 의원을 불렀는데 아이가 들어섰다 합니다. 어쩜 그렇게 무심하신 것입니까?”

반은비가 타박을 했지만 승도는 그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전생에도 갖지 못했던 친자를 이생에서 갖게 되다니. 그 묘한 감회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정리되질 않았다.

그의 전생에도 자식은 있었다. 재능 하나만을 보고 거두어 기른 양자.

하지만 그가 거둔 양자 앙리는 친자가 아니었다. 정으로 기른다는 양자도 자식이었지만 친 혈육이 주는 느낌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반은비의 골이 난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승도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고맙습니다.”

승도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그래도 강주를 떠나는 문제에 마음이 흔들리는 빛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아이를 보니 그 생각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에게 지킬 것이 하나 더 늘어난 이상 저울추를 새삼 바라볼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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