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묘수 (1)
전쟁이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났다.
어느덧 계절은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물론 겨울이라고 해도 강주는 따스한 남방답게 기온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승도는 이 기이한 날씨를 신기하게 여기며 달력을 보고 있었다. 그가 보는 달력은 바로 태양태음력. 그는 이 음력 달력을 보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태양력을 즐겨 사용하는 서역과 달리, 동양은 기본적으로 달의 운동을 중심으로 시간을 구분하는 음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같은 차이는 서역과 동양의 지리 인문적 차이에서 기인했다. 태양력이 정해진 시기마다 일어나는 홍수의 예측을 위해 나왔다면, 음력은 농사 절기를 맞추기 위해 고안됐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처음에는 날짜 계산이 쉽지 않았다. 요컨대 1년을 360일로 보는 음력과, 1년을 365일로 보는 태양력은 날수의 예측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음력 달력을 보고 날짜를 계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서역에서는 종교적 이유로 달에 붙은 날짜도 자주 고친 까닭에 그 차이는 더 컸다.
아무래도 더 오랜 세월을 보아온 것이 태양력이다 보니, 승도에게 음력은 다소 불편했다. 익숙한 쪽이 정확한 날짜를 보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 내 중요한 행사는 모두 음력으로 표기된 까닭에 음력 달력을 보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승도는 한참이나 달력을 보며 손가락을 들어 날짜를 셈했다. 하필 서역 최대의 축일인 오시리스 탄신일과 제국 황제 탄신일이 겹쳤다.
오시리스야 신(?)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돈이나 받아 처먹는 황제의 생일은 별로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승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을 나섰다. 그놈의 탄신일 생각만 해도 짜증이 절로 치밀었다.
‘전쟁 중에도 선물을 바치라 닦달할 작자들을 생각하니 머리부터 아프다. 그나마 위해충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다행이지. 신임 감독은 얼마를 요구할지. 위해충보다 덜한 놈이면 좋겠는데.’
아문 해관은 적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감독 자리는 공석이 아니었다. 황실의 수요를 부지런히 충당해야 하는 까닭이다. 위해충 다음으로 온 신임 감독은 전요립이란 자인데, 이자도 상판만 보면 돈 꽤나 밝히게 생겼다.
얼마 전 신임 감독의 취임사에서 보았는데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인간이다.
승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화원을 따라 걸었다. 계절은 겨울임에도 꽃이 무성하게 피어 달콤한 향기가 절로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향은 승도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 생각이 깊어진 까닭이다.
행상들은 이따금 황실 가족들의 생일과 각종 연례행사에 맞추어 공납을 바치곤 했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돈이 결코 작지 않았다. 평시라면 부담이 덜하였을 것이나 전쟁 중에도 선물을 요구하는 것이 여느 때와 같으니 행상들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어쩌면 이번 탄신일에 파산하는 행상이 나올지도 모른다. 보통 때라면 행상 기금을 통해 파산하는 행상을 구제했겠으나, 지금은 도저히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오씨와 반씨도 자금 사정이 상당히 좋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외국과 전쟁 중인 까닭에 외국 상인들에게 파산한 행상의 채무를 연대로 갚아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정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이참에 행상 수가 4개 이하로 떨어지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어차피 행상에 대한 우리 가문의 통제력은 간접적인 것이니, 이쪽이 유리할지도 모를 일. 오씨와 반씨만 남기고 모조리 무너지도록 방관하는 쪽도 생각해봄직한 일이야.’
승도가 연못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연못 안을 노니는 금빛 비단잉어들이 주인의 기척을 알아챈 것인지 수면 앞으로 모여들어 입을 뻐끔거렸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기들이다.
승도는 손에 쥐고 있던 볍씨를 한 줌 연못으로 던졌다. 그러자 고기들이 물장구를 치며 한 알이라도 더 챙기려 아귀다툼을 벌였다.
그것을 보니 인간 세상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문을 탐하여 어제의 동료조차 서슴없이 밀쳐내며 제 먹을 것만 챙기는 인간.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오승도 자신이 그러했다. 행상의 동료들도 버겁다 싶으면 버리는 것이 자신이었다.
‘지킬 수 없는 것까지 지키려 드는 것은 만용이지. 나는 지킬 수 있는 것만 지킨다. 내 가문, 내 가족. 그리고 내 야망. 내가 지킬 것은 그것이 전부다. 그 이상을 지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겐 능력 밖의 일이야. 이상을 먹고사는 이상론을 꿈꿀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이상론을 추구하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승도는 모든 것을 지키려 발버둥을 치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는 진리를 체득하고 있었다. 굳이 깨달음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인간사 어디에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원리. 군사를 움직이는 용병술에서나 인간을 다루는 정치에서나, 생활과 연관된 경제에서나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승도가 손을 재차 털어 볍씨를 고기들에게 먹이는 차에 반은비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녀는 다소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서방님. 오늘은 집무를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녀의 말에 승도가 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던 손을 늦추며 고개를 돌렸다. 자색의 비단을 걸친 부인의 흰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승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예. 오늘은 생각도 정리할 겸 집무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간단한 일은 건문에게 맡겨 두었으니까요.”
건문은 한 달 전 승도를 찾아와 그 밑에서 장서기 일을 맡고 있었다. 사실상의 비서 역할인데, 어느 정도 안목도 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일 처리에 있어서 상당히 깔끔한 모습을 보여 승도는 종종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기도 했다.
물론 중요한 일은 맡기더라도 다시 한 번 점검하긴 했지만, 일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다행이에요. 사실 서방님이 일이 너무 많아 조금 걱정했습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일 하나는 단련된 몸이니까요.”
승도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그녀의 손을 쥐고 연못가를 따라 걸었다. 바람이 선선하고 날씨가 좋은 것이 나들이하기에 좋은 날이다. 전쟁 중이라곤 하지만 일상의 여유를 잠시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승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드러운 아내의 손을 어루만졌다.
연꽃이 수려하게 핀 연못가의 정취에 홀린 듯 반은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와 꽃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승도의 눈이 개구리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자 연못으로 급히 뛰어드는 개구리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반은비가 걸음을 늦추었다.
그런 그녀에게 승도가 말을 건넸다.
“개구리에 놀라신 겁니까?”
승도가 웃으며 건넨 말에 반은비가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개구리를 무서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남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마음이 있어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듯 애써 강한 모습을 보였다.
수백, 수천의 목숨이 달린 전쟁의 중압감을 견뎌내는 남편의 반려자인 만큼,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개구리 정도에 놀랄 소첩이 아닙니다.”
그녀는 힘주어 대답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그것을 알면서도 승도는 모른 척 넘어갔다.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다.
“개구리를 보니 문득 생각이 드는 게 있습니다.”
승도가 가만히 말을 꺼내자 반은비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 아내의 반응에 승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실 말입니다.”
승도의 말에 반은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로서는 개구리와 황실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연관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실이요? 그들이 개구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승도는 돌멩이를 하나 주워 들고 개구리가 사라진 연못 위로 가볍게 물수제비를 만들었다. 통통 튄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며 연못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승도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돌멩이를 주웠다.
“황실과 개구리의 공통점은 겁은 많은 주제에 시끄럽다는 거지요.”
오승도의 말은 대단히 불경스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누가 듣는다면 불경죄로 몰려도 할 말이 없는 발언이었다.
그 말에 반은비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의 입술이 활짝 만개한 꽃잎처럼 벌어졌다.
“서방님.”
반은비가 놀라 그 불경스런 말을 멈추려 했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주변을 얼른 살폈다. 다행히 듣는 사람은 없었다.
있다 해도 충성심이 검증된 사람들만 있겠지만 말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승도는 놀란 아내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돌멩이를 연못 위로 던졌다.
흰 파문이 번지는 것이 꼭 그가 던진 발언에 놀란 아내의 얼굴을 닮은 듯싶었다.
“놀랐습니까?”
승도가 묻자 반은비가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단호하게 답했다. 농담으로라도 할 말이 아니니 정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서방님이 잘못되시길 바라지 않으니 두려울 수밖에요.”
그녀의 말에 승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은 이해 가능한 범주의 것이었다. 왕조 국가에서는 말 한마디, 행동 가짐 하나하나를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말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엔 부인과 나,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오늘 내원의 뜰을 돌기 전에 우리 가족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을 내려 두었으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하지 않습니까? 벽에도 귀가 있는 세상입니다.”
그녀가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자 승도는 뒷짐을 진 채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역시 그녀의 염려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그 속내를 털어놓고 싶었다.
“부인의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앞으론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세상이 올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그렇게 단언하시는 건가요?”
“신이 오랑캐들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꺾인 권위는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는 법. 그 권위가 깎인 만큼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겠지요.”
승도는 그간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반은비에게 내보였다. 그의 동반자이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가진 아내다. 그런 그녀에게 굳이 숨길 것은 없었다.
“하오나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내가 자신하는 대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천지회 반란을 기억하시겠지요?”
“서방님이 공을 세운 반란이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은비가 천지회 반란을 안다고 말하자 승도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조정의 고관이자 거상답지 않은 행동에 반은비가 한마디 하려 했지만, 승도가 손을 당기자 그녀도 엉거주춤하게 따라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비단옷에 흙이 잔뜩 묻었다.
“천지회의 난은 작금의 조정이 착취를 일삼아 일어난 민란이었습니다. 욕심이 과해서 벌어진 일이지요. 하물며 홍모귀들에게 전쟁에 패해 발생한 막대한 전비 부담과 배상을 그들이 책임지겠습니까? 결국 백성들에게 부담이 전가될 것입니다. 지금도 먹고살기 어려운 그들에게 그만한 부담을 지운다면, 가뜩이나 권위가 떨어진 제국 정부에 굽히고 싶은 마음이 더는 들지 않겠지요. 하면 천하대란이 일어날 겁니다.”
“천하대란.”
반은비는 그 무서운 말을 입에 담았다. 수천만의 민중이 죽어나가는 혼란의 시대, 난세를 의미하는 말. 그 시대가 찾아온다면 남편의 말대로 될지 몰랐다.
“그렇습니다. 천하대란. 한편으로는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갑지 않은 일이지요.”
반은비는 남편의 말을 이해했다. 좋아진다는 말은 조정의 막대한 수취 부담과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고, 좋아지지 않는다는 말은 가문의 이익 상당 부분이 창출되는 내수 시장이 무너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된다면.”
반은비는 말을 하려다 그것을 잇지 못했다. 승도가 그 말을 받았다.
“나는 제국이 회생불가의 길에 빠진다면 자립(自立)을 생각할 겁니다. 내 가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승도는 자립을 입에 담았다. 일개 상인이 입에 담을 말은 당연히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다.
거대한 제국을 통치해본 황제의 경륜과 세계 제일을 다툰 전략가의 식견, 거상으로부터 훈련받은 감각을 한 몸에 가진 괴물이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소첩은 겁이 납니다.”
승도는 그녀의 배에 가볍게 손을 가져갔다. 약간 부푼 그녀의 배에서 미미한 미동이 느껴졌다. 옅은 비단 천 아래로 새로운 생명이 느껴졌다.
승도는 아이의 발길질에 미소 지으며 그녀의 배를 가볍게 쓸었다. 반은비는 볼을 붉혔지만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 일이 꼬인다면 안면이 있는 서역 상인들에게 몸을 의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오승도는 내 품의 가족들을 지킬 정도는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승도의 말에 반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는 소처럼 눈치가 느린 남편이었지만 그 약속은 신뢰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불가능하다 여긴 일을 모두 이루어낸 거인이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가 한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거운 것. 그가 그렇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었다. 쉽게 약속을 내뱉지 않는 남편이기 때문이었다.
“서방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하니 위험한 이야기는 자리를 가려 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리할 생각입니다. 부인의 앞이니 그런 이야기를 해본 것이지 다른 곳에서는 입에 담지도 않을 말입니다.”
승도의 말에 반은비가 눈웃음을 지었다. 여자에게 비밀의 공유가 갖는 의미는 컸다. 정서적으로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상대를 ‘신뢰’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남편이 속내를 털어놓기를 바랐던 그녀이기에 조금 전의 이야기는 위험스럽지만 기분 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승도가 꺼낸 이야기 덕분에 남편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여겼다.
“그럼 일어나 볼까요?”
승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옷에 묻은 흙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내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다 실밥이 붙은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