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77화 (77/425)

제77화. 묘수 (2)

승도는 겨울 동안 왕국 측의 움직임이 없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들의 차후 계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천둥 장군만 아니었다면 예민해질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주의하고 경계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업이 송두리째 날아갈 수도 있었다.

여문과 금포 시찰은 겨울이 끝나갈수록 그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급기야 장원에 머무는 시간보다 이들 지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판이었다.

승도는 아내의 곁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면서도 시찰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장원에서 처리해야 할 기본적인 업무는 대부분 건문에게 맡겨둔 터라, 그가 신경 쓸 일은 대개 군사적인 것에 해당되었다.

승도가 금포 관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임경문을 위시한 관료들이 그를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홍모귀들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던 터라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서 오시게.”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인.”

승도가 읍을 하며 답하자 임경문이 웃으며 마주 포권했다. 그는 가볍게 손을 펴 안쪽으로 들어가자는 시늉을 했다. 승도와 임경문이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기자 나머지 관료들도 그 뒤를 따랐다.

임경문은 먼저 걸음을 옮기며 승도에게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문에 양선들이 여럿 들어왔네. 모르긴 몰라도 적의 증원 병력이 들어오기 시작한 모양일세. 어떻게 생각하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기상으로 보아도 적의 증원이 도착하기 시작할 시간입니다. 대개 장사를 위해 이곳 아문까지 배를 몰아오는 서역인들의 항해 시간만 생각해봐도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승도의 대답에 임경문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나 가뜩이나 강력한 양이들이 그 세를 더욱 불린다고 하니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도착이 아니라 규모가 아니겠습니까?”

승도가 한마디를 덧붙이자 임경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역시 적의 규모가 가장 우려스러웠다.

기천 단위의 증원이라면 그나마 마음이 놓이겠으나 만 이상의 적이라면 감당할 방도가 없었다.

“물론 그러네. 혹여나 적이 만 단위까지 군세를 늘린다면 낭패인데. 적이 얼마나 병력을 동원할 것 같은가?”

“척후의 보고를 들어야 가장 정확하겠지만 제 짐작으론 만을 상회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일전에 우리가 강주와 여문에서 적에게 준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둔 승리가 과했기 때문에 양이들이 더 많은 전력을 증원한다. 자네 말대로라면 차라리 졌어야 할 싸움이야.”

“최선의 방법은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할 수는 없으니 어느 시점에서 저들과 타협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경문은 승도의 대답을 부정하지 않았다. 일전에 이미 나눈 대화에서 나온 결론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 그 점에서는 그도 공감하고 있던 바였다.

금포 관아에 들어서자 지난 전투에서 죽은 이들을 가매장하여 만든 봉분들이 수도 없이 들어서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관아에 매장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홍모귀들이 이미 묻어둔 것을 도로 파낼 수도 없어 그냥 방치해두고 있었다. 유족들이 와서 수습하기 전에는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될 것들이었다.

승도는 봉분 앞을 지나다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금포에 들를 때 한 번 보았지만 씁쓸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강주가 적의 군홧발에 밟혔다면 이 참상이 재현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가 봉분을 바라보는 걸 느낀 임경문도 걸음을 늦추었다.

“제국 전역이 이렇게 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야 할 것인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낭패일세.”

“가급적이면 전화가 강주에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승도는 숱한 전쟁을 겪으며 그에 휘말린 무수한 인간의 죽음을 보았다. 전쟁은 노약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도리어 노약자들에게 더 잔인하다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제 백성을 지켜주지 못할 만큼 나약한 나라에 태어난 게 죄다.

승도와 임경문이 봉분 앞에서 잠시 걸음을 쉬는 사이, 뒤에 서 있던 관료들을 헤치고 한 사내가 급히 달려왔다. 그 사내의 부름에 임경문이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그가 아문으로 보냈던 탐보꾼 중 하나였다.

“그래. 다녀왔는가?”

“예. 대인.”

“그려오라 한 것은 그려왔는가?”

“여기 있습니다.”

탐보꾼이 공손하게 품 안에 든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전직 화공 출신인 사내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려 임경문이 특별히 탐보 일을 맡겼었다. 사내가 건넨 종이를 받아 쥔 임경문은 잠시 그것을 보다 승도에게 그것을 건넸다.

“자네도 한 번 보게.”

임경문의 권유에 종이를 받아 든 승도가 그것을 유심히 보았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낱낱이 그려오려 했지만 멀리서 보는 것이라 그리 정확하진 않았다. 부대 깃발과 같은 세부 정보까지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한참 그림을 보던 승도가 그려진 홍모귀들을 보다 불현듯 눈을 멈추었다. 그러곤 너무 놀라 다시 눈을 비비고 그림을 보았다. 그 놀란 모습에 임경문이 물었다.

“뭐가 이상한 것이라도 있는 것인가?”

“이건, 홍모귀들의 최정예 부대입니다.”

승도가 그림 중 한 부분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임경문이 그에 눈을 가까이 가져가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기이한 옷을 걸친 자들이 아닌가. 이런 자들이 최정예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이자들은 홍모귀들 중에서도 악명이 드높은 고지보병연대입니다. 같은 숫자라면 지옥의 악마들과 싸워도 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자들입니다. 지난날 우리가 강주와 여문에서 상대한 적들도 이자들에 비하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진정인가?”

임경문은 그 말에 놀라 다시 그림을 보았다. 대단찮게 보이던 자들이 새삼 다시 보였다. 킬트를 걸친 자들을 우스꽝스럽다 여겼는데, 다시 보니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옆에 선 자들 역시 강병일 겁니다. 고지보병연대가 나왔다는 건, 왕국 육군의 정예들이 모두 나왔다는 의미이니,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적의 최정예라 함은 일전에 상대한 적당들보다 강하다는 의미 아니던가. 이거 야단났군.”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수만 적세가 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들을 막을 수 있는 군대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임경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면 벌써 승부가 결정이 났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들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따라 전쟁이 길어질지의 가부가 판가름 날 겁니다.”

승도는 그리 말하며 그림을 물끄러미 보았다. 도착한 상선의 수효로 보아 증원된 적의 수는 연대 3개에서 4개 정도.

앞으로 더 증원될 적 병력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도착한 적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강주는 자력으로 저들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저들의 공격 방향을 다른 곳으로 바꾸어야 했다. 제국 수도가 불타더라도 강주만 무사하면 그만이다. 승도는 입술을 깨문 채 그림을 노려보았다.

***

군홧발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오랜 항해로 지칠 대로 지친 육군이었지만, 해군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열과 오를 맞추었다.

상선으로부터 하선하는 것조차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추어 움직이는 것이 과연 왕국의 정예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장교와 준사관들이 언성을 높일 필요도 없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군대 개미를 연상시켰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 병사들의 물결이 해안가에 전개를 마치고는 멈추어 섰다.

그 선두에 선 장교가 우렁찬 목소리로 연단에 선 장성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왕국 육군 제41 고지보병연대장 하운즈 대령 이하 1,800명의 장병이 동방 원정군 예하로 편입되었음을 보고 드립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대령은 연단 옆에 쭉 도열한 장교들을 쓱 살피고는 제일 앞자리로 올라섰다. 물론 거기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장교는 없었다. 육군 장교 서열상 고지보병연대장의 서열이 가장 높기 때문이었다.

참모장 하비 대령은 자신들의 앞에 선 채로 사열을 받는 고지보병들을 보다 특이한 이들을 보고 눈이 살짝 커졌다. 고지보병의 깃발을 든 한 무리의 여자들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고지보병연대는 왕국 육군과 달리 의장용 군악대를 모두 여자로 채우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연대의 군악대는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왕국 육군의 고정 관념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하비 대령은 그것에 대해 한마디를 하려다 ‘고지보병연대의 일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유명한 금언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곧 고지보병연대의 군악대가 앞으로 나섰다. 백파이프를 부는 연대의 전투 군악대와 달리 의장용 군악대인 까닭에 그녀들은 트럼펫과 북 등도 가지고 있었다.

의상도 상당히 이색적이었는데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은 차림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들의 나이가 상당히 어린 것에 기인했다.

“꼭 계집아이들의 소풍놀이 같군요. 여왕 폐하 앞에서 의장대나 시키면 딱 좋겠습니다.”

하비 대령의 옆에 서 있던 로버트 대령이 한마디를 했다. 그러자 참모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군악대가 지나가자 연대의 분열 행진이 시작되었다. 병사들이 절도 있게 발과 손을 움직이면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모습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의례적인 예식 행위로 볼 수도 있었지만 전열 전투에서 이 정도 수준의 통제력을 가진 군대가 나타난다는 것은 재앙과 같았다.

무의식적인 실수조차 거세된 군대라면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얼마나 강력할 것인가!

연대의 분열을 지켜보던 장교들도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먼저 전투에 투입되었던 연대의 지휘관들은 그 사실을 느끼며 제 부하들과 비교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지보병 수준의 훈련 도를 가졌다고 자평할 수는 없었다.

전원이 상비군으로 유지되는 데다 근속 10년 이상의 베테랑들로 채워진 군대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잘 단련된 이 전쟁 기계들과 비교할 정도의 군대라면 로망스 제국의 고참 근위대 정도가 고작이다. 물론 비교가 된다는 것이지 적수가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연대가 분열을 마치자 부대가 보유한 특수 병종의 소개가 있었다. 숙련이 어려워 대부분의 연대에서는 감편 편제에서 보유하지도 못한 엽병이 그들이었다.

저격을 전문으로 하는 엽병들이 대대마다 중대 단위로 배속되어 있었다.

비정규전을 주력으로 하는 상대가 있다면 그에 대응할 능력이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그들을 바라보던 장교들은 자연히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엽병이 부족한 탓에 강주 진공 과정에서 맛본 혹독한 피해가 떠오른 까닭이다.

연대의 의장 행사가 모두 끝나자 웰즈 소장이 박수를 쳤다. 다른 장교들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확실히 왕국의 최정예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다. 이들이 도착한 이상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잘 보았습니다. 아주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요.”

“감사합니다, 각하.”

하워즈는 웰즈의 칭찬을 받으며 제 병사들을 자부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 웰즈는 가벼운 덕담을 덧붙이며 하워즈와 함께 연단에서 내려왔다.

나머지 장교들은 참모장 하비 대령이 자리를 지킨 까닭에 제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웰즈는 하워즈와 나란히 걸으며 한마디를 꺼냈다.

“실은 당신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전투를 한 차례 치렀었습니다. 이곳 아문에서.”

“그렇습니까? 각하께서 무리해서 전투를 치르시진 않았을 테니, 적이 도발해온 것이겠군요.”

“정확합니다.”

“그게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모양이지요?”

웰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워즈는 미소를 지으며 장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난 강주, 여문 전투를 거치며 우리는 적의 역량을 상당히 과대평가했습니다. 그 허실을 깨달은 것이 아문에서의 교전이었던 셈입니다. 군대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자들이 적의 정규군이더군요. 1만이 넘는 적이 전열 전투 한 번에 붕괴되는 꼴을 보고 우리는 지금까지 적에 대해 오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포로 심문과 정보 수집을 통해 아문에서 싸운 적과 강주, 여문에서 싸운 적이 별개의 적이라는 사실은 알아냈습니다. 아문과 여문의 적이 별 게 아니었던 거지요. 연대 셋 정도만 보내면 충분히 승리할 정도의 전력이 고작이었으니 우리가 제대로 기만당한 꼴입니다. 해서 이 부분을 놓고 우리 지휘관들 사이에 강주 재진공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명예 회복 문제 말입니다.”

“명예 회복이라. 그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면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나는 강주 공격은 뒤로 미루었으면 합니다. 어차피 정치적 목적을 우선 달성하고 돌아오는 길에 응징해도 늦진 않겠지요. 그 응징이 지금일 필요는 없습니다. 정부가 진 부담을 생각하면 가급적 승기를 잡는 모습을 빨리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웰즈의 말에 하워즈도 공감했다. 명예 회복 운운하기에는 본국의 여론이 썩 좋지 않았다.

괜히 전쟁을 지지부진하게 끌다간 오히려 육군의 명예만 똥통에 빠진다. 설령 강주를 응징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전쟁은 이기고 볼 일이다.

“하면 어디를 염두에 두고 계신지. 생각해두신 곳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우선은 상경을 타격해볼 생각입니다. 제2수도라 불리는 곳이니 정치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입니다.”

“제국의 머저리들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한 표적이군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여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다음은 북경이 되겠지요.”

웰즈의 대답에 하워즈가 걸음을 멈추었다.

“제국 수도까지 타격하는 것입니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야만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더 강한 수를 꺼내는 수밖에요.”

그 말을 꺼낸 웰즈의 뒤편 바다가 유난히 붉게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