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80화 (80/425)

제80화. 상륙 (2)

연합왕국 섬에 대한 상륙은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새벽녘에 감행되었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작전 감행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파도가 그리 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도는 이를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비는 강력한 우군이라 할 수 있었다. 시야를 크게 축소시켜 혹시 모를 연합왕국 해군의 눈을 피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기상보다 적 해군의 움직임을 두려워해야 하는 승도로서는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늦저녁에 뗏목과 나룻배를 해안으로 옮긴 다음, 철저한 등화관제 속에 10척씩 무리를 지어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시간에 맞추어 배를 띄운 터라, 시작은 순조로웠다.

그들은 1시간 만에 썰물을 타고 해안에서 20리 이상 나아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부터는 강한 조류가 흐르는 까닭에 연합왕국 섬까지는 비교적 쉽게 항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야간의 바다, 그것도 비가 쏟아지는 시간에 감행한 작전인 까닭에 비전투 손실이 얼마나 나올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빗속에서 바다로 나오다니. 정말 미친 짓이군.”

시커먼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던져진 사내 하나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 노를 젓는 동료 몇을 제외하면 정말 보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육지 쪽에서 반짝이는 옅은 불빛과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검은 바다뿐이었다. 그나마 비가 오는 것을 본 승도가 작은 등불을 켜도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 덕분에 약간의 빛을 곁에 둘 수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지.”

늙은 사내가 말을 받으며 노에 힘을 실었다. 조금의 빛이나마 없었다면 미쳐버릴 만큼 두려운 곳이었다.

“저 빛을 따라 쭉 가면 되는 거요?”

“아마도 그렇지 않겠나.”

사내는 노를 재차 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섬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것이 끝은 아니다. 그다음에는 막강한 홍모귀들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육지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빛이다.”

누군가가 손가락을 뻗자 모두 고개가 돌아갔다. 벌써 목적지에 도달한 것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희미한 호롱불에서 나온 옅은 빛이었다. 앞서나간 뗏목인 것이다.

그것은 겨우 장정 열 사람 거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빗소리에 파묻혀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다보니 착각을 일으킬 만했다.

“호들갑들 떨지 말게. 벌써 뭍에 갈 리가 있나. 모르긴 몰라도 한참은 더 걸릴 일일 터인데.”

늙은 사내의 말에 모두가 입맛을 다셨다.

그만큼 검은 바다가 주는 압박은 컸다. 빛도 찾아보기 힘든 어두운 공간에서 검은 괴물에게 포위된 채,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보기 어렵다는 것이 주는 심적인 부담 때문이었다.

사내들은 입을 꾹 다물고 노를 젓는데 집중했다. 한참 노를 젓다 대충 시간을 본 늙은 사내가 허기나 채우자고 말했다.

노를 젓는 일은 힘이 많이 들기에 그만큼 많이 먹을 필요가 있었다. 사내들은 품에 넣어둔 주먹밥을 꺼내 입에 베어 물었다.

주먹밥은 흰쌀밥에 약간의 무말랭이, 깨와 콩 등을 넣은 것으로 그 자체로 부족하나마 한 끼 식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소금을 치지 않았음에도 해풍과 바닷물에 젖어 짭짤한 맛이 났다. 그 짭짤한 맛에 입맛이 도는지 한 입에 넣는 이들도 있었다.

사내들은 작은 주먹밥 한 덩이로 요기를 하고는 다시 노를 잡았다. 노질에 유리한 신 전통의 노는 물살의 이용에 용이한 물방울 모양을 하고 있어 노질 자체는 큰 부담이 없었다.

그들은 이따금 ‘풍어가’나 ‘농가’를 조용히 흥얼거리며 노에 힘을 주었다. 가끔은 운율을 맞춘 노래 가락이 노 젓기에 도움을 주곤 했다.

그렇게 거의 두 시간여를 노를 저었을 무렵이었다. 노를 저어 가던 사내들 중 하나가 육지 쪽의 불빛을 보고 말했다.

“저기서 불빛이 끝난 걸로 봐서 그 옆은 아문이겠지. 그럼 홍모귀 섬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사내 하나가 앞에 새로 나타난 흐릿한 불빛을 인식했다.

“불빛이다. 홍모귀 섬이다.”

그 말에 바다만 내려다보며 묵묵히 노를 젓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앞으로 희미한 불빛이 훤히 보였다. 작은 뗏목이나 나룻배에 실린 호롱불이 아니라 멀리서도 분별할 수 있을 법한 불빛이었다.

육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섬의 윤곽을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불빛들이 그 모습을 대강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들이 상륙을 시도하는 섬 동쪽 해안엔 평탄한 백사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내륙에 높은 구릉이 펼쳐져 있었다.

백사장에 상륙하지 못하면 조류를 타고 남쪽이나 북쪽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북쪽은 경사진 절벽이라 상륙이 불가능했고 남쪽은 얕은 만이 있어 조류가 흘러들지 않았다.

때문에 상륙을 하려면 동쪽 해안에 내려야 했다.

“호롱불을 이리 주게.”

늙은 사내의 말에 사내 하나가 얼른 호롱불을 건네주었다. 늙은 사내는 그것을 들고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어둠 속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어둠 속이 잘 분별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먼지 한 톨만큼은 나았다.

빗줄기 속을 훑어가던 늙은 사내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그는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표정을 굳혔다.

“슬슬 무기를 잡을 준비들 하게.”

그 말에 사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꺼낸 무기는 총이 아니라 칼이었다.

***

연합왕국의 영사관 경비중대는 섬 전체의 방어도 관장하고 있었다. 섬에 주둔군이 많을 때는 영사관만 경비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경비중대는 각 소대별로 섬의 구획을 할당하여 방어하도록 계획을 짰다. 대포를 보유한 본부 소대는 만과 동쪽 해안 전체를 관장할 수 있는 동쪽 구릉의 산정에 배치되었고, 소대 3개는 섬의 북쪽과 서쪽, 항구에 분산되었다. 그리고 남은 소대 하나는 영사관 경비를 맡았다.

배치 상으로 보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섬 전체를 관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보다 훌륭한 배치를 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상륙에 대한 대비라고 보기엔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대 상륙 작전에 대응을 생각하고 있다면 경비중대 병력의 태반은 초기에 대응이 가능한 섬 중앙부에 집결시켰어야 했다. 그 점에서 본다면 경비중대의 배치는 실수에 가까웠다.

“소위님. 이른 새벽부터 체스를 두자고 하시다니요?”

자신의 초소를 찾아온 알렉스 소위의 방문에 제임스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반문에 알렉스가 씩 웃으며 답했다.

“빗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서 그렇다네.”

“브랜디를 따뜻하게 데워서 한 잔 하시면 잠이 잘 오실 것을.”

제임스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체스 판을 꺼내고 있었다. 따분하고 할 일이 없는 무료한 생활에 체스는 좋은 소일거리였다. 고상한 취향을 가진 지주 계급 출신의 제임스와 알렉스에게는 더욱 그랬다.

제임스가 체스 판을 펼쳐놓는 동안, 알렉스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뻐끔거리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훅 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알렉스는 뻣뻣한 고개를 가볍게 풀며 제임스와의 한 판 승부를 기대했다. 20전 20패의 기록이 있던 터라 이번에는 한 번 이겨보고 싶다는 승부욕이 그를 자극했다.

눈동자도 미리 돌려놓고 목도 풀고 기지개도 펴는 등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고 대결에 임하려는 그의 준비는 거창했다. 막 기지개를 펴고 돌아서려던 알렉스가 고개를 잠시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제임스에게 물었다.

“자네 망원경을 하나 갖고 있지 않았나?”

“작년에 사촌에게 받은 게 있습니다.”

“그거 이리 줘보게.”

알렉스의 재촉에 제임스가 망원경을 넘겨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알렉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거센 빗줄기 탓에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건너편 해안가에 비친 불빛은 범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인지라 그로서는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일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면 해군 차원에서 해안선을 샅샅이 뒤졌을 것이지만, 이전에 그런 일이 없었기에 해군이 해안을 수색한 적은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해안선을 바라보다 제임스에게 물었다.

“여기서 동쪽 해안까지 일이백 미터 정도였던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지금 초병 몇 명만 데려오게. 확인할 게 있어.”

“이 빗속에 말입니까?”

제임스의 반문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두툼한 외투를 걸쳐 입고는 등불 하나만 들고 초소를 나섰다. 멀어지는 제임스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알렉스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설마하니 야만인들이 야간 상륙을 꾀한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질겅거렸다. 하지만 반대편 해안가에 켜진 불빛을 보면 그렇게 단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몇 분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알렉스의 앞으로 제임스와 그 부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알렉스가 초소 밖으로 뛰어 나왔다.

“일단 해안부터 점검해보세.”

“해안을 말입니까?”

“그래.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알렉스는 지난 신대륙 독립 전쟁의 전훈 하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연합군은 현지 주민이 해안에 피운 불빛을 표식으로 삼아 야간에 대담한 상륙 작전을 감행한 전례가 있었다. 상륙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을 보긴 했지만 전략적으로 이쪽의 허를 찔러 상당한 전술적 이익을 누렸다.

야만인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겨우 경비중대 하나만 남은 섬은 상당한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섬 근방의 해군력은 아문과 금포강 하구, 그리고 그보다 먼 곳의 항구 봉쇄에 집중되어 섬에는 단 한 척의 군함도 없는 상태였다.

알렉스가 선두에 서고 제임스와 병사들이 뒤를 따랐다. 어둠 속을 걷다보니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거의 십 수분이 흘러서야 구릉을 내려온 알렉스 일행은 일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저건?”

제임스가 말할 것도 없었다. 해안가에는 희미한 불빛이 여럿 보이고 있었다. 빗소리에 감춰진 인기척도 느껴졌다. 거센 빗줄기 덕분에 역설적으로 양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도록 서로의 존재를 모른 탓에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알렉스 일행이 적을 발견한 순간, 적도 알렉스 일행을 발견했다. 다음 찰나에 수십 명의 적병들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어둠 속인지라 등불을 끌 수도 없었다.

알렉스는 초병 하나의 어깨를 세게 쥐고 말했다.

“당장 포대로 달려가. 대포를 쏘라고 전해라. 대포를 쏘면 야만인들에게 그냥 당하진 않을 거다.”

그는 초병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비 때문에 총을 쓸 수 없는 초병들은 급히 총에 총검을 끼웠다.

곧 붉은 코트들과 한 무리의 흰옷 무리가 어둠 속에서 무기를 부딪쳤다. 충돌의 순간 비명 소리가 터졌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무기가 휘둘러진 터라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그래도 불리한 쪽은 알렉스와 그 부하들이었다. 겨우 다섯으로 서른도 넘는 적과 싸워야 했으니 천하의 붉은 코트들이라고 해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총검을 내지르긴 했지만 그것을 맞고 쓰러진 자는 거의 없었다. 공격자들은 순식간에 알렉스와 그 부하들을 포위한 채로 칼을 휘둘렀다.

평소 검술과 거리가 멀던 제임스가 먼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종횡으로 그어진 칼날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지주 집안의 차남으로 군문에 들었던 자의 최후치고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이어 초병 하나가 좌우에서 그어진 칼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뿌렸다. 그 둘이 쓰러지는 사이 흰옷을 입은 자 서넛을 쓰러트렸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알렉스는 거의 넝마조각이 된 외투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칼침도 몇 번 맞았는지 몸이 성치 않았다. 그는 상태가 몹시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호기를 잃지 않고 적병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연합왕국은 네놈들 따위에게 지지 않는다. 덤벼라!”

알렉스의 외침과 동시에 몇 자루의 칼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모든 방향을 막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렉스가 피거품을 토하며 쓰러지자 단련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게도 적의 초병들을 제압한 터라 상륙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의 뒤를 따라 계속해서 해안가로 도착한 뗏목들이 사람들을 쏟아냈다. 얼마나 도착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추 보아도 벌써 백 명 이상은 상륙에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넓은 해안선을 따라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상륙한 병사들을 규합하자면 시간이 더 필요했기에 지휘관들은 우선 불부터 크게 피웠다.

적에게 관측당할 위험도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병력을 재조직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군대와 민간인의 차이를 들라면 조직력인데, 그 차이를 만들려면 역시 시간이 필요했다. 지휘관들은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그들은 미리 가져온 송진과 역청 위로 등불을 올려 불을 붙여 병사들을 모을 준비를 했다.

콰쾅.

그들이 막 불을 지피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천둥소리보다 큰 대포 소리가 울렸다. 모든 장병들은 그 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승도가 탄 나룻배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던 까닭에 그들은 갑작스런 포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발을 굴렀다. 대포 소리가 난 이상, 연합왕국 해군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반응을 보일 것이 뻔했다.

그들이 주저하는 동안에도 병사들은 꾸역꾸역 해안가로 들어왔다.

예상보다 빠르게 발견된 상황에 당황한 신 측과 허를 찔린 붉은 코트. 어느 쪽이 먼저 주도권을 장악하고 승리자가 될지는 짙은 어둠이 드리운 장막처럼 오리무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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