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상륙 (3)
초기 상륙 작전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방어군의 신속한 반응 여하에 달려 있었다. 이 부분에 있어 연합왕국은 심각한 약점을 드러냈다.
수비대가 지나치게 분산된 탓에 병력 집결에 시간이 걸린 탓이 컸다.
만약 공관 수비대가 백 명 이상의 병력을 미리 집결시켜 두고 있었다면 상륙 초기 단계에서 해안선을 향해 반격을 감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안 되더라도 구릉에 방어선을 펴고 시간을 벌 수 있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해병 위관이 말을 타고 섬의 북쪽과 서쪽, 항구에 흩어진 수비대를 긁어모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총영사 하워드와 해군 장교는 말을 타고 동쪽 구릉에 위치한 포대로 달려왔다. 대포를 쏜 경위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들이 구릉에 도착했을 때는 빗줄기가 거의 멎어 시계 구분이 훨씬 용이해져 있었다. 멀리서 작은 불만 켜도 보일 정도로 시야가 좋아진 탓에 총영사는 어렵지 않게 포대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들이 포대에 가까이 다가오자 붉은 코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냐?”
“총영사 하워드다. 포대 지휘관을 만나러 왔다.”
총영사의 대답에 병사 중 하나가 총검을 겨눈 채 다가왔다. 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총영사 일행 근처로 다가온 다음, 신분을 확인하고는 ‘들어오라’고 말했다.
전장에 서본 경험이 있는 해군 장교는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침을 삼켰다. 총영사 역시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라면 병사들이 이렇게 딱딱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뭔가 일이 터진 것이다.
하워드가 진지에 도착하자 포대의 차 순위 지휘관이 나와 그를 맞았다. 계급장을 보니 준사관이었다. 대포를 쏘는 상황에서 지휘관이 어디로 갔냐고 소리를 버럭 지르려는 차에 준사관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각하. 저희 소대는 적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지휘관 알렉스 소위는 교전 중 실종되었습니다. 남은 병사도 몇 되지 않아 영사관으로 사람을 보낼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하워드는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했지만 적의 공격이란 말에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준사관은 코를 문지르며 해안가 쪽을 가리켰다.
“조금 전 야만인들이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적게 잡아도 수십의 적이 상륙한 상황이라 저희 힘으로 상대할 형편이 못 됩니다.”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단 말이요?”
준사관은 대답 대신 망원경 하나를 건넸다. 하워드는 그의 망원경을 받아들고는 해안 쪽을 보았다. 밤이라곤 하지만 제국군이 지핀 불빛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을 본 하워드는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불빛 주변에 비친 적의 병사들은 대충 보아도 백은 넘었다.
이따금 일렁이는 파도 사이로 비친 뗏목들에서 뛰어내리는 자들을 보면 적의 상륙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포를 쏠 수 없는 거요?”
“야간이라 탄착 확인이 어렵습니다. 애초 저희 포대는 평시 바다를 겨냥하고 양각을 맞추어둔 탓에 해안으로 사격을 하려면 새로 조준점을 짜야 합니다. 야간에는 그게 어렵습니다.”
총영사는 한참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해군 장교에게 물었다.
“해군이 출동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소?”
“대포 소리가 들렸으니 통상 초계중인 프리깃함은 길어도 한 시간 내에 도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야간에는 지상에 대한 포격이 쉽지 않습니다. 충분한 양의 백린을 갖춘 박격포함이 있어야 제대로 된 지상 지원이 가능합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해군의 도움은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결국 우리 힘만으로 다섯 시간 이상을 버텨야 한다는 소리군. 당신 생각엔 이 포대에서 버티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당연히 영사관으로 가셔야 합니다. 여차하여 항구로 가시려면 그게 옳습니다.”
해군 장교의 말에 하워드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상시 탈출을 염두에 둔다면 항구 근처에 머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항구에 남아 있는 배가 없다지만 해군 군함이 항구로 들어오면 배편이 얼마든지 마련되기 때문이다.
총영사는 해안가를 노려보다 붉은 코트들을 보며 말했다.
“그럼, 일단 이 포대는 포기합시다. 당신들도 영사관으로 이동하도록 하시오.”
“저희 진지를 포기하란 말씀이십니까? 직속상관의 명령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 상관은 전사하지 않았소? 중요한 건 영사관 경비요. 총만 챙겨서 영사관으로 이동하시오. 이건 명령이오.”
하워드의 말에 준사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생각을 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이만 출발합시다. 야만인들이 오기 전에.”
총영사의 말에 해군 장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올랐다. 붉은 코트들이 몇몇 장비만 챙기는 모습을 뒤로하고 영사 일행은 말 머리를 돌렸다.
***
“벌써 들통이 났다니.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운이 좋지 않군요.”
승도가 배에서 내린 다음 꺼낸 첫마디에 모든 지휘관들이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지핀 불빛을 이정표 삼아 후속하는 배들은 대부분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후발대에 속해 해안에 도착한 승도는 병사들의 수효를 간단히 확인하고는 상황을 보고 받았다. 그는 적이 기습을 눈치챘다는 사실과 더불어 상륙 초기 단계에서 반격이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전투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적의 움직임에 대한 초동 대응이다. 허를 찔리고도 초기에 대처하지 않는 것은 무능한 지휘관들이나 하는 짓. 지금 연합왕국이 보이는 모습이 바로 그랬다.
그들이 무능해서 그렇건 혹은 역량이 부족해서 그렇건 승도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명령대로 병사들을 규합하는 일에 신경을 쏟느라 대포 소리가 울리고도 한참 머뭇거렸습니다.”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야간에 병사들도 제대로 규합하지 못하고 움직였다간 부대 전체가 흐트러져 적에게 하나씩 사냥당하는 꼴이 나왔을 겁니다. 잘했습니다.”
승도는 지휘관들을 격려한 후 뒷짐을 지고 섰다. 불가에 모인 병사들이 가볍게 몸을 녹이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 뒤로 속속들이 불을 보고 오는 병사들도 보였다.
대충 점고된 인원은 400여 명. 최초 병력의 육분의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초기에 수습한 병력치고는 대단히 많은 편에 속했다.
승도는 더 이상 병사들이 집결할 시간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시간을 허비하다간 적 해군의 위협을 감내해야 했다. 병사 몇 백을 더 모으려다 막강한 적 해군과 대결하는 상황이 오면 말 그대로 끝장이다.
승도는 무인들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더는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출발할 예정이니 병사들을 지휘할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건문.”
“예. 대인.”
“해안에 남아 불을 지키며 후속되는 병사들을 모아 오십 명 단위로 우리 쪽으로 보내주시오. 우리 위치를 아는 병사를 수시로 보낼 테니.”
“알겠습니다.”
간단한 지시를 내린 승도는 무인들에게 횃불을 준비하라 일렀다. 산길을 타고 오르려면 불은 필수적이었다.
백 개가 넘는 횃불이 준비되자 곧 수백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산을 타고 올랐다.
이동은 상당히 위태로웠다. 비가 쏟아진 탓에 노면이 미끄러웠다. 거기에 어둠까지 있으니 부상자가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붉은 코트들이 구축한 초소에 다다랐다. 산정을 오르는 길목을 관제하는 곳에 설치된 초소라 그곳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소에는 초가 몇 개 켜져 있을 뿐 인기척은 없었다. 승도는 이곳에 병사 몇을 남겨 해안과의 연결점으로 삼고 계속해서 산정으로 진군했다.
흰옷의 무리들이 등불 하나를 쥐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고 오르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한 마리의 뱀을 연상시켰다. 불꽃으로 이어진 뱀은 꾸물거리다 그 머리가 산정에 다다랐다.
산정에 이른 뱀은 잠시 왕국 군이 버린 포대를 살피다 재차 섬 중앙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릉을 내려가기 전, 그들은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정에서 얼핏 내려다본 영사관과 항구 일대는 온통 불이 훤하게 밝혀져 대낮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섬에 있는 홍모귀가 모두 모여 그들과 대적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구릉을 내려와 야트막한 평지에 발을 딛자 승도는 무인들에게 전열을 갖추라고 지시했다. 파도처럼 몰려가는 것도 좋지만 어느 정도는 전투 준비를 갖추고 공격하는 것이 좋았다.
병사들은 명령을 받자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어차피 비가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약무기는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총구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총 자체가 물기를 머금은 탓이다. 그것은 연합왕국 쪽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승도는 그 같은 점을 의식하여 긴 선형 진을 펼쳤다. 이는 냉병기의 특성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냉병기의 전투력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면적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갈렸다. 선형 진은 이 점에서 유리한 면이 많았다.
그래서 고대부터 기본적으로 쓰인 진은 선형 진이었고 이것을 응용한 변칙적인 방식이 여럿 사용되었다. 돌파에 사용되는 삼각 진이나 쐐기 진, 그리고 한쪽에 충격력을 집중하는 사선 진까지. 다양한 진들의 원형은 기본적으로 선형이었다.
승도는 이 선형 진을 기본으로 삼아 대열을 정비했다. 고대의 명장들이 사용한 사선 진이니 양익 날개 진이니 하는 다양한 변칙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잘 훈련된 냉병기 전문가들이 하는 짓.
승도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그만한 역량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병사들의 역량도 파악하지 못하고 무리한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은 삼류다.
하물며 야간에 정교한 진을 구축해 운용한다는 자체가 웃긴 일이다.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해야 할 일이니 기본적인 전투 대형만 갖추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가 칼을 뽑아들자 무인 정씨가 도를 뽑아든 채로 외쳤다.
“진격한다!”
정씨의 일갈과 함께 수백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훤하게 밝혀진 영사관 주변 일대의 건물들이 확 다가왔다.
그 건물들 앞으로는 질서정연하게 열과 오를 갖춘 채로 선 붉은 코트들의 무리가 서 있었다. 그들은 수적 열세를 의식한 듯 건물의 담벼락을 천연 장애물로 삼아 가능한 좁은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짧은 시간에 내린 판단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붉은 코트들을 발견한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붉은 코트들은 자신들을 향해 몰려오는 적의 접근을 눈치챘지만 대열을 벗어나지 않고 제 위치에 섰다. 총검을 든 채로 이쪽을 겨눈 모습 어디에서도 두려운 빛은 엿보이지 않았다.
“홍모귀들을 죽이자!”
무인들이 선두에 서서 고함을 지르자 저쪽에서도 전의를 고취하는 함성이 울렸다.
“신성한 성 조지의 깃발을 적에게 넘기지 마라!”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총검과 칼이 부딪쳤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지며 사람들이 뒤엉켰다. 붉은 코트들의 병력이 충분했다면 총검의 위력이 발휘되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좁은 길조차 막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의 병력은 부족했다.
조금 더 입구가 좁은 영사관에서 막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붉은 코트들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 야만인들이 영사관에 불이라도 지르면 앉은 자리에서 몰살하고 만다.
비명을 지르는 자들 사이에서 유독 빛을 발하는 자들이 있었다. 오승도의 장원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지난날 프리지아 인들로부터 빼앗은 플뢰레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붉은 코트들을 사냥했다.
플뢰레 자체가 찌르기에 적합한 칼인 까닭에 난전에서는 총검보다 그 위력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붉은 코트들의 전투력이 어디 간 것은 아니라서 난전 중에도 승도 쪽의 피해가 훨씬 컸다. 잘 훈련된 붉은 코트들의 노련한 총검술이 발휘될 때마다 여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전투는 한참이나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붉은 코트들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사자와 같은 용맹을 보였다. 하이에나 떼에게 물어뜯기면서도 포효하는 백수의 왕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의 용맹과 전의는 충분히 경의를 표할 만했다. 하지만 곧 승부는 결판났다.
승도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때, 반대쪽으로부터 한 무리의 횃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을 알아본 승도의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후발대로 도착한 우군이었다. 새로운 병사들이 수십 명이나 도착하자 전세는 대번에 기울었다.
함성을 지르며 도착한 증원군의 가세에 공격자들의 사기는 올랐고, 반대로 절망적인 분전을 벌이던 붉은 코트들의 기세는 꺾였다.
겨우 몇 분 사이에 붉은 코트들의 반 이상이 시체로 변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주춤거리며 영사관으로 후퇴했다. 그런 그들을 서슴없이 밀어붙이며 칼을 휘둘러대는 공격자들의 기세는 날이 서 있었다.
오합지졸들이라곤 하지만 기세를 탄 이상 그들을 막을 것은 없었다. 붉은 코트들의 수가 조금만 많았다면 이럴 수야 없는 일이지만, 수가 모자란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처 입은 사자의 마지막 몸부림.
상처 입은 늙은 사자를 향해 하이에나 무리가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하나둘 붉은 사자들이 쓰러지자 흰 하이에나 무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피로 얼룩진 영사관 돌담 입구를 바라보던 승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승부가 난 이상 지체할 것은 없었다. 승도가 들어서자 무인들과 병사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시했다.
승도는 승리자로서 사열을 받으며 영사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앞으로 스무 명의 무인과 병사들이 앞서갔다.
1층을 샅샅이 뒤져 다섯 명의 붉은 코트들을 죽인 그들은 2층 층계참을 돌아 올라갔다. 계단 위에서는 영사관의 무관처럼 보이는 한 해군 장교가 권총을 쥔 채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저항도 오래가지 않았다. 단발의 총성이 울린 끝에 해군 장교는 서른 번도 넘는 칼침을 맞고 그 자리에서 뜨거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야만인 따위에게 항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자의 최후였다.
영사관 내부는 그야말로 피로 점철된 길이라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승도는 질척하게 깔린 핏물을 서슴없이 밟고 올라섰다. 계단을 돌아서자 총영사의 방이 보였다.
승도는 영사의 방을 제외한 나머지 방을 먼저 뒤지라고 명령했다. 그 방들에는 영사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대부분은 여송이나 신 출신의 사람들이었지만 일부는 연합왕국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 끼여 있는 젊은 아가씨들을 보고 병사들이 입맛을 다셨지만 승도는 포로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했다.
관습적으로 민간인에게 손을 대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품는 연합왕국 측의 입장을 고려해서였다. 승도가 강자라면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약자였다.
더구나 그는 인권 선언에 한 팔을 거든 공화국의 참여자이니 만큼 이런 부분에서는 다소 민감했다.
그의 엄한 명령에 병사들은 출발 전 그가 내린 ‘민간인 범죄 금지’를 상기하며 침만 삼켰다.
승도는 무인들에게 눈짓을 해 영사의 방문을 열게 했다.
쾅 소리와 함께 무인들이 방문을 발길질로 차고 들어가자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총영사가 의자에 앉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도는 무인들을 시켜 총영사의 무기를 수거하게 한 다음,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방문이 닫히자 승도는 영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곤 다리를 꼬고 앉아 승리자의 여유를 보이며 영사에게 말을 건넸다. 물론 연합왕국 어로.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연합왕국 총영사 각하.”
“잠시 승자가 되었다고 나를, 위대한 조국을 조롱하려는 건가?”
총영사가 물었다.
“조롱이라기보다.”
승도는 영사의 책상 한쪽에 놓인 체스 판에서 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걸 본 총영사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체크 선언을 하러 왔습니다. 체크 메이트.”
그 말에 총영사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
“오만한 친구로군.”
한참을 찌푸린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던 총영사가 불쾌하다는 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는 오승도가 내보인 여유가 몹시 거슬렸다. 연합왕국의 총영사를 상대로 감히 승자가 됐다고 단언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오만하다 말하실 자격은 없지 않습니까? 나는 이 방에 승리자로 서 있고, 총영사 각하께서는 지금 내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입니다. 그 점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착각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군. 지금 잠시 승리를 맛본다고 해도 낮이 오면 우리 해군이 섬을 겹겹이 포위할 거다. 그때도 지금 같은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총영사는 불리한 입장을 타개해 보려는 듯 애써 해군을 언급했다. 그 말대로 왕립 해군이 나타나면 포위되는 쪽은 오승도의 군대였다. 하지만 승도는 그 말에 위축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지?”
“신대륙 독립 전쟁에서 독립군의 손에 총독이 잡혔을 때, 당신들이 보인 태도만 상기해도 왕립 해군을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말에 총영사는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이 애송이가 신대륙 독립 전쟁까지 알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에우로페의 전쟁사를 훤히 꿰고 있는 놈이 적들 중에 있는 것은 분명했으니까.
“전례 하나로 자신하기엔 너무 오만하군.”
“오만하지 않습니다. 제 손에 잡힌 포로는 총영사 각하를 위시해서 왕국 시민권자만 수백에 육박하니까요. 여자와 아이들이 특히 많을 텐데, 왕국 해군이 그들을 버릴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뿌드득.
총영사의 이빨이 맞물렸다.
눈앞의 젊은 동방인은 해군과 왕국의 명예를 들먹이고 있었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기한다면 여론부터 일단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본국으로 소식이 바로 날아갈 일이야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일. 본국에서 안다면 여론이 뒤집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영사관에 있는 우리 민간인은 열 명도 되지 않는다.”
“야전 병원과 항구에 있는 사람을 포함해도 그렇습니까?”
승도의 말에 총영사는 입을 다물었다. 이자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승도가 그것을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강주에서 오랜 세월 연합왕국인들과 거래를 한 상인이다. 전쟁 중이라도 해도 섬에 머무를 수 있는 민간인의 최대치 정도는 뻔히 알 수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총영사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승도에게 물었다.
“원하는 것이 뭐냐? 전쟁에서 원정군을 철수해 달라 따위의 요구라면 수용해줄 수 없다. 그런 결정은 내 권한 밖의 일이니까.”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네 수상과 의회가 결정할 문제니까요. 내가 요구할 것은 딱 세 가지입니다.”
승도는 장난스런 어투를 딱딱하게 바꿨다.
“세 가지라고?”
총영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승도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보라는 의미다.
“먼저, 강주의 안전을 보장해주기 바랍니다. 총영사 당신과 당신네 원정군 사령관 명의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가 필요합니다. 물론 당신들이 종이 문서의 공신력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 귀 정부의 인준까지 거쳐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포로는 우리가 잡고 있을 생각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칼자루를 쥔 것은 접니다. 계속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총영사는 이를 갈았다. 언제 그가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가. 세계 최강국의 외교관으로 겪어볼 수 없는 최악의 굴욕이었다.
“둘, 강주의 봉쇄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네 상인들을 강주로 보내 무역을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당신네 상인들도 바라는 일이고 우리도 바라는 일입니다. 귀국 상인의 안전 보장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 두겠습니다.”
“전쟁 중에 무역을 하잔 소린가?”
기가 막힌 얘기다. 하지만 승도는 뻔뻔하게 할 말을 다했다.
“어차피 이 전쟁도 이윤을 위해서 하는 일. 우리라고 해서 이윤을 탐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총영사는 기가 막혀 어이가 벙벙해졌다. 상대의 대담함에 할 말이 없었다.
“셋, 전후에 전쟁 배상금 지불에 있어 강주가 어떤 형태로든 그 지불을 전가 받는 일이 없도록 조약문에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이 압력을 넣는다면 우리가 그 부담을 안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크크큭.”
총영사는 실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자가 꺼낸 말 하나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제 지역의 이익을 지키려는 발언들이다. 다소 무리한 요구가 섞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못 들어줄 요구는 아니었다.
그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연합왕국이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총량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상대는 불가능한 요구를 해오지 않았다. 얄미울 정도로 협상의 균형을 잘 잡는 작자였다.
“어떻습니까, 이쪽의 요구 사항이?”
총영사는 애송이가 던진 말에 팔짱을 꼈다. 놈이 인질의 수를 어느 정도로 파악했는지 몰라도 섬에 있는 민간인과 총영사 자신의 무게감을 고려하면 저 정도의 요구는 허용 범위 안의 것이었다.
민간인 및 부상자 총합 460명. 거기에 공관 전투에서 발생했을 사상자와 포로를 합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상대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연합왕국이 숱한 전쟁을 치른 이래, 이토록 많은 민간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이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의 요구를 검토해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주 불가능한 요구는 아니다.”
하워드는 부정의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노련한 외교관인 그는 불리한 입장에서 상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조율을 하더라도 일단은 긍정하여 여지를 남기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될 만하군요. 일단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해둔 데 의미를 두겠습니다. 각하께서는 계속 이 방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가택연금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우습지만 받아들이지.”
“그럼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총영사가 다소 짜증스런 음색으로 답했지만 승도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는 패자고, 승자는 자신이었다.
승도는 총영사의 방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