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83화 (83/425)

제83화. 교섭 (2)

승도는 간단한 협상을 마치고 연합왕국의 사절단을 배웅했다. 왕국 대령들은 섬에 상륙할 때는 하지도 않았던 거수경례를 하고 물러갔다. 경례란 상대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에 승도로서도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승도는 사절단을 보내고는 영사관에 마련된 그의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방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옅게 풍겼다.

‘익숙한 냄새야. 역시 상인보다는 군인이 체질에 맞는지도 모르겠어.’

승도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협상은 여러모로 그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컸다. 가장 중요한 강주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컸지만, 왕국의 고위층과 접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이익이라 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왕국 쪽에선 이 협상을 타결시키려 고위 인사들을 거듭 보내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 인사들은 하나같이 왕국에서도 입지가 높은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후의 신에서는 정1품 이상의 재상 급 관료나 겨우 만나볼 수 있을 정도의 인사들일 것이니, 승도로서는 이렇게 접촉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이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만나본 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향후의 밑천으로 삼는 것. 그것만큼 큰 이익은 달리 없었다.

이미 그는 적국의 고위 인사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었기에 접촉에서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자’로 인식되고 있는 상태에서 적당한 관용을 베풀어 준다면 적은 그것을 ‘비굴함’이 아니라 ‘강자의 여유’로 인식하고 합당한 경의를 보일 것이다.

‘강자의 여유.’

승도는 그 낱말을 입 속으로 굴렸다. 에우로페를 호령할 적에 전투는 잘해도 협상은 얼간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유를 부렸었다. 그 말만큼 그를 잘 보여주는 말도 달리 없었다.

‘하지만 마냥 여유를 보여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는 법이지. 모든 것은 적당한 것이 최선인데.’

승도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던 옛 적국들은 그가 약해지자 재차 신성 동맹을 결성해 반기를 들었다.

만약 그가 호된 응징을 가해 재기할 힘까지 없앴더라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반기를 들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관용과 강자의 여유는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것이 전생으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적의 환심을 사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간도 쓸개도 다 빼주는 협상을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승도의 상념도 끊어졌다.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대인.”

문이 열리고 훤칠한 인상의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그를 알아본 승도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들어온 사내는 막 병력 상황을 점검하고 돌아온 건문이었다.

건문이 자리에 앉자 승도가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거두어들인 병사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오전까지만 해도 거두어들인 병사는 팔백 명이 조금 못 되었습니다만, 조금 전까지 이백 명 남짓을 더 거두어 천 명 정도가 점고를 마쳤습니다.”

“천 명이라. 전체 병력의 4할을 조금 넘는 숫자군요.”

승도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입맛을 다셨다. 야간 상륙의 위험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병력 손실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총 병력의 절반 이상이 사라질 정도의 위험 부담이라니. 왜 야간 상륙을 하지 말라는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손실 율이었다.

손실된 병력의 태반은 검은 바다에서 익사했거나 왕국 측의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운이 좋다면 보다 멀리까지 떠내려가 다른 육지에 닿았을 수도 있고, 혹은 표류 중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쉬운 숫자지만 이 정도로도 연합왕국 측의 기습에 대비할 수준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천 명이면 경계 병력을 섬 곳곳에 내보내고도 포로들을 감시할 숫자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적의 어떠한 포로 구출 시도도 사전에 감지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적 포로들을 감시하는 병사들을 잘 살펴야 합니다. 거긴 여자와 아이들이 많으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물론입니다.”

건문은 승도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신 내부의 내전이라면 몰라도 서역 열강과의 대결에서 민간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강력한 열강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짓을 벌였다간 강주를 지키긴 고사하고 통째로 날려먹을지도 몰랐다.

“특히나 우리 병사들은 녹기와 단련. 군의 기강은 낮고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민간인 범죄를 일으키기 쉬운 군대이니 그만큼 신경을 더 써야 합니다.”

“제가 자주 시찰을 가겠습니다. 그리고 대인의 사병들도 그곳에 배치하겠습니다.”

승도의 사병이란 장원의 무인들을 말하는 것이기에 승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원 무인들은 많은 급료를 받으며 오씨에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었기에 군대보다 규율이 잘 선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감시를 맡긴다면 아무래도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낮출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휘관들, 나와 서기를 제외한 지휘관들은 모두 포로들에게 접근을 시키지 마세요.”

“조치하겠습니다.”

신의 지휘관들은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탐욕스런 자들이 많았다. 재물만이 아니라 여색을 밝히는 자들도 많아 만에 하나 서역 여성들에게 손을 대려는 자들이 나올 수도 있었다. 승도의 휘하에 있는 자들이지만 본성이 바뀌지는 않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건문에게 지시하기 전에도 야전 병원을 직접 시찰하며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여겨 이런 지침을 추가했다.

승도와 건문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승도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붉은 머릿결을 가진 건강한 아가씨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건문은 여자를 보자 헛기침을 하고는 자신은 병원으로 가보겠다고 말했다. 이미 업무상 지시를 모두 내린 터라 승도도 그러라고 말했다.

건문을 내보내자 메리가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깜빡이다 조심스레 승도 쪽으로 다가왔다. 승도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용건을 물었다.

“무슨 특별한 용건이라도 있습니까?”

“네. 다른 것이 아니라 제 거처에서 책을 가져와도 될지 여쭙고 싶어서요. 마리아에게 책을 좀 읽어줘도 될까 해서.”

“책이요?”

승도는 그녀의 말에 다소 생경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고 보면 서역의 책을 읽어본 지도 오래된 기분이었다. 서역 상인들이 강주에 서역 책을 가져올 이유가 없으니 더욱 그랬다.

“네.”

“무슨 책인지 알 수 있을까요?”

“왕국에서 유행하는 연극 대본을 소설로 바꾼 비극과 희극 소설들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비극과 희극 소설이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도 비극과 희극 정도는 서역 상인들로부터 풍월로 들어보고 있었다.

망할 놈의 연합왕국은 그를 부관참시하기 위해 유명한 극작가들을 총동원하여 그의 생애 중 부정적인 면모들만 골라내어 각종 연극 대본을 만들어 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반역자’였다.

반역자는 군주를 향해 칼을 빼들고 왕위를 찬탈한 다음, 야망을 불태우다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의 손에 쓰러지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반역자를 로망스 황제에, 정당한 후계자를 신성 동맹에 복원된 왕실을 대입하면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이런 종류의 비극과 희극이 무려 서른 종류가 넘었다. 그러니 그녀가 말한 희극과 비극 종류 소설이란 이 내용을 담았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았다.

승도로서는 몹시 꺼림칙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흥미로운 책들일 것 같지만 책을 가져오는 것은 허락해드릴 수 없습니다. 포로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허락하는 것은 관리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승도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연극 대본의 내용이 아니었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었지만, 자신을 욕하는 내용을 태연하게 읽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비록 황제로서, 거상으로서의 경륜을 가진 그도 이런 부분에서는 치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때로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

‘협상의 철칙은 내 약점을 적에게 들키지 않는데 있다.’

유명한 왕국 외교관 웨드마이어 경의 말에 따르면 약점을 보이고 하는 협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동방 원정군의 협상단은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질 수 없는 카드를 쥐고 흔들어대는 판에 협상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협상이 되겠는가.

결국 협상은 승도의 계산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요구 사항은 당장 수용이 불가능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철되었다.

동방 원정군 사령관의 명의로 강주 봉쇄 중지 및 금포강 자유항행이 선포되었으며, 강주 지역에 대한 모든 군사 작전이 동결될 것이라는 보장 문서가 건네졌다.

배상금 지불 문제에 있어서도 전후처리에 신경을 쓰겠다는 총영사 명의의 보증 문서까지 내주었다. 승도로서는 자신이 원한 것을 거의 모두 얻은 협상이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왕국 의회의 안전보장 문서에 대한 인준과 전후 처리에 대한 확답 정도였지만, 그것을 얻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국익이 현저히 손상되지 않는 이상, 연합왕국으로서는 승도가 쥔 패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주일에 걸친 긴 협상이 끝난 날, 승도는 웃으며 왕국의 사절단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협상단의 단장으로 온 육군 소장 웰즈와 그 수행원들은 이 정도 선에서 협상이 끝난 것에 안도하며 배에 몸을 실었다.

협상이 끝나자 승도는 왕국 측이 보인 조처에 화답하여 일부 여자와 아이들을 석방하는 태도를 취했다. 마냥 고압적인 태도만 고수하며 악감정을 사는 짓은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우로페에서는 전통적으로 한쪽이 양보를 하면 반대편도 그에 화답하는 것이 협상의 관례로 여겨졌다. 이를 지키지 않을 때는 협상의 반대편에서 상당히 불쾌하게 여기곤 했다.

덕분에 승도가 보인 전향적인 조처는 연합왕국 측에 상당히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성의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면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인식. 그것 하나만으로도 승도가 얻는 것은 매우 컸다.

동방에 대해 신뢰를 보이지 않는 연합왕국 측에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인식하게 한다면 그들의 정책 변화에 따라 ‘파트너’로 선택될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승도는 한번 찍은 적은 끝까지 적이라 판단하고 치킨게임을 서슴지 않았던 로망스 황제 시절과 달리 연합왕국과 끝까지 대결하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들도 우방으로 만들어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관점을 바꾸어 본다면 연합왕국을 뒷배로 두면 그만큼 든든한 것도 없었다. 바다에서만큼은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다.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고, 강주는 안전을 얻었다. 그리고 전후를 위한 기반도 보장받았다.’

승도는 포로 석방에 대한 연합왕국 측의 치사를 듣고 돌아온 자리에서 이번 협상을 가볍게 평했다.

상인으로서나 정치가로서나 만족스런 협상이었다. 본래라면 전후에 상당한 타격을 입어야 했을 강주의 입지를 충분히 얻었고, 가문의 손실도 최소화하였다.

거기에 더해 정치적으로 강주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음으로써 강주 사람들의 신망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은 이중의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야망을 꿈꾸는 정치가라면 이것만큼 좋은 자산도 없었다.

“대인.”

“잠시 생각 중이었습니다.”

건문이 맞은편에서 말을 건네자 승도는 상념을 정리했다. 건문은 눈앞의 젊은 거인을 보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협상으로 대인께서는 제국의 영웅으로 거듭나실 것입니다. 천하에 누가 있어 홍모귀들을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겠습니까? 관에서도 대인을 다시 주목하게 될 겁니다. 잘만 된다면 중앙 정계에서 입지를 얻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건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 부분은 내가 이 섬에 머무는 것으로 회피할 생각입니다. 당분간 섬과 본토를 오가며 내 지시를 전달하는 것은 서기가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승도의 말에 건문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황량한 섬에 계속 머무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본토로 간다면 분명 관에서는 홍모귀들과 싸우는 최전선에 나를 내보낼 것이 뻔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협상에 대해 캐물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내게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들의 군함을 구실로 삼아 이곳에 머무는 편이 가장 유리합니다. 어차피 홍모귀들도 내가 그런 이유로 나가지 않는다고 하면 동의해줄 것입니다. 그들도 전장에서 나와 다시 싸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승도는 자신의 전쟁을 끝낸 판이다. 괜히 뭍으로 나가 신을 위해 싸워줄 마음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얻을 것을 다 얻은 상황에서 발을 빼는 것이 그의 입장에서 가장 유리했다.

“관에서 독촉을 해올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바다로 나서는 순간 내가 홍모귀들에게 포로로 잡힐 가능성이 있다고 변명하면 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승도는 건문의 말에 여유로운 웃음을 보였다.

그 말처럼 연합왕국 측을 신뢰하고 바다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약점을 보이긴 했지만 연합왕국은 강자. 그들의 마음이 바뀌어 그의 배를 나포하기라도 하면 상황이 아주 우습게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육지로 가서 화를 자초할 이유도, 적의 수중에 들어갈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건문이 고개를 숙여보이자 승도는 손사래를 쳤다.

“육지로 나가는 것도 이문을 남길 수 있는 일이니, 서기가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단지, 내 생각과 달랐을 뿐입니다.”

건문은 승도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바라보는 것을 자신이 읽어내지 못한 것은 역시 강주에 한정된 이익과 제국 차원의 정치적 이익이라는 전혀 다른 가치를 바라본 탓이 컸다.

승도는 그런 건문을 보다 말을 이었다.

“뭍에 가면 당장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제가 무얼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각 행상에 대해 물목을 부릴 준비를 하라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봉쇄가 풀리면 곧 서역 배들이 들어와 교역을 시작할 터, 장사를 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건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임 대인께 서찰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승도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자 건문이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들었다.

“서찰은 강주 교역에 대한 대인의 허락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그 서찰을 전하고 아버님께 가서 강주 교역이 준비되었다고 말씀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아버님께서 제반사항을 모두 처리해주실 겁니다.”

“그리 전해드리겠습니다.”

“물때에 맞추어 연합왕국 측이 군함을 보내올 겁니다. 그 배를 타고 아문을 거쳐서 올라가시면 될 겁니다.”

“예, 대인.”

건문이 읍을 하고 물러나자 승도는 정씨를 불렀다. 건문에게 전한 것은 공적인 용건이었기에 그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킬 수는 없었다.

정씨가 방으로 들어오자 승도는 품에서 다른 서찰 두 개를 꺼냈다.

“이것은 부인께 전해주세요. 저간의 사정을 적어 두었지만, 묻는 것이 있다면 모두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혹여나 일이 끝나고도 내가 육지로 나가지 못하는 연유를 묻거든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예, 공자님.”

“그리고 이건 장인께 전하는 서찰입니다.”

“반 대인께 말입니까?”

정씨는 그 서찰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승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찰 내용에 대해 물으시거든 ‘다 준비된 것’이라고만 전해드리면 됩니다.”

“그리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럼 나루에 있다가 건문과 함께 서역 배를 타고 강주로 가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정씨가 읍을 하자 승도는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랫사람들이 모두 물러가자 방은 어느새 썰렁한 기분을 주었다.

승도는 뒷짐을 지고 일어나 햇빛이 쏟아지는 창가로 다가갔다. 유난히 눈부신 빛이 눈을 찌를 듯했다.

‘에우로페의 왕좌에 앉아 군림하던 때에 맛본 기분과 같다. 과연 이번에는 인생의 정점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그 계단을 계속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승도는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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