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강주화약 (1)
“포격은 성공적입니다.”
망원경을 내린 하워즈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적 방어군의 진지는 이미 반 이상 허물어져 있었고, 전열은 거의 파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했다. 육군과 해군을 합쳐 2,000발이 넘는 포탄을 쏟아부었는데 머저리 같은 적이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보병에 전진 명령을 내리게.”
“예, 각하. 연대에 전진 신호를 발하라!”
연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고지보병연대의 보병들이 질서정연하게 열과 오를 맞추어 야트막한 모래밭으로부터 줄을 지어 전진했다.
기계적으로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땅이 흔들린다는 착각을 줄 정도였다.
군기가 바짝 선 군대의 움직임은 멀리서 보기에도 아름답고 화려했다. 팔과 발의 동작 하나하나가 정확히 일치하는 데다 대열 자체가 반듯하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서 방어선의 측방을 흔들었고, 남쪽에서 2개 연대가 치고 올라와 서쪽으로 진군 중이니 이걸로 승부가 나겠지.”
연대장은 차갑게 웃으며 전투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염해에 집중된 2만의 수비대를 상대로 왕국군은 압도적인 전술적 역량을 발휘해 일방적인 학살을 이어가고 있었다.
길어도 이틀 안에 적 병력 전체를 포위망에 몰아넣어 파멸로 인도할 것이다.
킬트를 걸친 보병들이 무너진 성곽 앞으로 다가가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장교들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정확한 사격 통제에 총성은 오래 울리지도 않았다. 짧고 정확하게 집중되고 절제된 화력 운용의 모범 그 자체였다.
그 막강한 공격에 대항하는 적은 너무나 어설펐다. 구식 화승총을 들고 띄엄띄엄 총격을 가해오는 모습은 적이지만 동정심이 들었다.
집중된 일제 사격이 퍼부어질 때마다 구식 화승총을 쏘아대며 저항하던 적병들이 무더기로 쓸려나갔다.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던 전열이 일제 사격 몇 번에 녹아내리자 킬트들이 총구에 총검을 끼웠다.
숙련된 동작이기에 몇 초 걸리지도 않아 화승총을 쥔 자들은 총을 쏠 기회도 얻지 못했다. 킬트들은 이내 함성을 지르며 허물어진 성곽을 향해 쇄도했다.
몇몇이 칼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완벽한 총검술을 익힌 킬트들의 조직적인 공격에 대항할 방법은 없었다. 몇 번의 형식적인 저항 끝에 성곽의 입구가 뚫리고 군데군데 킬트들이 난입했다.
전투는 싱겁다 못해 지켜볼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학살 또 학살. 처음부터 끝까지 결과가 정해진 지루한 대본이었다.
연대장은 전장을 지켜보다 옆에 선 장교들에게 물었다.
“적장이 누군지 알고 있나?”
“염해 방어사를 겸한 신임 전봉 좌익 통령 호광이란 잡니다. 동방 무역회사의 정보에 따르면 뇌물을 밝히지 않는 자로, 제국에서 보기 드문 담백한 인간이라는 평입니다.”
“드물지 않게 타락하지 않은 자라. 문관 출신인가?”
하워즈는 단말마의 저항을 보이며 와해되어 가는 적을 보고 물었다.
“아닙니다. 정통 무관 출신입니다.”
“정통 무관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무능하다 못해 버러지란 평을 들어도 모자람이 없겠군. 이 호광이란 자가 그나마 개중엔 나은 자란 뜻일 텐데, 나머지는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아. 이거야 원. 하하하하.”
신의 깃발이 우두둑 꺾인 자리로 연합왕국의 깃발이 우뚝 섰다. 적의 저항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애초 계획보다 상경 공격이 앞당겨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대 방어 지역이자 적 정규군이 집중된 염해가 이 정도라면 나머진 볼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도 같네. 상경까지 앞으로 남은 적의 방어 지역은 모두 다섯. 그곳들이 이곳만 못 하다 가정하면 상경까진 길어도 열흘이면 도달하겠어. 정말 우리가 이곳에 올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일이지.”
연대장은 진지로부터 천천히 흩어져 사라지는 적병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가 말에 오르려는 차에 뒤편에서 급히 달려오던 말 한 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알아본 장교들이 고개를 돌렸다.
“전령이 어쩐 일로 온 것인지.”
그들은 작전에 들어간 상황에서 전령이 오가는 데 대해 의문을 가졌다. 웬만큼 위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전투 직전에 전령을 보내는 행위는 좋은 판단이 아니다.
전령이 소지한 문서가 적의 손에 들어갈 경우, 이쪽의 작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사 작전에 필요한 긴급한 정보가 입수된 경우가 아니면 전투 직전에 전령을 보내는 일은 드물었다.
전령이 도착하자 하워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순조롭게 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령이 오갈 이유가 없어서였다.
“어디서 온 전령인가?”
대령이 묻자 전령이 간단히 경례를 하며 답했다.
“해군에서 온 전령입니다.”
“해군에서? 조금 전까지 우리에게 지원 포격을 해주고 무슨 볼일이 있다고 전령까지 보낸단 말인가?”
“강상전단이 아니라 아문의 해군 소속입니다, 각하.”
전령의 대답에 하워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문에서 볼일이 뭐가 있다고 육군 대령에게 전령을 보낸단 말인가. 그는 궁금증을 느끼며 전령이 내민 서찰을 받았다.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하워즈는 어느 순간 손을 덜덜 떨었다. 생전에 생각지도 못한 급변이 그의 생각을 집어 삼켰다. 그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 섬이 점령당하다니?”
그 말에 장교들도 경악했다.
“섬이 점령당했단 말입니까? 세상에 그럴 수가.”
“군함도 있고 포대도 있지 않습니까?”
해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호위하는 것도 모자라 주변의 항구란 항구는 죄다 봉쇄 전단이 나가 봉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섬이 점령당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모자라 총영사 각하와 민간인, 부상병들까지 죄다 적의 손에 넘겨주다니. 그 잘난 해군은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하워즈는 어이가 없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구호를 내세워 왕국 군비의 태반을 집어삼킨 주제에 섬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작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적이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제해권을 확보해 상륙을 하겠는가.
이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해군의 직무유기다. 그는 혀를 내두르다 다시 서찰을 읽었다.
“그래서 현 위치에서 일단 정지하란 말인가. 협상이 끝날 때까지?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각하. 정지는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진격을 멈추면 기껏 포위 태세를 갖추어놓고 적을 전부 놓아 보내게 됩니다.”
“미치겠군. 내가 애꾸라면 몰라도 두 눈이 다 달린 판에 이 명령을 못 본 척할 수 없지 않나.”
하워즈가 꺼낸 말에 장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애꾸 운운한 것은 신대륙 반란군이 백기를 단 것을 보고 애꾸였던 그록 장군이 안대에 망원경을 갖다 대고 ‘나는 백기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포탄을 계속 쏟아붓도록 명령한 것을 빗댄 말이었다.
“정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연대에도 명령이 전파되었다면 우리 혼자 움직여봐야 제대로 된 성과는 내기 어렵습니다.”
“젠장. 머저리 같은 놈들. 제 놈들 실수로 우리 공까지 날려먹으려 들다니.”
하워즈는 짜증을 내면서도 진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
강주는 전쟁으로부터 벗어났다. 오래지 않아 금포강 하구를 봉쇄하고 있던 연합왕국 군함들이 물러나면서 수운이 트이고, 물류 활동이 재개되었다. 이 혜택을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행상들뿐이었다.
염상들은 이 봉쇄 해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소금을 실어올 수 없어 아무런 득도 얻을 수 없었고, 내륙 수운을 책임진 강상 역시 왕국 측의 암묵적인 위협을 견디지 못해 이익을 내지 못했다.
덕분에 제국 상계에서 행상이 차지하는 입지는 놀라울 정도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대외 무역의 마비로 고사당할 처지에 몰렸던 행상들로서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었다 할 수 있었다.
“하하하. 한 잔 받으십시오, 대인.”
행상의 수장들은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술잔을 들 수 있었다. 그간 상품이 창고에서 썩어나가는 것을 보며 마음을 졸인 시간이 얼마였던가.
그들로서는 당장 세금을 내기도 곤란한 처지였던 터라, 무역이 재개된다는 말 한마디를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처럼 여겼다.
행상들이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터라, 오유도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몇 순배 술이 돌자 입이 무겁던 자들도 하나둘 말문을 열었다.
“오 대인, 이번에 우리 행상들을 위해 베풀어주신 은혜, 뼈에 새기겠습니다.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이를 말입니까? 총상께서도 한 말씀하시지요.”
행상들이 하나둘 말을 꺼내자 행상들의 신임 총상 역할을 맡고 있던 노진승이 헛기침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돌아가며 총상을 맡는 행상들의 관례에 따라 총상이 된 인물로, 그 상단이 영세하여 역대 총상들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오 대인의 은덕으로 우리 행상들이 살게 되었으니, 모두는 그 은혜를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혹여나 이번 협상과 관련된 처리 과정을 조정에서 문제시 삼는다면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힘을 모아 오 대인을 도와드려야 할 것입니다.”
노진승은 의례적인 말로 오유도를 중심으로 뭉칠 것을 말했다.
원론적인 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행상들이 진 빚이 너무나 커 그 말에 화답하는 행상들의 표정은 진중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 한잔하시지요.”
누군가의 제창에 행상들이 기분 좋게 술잔을 들었다. 일부는 오유도의 만수무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높아진 오씨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지만, 여기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술잔을 비우자 오유도의 옆에서 말없이 술잔을 들고 있던 반진유가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당장의 일은 이렇게 처리되었지만 향후의 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향후의 일이라니요?”
반진유의 말에 행상들의 눈이 그를 향했다. 반진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전쟁 동안이야 이렇게 지낸다고 해도 전쟁이 끝난 다음을 생각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전쟁 이후야 대비할 여력이 있어야 뭘 하지 않겠습니까?”
노진승이 말을 받자 반진유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반가와 사돈인 오씨는 전후에 대한 대비를 해두었습니다. 여력이 있는 우리도 미래가 걱정스러운 판인데, 여러분은 무얼 믿고 그리 여유를 부리시는 겁니까?”
“흠.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당장 장사를 해서 세금 낼 돈을 마련하는 것만 해도 빠듯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전쟁 이후에 모두 쓰러지고 말 겁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다는 말씀 같습니다.”
행상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반진유는 헛기침을 했다. 승도가 미리 일러준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꼭 자기 생각처럼 이야기하자니 어색했다. 그래도 사위를 위한 일이라 체면불구하고 말을 꺼냈다.
“아직 전쟁 중이라 동방 무역 회사의 백지 어음 만기가 연기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걸 우리 반가에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가 그것을 매입하여 여러분의 자금 사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어음 할인은 할 생각이니 그 점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진정이십니까?”
행상들은 어음 할인이란 말에도 눈을 빛냈다. 어음 할인이란 액면가보다 값을 낮추어서 매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어음을 매도하는 쪽이 손해를 보는 것이지만 자금 융통이 급한 쪽에서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물론입니다. 이 반진유가 그런 것으로 허언을 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닙니다. 반 대인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말고요.”
행상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사이, 오유도가 반진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홍모귀들의 백지 어음을 사서 뭘 어쩌시겠단 거요? 혹시 승도가 부탁한 일이요?”
반진유는 오유도의 물음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오유도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승도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 이유가 있을 터.
그는 순식간에 그것으로 챙길 수 있는 이문을 따지기 시작했다.
‘승도가 바보가 아닌 이상 백지 어음을 거두어들이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갑자기 녀석이 생각을 바꾼 이유가 있을 것인데.’
오유도가 생각에 잠긴 동안 반진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그도 그 진의를 몰랐으나 ‘다 준비된 것’이라는 정씨의 말을 듣고서야 그 말을 이해했다. 무엇이 이문이 될지 대충 눈에 보였다.
‘자네 아들의 생각을 자네가 읽을 수 없다니. 알려주고 싶지만 나도 고생해서 답을 얻은 것을 그냥 알려줄 수는 없지. 자네도 머리 좀 썩여야 할 걸세.’
반진유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행상들과 백지 어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사이 오유도는 술잔도 비우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돈에 관련된 문제가 머리를 차지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상인 특유의 고집 때문이었다.
오유도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때 노진승이 백지 어음과 관련된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러고 보면 전쟁 중이라 다행이요. 그놈의 서역인들이 빚을 무기로 우리 목을 졸라대는 꼴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복이 아니겠소?”
그 말에 오유도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설마 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은 가능성. 아들놈은 서역 굴지의 막강한 기업, 동방 무역회사의 목줄을 쥐려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동방 무역회사를 잡아먹으려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고, 그것을 무기 삼아 뭘 얻어내려는 속셈인 것이 분명했다. 말 그대로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감각이 절묘했다.
상행위를 준비하기 위해 현금이 필요해진 행상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순간적으로 내린 백지 어음의 확보. 그 판단을 감각적으로 내린 자체가 실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오유도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이나마 아들의 상재가 자신을 능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
오유도의 미소를 본 반진유가 행상들과 대화를 하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이제 자식의 생각을 아신 거요?”
“조금은 알 것 같구려.”
반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 친우이자 상계의 맞수로 여겨온 오유도는 과연 거상이었다. 단서도 없이 짧은 시간에 정답에 도달하는 모습만 봐도 그 상재는 천하제일을 자부할 만했다.
두 거상이 기분 좋은 미소를 나누며 다시 술잔을 들던 차에 반은비가 정자에 모습을 드러냈다.
명가의 여성이라면 외부인에게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상례였지만, 그녀는 반씨의 후계자인 몸이라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홑몸이 아닌 까닭에 그녀는 풍성한 비단으로 몸을 감싼 채로 시녀들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행상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올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오유도를 향해 다가왔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며느리의 모습에 오유도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편치 않은 몸으로 여긴 어쩐 일이더냐?”
“서방님께서 돌아오시기 어렵다 전하셔서 제가 맡고 있는 일을 아버님께 넘겨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내게 무슨 일을 넘겨주려 하느냐?”
오유도가 묻자 반은비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답했다.
“구휼과 은전 문제이옵니다.”
“구휼과 은전이라면 일전에 승도 이름으로 약속한 그것들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그러하옵니다. 소녀가 직접 일을 맡고 있었으나, 몸이 이러하니 서방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일을 넘겨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한데 귀가가 늦어지실 것 같아 제 일을 아버님께 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오유도는 며느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마.”
“송구합니다.”
반은비가 읍을 하고 조심스레 물러나자 오유도는 껄껄 웃음을 보이며 다시 행상들과 술잔을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