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강주화약 (2)
섬에서 머무는 동안, 승도는 종종 총영사와 체스를 두었다. 첫 대면에서 날이 선 말을 주고받은 둘이었지만, 딱히 할 일도 없는 일상 속에서 공통된 취미를 발견하자 둘 사이는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체스였다.
총영사는 자칭 연합왕국의 ‘체스 기사’로 전적이 아주 화려하다고 했다. 그 말을 믿는다면 외무성의 고위 외교관들은 모두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도도 체스 실력은 만만하지 않았다.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부터 체스를 심리전 연습의 수단으로 삼아 하루에도 수십 번은 체스를 두던 터라, 그 실력은 에우로페의 유명한 정치가들 중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수읽기는 자그마치 50수 이상을 계산할 정도로 엄청나서 그와 체스를 둔 자들은 ‘예언자’를 상대하는 기분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승도가 체스를 두며 얻은 별명이 ‘아르고스’다. 백 개의 눈을 가진 괴물에 비교될 정도이니 그 역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날도 둘은 방에 마주 앉아 체스를 두었다. 대화야 여전히 부드럽지 않았지만, 체스를 둘 때만큼은 표정들이 훈훈했다.
“각하께서는 늘 그렇듯이 정공법이시군요. 이게 연합왕국의 스타일입니까?”
승도가 전진해오는 폰의 진로를 차단하며 묻자 총영사가 비숍을 집어 들며 답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에 왕국을 투영하고 있어 플레이 방식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것. 그것이 연합왕국의 전쟁 방식이지. 직접 겪어보며 실감해보지 않았나?”
총영사가 던진 말에 승도는 반응을 보이는 대신 말을 쥐었다. 그는 그대로 말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알면서도 막을 수 없다. 그 말은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실수를 부르는 법이지요.”
승도가 총영사의 나이트를 잡아내고는 팔짱을 낀 채 여유를 보였다. 그 태도에 하워드는 미간을 씰룩였다. 방심하다 섬을 접수당한 입장이니 그 말에 반박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총영사는 체스 판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집어 들었다.
“그렇지만 이건 알아두면 좋겠네. 전략가는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말을 다룬다는 사실을. 나이트를 주고 룩을 잡는다면 할 만한 거래니까.”
사자의 심장을 가진 전략가. 흔히 인용되는 경구로 승도도 그 말을 잘 알고 있었다. 냉철함이 요구되는 군주, 즉 사자처럼 차갑게 식은 심장을 가지고 전쟁을 바라보라는 말로 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물론 중의적으로 쓰이는 말이라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이런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었다.
하워드가 룩을 치워내자 승도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물론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자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없더군요. 적어도 저는 전장에서 그런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없다. 이 말 역시 전장에서 통하는 경구였다. 인간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일 뿐, 언제나 평정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실수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전제로 한 말이었다.
승도는 웃으며 말을 가볍게 움직였다.
“우리 왕국의 지휘관들을 비웃는 건가?”
하워드는 승도의 말에 미간을 구기며 반문했다. 사실 앞서 꺼낸 사자의 심장을 가진 전략가 이야기는 ‘왕국 지휘관’들을 상징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승도의 말은 왕국 지휘관들이 그 정도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승도의 대답에 총영사는 냉소를 지었다. 물론 눈앞의 애송이라면 연합왕국 지휘관들을 비웃을 자격은 충분했다. 오합지졸들을 거느리고도 세계 최강의 붉은 코트들을 몇 번이나 물 먹이고, 그것도 모자라 이 섬까지 장악한 놈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 애송이의 능력은 어지간한 왕국 지휘관들보다 윗줄처럼 보인다. 하워드는 그 불쾌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 오만함도 여기까지겠지.”
하워드는 체스 판에서라도 이 건방진 애송이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었다. 그가 퀸을 움직이며 외쳤다.
“체크. 오래전에 들었던 그 오만한 선언을 다시 한 번 돌려주게 돼서 기쁘군.”
총영사는 보란 듯이 말을 흔들며 승도의 왕을 가리켰다. 왕을 잡으면 게임은 끝난다. 얼마 전 승도가 자신의 앞에서 불렀던 ‘체크’가 생각났기에 그는 그 목소리에 감정을 잘 실을 수 있었다.
“승리 선언이 너무 이르시군요.”
승도는 씩 웃으며 퀸의 앞으로 폰을 전진시켰다. 그 간단한 행동에 퀸의 진로가 막혔다. 별거 아닌 수였지만 그다음부터 보인 변화의 폭은 조금씩 총영사가 읽어내던 수의 방향과 다른 것이었다.
“으음.”
하워드가 표정을 찌푸리자 승도가 말을 옮기며 말했다.
“승리의 목전에서 변덕의 여신을 피하라. 그런 말 들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승도의 말에 하워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말을 몰라서가 아니라 승기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다. 승도가 한 말은 외교관들 사이에 통하는 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속어였다.
“졌군.”
하워드가 자신의 왕을 옆으로 쓰러트려 패배를 인정하자 승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기에서 지셨으니 제 요구 조건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독촉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왕국의 외교관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네. 약속은 명예를 걸고 지킨다.”
하워드의 대답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왕국 외교관들이 국익 앞에서 안면 몰수하는 경우가 허다하긴 했지만, 명예 운운하고 입을 싹 씻는 일은 별로 없었다.
사실 하워드와 체스를 두며 가끔 내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큰 요구 조건을 건 내기를 했다. 승도가 일부러 비슷하게 싸우는 모양새를 취했기에 자신만만하게 내기에 응했는데, 결과적으로 낚인 꼴이 되고 말았다.
그가 지켜야 할 요구 조건은 연합왕국 총영사 명의의 서한 한 장을 강주로 보내는 것이었다.
‘자국 정규군, 특히 팔기와 녹기 전체를 강주에서 퇴거시키지 않으면 강주를 침공하겠다는 위협 서한을 보내달라니. 말 그대로 자기 사병으로 지역을 장악하겠다는 의미인가?’
어차피 하워드로서는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서한 한 장 보낸다고 얼마의 수고가 더 들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승도의 입장에선 이것 역시 얻는 것이 많았다. 강주에 주둔한 군대, 특히 정규군을 걷어내면 그만큼 강주 상인들의 부담이 경감되기 때문이었다.
연합왕국의 안전 보장도 얻어낸 이상 그들의 머릿수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그 처치 곤란한 머릿수와 입을 줄일 시점이기도 했다.
전투력도 기대하기 어려운 팔기는 밥만 먹는 식충이들이었기에 그 밥버러지들을 치우는 만큼 강주의 부담은 덜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숫자도 얼마 안 되고 조직의 통제만 불편하게 만드는 녹기들도 치워버리는 것이 좋았다.
그들만 걷어내고 나면 전쟁 상황에서 상당한 지출을 하고 있던 행상들에게 또 하나의 호재가 될 것이다.
외국 총영사의 서한 한 장으로 어떻게 그들을 퇴거시키겠냐고 하겠지만,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할 수 있었다.
승도에게 서찰을 받은 임경문이 서한을 구실 삼아 ‘강주의 안전’ 운운하며 즉시 녹기와 팔기에 퇴거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강주 관리사의 요구를 깔아뭉개기엔 팔기와 녹기들의 입지가 좁았다.
전투에서 박살이 난 그들이 지방관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승리라도 했다면 그들이 큰 소리를 치겠지만 지금으로서 그들의 입지는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승도는 자신의 덫에 걸려준 총영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느긋하게 그의 방을 나섰다.
***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대인.”
오랜만에 찾아온 오유도의 모습에 군기대신 기영은 메기수염을 쓰다듬다 자리를 권했다. 전쟁도 소강기에 접어든 터라 업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있다고 해도 챙길 그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정갈하게 꾸며진 기영의 집무실 안에는 값비싼 도자기와 난초가 가득했다. 인간의 심성과 취향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였다.
오유도는 방 안을 훑던 시선을 돌려 기영의 낯빛을 살폈다.
“이거 전란 중에 대인의 얼굴을 보게 되니 다소 뜻밖입니다.”
기영은 손수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보통 방문자라면 차를 줄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천하제일의 거상이자 고위 품계의 관료인 오유도를 푸대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기침하는 것만으로도 조정의 관료들이 ‘칭병 소문’을 만들어 준다고 할 정도이니 사이가 나빠져서 좋을 일은 없었다. 기영의 살가운 태도에 오유도도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물론 둘 모두 상투적으로 보이는 접대용 태도와 미소였다.
“자주 찾아뵙고 싶었는데 전쟁이 터지다 보니 앞가림하기도 바빴습니다.”
“대인께서 바쁘신 것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이렇게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영은 의례적인 말로 오유도의 말을 받으며 그 안색을 살폈다. 부패하긴 했지만 정치가로서 산전수전을 겪은 그였기에 상대가 용건이 있어 찾아왔다는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색을 살펴도 오유도가 초조한 기색이 보이지 않아 자신의 감이 틀렸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조용히 차를 홀짝이며 서로의 안색을 살피던 탐색전이 벌어지기를 한참.
이윽고 오유도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기영의 속내를 짐작하고 갑작스럽게 화제를 꺼내 기선을 제압했다.
“오늘 이렇게 대인을 찾아뵙게 된 것은 한 가지 용건이 있어섭니다. 강주 화약(和約, 화목하게 지내자는 약속)이 바로 제 용건입니다.”
“강주 화약?”
기영은 처음 듣는다는 듯 생경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것은 연극이었다. 천하에 귀를 깔아둔 탐관이 그 정도 소식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소식이 늦으면 생존에 불리한 것이 탐관이니 그 정도의 대사건이 그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오유도는 기영이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회한 상인은 상대의 안색과 동공의 움직임, 말투만 보고도 그 꿍꿍이를 내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홍모귀들과 강주에서 싸움을 멈추자는 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아시다시피 지방 차원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에는 무리수가 많습니다.”
“싸움을 멈춘다는 합의라. 임경문 대인의 재가는 받은 일입니까?”
“물론입니다.”
오승도가 이것 때문에 미리 임경문의 사후 재가를 얻어두었던 터라 기영이 특별히 책을 잡을 부분은 없었다. 지방관 차원의 ‘화약’은 수천 년 전부터 오랑캐들을 전담하는 지방관 고유의 권한에 속했다.
그렇지만 중앙 정부의 권력이 강화된 이전 왕조부터는 ‘화약’을 지방관 임의로 체결하는 데 대한 시선이 좋지 않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유도가 일의 매끄러운 마무리를 진행코자 기영을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하면 이 사람을 찾아온 이유는 명의를 빌려달라는 뜻이겠군요?”
기영은 단번에 핵심을 짚었다. 탐관이라고 해서 마냥 멍청할 수는 없었다. 물론 멍청하고 탐욕스런 자들도 있지만 그런 자들은 결코 정점에 올라설 수 없었다. 적어도 기영은 탐욕스럽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직위에 걸맞은 군사적 식견은 없었지만 정치적인 감각 하나만큼은 노회한 구렁이 그 자체. 기영이 명의를 언급하자 오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부정하며 대화를 질질 끌 필요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대인께서 화약 체결의 주도자가 되어 주신다면 공을 모두 대인께 양보하겠습니다.”
“화약 체결을 내가 한 것으로 한다.”
기영은 찻잔을 손에 쥔 채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손해 보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 황실의 보물창고인 강주를 홍모귀들의 위협에서 빼내는 것은 그의 입지를 높여주기에 충분한 공. 손익계산을 해보면 분명 남는 장사다.
하지만 탐관은 탐욕스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남이 쥐어주는 떡보다는 남이 가진 떡 광주리 자체를 탐하는 것이 그들의 본성이다.
“대인께는 충분히 좋은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쁜 제안은 아닙니다. 단지.”
기영은 잠시 차를 홀짝이며 뜸을 들였다. 뭔가 큼직한 조건을 달기 전에 보이는 탐관들의 버릇이었다. 거상으로서 무수한 탐관들을 상대해 온 오유도는 대번에 상대가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했다.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만에 하나 위험 부담이란 것이 있어 이 사람의 노후가 조금 보장되어야 그 일에 명의를 내놓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영은 뻔뻔한 태도를 취했다. 공도 부족해 돈도 달라는 소리다. 물론 그것은 계산을 해보고 오유도가 돈까지 얹어줄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꺼낸 말이었다. 그는 그런 부분에서 셈이 매우 빠른 사내였다.
“대인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도와드려야지요. 얼마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오유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