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강주화약 (3)
구체적으로 액수를 언급하면 상대가 값을 올릴 터이니 상대의 재량에 맡기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물론 마음대로 큰돈을 말하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었다.
오유도가 어느 정도의 선을 생각하는지도 모르는데 큰 액수를 부르면 당연히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을 댈 대신이 군기대신 기영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기영 입장에선 신중하게 액수를 말해야 했다.
“삼만 냥이면 좋겠습니다.”
기영은 고심 끝에 무리하지 않는 액수를 제시했다. 원래 받아내려던 액수는 오만 냥이었지만 그 정도는 아무래도 위험 수준일 것 같아 한발 물러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영은 협상을 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애초부터 오만 냥을 생각하고 있던 오유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삼만 냥이라면 조금 무리한 액수 같습니다.”
장사꾼은 흥정을 한다고 했다. 상대가 백 냥을 부르면 칠십 냥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상인. 깎는 맛으로 장사하는 이들에게 처음부터 적은 값을 부른다고 해서 사정을 봐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자기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면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삼만 냥이 어려우시다는 말씀입니까?”
기영은 그 대답에 다소 당황했다. 천하제일의 거상 오유도가 삼만 냥이 어렵다니. 아마 과한 액수를 불러 불쾌한 모양이라 짐작한 그는 안색을 조금 바꾸었다.
그가 생각해도 공도 모자라 돈까지 달라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싶었다.
“전쟁 중이라 자금이 묶여 있어 그렇습니다.”
“하면 이만 냥으로 하시지요. 그 이하는 이 사람도 어렵습니다. 조정에 기름칠도 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오유도는 그 말에 실소를 지을 뻔했다. 혼자 먹을 것이면서 무슨 기름칠을 한단 말인가.
그는 내심을 감추며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더 깎으려면 더 깎을 수도 있지만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는 것이 왕도. 오유도는 이만 냥이라는 타협점에서 멈추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대인께서 손을 써주신다면 어렵더라도 자금을 융통해 보겠습니다. 하면 명의를 빌려주시는 걸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 사람이 언제 대인과의 거래에서 신용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오유도는 기영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탐관이긴 하지만 적어도 받아먹은 만큼 일을 하는 자가 기영이다. 그러니 이자에게 먹이는 돈은 아깝지만 제값을 하는 지출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여기 이 서찰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오유도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건네자 기영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강주 화약에 대한 임경문 명의의 서찰이었다. 이것을 기영이 추인하면 조정에서도 뭐라 말할 거리는 없었다.
기영의 신분은 군기대신 겸 흠차대신, 그 외에 공식적으로 전쟁의 최고 사령관이나 다름없는 지위들도 겸하고 있다 보니, 그의 서명은 강주 화약이 조정의 승인을 받고 진행된 공식적인 화의로 인정받는다는 의미를 가졌다.
“내용이 조금 문제가 되는 면이 있군요.”
“그래서 대인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영은 한참이나 서찰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냥과 공을 받아먹고 하는 일이니 명의를 빌려주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기영이 서명하는 것을 본 오유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
강주 화약은 곧 제국 정부에도 알려졌다. 그들은 화약의 내용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강주가 연합왕국의 공격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황실의 보물창고인 강주가 연합왕국의 공격을 면하게 됐다는 건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일이 이렇게 가볍게 처리된 것은 강주 상계의 전 방위적인 매수와 이를 감시 감독해야 할 몇몇 관료들의 공적 부풀리기의 덕이 컸다.
일부 관료, 특히 군기대신 기영은 강주 화약의 성립을 자신의 공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주도적으로’ 화약을 체결한 것처럼 만들었다.
기영으로서는 이번 일로 제 입지를 높이려는 야심에 불탄 터라, 화약 체결 과정의 문제를 모두 수면 아래로 묻어버렸다. 물론 공짜로 덮어준 것은 아니고 한몫 단단히 챙겼다.
그래서 다소간의 무리수가 없지는 않았던 화약의 성립 과정 자체가 조정에서 공론화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오승도의 입장에서는 그깟 공을 떼어주고 무리수를 피할 수 있었으니 남는 장사라 할 수 있었다.
“일 처리가 매끄럽게 잘 되었군요. 아버님께서 수완을 잘 발휘해주신 것 같습니다.”
“예. 화약 부분은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승도는 본토로부터 돌아온 건문에게 화약 건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화약 문제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매듭지어진 이상, 강주는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신경 쓸 부분은 전쟁이 아니라 전후에 강주가 나아갈 방향과 지금부터 얻어나가야 할 가문의 이익이었다. 물론 이것도 간단한 일들은 아니었다.
승도는 건문으로부터 강주의 사정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건문의 말을 잠시 끊었다. 걸리는 부분이 있을 때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잠깐. 지금 강주의 인구가 폭증하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건문은 그 이유를 언급했다. 강주가 갑작스레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역시 전란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이 컸다. 거기에 더해 서역과의 상행위를 준비하기 위해 행상들이 움직이면서 일거리도 다시 늘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모여들 동기가 충분한 판에 오승도가 미리 약속한 구휼과 은전이 베풀어졌다. 사람이 모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승도는 그 말을 들으며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인구의 증가는 반길 일이었지만 준비되지 않은 인구 증가는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로망스 제국만 해도 그랬다.
상하수도가 정비되지 않은 도시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면서 각종 질병이 횡행했다. 그것도 모자라 증가한 빈민들은 치안을 불안하게 만들어 범죄율을 높였다.
이것만으로도 문제는 심각했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바로 민란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인구가 폭증하면 그에 수반해 그 지역의 식량과 식수 공급은 상당히 어려워진다. 특히 강주처럼 배후지가 협소한 도시에서는 그런 현상이 더 심화되게 마련이었다.
식량이 모자라면 당연히 식료품 가격이 오르고 도시 거주민에 대해 제대로 식량을 공급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약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초기에 막지 못하면 민란으로 번지게 마련이다.
이 위험성을 잘 아는 승도로서는 인구 증가에 심각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문제에 대해 임경문 대인께서 행상에 협조를 구한 적은 없습니까?”
“아직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승도는 입맛을 다셨다. 직접 시정을 챙기며 도시를 관리해본 경험이 있는 그는 인구 팽창의 위험을 직시하고 있었지만, 임경문은 그에 대한 반응이 상대적으로 둔했다.
화약 문제에 신경을 쓰느라 그런 탓도 있겠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은 분명했다.
‘전후에 민란은 반드시 터진다. 하지만 그 시발점이 강주가 되어선 곤란하지. 사람이 모이는 곳이 강주가 아닌 다른 곳이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대책을 세운다면 하나. 다른 곳에서도 구휼을 행한다. 돈은 좀 들더라도 이쪽으로 유입되는 인구를 줄일 수 있겠지. 하지만 이건 미봉책에 지나지 않아. 다른 것이 필요하다. 다른 것이.’
승도는 생각을 하다 건문을 향해 물었다.
“근래에 강주에서 가까운 곳 중에 제방 공사를 하는 강이 있습니까?”
“북쪽으로 500리 떨어진 강의 수계를 정비하는 사업을 지방 관아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재원이 부족해서 제방 공사 규모가 작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승도는 그 말에 옳다구나 싶었다. 제방 공사는 막대한 인력을 소모하는 일이기에 사람을 빨아들이기에 이만큼 좋은 일도 달리 없었다.
관이야 하는 일에 삯도 제대로 주지 않으니 적당한 돈만 있으면 엄청난 인간을 흡수하는 것도 가능했다.
“예. 은자로 만 냥 이상 드는 사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 냥?
평범한 이들에겐 엄청난 돈이지만, 승도에겐 적당한 액수로 들렸다.
애초에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현찰이 금자로 백 냥이다.
“아버님께 그 공사를 지원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강주와 상관도 없는 공사를 말입니까?”
건문이 반문하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이야 없지만 위험을 떠넘기는 일이니 당연히 지원해야 할 일이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고 싶지 않다면 만 냥이 아니라 십만 냥이라도 써야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임경문 대인께 강주의 빈민들을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말씀을 올리도록 하세요. 어차피 도시에서 공치는 사람들이니 그분께서도 동의해주실 겁니다. 이대로 강주에서 굶겨 죽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니까요.”
승도는 냉정하게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하는 일이다. 천하제일의 거상이 아니라 천하제일의 부국이라도 굶어 죽는 사람들을 모두 구할 수는 없었다.
세계에서 제일 부강하다는 연합왕국에도 지천으로 널린 것이 빈민이다. 현실을 아는 관료인 임경문이라면 승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전할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승도는 생각이 난 김에 말을 하나 더 꺼냈다. 돌이켜 보면 강주는 그 방어력에 취약점이 많았다.
강 쪽은 철제난간의 완공 이후 완벽에 가까운 방어력을 갖게 되었지만, 육상 부분은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내륙으로부터의 위협에 취약했다. 승도는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문하시지요.”
“상관 거리 주변으로 담을 이중으로 보강해 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고용인의 수도 배로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제국 내부의 사정이 뒤숭숭하고 치안 사정이 나빠 도적들이 창궐하기 좋은 시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보물을 가진 우리는 경계심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뭍에 돌아가면 이 말씀도 올리도록 하세요.”
“상관 거리가 위태롭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건문은 안전을 보장받은 강주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보아온 승도는 허튼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시국이 불안할 때는 일말의 가능성도 예상해야 합니다. 강주 내부가 흔들릴 경우도 생각해서 최악의 상황에 상관만이라도 지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승도는 방심이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단단히 당부했다. 연합왕국의 안전 보장은 말 그대로 그들이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지, 신 내부의 격변에서 보호해 주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 승도로서는 이 부분에 경각심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은자 5천만 냥의 상품이 쌓인 상관 거리의 안전이 달린 문제다.
만에 하나 그곳이 전소되는 일이 벌어지면 행상은 말 그대로 끝장이다. 천하의 오씨와 반씨라도 그런 타격은 못 견딘다.
아니 그 정도 손해면 동방 무역 회사나 서역 유수의 은행도 신용이 붕괴돼 주식 청산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도 상관 거리의 경계는 튼튼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건문은 상관 거리의 경비가 얼마나 탄탄한지 잘 알고 있었다. 관병과 장원의 무인들을 합해 천 명이 넘는 사람이 경계를 서고 있고, 한 번에 뛰어넘기 힘든 5m 높이의 담장이 거리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 경비가 부족하다고 하니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건문은 읍을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다소 과한 조처라고 해도 결국 명령권자는 오승도였다. 그의 의지가 중요한 이상, 건문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건문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승도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내가 과민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사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높이 날아올랐을 때야말로 주위를 살피지 않으면 무너지고 마는 법. 순풍은 언젠가 폭풍이 될 수 있음이야.’
제국의 황제로 군림할 적에 배운 교훈이다.
승도는 그 시절을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