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내우외환 (2)
승도의 예상은 오래지 않아 현실화되었다.
내우외환(內憂外患: 안팎의 근심)을 견디지 못한 신의 조야에서는 화의를 맺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양이’는 제국의 부를 탐하지만 ‘역적’들은 황실 그 자체를 노린다고 주장했다.
두 적을 상대하기 어렵다면 더 시급한 도적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논지였다.
화평파의 주장에 대해 강경파는 ‘천조의 존엄’을 내세웠다. 적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들을 꺾어 제국의 위신을 지켜야만 현재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나 우선적인 적부터 잡자는 화평파의 주장을 꺾기엔 강경파의 설득력이 부족했다. 제국의 힘이 충분하다면 몰라도 열세를 보이는 입장에서 마냥 현실을 무시하자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이상론으로 보자면 제국의 체면과 황제의 존엄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하나 이상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권력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 손에 쥔 지위와 권력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손에 잔뜩 쥔 것을 들고 모험을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권력자들이 위험한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정치적 감각 하나로 살아남은 노회한 정략가들이 화평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제국 정부는 화의를 결심했다. 그에 따라 내각은 군기대신 기영으로 하여금 화의를 맺도록 했다.
조정의 명을 받은 기영은 연합왕국 측에 사자를 보내 화의의 뜻을 알리고 구체적인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청했다.
왕국 측도 연합왕국 섬을 점령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던 처지라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양측의 이해는 일치하여 일사천리로 사전 물밑 교섭이 진행되었다. 양자는 보름간 사자를 주고받으며 사전 접촉을 한 후, 구체적인 협상 일정과 장소를 정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문자를 맞았다. 평소라면 인상부터 찌푸렸을 인간이 살가운 태도를 보이자 임경문은 입맛이 썼다. 제국의 국익을 위해 화의를 도우러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기영에게 협조하는 일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기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협조를 구하지도 않았지.’
기영은 속내를 감추며 임경문에게 자리를 권했다.
“협상이 며칠 안에 시작된다지요?”
임경문이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겉치레 수사를 모두 제외하고 용건만 간단히 하는 그의 화법이었다.
탐관들을 상대하며 친밀감을 올릴 생각 따위는 없으니 그런 불친절한 말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기영은 불쾌하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 나라의 녹을 먹는 대신이니 당연히 협조할 생각입니다.”
임경문의 대답에 기영이 표정을 폈다. 깐깐하긴 해도 빈말은 하지 않는 인간이니 적어도 이 협상에 한해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임경문에게 차를 권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 협상도 강주 화약처럼 잘 처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이들을 잘 다룰 방법이 없겠습니까?”
“양이들을 잘 다루는 방법이라.”
임경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탐욕스럽고 잔인한 양이들을 다루는 방법은 사실 많지 않았다. 있다고 하면 이문이 전부다.
“없겠습니까?”
“있다면 이익밖에 없을 겁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것밖에 없을 터이니.”
“강주에서는 순한 양처럼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기영이 묻자 임경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가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요. 하지만 이곳 상경에서는 연전연패를 거듭했으니 양이들이 두려워할 것도 없지요. 이곳 상경 근방에서 양이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임경문이 묻자 기영은 입맛을 다셨다. 군기대신인 그가 그 정도의 정보도 구하지 못할 턱이 없다. 그에게 들어온 보고가 사실이라면 전투 과정에서 상한 홍모귀는 이천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도 특유의 과장이 섞였을 테니, 걸러 듣는다면 기백도 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간 상경 주위에서 박살이 나고 흩어진 군대가 삼만이 넘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압도적인 교환비다. 이따위 전투를 치르고 적이 두려워하기를 바란다면 그거야말로 허황된 꿈이다.
“일천은 상했을 겁니다.”
기영이 애써 제 체면을 세울 정도의 숫자를 불렀다. 임경문은 그 숫자를 믿지 않았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일천을 잡았다고 해도 상경 근처에 있는 적의 십분의 일도 안 될게요. 우리 군세의 반을 잡고 일천을 내주었다면 적으로서는 충분히 기세가 오를 만한 일일 터이니, 그들이 굽히기를 바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지요.”
임경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기실 동방 원정군이 상경 근처에서 입은 피해는 모두 이백도 되지 않았다. 그들의 지상군은 일선에만 오천, 그리고 이선에서 준비된 병력이 오천, 다시 증원되는 병력을 합치면 이만에 육박한다.
신이 몇 만의 군대를 동원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면 대인께서는 어찌하는 편이 좋다 여기십니까?”
“한시라도 빨리 협상을 마무리하는 편이 좋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입장은 나빠지고 저들의 입지가 좋아집니다. 무엇보다 역당들을 잡는 일이 시급하지 않겠습니까?”
“그야 물론입니다.”
이 부분에 한정해선 기영과 임경문의 생각이 이견 없이 일치했다. 제국 내에서 전란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역당들의 존재는 연합왕국보다 더 위험했다. 권력자가 아니라 백성을 생각하는 목민관의 입장으로 보더라도 반란은 조속히 진압하는 것이 옳았다.
“하니 체면은 접어두고 우리 쪽이 양보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약문의 형식은 모두 접어두는 쪽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조약문의 형식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용어의 격이 얼마나 중요한지 대인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기영은 용어의 격을 함부로 낮추었다간 제 목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약문 문구에 쓰이는 용어 하나하나에 외교관들이 목숨을 거는 이유는 그것 하나에 국가의 체면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신처럼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나라라면 더 그렇다. 그런 나라에서 용어의 격을 낮추었다간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협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타협이 불가능한 부분입니다.”
기영이 완고하게 나오자 임경문이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형식에 집착하지 말잔 얘기지 용어의 격을 낮추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낮추는 대신 저쪽도 올려주면 그만 아닙니까?”
“하나 우리는 존엄한 천조입니다. 어찌 양이들과.”
기영의 말에 임경문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도 강주에서 현실을 보고 느끼기 전이었다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하나 양이들이 얼마나 막강한지 깨달은 지금은 그런 체면을 내세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기영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양이들의 강대함을 지금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렇게 나오는 것은 그 자신의 목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지 진실로 황실의 존엄을 위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황실의 안위가 아니겠습니까? 사태의 시급성을 고려하여 협상을 했다는 증거만 남긴다면 대인께서 상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임경문은 넌지시 반란의 위험성을 과장하면 네가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기영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협상이 순탄하게 마무리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제야 비로소 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협상은 상경 근방에 정박한 연합왕국의 전열함 버지니아의 함상에서 이루어졌다. 협상 장소를 자신들의 군함으로 정한 것은 순전히 연합왕국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영은 이에 토를 달지 않고 수락했다.
사실 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협상 장소를 가지고 씨름을 할 여유가 없었다. 가능한 한 빨리 상경 주위의 군대를 돌려 반적을 진압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역적들의 세가 강대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 측이 협상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덕분인지 협상은 겨우 일주일 만에 타결을 보았다.
대개 국가 대 국가의 전후 협상은 그 조약문의 글귀 하나를 놓고 다투는 협상만 해도 몇 달은 질질 끌게 마련이다. 이번 경우는 신 측이 다소 다급했던 탓에 그렇게 질질 끌지 않았다.
협상이 타결되자 양측은 조약문을 작성하고 이에 서명했다. 연합왕국 의회의 인준과 제국 정부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요식적인 절차는 모두 거친 셈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상경 조약 전문.
제1조. 제국은 ‘밀가루’ 전쟁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지고 아문을 연합왕국에 할양한다. 할양될 아문의 경계와 왕국이 통제할 금포강 하구의 범위는 추가 조약 및 부록에서 구체화한다.
제2조. 제국 정부는 연합왕국이 지정하는 8개의 주요 항구(강주, 염해, 위해 등)를 개항한다. 개항장의 설치 및 관리 권한에 대한 문제는 부록에 첨언한다.
제3조. 지정된 개항장에는 영사를 둔다. 제국 수도 북경에는 공사관을 두고 왕국의 전권특명공사를 상주시킬 수 있다. 전권특명공사에 대한 대우와 특권은 부록에서 논의한다.
제4조. 전비 배상금으로 800만 파운드를 즉시 지불하며, 몰수된 밀가루 및 상품의 비용으로 650만 파운드를 추가로 왕국 정부에 지불한다. 단, 이 배상금의 지불과 관련된 재원 조달에 있어 강주는 배제한다. 세부적인 사항은 부록에 첨언한다.
제5조. 행상, 즉 공행(公行)을 폐지한다. 이들은 민간 회사와 같은 위치로 대우되며 관부의 대리인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제6조.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통상 장정에서 추가로 논의한다.
제7조. 제국 정부와 왕국 정부는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고 공식 문서에서 천조와 속방 등의 용어를 배제한다. 교섭에서 양국의 관리는 상호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
조약은 천조라 자부하던 제국 정부의 체면이 무색할 정도였다. 형식상으로는 체면을 지켰지만 내용 자체가 너무 굴욕적인 탓이다. 기영은 협상 내용에 상당한 불안감을 드러내면서도 용어의 격을 지켜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연합왕국 측은 시종일관 ‘신’과 연합왕국의 ‘대등함’을 강조하는 정도에 만족했다. 굳이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는 신의 입장을 망가트려본들 별 이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연합왕국은 상당히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순전히 동양과 서역의 역사적 차이 덕분이었다. 전통적으로 에우로페에서는 ‘제국’과 ‘황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제국을 칭한다고 해서 국가의 격이 새삼 올라가지 않았고, 그 군주가 황제를 칭한다고 해서 다른 나라들이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연합왕국은 세계 최대의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으로는 신보다 격이 낮은 ‘국왕’과 ‘왕국’ 호칭을 고집했다. 물론 ‘왕국령 힌디아 제국 황제’ 칭호를 여왕이 겸하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제국과 황제를 칭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호칭에서 한 수 굽혀준다고 해도 어차피 그들은 얻을 것을 다 얻은 협상이었다. 수백 년간 그 어떤 국가의 관리도 머무를 수 없었던 제국 수도에 관료의 상주를 허락하게 하였고, 영토 일부를 할양받았다.
실리를 취한 이상 형식이야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기영은 이 부분에 대해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아문이 중요한 곳이긴 하지만 제국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한낱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땅 한 뙈기 떼어주는 정도야 수천 년 역사를 살펴보면 없던 일도 아니었다.
제국 수도에 외교관이 상주한다는 개념도 사신이 1년 내내 머무는 정도로 이해하면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기영도 몹시 거슬린다고 느낀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항구의 개항 및 개항장의 설치 문제였다.
사실 연합왕국 측에 남쪽 항구 몇 개를 열어주는 정도야 허용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었다. 강주와 같은 변방의 항구를 몇 열어주는 수준으로 여긴다면 눈감아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강북의 항구를 몇 열어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제국의 수도와 비교적 가까운 항구들이기에 국방상의 문제도 걸렸고, 제국의 심장부인 중원에 외국인들이 돌아다닌다는 자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조약문에 조인을 하면서도 기영은 이런 부분을 놓고 고심했다. 하지만 연합왕국 측이 용어를 양보한 이상, 더는 양보 받을 수 없었다. 형식을 주고 실리를 취하기로 마음먹은 자들에게 실리를 얻어낸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