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관망 (1)
협상이 타결되고 이 주일이 지났다. 조약 체결에 대한 소식은 상경으로부터 달려온 왕국의 쾌속 범선 편으로 연합왕국 섬에도 전해졌다. 드디어 전쟁이 끝난 것이다.
총영사로부터 부름을 받고 방으로 올라간 승도는 그가 내민 조약 전문을 받아 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몽상에 잠겨 있던 우물 안 개구리들도 이렇게 현실을 깨닫게 되었구나. 국제 정치는 신이 믿는 관념론이 아니라 힘에 의해 주도된다는 걸 깨달았으니 앞으로는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승도는 독소 조항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래로 눈을 돌렸다. 사실 다른 것보다 그의 눈을 끈 것은 바로 배상금의 지불을 명시한 부분이었다.
배상금 지불 문제에서 연합왕국은 강주에 부담을 지우지 말라고 명시해 두었다. 일전에 나눈 강주 화약의 부속 조항을 성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전쟁 재발을 염려할 수밖에 없는 제국 정부로서는 이 글귀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전가하지 말라고 했으니, 평시보다 세율을 높이기만 해도 전쟁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셈이다.
따라서 제국이 도탄에 빠지건 말건 강주의 세율은 일정하게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제5조, 행상의 특권 폐지였다. 이 부분은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연합왕국의 입장이 반영되긴 했지만, 승도에게도 아주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개항장이 늘어나면 행상의 특권은 그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공행 제도에서 벗어나 정부의 수취를 덜 받는 편이 유리했다.
‘여기까진 나쁘지 않아. 걸리는 것이 있다면 수출입 관세의 폐지인데.’
승도는 이 문구에서 손익 계산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수출 관세를 매기지 않으면 그만큼 행상의 이윤이 올라간다. 하지만 수입 관세가 없어지면 연합왕국의 상품들이 그만큼 경쟁력을 가지고 시장을 잠식해올 것이 뻔했다.
연합왕국과 같은 상품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제국 내의 경화가 대량으로 유출되면 결과적으로 행상의 자금 회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로망스 제국에서 경화(硬貨: 금속 화폐) 부족으로 발생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어본 승도는 위험을 간과하지 않았다.
승도가 조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총영사가 입을 열었다.
“조약문을 본 소감은 어떤가?”
“왕국의 승리 말씀입니까?”
승도가 묻자 하워드가 파이프를 입에 가져갔다. 그는 그것을 입에 물고는 천천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승도는 총영사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굳이 생각을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왕국은 승리했지만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 대답에 하워드가 파이프를 입에서 빼냈다. 하얀 구름을 가볍게 흘려낸 총영사의 표정이 기이한 빛을 머금었다.
“승리했지만 승리한 것이 아니다?”
“왕국이 이번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이윤. 하지만 이 조약문으로는 그 이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윤을 얻을 수 없다. 어째서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인가?”
“제국 정세가 불안해지면 상품을 팔아치울 수 없을 테니까요. 왕국이 한 일은 흔들리던 제국 황실의 발을 걷어차 넘어트린 것이니 안정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승도의 대답에 총영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작금의 반란군이야 제국 정부가 진압할 것이라 생각되는데.”
“물론 진압할 겁니다. 그것이 끝이라면.”
“그것이 끝이 아니다? 묘한 대답이군.”
총영사는 파이프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태양이 산마루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총영사가 태엽 시계 하나를 꺼냈다.
“그간의 대접에 감사하는 뜻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네만, 해군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겠지. 곧장 항구로 가게. 이 조약문을 가져온 범선이 아문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섬에 있는 병사들은 다음 배편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가져가게. 기념이라고 해도 좋고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총영사가 들고 있던 태엽 시계를 건네자 승도는 그것을 받았다. 에우로페 인들은 자신들의 문명 발전 원동력으로 인쇄술과 나침반, 그리고 시계를 손꼽았다.
그 중 시계가 상징하는 것은 시간관념, 좀 더 추상적인 의미를 말하면 약속이었다.
영사는 승도에게 약속을 지켰다는 의미로써 시계를 건넨 것이었다. 그 의미는 승도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제국 황제 시절에 휘하 장관들에게 약속을 잘 지키라는 의미에서 시계를 선물로 준 적이 많았다.
“약속 잘 받았습니다.”
승도가 시계의 의미를 입에 담자 총영사가 미소를 보였다. 눈앞의 애송이는 아무리 봐도 동양인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에우로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이젠 그가 피부색만 다른 에우로페 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것도 아는 줄은 몰랐군. 다음번엔 적으로 만나지 않기를 기대하지.”
승도는 총영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의 방을 나섰다.
***
전쟁의 종식이 전란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강에서 일어난 반란은 여전히 제국 동남부를 뒤흔들고 있었고, 일부 지방에서는 기근과 가뭄이 휩쓸고 있었다.
승도는 혼란이 지금부터 본격화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제 세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겠지. 제국도, 강주도, 가문도.’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세요?”
문득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승도가 고개를 들었다. 반은비였다. 그녀의 새치름한 표정을 보고서야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섬에서 여자라도 만난 건 아니겠지요?”
반은비가 눈을 흘기며 묻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섬에서 나올 적에 메리가 작별 인사라며 가볍게 포옹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야 에우로페에서는 흔한 인사에 속했다. 동방에선 아니지만.
‘루미에 가면 루미의 법을 따르라.’라는 고언을 기억할 것도 없다. 그 얘기를 했다간 반은비에게 옆구리 살점이 뜯겨 나갈 위험이 있다는 정도는 둔한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요즘 몸은 어떤가요?”
“평소와 다를 것은 없어요.”
반은비가 부푼 배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승도는 그런 그녀를 보며 ‘흐음’ 소리를 냈다. 그도 곧 아버지가 된다고 하니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태교에 신경을 써야겠어요. 근래 전쟁이다 뭐다 해서 좋은 것을 가까이하지 못한 것이 염려스러워요.”
“태교요?”
반은비의 말에 승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에우로페에서는 태교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동양은 달랐다.
이쪽에는 배 속의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듣게 하여야 훌륭한 자손을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이 있었다.
“가능하면 좋은 소리를 좀 듣게 하고 싶어요.”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좋은 소리라고 하니 그도 내심 듣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건반 악기가 내는 소리였다.
동양과 서역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음악이었다. 동방에서는 악기가 다양하긴 했지만 그 음역의 폭이 제한적인 까닭에 서역처럼 다양한 음악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동양이 서역에 대해 다양성 부문에서 많이 뒤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승도는 그쪽의 음악을 떠올리자 금세 오페라며 피아노 합주곡 따위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주는 것이라고 그의 머릿속은 군대 행진곡 따위로 넘어갔다.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군대와 관련된 것이다 보니 그런 것이 연상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행진곡이라면 역시 군악대가 필요해.’
승도는 태교 음악에서 난데없이 군악대를 떠올렸다. 그도 멋을 상당히 좋아하는 인간이기에 붉은 코트들처럼 멋들어진 군악대를 하나 갖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전생만 하더라도 로망스는 세계 최고의 군악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악기와 군복은 붉은 코트들의 군악대도 부러워할 정도로 화려했다.
그는 그것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생각이 난 김에 승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지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것을 처리하는 김에 일을 처리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벌써 가시는 것입니까?”
“일이 많이 쌓여 있어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몸조리 잘 하고 계세요.”
승도는 반은비를 남겨두고 곧장 방을 나섰다.
승도가 처리해야 할 일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오씨와 반씨가 주도해야 할 철도 건설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합왕국에 할양될 예정인 아문과 그 주변의 석탄 광산을 연결하는 구간의 공사 문제다.
물론 강주와 아문을 연결하는 노선의 건설도 시급했지만, 한 번에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건설할 철도 부설 사업은 이쪽이 먼저였다.
이 문제는 연합왕국 측과 논의를 거친 후, 강주 관청과 제국 정부의 허가를 득해 추진할 예정이었다. 이 건 자체가 상당한 물밑 작업을 거쳐야 하는 일이라 이해 관계자들과의 사전 조율작업이 현재 진행해야 할 주된 과제였다.
두 번째는 연합왕국 측으로부터 인수받을 예정인 범선의 운용과 승무원 고용 문제였다. 범선 인도야 조만간 이루어질 예정이었지만, 승무원 고용은 전쟁의 여파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동방 무역 회사의 대반에게 다시 독촉 편지를 보내 고용 문제를 마무리 짓고 범선의 국적 등록 절차를 진행해야 했다.
이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외국인 고용 문제는 외국인의 강주 체류 기간 문제가 겹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반되는 제반 문제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광산의 관리 문제였다. 이미 확보해둔 광산들은 운영을 하고 있었지만 생산량의 획기적 증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하려면 서역의 채굴 장비를 들여와야 했다. 이 부분에서도 장비 도입을 서역 측에 의뢰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이 역시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신형 채굴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가 몇 없어 ‘운송’과 ‘양도’에 이르는 부분을 전혀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별도로 서역 해운사와 계약을 맺어야 하는 이중의 문제가 있었다.
네 번째는 건설 사업. 연합왕국 측과 사전 교섭을 거쳐 사업권을 따내는 일이 시급했다. 이 역시도 서역과 안면을 가진 사람이 승도밖에 없어 그가 직접 나서야 하는 문제였다.
다섯 번째는 강주의 방위 점검. 관에 맡겨두어야 할 문제였지만, 관이 얼마나 미덥지 못한지는 승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필요하면 무기를 사서라도 강주의 군사력을 증강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 역시 서역과의 접촉이 걸린 문제라 그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른 행상들에게 맡길 수도 있는 일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격변을 맞고 있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심지어 여유가 있다는 아버지 오유도나 반진유도 하루를 쪼개 쓰는 처지이니 그들의 손을 빌릴 여유는 없었다.
그나마 일을 시킬 수 있는 건문은 연합왕국 섬에서 병사들의 퇴거를 감독하고 있었고, 오씨 가문의 몇 안 되는 사촌들과 심복들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사업 전반을 감독하기도 바빴다.
‘하나같이 골치 아픈 일들이야. 하지만 남 탓할 수는 없지. 내가 벌인 일이니까.’
승도는 기지개를 펴고 자신의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보았다. 처리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분량의 산을 보자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차를 한 잔 마시며 서찰을 하나씩 처리하다 보니 한나절이 금방 지나갔다. 겨우 서류 더미의 일부를 해결하고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차에 사내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이요?”
승도는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큰일이라고 할 정도면 가벼운 일은 아닌 듯싶었다.
“오강의 반란군을 기억하십니까?”
“압니다. 그자들이 왜요?”
승도는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오강의 반란군이라면 그냥 넘어갈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들이 팔기를 격파했습니다.”
그 말에 흥미를 가졌던 승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그리 놀랄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제국의 팔기가 허약한 것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승도는 그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문제는 격파된 자들이 상경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군대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비로소 승도의 표정이 바뀌었다. 상경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면 간단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정말 큰일은 큰일이었다.
“반군이 상경으로 진공하고 있단 말입니까?”
승도가 묻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 관청에서 들어온 소식이니 확실합니다.”
승도는 그 말에 ‘흐음’하며 신음성을 흘렸다.
“반적들이 상경을 노린다면 그 세는 얼마나 된다 합니까?”
“반군의 일부가 북상한다고 말은 나왔습니다만,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삼만을 넘는다고 합니다.”
“삼만.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애매한 숫자인데.”
승도는 코를 가볍게 문질렀다. 상경의 군대가 상대할 만한 숫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진정 큰일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당장 손을 쓰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아주 나쁜 일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승도는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문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승도는 미지근한 차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
상경을 방어하는 제국군은 모두 4개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팔기 효기영과 팔기 전봉 우익, 녹기, 단련이 그것이었다. 이들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말하라면 주방 내지의 팔기 효기영이었다.
북방에 주둔하는 효기영 병력과는 별개의 편제에 속한 전력으로 자그마치 28,000명의 대군을 가진 막강한 집단이다. 이들이 정규 편제를 유지하고 있다면 반군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상대할 수 없는 군세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패한 제국의 실정은 그런 효기영의 힘을 앗아갔다. 마필과 무기조차 제대로 수급되지 않은 기병은 보병만도 못했다. 더구나 소집 인원은 실제 정원의 반도 되지 않아 그 전력은 참혹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전에서 반군에 두 차례 패하고 실 전력이 1,000명 이하로 감소하여 상경을 지키는 주요 방어 세력 중 가장 약소한 처지로 굴러떨어졌다.
사정은 전봉 우익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연합왕국과의 교전으로 병력의 태반을 날려 먹어 보유 전력이라고는 2,000명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운이 좋아 이 정도라도 남은 것이지 제대로 포위 섬멸을 당했더라면 보유 병력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군기대신 기영이 믿을 수 있는 군대는 아이러니하게도 녹기와 단련이었다.
제국 중앙군을 몇 만 단위로 동원하고도 전혀 믿을 수 없는 상황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저쪽이 반군의 진영입니다, 각하.”
“적당들의 세가 강대해 보이는 것이 염려스럽군.”
기영의 눈에 비친 반군의 모습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그 수효는 방어군에 비해 열세했지만 사기가 높고 그 군율이 정강한 것이 이쪽과 차원이 달랐다.
제국을 전복시키고 말겠다는 투지에 불타는 자들과 달아날 궁리를 하는 자들이 싸우는 격이니 수의 격차야 아무래도 좋았다. 싸워보지 않아도 전장의 공기란 것이 누가 이길지 똑똑히 알려주고 있었다.
기영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입맛을 다셨다. 웬만하면 일선에 서지 않는 그였지만, 상경이 위태로워지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라니 일선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반군이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각하.”
기영도 이미 그것을 본 터라 입술을 깨물었다. 가능하면 시간을 질질 끌며 병력을 더 보강했겠지만, 그럴 기회는 없어보였다.
“역적들을 쳐라.”
기영이 명령을 내리자 장수 하나가 기수들에게 명을 전했다. 곧 수십 개의 깃발이 차례로 흔들리자 진압군의 진영에서 한 무리의 군세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직 화기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 전근대적인 운용을 면치 못하고 있던 터라 제국군의 전술은 다소 구시대적인 방식에 가까웠다.
그나마 보유한 기병을 먼저 보내 반군의 앞을 빙빙 돌며 그 발을 묶어두고 좌우로 보병을 보내 상대를 잡아먹겠다는 고전적 정공법의 한 방법이었다. 상대가 기병이 없기에 가능한 수법이기도 했다.
“역도들을 짓이겨라!”
제국 기병들이 말을 몰아 반군의 앞에서 좌우로 갈라졌다. 그나마 훈련이 잘된 기수들을 앞에 세운 터라 기병들은 그 기동까지는 그럭저럭 해냈다.
하지만 대다수는 말을 타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말고삐만 잡고 달리기에 급급했다.
위협을 하려면 총을 쏘아야 하지만 총을 쏘지 못하니 기병의 위협 기동이란 것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 도리어 달려오는 표적이 된 꼴이 되고 말았다. 정공법조차 쓸 수 없는 제국군의 우스꽝스런 추태였다.
반군은 기다렸다는 듯 입수한 화승총을 들고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훈련 수준이야 반군과 제국군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었지만, 아무래도 마상보다는 땅 위에서 총을 쏘는 난이도가 훨씬 낮았다. 그 사격에 기병들이 하나둘 땅으로 떨어졌다.
연합왕국의 전열 보병들이었다면 기병들은 그야말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테지만, 반군의 화력과 훈련도가 낮아 그 정도의 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공격으로도 기병들의 사기가 떨어지기에 충분했다. 사격을 덜 받기 위해 서로 가장자리로 움직이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자 기병들의 대열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저, 저런. 무능한 자들이 있나!”
기영이 혀를 차기도 전에 기병들이 꽁지가 빠지게 좌우로 갈라진 채로 그대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총을 맞다 몰살할 바에 도망치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보는 지휘관은 미칠 노릇이지만 도망가는 기병을 쫓아가 잡을 수는 없었다.
기병 전력이 제 앞으로 몰려왔다가 총질을 당하고 달아나는 꼴을 본 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괜히 정공법을 쓴다고 수를 부렸다가 적의 사기만 높여준 꼴이 된 것이다.
“신은 망한 나라다. 전군 앞으로!”
반군들이 기세가 올라 파도처럼 앞으로 나아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기병을 경계하여 방진을 치던 차에 제국 기병의 추태를 보니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긴 듯했다.
“모두 제 위치를 지켜라. 동요하지 마라!”
기병의 도주를 본 보병들까지 동요하기 시작하자 지휘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기영은 두려움이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고 싶은 욕심이 굴뚝같았지만 여기서 달아나면 그의 입지가 좁아진다.
기영은 침을 뱉고는 깃발을 잡았다. 탐관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권력이 아까워서라도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