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90화 (90/425)

제90화. 관망 (2)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역적들을 쳐라.”

최고 사령관이 몸소 깃발을 흔들며 제 위치를 지키자 병사들의 동요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제일 먼저 달아날 줄 알았던 지휘관이 위치를 지킨다는 것이 가져다준 심리적 안정감은 상당히 컸다.

기영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군은 그 단순한 행동 하나로 ‘그나마’ 전투할 의지를 회복했다.

“전군 앞으로!”

지휘관들이 칼을 뽑아들고 소리치자 병사들도 무기를 꼬나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곧 새카맣게 몰려온 반군과 제국군의 물결이 뒤엉켰다. 무기와 무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에우로페라면 이런 순수한 냉병기들의 교전은 백년도 전에 도태되었겠지만, 이곳은 제대로 된 화약 병기의 보급이 상당히 느린 상태였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무기라고 해도 병기는 병기다. 칼과 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잔인성만 놓고 보면 총기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사람의 머리통이 쪼개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비명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뒤엉킨 병사들의 발아래로 시체가 즐비하게 깔렸다.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연주하는 죽음의 오케스트라는 점차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밀고 밀릴 때마다 시체가 빽빽하게 쌓였다.

마침내 팽팽하던 끈이 끊어졌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반군이 힘을 내어 밀어붙인 탓에 제국군의 진형이 약간 뒤로 휘어졌는데, 그것을 본 일부 병사들이 아군이 포위섬멸당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착각을 했다. 그들은 위험을 느끼자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잘 싸웠던 제국군이건만 누군가 뒤로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하자 부대가 줄줄이 붕괴되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강군이라도 이렇게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오합지졸만도 못한 추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 강군이라 보기도 어려웠던 제국군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달아나는 자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었으며, 부대가 되었다. 부대 하나가 사라지자 대열이 뜯겨나갔고, 진형의 일부가 무너지자 전체가 무너졌다. 전투는 그걸로 끝장이 났다.

“각하.”

“맙소사. 우린 육만이다. 육만이란 말이다. 어째서.”

기영은 입술을 떨었다. 그래도 그가 전장을 지킨 것은 제국군이 우세하다 믿어서였다. 한데, 반절 남짓한 적에게 패하다니. 이건 상식 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힘으로 안 된다면 다른 수를 써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단 몸을 피하시고 후일을 기약하시지요.”

수하 장수의 말에 기영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하긴 전투는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음모와 모략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능력이었다.

기영은 그제야 겨우 생기를 되찾았다. 그는 말고삐를 잡은 채로 수하 장수를 향해 말했다.

“반군과 접촉할 사람을 물색해보게. 그리고 그 편으로 반군 지휘부 중 몇을 매수해야겠어.”

그는 처참하게 무너지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말 머리를 돌렸다.

***

승도는 반군의 향후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자신이 진행하던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어차피 반군이 남하한다고 해도 그에게 대단한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일천 이상의 병사만 주어진다면 기만의 반군이라도 능히 쳐부술 수 있었다.

전술적으로 잘 다듬어진 서방의 강병이 아닌 이상, 머릿수만 앞세운 동방의 군대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이 서찰은 총영사, 아니 공사 각하께 전해드리면 됩니다.”

승도의 말에 건문이 머리를 긁적이며 종이 꾸러미를 건네받았다. 본래라면 동방 무역 회사의 대반에게 맡겨야 할 물건이었지만, 독점이 무너진 이상 연합왕국 측에 직접 접촉하는 쪽이 빠르고 정확했다.

마침 총영사 하워드가 임시로 공사 직을 맡고 있던 터라, 이 문제는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안면이 있다는 것은 이래서 좋았다. 맨입으로 해달라는 것은 아니고 선물을 좀 섞어서 보낼 참이었다.

하워드는 동방의 자기를 좋아하여 값비싼 백자를 몇 점 보내주면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도 남았다.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업자로 이름만 올려달라는 것이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만했다.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준비한 자기만 같이 챙겨가면 되겠습니까?”

“혹시 모르니 동방의 홍삼도 챙겨가도록 하세요.”

승도는 홍삼을 언급했다. 동방 반도국 려(麗)의 특산물인 홍삼은 인삼을 쪄서 말린 것으로 그 효능이 좋은 약재로 알려져 있었다. 동방에서는 뇌물로 흔히 사용되었는데 그 값이 비싸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맛도 보기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승도가 급히 말을 잇자 건문이 읍을 하려던 손을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승도가 손을 들어 탁자 위의 한곳을 가리켰다.

“그림이 보입니까?”

“예.”

건문은 승도가 가리킨 그림을 보고 대답했다. 보기에 몹시 이상한 서역 풍의 그림이었다. 승도가 종종 사서 모으곤 하는 그림인데 모두 용씨 형제의 작품들이었다. 동양의 풍경을 서양의 화풍으로 그린 것들로 ‘묘한’ 향취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이었다.

“내 서재에 가면 저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여섯 점만 골라서 선물로 드리세요.”

“그림을 말입니까?”

건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양에서도 그림을 선물로 주고받는 관습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뇌물’에 대치되는 수준의 선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역 풍의 그림은 춘화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어 더 그랬다.

승도는 건문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총영사, 아니 공사 하워드와 같은 연합왕국의 상류층들은 그림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즐겨서가 아니라 그것을 소장하는 걸로 ‘고상한 취미’를 과시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서역 상류층은 그런 취미로 하층민과 자신들을 구별해 계급의식을 드러내곤 했다.

승도도 전생에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황제의 신분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서역 상류층의 관습을 자연스레 받아들였었다.

동양이라고 해서 그 점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문화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예.”

건문이 읍을 하며 물러나자 승도는 턱을 가볍게 문질렀다. 선물을 이야기하다 홍삼을 말하고 보니 홍삼이 몹시 탐이 났다. 해운업을 시작하면 동방으로 가 홍삼을 직접 사오는 방법도 고려해봄 직했다.

어차피 당장 서역과의 교역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의 중거리 무역은 경험 삼아 시도할 만한 일이었다.

이것 역시 직거래만 가능하다면 이문이 상당히 많이 남는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대개 강남(江南)까지 내려오는 홍삼은 먼 화북을 지나 내려오는 과정에서 원가의 30배까지 가격이 붙기 때문이었다. 원산지인 려에서 한 근에 은 10냥을 주면 살 수 있지만, 화북으로 가면 은 100냥까지 값이 붙는다.

그것은 다시 강상의 손을 거쳐 강남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그 값이 3배로 붙어 은 300냥에 이르게 되니 가격의 폭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려는 상품 거래에 있어 밀무역만 허용하는 폐쇄적인 국가다. 하지만 그 빈틈을 파고 들어가면 직거래는 충분히 할 만한 일. 은 50냥을 주고 밀거래를 해도 남는 장사다. 아편 무역을 하는 작자들의 노하우만 이용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아편 밀수업자들은 큰 배를 먼 바다에 정박해두고 작은 종선을 띄워 육지로 운송하거나 혹은 미리 약속된 배를 부르는 방식으로 밀수를 시도하곤 했다.

관리를 매수하는 것은 안전 보장을 위한 수단일 뿐, 굳이 매수하지 않아도 운송하는 방법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수법을 이용한다면 려와의 홍삼 밀무역도 생각해봄 직했다.

승도는 입맛을 다시다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모처럼 그가 집무실에서 나오자 시녀들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비켜섰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보는 승도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승도는 그런 그녀들의 눈빛을 기분 좋게 받으며 회랑을 지나 뜰로 걸음을 옮겼다. 뜰에는 최근 가병들을 늘리며 만든 연무장이 여럿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연무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느긋하게 훑었다. 그곳에는 서역의 무기를 쥔 무인들이 여럿 모습을 보였다. 근래에 새로 고용한 사내들이었다. 대부분은 인근의 무관과 표국에서 일하던 자들로 후한 대가를 약속하자 미련 없이 제 일자리를 버리고 옮겨왔다.

그들은 승도를 발견하자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읍을 해보였다. 얼굴을 알고 인사를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의 옷차림과 태도를 보고 그의 신분을 대충 짐작한 모양이었다.

새로 받아들인 가병들이었지만 고용주에 대한 예의는 벌써 숙지한 것 같아 승도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했다.

“공자님.”

무인들 사이에서 정씨가 급히 나와 허리를 구부렸다. 승도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물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요 며칠 동안에도 가병들을 많이 늘렸다고 들었는데, 현재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공자님께서 섬에 계실 적에 고용한 자만 이백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요 며칠간 반적들의 위협을 고려하여 다시 백을 늘려 삼백을 채웠습니다. 가주님께서 관의 허가를 득하고 진행하신 일이라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삼백이라. 제법 많군요.”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삼백이지 사병으로 삼백을 거느린 사람은 제국의 최고위층 중에서도 거의 없었다. 자칫 역모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13행의 행상들이 분담하여 비슷한 숫자의 사병을 모았다.

“다른 행상들도 사병을 상당히 모았습니다. 13행의 기존 사병을 모두 합친다면 삼천은 족히 될 겁니다.”

“삼천. 관병을 합치면 육천은 넘겠군요.”

승도는 강주의 군사력을 대강 짐작했다. 육천이라면 적어 보이는 숫자일 수 있지만, 이는 상비군의 숫자인 까닭에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반적들이 강주를 감히 넘보지 못할 숫자입니다.”

그 말에 승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의 병사들은 신병을 제외하면 서역과의 교전 경험을 가진 자들이다. 거기에 제대로 된 조련을 받아 어느 정도의 숙련도도 갖고 있다. 전투력만큼은 제국에서도 수위의 군대라 할 수 있었다.

“믿음직스러워서 좋군요.”

“믿으셔도 좋습니다.”

“무기는 무얼 지급하였습니까?”

승도가 묻자 정씨는 무인들이 쥔 무기를 가리켰다.

“기본적으로 총기는 관의 허가를 얻기 까다로워 무장은 칼과 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대로 저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무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통제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군대는 아무리 훈련이 잘 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승도의 말에 정씨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지난 전투를 경험하며 느낀 것이 많은 듯했다.

“물론입니다. 그 부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승도는 병사들의 무장 상태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큰 불안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사실 무기는 전투력과 직결되는 요소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병기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강주 전투에서 증명되었듯 동등한 총을 쥐고도 강주의 보병들은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기본적으로 무장만큼 중요한 것이 병사들의 정신 무장과 훈련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계속 수고해 주세요.”

승도는 정씨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걸음을 옮겼다.

***

좁은 다다미방 가운데에서 찻잔을 사이에 둔 두 사내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상석에 앉은 자는 구주에서도 강대하다 이름이 높은 살마의 번주(藩主) 요시미츠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는 그의 가신 사카모토다.

그들은 이번 상경 조약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그것이 가져다줄 영향에 대한 논의를 나누고 있었다. 수천 년간 천하의 중심으로 군림해온 대국이 일개 양이들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서역귀들의 총칼 앞에 대국이 무릎을 꿇었다. 향후 정세가 어찌 돌아가겠는가?”

번주의 물음에 사카모토는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외부와의 접촉이 많은 재번봉행(在番奉行: 살마 번이 외부에 상주시킨 감독관) 출신의 관리답게 그 부분은 쉽게 예견할 수 있었다.

“우리 동영도 신과 같은 신세가 될 겁니다.”

“신과 같은 신세가 된다. 서역인들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는 말이더냐?”

요시미츠의 물음에 사카모토가 자세를 바로 하고 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동영은 천하제일의 은 생산국 중 하나. 그 시장의 규모는 서역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미 저들은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카모토의 대답에 요시미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대로였다.

서역은 동영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동영은 일구통상 정책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수백 년에 걸쳐 서역과 교류를 이어온 처지였다. 아무리 제한적이라도 수백 년이나 교역을 하다보면 그 나라에 무엇이 있고 물산이 얼마나 되는지 상당한 정보가 축적되게 마련이다.

“그리된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되겠는가?”

“양이에게 굽히지 않겠습니까?”

사카모토의 대답에 요시미츠가 찻잔을 들었다. 그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넣고는 안색을 굳혔다.

“양이에게 굽힌다. 이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외부에 굽히지 않은 이 나라가?”

“격변의 시대에 변화는 피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 말도 일리는 있군.”

요시미츠는 찻잔을 내려놓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주군의 침묵에 사카모토도 침묵을 지켰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번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막부가 이번 사안을 보고 어찌 나오겠나?”

번주가 막부를 입에 담자 사카모토는 잠시 생각을 골랐다. 생각할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신중하게 입에 담아야 할 부분이니 가볍게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막부는 자그마치 삼백 년 이상 동영을 지배해온 중앙 정부로 막번 체제로 이루어진 동영에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존재를 입에 올리는 것은 그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막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요시미츠는 그 말에 조금 당황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세상이 뒤집히는 문제인데 거기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주가 허를 찔린 것 같은 반응을 보이자 사카모토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현상 유지를 바랄 뿐이니까요. 그들이 신의 격변에 대해 안다고 해서 무얼 하겠습니까? 신을 무너트린 양이와 손을 잡는다면 존왕양이를 기치로 내건 지사들이 일어서 통치 행정이 흔들릴 겁니다. 반대로 외세의 침공에 대비해 군대를 강화한다면 재정 부담을 감당키 어려울 겁니다. 막부가 오랜 세월 유지된 근간은 군축이었습니다.”

사카모토의 말에 요시미츠도 긍정했다. 그건 그도 생각해본 부분이었다.

“하지만 막부가 아주 손을 놓고 있을 것 같지도 않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이 흔들리면 대신 무역 자체가 축소될 터.”

“하지만, 주군. 막부가 손을 쓸 여지는 없다고 보셔도 좋을 겁니다. 막부가 그럴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쓸 재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재미있군. 자네가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번에서 외부 정세에 밝은 것은 자네가 제일 아닌가.”

“과찬이십니다.”

“양이들 이야기는 그쯤 해두기로 하지.”

“핫.”

사카모토는 예를 표시하고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그가 방문 앞에 다다르자 시녀들이 양옆에서 문을 열었다.

요시미츠는 물러가는 가신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사카모토에게 듣는 정세 이야기는 이것이면 충분했다.

사카모토가 물러가자 요시미츠는 옆쪽 방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토. 들어오게.”

“핫.”

다다미방의 문이 열리며 향초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분 냄새를 감추기 위해 향초를 태웠는지 이토의 몸에서는 짙은 냄새가 잔뜩 배어났다.

요시미츠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또 여자를 안고 들어왔군. 그 짧은 새를 참지 못하나?”

“송구합니다, 주군.”

“자네를 책망하러 부른 것은 아니니 죄인 같은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네. 거기 앉게.”

요시미츠가 자리를 권하자 이토가 방석 위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요시미츠가 본론을 꺼냈다.

“자네에게 하나 시킬 것이 있어 불렀네.”

그 말에 이토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간단한 일이라면 번주가 직접 불러 지시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긴장을 아는 것인지 요시미츠가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긴장할 것 없어. 자네가 할 일은 신으로 가서 제국의 사정을 탐문하고 오란 것이 전부네.”

“제국을 말입니까?”

“그렇다네. 가능하다면 서역 쪽의 사정도 같이 살펴주면 좋겠고.”

요시미츠는 편안하게 말했지만 그 의미는 실로 가볍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제국에 사람을 보낼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한 사람, 장군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정이대장군이 아닌 자가 사람을 보내는 것은 말 그대로 월권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막부는 우리를 제대로 감시할 수도 없지.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사정을 살피는 것은 어디에 중점을 두면 좋겠습니까?”

“전쟁에 관련된 부분이 좋겠지. 종이호랑이는 얼마나 약한지. 그리고 새로 나타난 호랑이는 얼마나 강한지. 또 그 호랑이가 우리 땅에 나타난다면 상대할 수 있는지.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하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요시미츠의 말에 이토는 허리를 굽혔다.

그의 주군은 일개 번주에 지나지 않았지만 앉아서 천하를 굽어보고 있었다. 만약 세상이 기회를 준다면 그 주역이 될 사람은 그의 주군이 아닐까.

이토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요시미츠의 앞에서 물러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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