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영입 (4)
신대륙 북부 식민지는 엄청난 넓이를 자랑했다. 그 넓이를 간단히 묘사하자면 에우로페 대륙이 두 개는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였다.
땅이 이토록 넓으니 교통수단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즉부터 이곳에서는 운하와 철도가 경쟁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강이 비교적 많은 중부 지역에서는 운하가, 그 외의 지역에서는 철도가 자리 잡았다.
이들 수송 수단은 서로 경쟁적으로 각 지역에 들어서 식민지의 성장을 견인했다. 곳곳에 소규모 도시들과 마을이 들어섰다. 그래도 땅이 워낙 넓어 에우로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이주민들을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문제가 있다면 하나. 이 무차별적인 팽창에 수반된 치안의 공백이었다. 아무래도 왕국 본토는 멀고, 치안에 투자되는 재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치안 수요를 감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왕국이 경영해온 동부 해안을 제외한 내륙 지방은 사실상 치안의 공백 지대나 다름없었다. 이 지역에서는 각종 범죄 조직들이 판을 쳤다.
그것만이라면 왕국 정부가 심각하게 생각할 여지가 없었지만, 문제는 신대륙의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점차 자신들의 토지를 잠식하며 들어오는 이주민들을 그냥 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내륙 지방 곳곳에 판을 치는 범죄 조직들과 손을 잡고 총기를 수입해 무장을 갖추고 이주민들을 습격했다.
이 난장판을 수습하기 위해 왕국 정부는 내륙 지방에 군정(軍政: 군대가 통치)을 실시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대규모 군대를 파병할 여력도 없거니와 땅이 너무 넓었다.
광대한 대륙에 비하면 파병된 육군의 규모는 한 줌이었다.
“오늘은 조용하군.”
광활한 평원 전체를 관제할 수 있는 위치에 세워진 요새 안에서 근무 중이던 병사들이 하품을 했다. 이따금 야만인들이 습격을 해오곤 해서 난리가 벌어지곤 했지만, 오늘은 아무런 공격의 전조도 없어 따분하기까지 했다.
이들이 근무하는 요새, 일명 ‘여왕의 눈’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면 야만인들이 조용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한 번 정도는 인사가 올 법도 했는데, 이렇게 조용하니 의아스러웠다.
포크 하사는 이 평온한 시간을 이용해 월급을 탈탈 털어 구입한 값비싼 바이올린을 꺼냈다. 에우로페에서 흔하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군인 월급으로는 매우 비싼 것이라 그는 이 물건을 제 목숨처럼 아꼈다.
그때 병사 하나가 창밖을 바라보다 소리를 쳤다.
“먼지 구름이다.”
그 말에 병사들이 일제히 창가로 몰려들었다. 평원에서 일어나는 먼지 구름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일어났다. 하나는 가축 떼. 하나는 말을 탄 사람들이다. 전자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후자라면.
“습격인가!”
포크 하사가 바이올린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망원경을 들었다. 하사가 움직이자 테이블에 앉아 포커를 하고 있던 장교와 올리버 상사도 카드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가장 먼저 망원경을 들고 지평선 너머를 훑던 포크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빌어먹을. 안 좋은 생각이 빗나간 적은 한 번도 없군.”
그가 짜증을 낼 틈도 없이 한 무리의 군마가 요새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제기랄. 전원 전투 준비!”
장교의 명령에 붉은 코트들은 날렵하게 좁은 총구에 총을 가져다 대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답게 제 위치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병사들이 제 위치에 배치되자 원주민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대지의 만물을 주관하시는 어머니! 얼굴 하얀 악마들의 피를 짜내 당신의 갈증을 달래는 것을 허락하소서!”
원주민들이 고함을 지르며 요새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거리를 두고 돌다 한 번에 거리를 좁혀올 것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에 붉은 코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수백이나 되는 공격자가 몰려온 탓에 긴장을 늦춘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사격을 통제합니까?”
포크 하사가 묻자 장교가 고개를 저었다. 전열 전투도 아닌 상황에서 사격을 통제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때 병사 하나가 총을 쏘았다. 이어 붉은 코트들의 사격이 이어졌다. 그러자 원주민 하나가 피를 뿌리며 땅을 굴렀다. 그것을 본 원주민들은 사거리를 가늠하며 다시 밖으로 물러섰다. 위협 기동만 하며 이쪽의 탄약을 소모시키려는 계산인지 몰랐다.
“귀찮게 나오는군.”
포크는 입을 씰룩이며 총구 너머의 적을 살폈다. 원주민들도 총기를 가지고 있어 몸을 노출시킨 채로 정밀한 사격을 가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저들이 위협 기동만 해도 실탄을 낭비하는 일을 피하기 어려웠다.
몇 번의 공격과 후퇴가 반복되는 동안 원주민들은 다섯을 잃었지만, 붉은 코트들은 자그마치 3천 발에 가까운 실탄을 소모했다. 실탄의 소모량으로 따지면 있을 수 없는 전과였다.
“이대로 가다간 놈들이 몰살하는 것보다 우리 탄약이 고갈될 가능성이 큽니다.”
포크가 다시 장교에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사격 통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장교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탄약 재고를 걱정하여 병사들의 사격을 함부로 통제했다간 탄약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원주민들의 접근을 허용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면 문자 그대로 끝장이다.
그럴 바에 탄약 낭비를 감수하고 강공을 펴는 쪽이 낫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우우우우.”
원주민들이 다시 고함을 지르며 가까이 다가오는 시늉을 냈다. 포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몇 명의 희생을 대가로 유효 사거리를 가늠하고 그 근처를 오가며 이쪽의 탄약 낭비만을 유도할 뿐이었다. 에우로페 식 전술에 익숙해진 전투 방식이라 붉은 코트들은 혀를 내둘렀다.
저들이 에우로페의 전투 방식에 익숙해진 것은 물론 붉은 코트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몇 번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치렀으니 발전이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몇 번을 오가던 원주민들 사이로 얼핏 흰 소가죽을 뒤집어쓴 사내가 보였다. 그를 본 포크가 이를 갈았다.
“하얀 황소가 이끄는 놈들이었구나.”
하얀 황소는 연합왕국이 목에 상금으로 3천 파운드를 내건 거물로 이곳 신대륙 원주민들의 영웅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붉은 코트들과 수십 차례의 교전을 벌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안겨주는 전과도 몇 번 거둔 바 있었다.
하얀 황소란 말에 장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얀 악마들의 요새를 바라보고 있던 사내, 하얀 황소는 세 시간 이상 총탄을 쏟아낸 붉은 코트들의 저항에 코를 문질렀다. 쉬운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악마들은 강했다.
저런 작은 요새에조차 자신들이 생각한 것 이상의 물자를 비축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것이 얼굴 하얀 악마들이었다.
그의 원대한 꿈을 생각한다면 갑갑한 일이다. 겨우 요새 하나도 점령할 수 없는 능력으로 조상들의 땅을 되찾는 건 어림도 없었다.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저 요새 하나가 아니라 그 뒤에 버티고 선 하얀 악마들의 거대한 군대와 도시였다.
“족장님.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습니다. 더 공격을 하다간 악마들이 말을 타고 올지 모릅니다.”
젊은 전사의 말에 하얀 황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에는 광활한 평원의 순찰을 담당한 11기병 연대 예하의 순찰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말이 순찰대지 그 전투력은 웬만한 원주민 부족 다섯을 합쳐도 상대할 수 없었다.
“붉은 바위야. 형제들을 모아라. 이만 철수하겠다.”
“예.”
젊은 전사가 씩씩하게 답하고는 요새 주변을 빙빙 도는 전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달려갔다.
형제들의 피만 무의미하게 흘린 싸움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그런 모험을 강행하기엔 그가 짊어진 짐이 너무 컸다.
하얀 황소는 요새를 바라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붉은 태양이 던지는 슬픈 기색이 느껴졌다.
‘어머니께서는 저들의 생을 조금 더 붙여 주시기로 생각하신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대 정령께서 자비를 베풀라고 뜻하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얀 악마들을 몰아내고 이 푸른 초원을 우리 손으로 되찾고 말 것이다.’
하얀 황소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
연합왕국은 여타 민주 정체 국가나 왕정 국가와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양자의 중간 정도 위치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라는 점이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더 큰 이유가 하나 숨어 있었다.
에우로페 대륙과 달리 귀족 계급이 몰락하지 않고 정계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왕국의 정치는 에우로페에서 시도되지 않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쏟아 내면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자주 보여주곤 했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보니 국가의 우선적인 가치도 ‘명예’, ‘국익’, ‘주권’으로 정립되어 있었다. 이중 명예란 국가의 위신과 영향력 등을 말했다.
그러니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 생기면 정계가 발칵 뒤집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오늘 심각한 정보 하나를 입수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진행한 전쟁에 대한 내용인데, 이 내용에 따르면 또 참혹한 꼴을 면치 못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야만인들이 우리 국가의 영사관을 장악하고 국가의 대리인인 총영사와 선량한 시민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 것입니까?”
자유당 쪽에서 포화를 열자 보수당 쪽 의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노회한 알링턴 공작조차 미간을 찌푸린 것이 이 상황에 대해 뭐라 반박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명예가 손상된 것 아닙니까? 대 연합왕국이 언제 이런 굴욕을 맛보았단 말입니까? 기왕 전쟁을 일으켰다면 깨끗하게 승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까! 나는 이 자리에서 육군성과 해군성, 그리고 내각에 책임을 물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자유당 당수 리브 백작이 정치적 공세를 퍼붓자 보수당 의원들이 모두 웅성거렸다. 반박은 해야 하는데, 반박할 것이 없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있던 수상과 내각 각료들은 똥 씹은 표정이 되어 자유당의 파상 공세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전쟁이 이렇게 꼬이다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초반에는 예상도 하지 못한 큰 피해가 나더니, 섬이 점령당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자유당 쪽에서 정보를 입수한 이상 일이. 휴우.”
육군 장관의 말에 수상이 혀를 찼다.
“원정군 수뇌부가 무능했다고밖에 볼 수 없어요. 뗏목이나 다름없는 함대를 가진 노란 원숭이들에게 상륙을 허용한 것부터가.”
“면목 없습니다.”
윌슨은 한창 공세를 이어가는 자유당 의원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전쟁의 승기를 잡은 덕에 ‘위신 추락’ 문제야 대충 넘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총영사까지 포로로 잡혔던 문제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당장 자유당은 모처럼 잡은 주도권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단 책임 문제를 확실히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수상의 옆에 앉아 있던 로스실트 의원이 조언을 건넸다. 안 그래도 패전 문제로 살생부를 만든 적이 있었다.
“책임 문제라면?”
“일단 원정에 관련된 인사들 중 섬 방위와 관련된 자들 전원을 문책하는 겁니다.”
“해군을 손보는 거야 당연하고, 그다음은요?”
“윌리엄 전하를 이용하는 겁니다.”
로스실트의 말에 수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치가인 그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위험부담이 커서 그렇다.
“전하를 이용한다니, 어떻게 하잔 겁니까?”
“간단히 말해 그분을 전쟁 영웅으로 만들고 일을 덮어버리자, 이런 얘기지요. 아주 간단하게 말입니다. 대중은 언제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주목할 뿐, 무대 뒤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그건 자유당이 입을 닫아줄 때의 얘기입니다.”
“언론 쪽만 틀어쥔다면 불가능하진 않지요. 수상께서 이번 일을 도와주셨으니 수습은 내가 힘을 보태지요.”
“의원께서 직접 말입니까?”
“필요한 만큼 나서지요.”
“도와주신다니 한시름 놓았습니다.”
윌슨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연단에 눈을 주었다. 막 불 같은 성정으로 보수당을 물어뜯는 젊은 의원 하나가 그 위에 서 있었다.
방금 올라온 그 의원은 수상도 잘 알고 있었다. 전쟁 표결부터 위험에 빠트린 자유당의 신진, 브루스 의원이었다.
“저 애송이가 또.”
수상이 이맛살을 구기자 로스실트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나기는 잠시 피하면 됩니다. 지금은 잠시 물러나는 게 좋겠지요.”
정계에 도는 은어 중 이런 말이 있다. ‘들리지 않는 말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않는다.’ 그 말을 로스실트가 입에 담은 것이다. 수상도 그것에 동의했다.
이렇게 두드려 맞는 것도 이미 진력이 난 참이었다.
“그럼 모두 일어납시다.”
수상과 각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순간 브루스가 벼락처럼 호통을 쳤다.
“수상 각하께선 지금 쥐구멍을 찾아가시는 겁니까?”
“뭐, 뭐야?”
보수당 의원들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일국의 수상을 상대로 한 언사치고는 무례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 앞에서 책임 면피를 위해 발이나 빼는 국가수반은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수상 각하께 그 무슨 무례를. 말을 삼가시게.”
“존중을 바라신다면 퇴장이 아니라 비난을 기꺼이 받아주시는 자세를 취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보수당과 자유당 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그렇잖아도 한참 동안 일방적인 공세를 당하던 차에 건수가 생기자 보수당 의원들도 입을 놀려댔다.
의사당이 소란스러워지자 알링턴 공작이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쳤다.
“건방진 애송이 놈이!”
알링턴이 지팡이를 휘두를 것처럼 성을 내자 의원 여럿이 몰려가 그를 말리는 시늉을 했다. 그 바람에 의사당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한심한 머저리들.’
로스실트는 그들에게 냉소를 지어보였다.
수상과 각료들이 의사당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의사당 흰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수백 명의 신문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왔다. 미리 자유당에서 정보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들은 마치 속사포를 쏘아대듯 수상 일행을 향해 말을 퍼부었다. 그 정신없는 질문의 홍수 세례에 윌슨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각하. 이번에 총영사가 포로가 되었다는 데 사실입니까?”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국민들에게 사실 한마디만 말씀해 주시지요.”
“지금 각하께서 바쁘십니다. 근위병! 길을!”
수상의 비서가 목소리를 높이고서야 한 무리의 근위병들이 몰려나와 기자들과 각료들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어떻게든 한마디 듣겠다고 몸을 들이미는 기자들의 움직임은 처절했다.
심지어 일부 여성 신문 기자들은 ‘레이디’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근위병들의 처지를 이용해 아예 몸을 비비다시피하며 앞으로 밀고 나오기까지 했다.
수상과 각료들은 겨우 근위병의 보호를 받으며 기자들을 뚫고 마차에 올랐다. 그 와중에도 저지를 뚫고 들어온 여성 신문 기자를 떼어내는 과정에서 수상의 양복 단추가 뜯어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정말 진저리가 납니다. 일단 몇 사람 옷을 벗겨놓고 로스실트 의원 말대로 하시지요.”
외무성 장관의 말에 수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이래 가지곤 출근도 장담할 수 없어요. 내일부터 수상 관저 앞에 저 독수리들이 진을 치고 앉아 내 살점을 쪼아 먹겠다고 눈을 희번덕거릴 것인데, 그것부터 처리해야지요.”
시체의 살점 하나도 남기지 않는 청소동물 독수리를 빗댄 말에 각료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들의 표적이 되면 정말 속곳 하나까지 탈탈 털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렇게 망신창이가 되기 전에 다른 먹이를 던져주는 편이 안전했다.
“어디로 마차를 돌릴까요?”
비서가 묻자 수상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폐하께로 가지. 지금 관저로 가는 건 일만 키울 테니까.”
그 말에 모두 수긍했다.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가진 여왕의 공간이라면 기자들도 어쩌진 못할 것이고, 윌리엄 문제를 놓고 논의하기에도 좋았다.
***
전쟁에서 영웅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스스로 일어서는 영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영웅은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영웅적인 행위를 해도 그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상 영웅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언론 정치라 불리게 된 근대 국가의 정치에 있어서는 더욱 그런 경향이 강해졌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면 그 누구도 영웅이 될 수 없었다.
반혁명 전쟁은 그런 시대상을 잘 보여주었다. 언론 정치의 달인인 필립 아우구스트 퐁퓌르가 각 전투마다 만들어낸 ‘인위적인 영웅’들은 그가 바라는 대로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수단이 되어 빛을 받았다.
윌리엄은 그런 시대상에서 보수당이 필요로 하는 영웅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상한 상류층 인사로서 전쟁에 참가하여 만신창이가 된 몸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전쟁에서 상당한 공적(?)을 세웠으니 보수당에게 이보다 더 좋은 적임자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전쟁 영웅이 되어야 할 사내는 이 전쟁을 ‘상처뿐인 승리’라 인식하고 있었다.
총영사가 생포되고 사실상의 왕국 영토가 점령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뿐인가?
얼치기들로 이루어진 제국 놈들에게 뒤를 보이기까지 했다.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윌리엄이 파이프를 물고 있는데 에버튼 백작이 다가왔다.
“이야기는 들었나?”
“무슨 이야기?”
“우리 쪽 고급 장교 몇 명이 야만인들에게 고용됐다는 이야기가 있네.”
“그게 무슨 소린가?”
윌리엄이 잠시 어이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고위 장교라면 최소 연대장이다. 연대장 정도 되는 자들이라면 사회에서 먹고살 만큼의 재산과 지위가 있었다.
그런 이들이 뭐가 모자라서 물 낯설고 적대적인 야만인들 사이에 남는단 말인가?
“들은 대로일세. 상상할 수 없는 거금을 약속했다지.”
에버튼이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어이가 없군. 야만인들이 몇 배를 준다 해도.”
“장교 기본 급여의 천 배도 넘게 준다는 말이 있네.”
“천 배? 기본적인 군대 유지비도 투자하길 꺼려하는 그 제국 놈들이?”
윌리엄의 의문은 당연했다.
비쩍 마르고 곯아 총도 후들거리며 쏠 정도로 답이 없는 군대가 제국군이다.
거액을 들여 외국 군사 고문관을 들인다는 걸 어떻게 상상하겠는가?
에버튼이 고개를 저었다.
“제국 정규군이 아니라 지방 의용군에서 초빙했다더군.”
“그자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설마?”
윌리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강주. 그 염병할 오씨들이지.”
“우리 총영사를 생포한 그놈인가.”
오승도.
처음에 그 이름을 들었을 땐 그저 그런 야만인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마주 섰을 때 놈은 위협적인 장애물로서 역량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들었을 때, 놈은 왕립 해군을 머저리로 만드는 위업을 보여줬다.
결단코 무시할 수 없는 자다. 아니, 위험천만한 괴물이었다.
윌리엄이 잠시 몸을 떠는데 에버튼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여기 남아서 오승도란 자를 잠시 지켜보고 싶네.”
윌리엄은 입에서 파이프를 떼었다.
“동방에 남는 건 고생스러운 일일 텐데. 자네가 그럴 필요가 있겠나?”
“조국을 위한 봉사에 어려움을 따질 필요는 없지. 내 이름만으론 주재 무관 자리에 남기 어려우니 자네가 힘을 써주게.”
윌리엄은 잠시 에버튼의 얼굴을 보았다.
‘이 친구가 진심인가?’
에버튼이 여기 남으려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가면 ‘7대 백작가문’의 일원으로서 사교계에 자랑할 전공이 모자란다. 무언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서 돌아가야 귀족 사회에서 평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속내가 어떻든 오승도, 그 괴물은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윌리엄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총영사와 만나서 이야기해 보겠네.”
원정이 끝난 이상 그의 지위는 일개 장교가 아닌 왕국의 대공이며 여왕의 약속된 반려다.
총영사를 만나 청탁 한 번 넣는 것 정돈 어렵지 않았다.
“고맙네.”
윌리엄은 에버튼의 손을 잡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