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정비 (2)
에우로페 인들에 대항하는 원주민들의 전술은 늑대의 사냥방식을 닮았다. 그들은 상대가 허점을 보일 때까지 주변을 빙빙 돌며 먹잇감을 물어뜯을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결정적인 기회가 다가올 때 전력을 다해 공격하여 상대의 숨통을 끊었다. 전술적 견지에서 보자면 기동력이 뛰어난 소수의 군대가 취하기에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합왕국 쪽도 그러한 전술에 마냥 휘둘리지만은 않았다. 마차를 긴 원형으로 모아 움직이는 이유도 대항책 중 하나였다.
대규모 공격이 이루어지면 마차들을 정지시키고, 그 간격 사이로 기병과 사람들을 배치하여 일종의 ‘요새’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주민들도 그것을 알기에 함부로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저 존재감만 드러내며 앞뒤를 오가는 것도 다분히 상대를 도발해 방어의 핵심인 기병대를 끌어내려는 의도였다. 기병만 끌어내면 마차를 공략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왕립 기병대 소속 엘리자베스 중위는 자신의 머리를 감싼 흰 모자를 벗고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풀었다. 햇빛을 받은 금발 머리가 흘러내리자 동료들의 시선이 잠시 던져졌다. 그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뜨거운 열기로 덥혀진 대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달려들지 모르는 적을 경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보니 땀은 쉴 새 없이 흘렀다.
“휴우.”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마차 쪽을 둘러보았다. 민간인들은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기병들만큼 긴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안쪽에서 보호를 받는 입장이니 그럴지도 몰랐다.
‘앞으로도 사흘은 더 가야 도시에 도착할 텐데. 그때까지 피해 없이 갈 수 있을까.’
차라리 저들처럼 걱정 없이 이동을 하고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엘리자베스는 모자를 다시 푹 눌러썼다.
“연합왕국에서는 여자도 군역을 집니까?”
조금 전 긴 머리카락을 보인 기병을 본 무인이 묻자 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에우로페에서 군역은 남성의 신성한 의무로 간주되어 여군을 받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상당히 달라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왕좌’와 ‘왕위 계승권’이 여성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군문에도 여성들이 하나둘 발을 디뎠다.
물론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다. 고상한 숙녀라면 교양을 쌓은 다음 좋은 혼처를 골라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 서역의 보편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일부 귀족 여성들은 그러한 시선을 기꺼이 감수하고 군문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인식은 좋지 않은 편이에요. 군문에 자원하는 여성들은 대개가 기병에 지원하곤 하죠.”
메리는 가볍게 설명을 붙였다. 기병은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병과인 까닭에 ‘여성’이 지원하더라도 그나마 좋은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거친 보병이나 특별한 교육이 필요한 포병 등은 여성이 애초에 들어갈 길 자체가 없었다.
“여성이 말을 탄단 말입니까?”
무인은 그것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가 말을 탄다는 것은 동양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이 탈것을 고른다면 가마나 마차 따위를 타지 말을 탄다는 것은 ‘선택지’ 안에 있지도 않았다.
실제로 신에서는 말을 타고 다니는 여성이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북방 유목민 출신의 여성들이나 그럴 뿐이다. 그래서 말을 탄 여성들에 대한 동양의 시선은 ‘오랑캐 여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서역에선 상류층이라면 승마가 교양의 일부로 포함되니까요.”
무인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던 차에 총성이 울렸다.
붉은 코트들과 원주민들은 거리를 두고 총격을 나누었다. 쌍방 모두 말을 타고 사격을 한 탓에 정확도는 형편없었다. 말에서 떨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주민들은 한 차례 사격을 가하고는 다시 시계 바깥으로 날렵하게 후퇴했다. 왕국 기병과 정면으로 대결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태도였다.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Hit and Run) 전술이다. 잠깐만 방심해도 다가와 총격을 퍼붓고 사라지니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피로를 높이고, 결정적인 시점에 공격을 가하는 방식이니 당하는 쪽에서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메리와 무인의 대화도 이 한 차례 소동 때문에 뚝 끊어졌다.
메리 일행은 사흘간 원주민들의 공격에 시달린 끝에 가까스로 사막 끝에 위치한 윌리엄 요새에 도착했다.
이 요새는 사막과 평원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보루로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경작지를 방어하는 역할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보다 방어가 어렵다는 말처럼 한 줌의 군대로 드넓은 경작지를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평원 곳곳에 다른 요새들이 놓여 있긴 했지만, 원주민들이 들어와 분탕질을 치는 것을 막기엔 땅이 너무 넓었다.
메리는 요새 한쪽에 마련된 숙영지에 여장을 풀었다.
‘정말 힘든 여정이었어. 이 앞으로도 원주민들이 날뛴다고 말들이 많던데. 치안이 굉장히 나빠진 모양이야.’
그녀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철도 공사비가 생각보다 더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많이 잡는다면 두 배 이상 소요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일에서 거둘 수 있는 수익은 생각보다 많이 내려간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강주양행의 첫 사업이야. 이 정도에 발목을 잡힐 순 없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메리는 손톱을 깨물었다. 하얀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깨물던 그녀가 턱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딱딱한 손톱이 이빨 사이에서 연하게 맞물린 차에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며칠 전 본 하얀 황소와 그 부하들의 얼굴이 자신을 경호하는 무인들과 색깔이 비슷하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들과 접촉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백인’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야기를 걸어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의 말을 아는 사람은 찾아보면 구할 수 있어. 그것을 속성으로 가르친다면 의사소통까진 할 수 있어.’
읽고 쓰기를 제외한 기본적인 회화는 핵심 문장만 외운다는 가정 하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원주민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서 그들과 타협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이다. 철도 건설은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안인데 말로 구슬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이 자리에 오승도 대인이 계셨다면 차라리 일이 편했을지도 모르겠네.’
메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푹신한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괴물 같은 사내라면 어떻게 일을 처리했을지 궁금했다.
원주민들조차 돈으로 매수해 버렸을까? 그런 방식은 아닐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가 생각하지 못하는 의외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컸다. 그는 못하는 것이 없는 초인으로 보였으니까.
메리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굳이 대화를 건다면 상대가 혹할 만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협상에 임하는 자의 기본적인 자세였다. 그렇지 못하다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고 이쪽의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오승도는 언제나 협상에서 그런 철칙을 지켰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를 휘둘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메리는 가만히 고민하다 침대 옆에 꽂혀 있는 서가를 보았다. 원래 이 방의 주인으로 있던 왕국 장교가 남긴 유품들이 서가에 가득 꽂혀 있었다.
그녀는 서가에서 눈길을 끄는 책 제목 하나를 보았다. 오래전에 읽어본 적이 있는 고전 작품이었다.
‘동방 기사단.’
동방 기사단은 동방의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그 정복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에우로페 인들을 이주시켜 ‘기사단 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역사를 저술한 작품이었다.
프리지아 국가의 모태를 다룬 역사서였지만, 한편으로는 문학적 가치가 높은 문학 작품이기도 하여 교양을 중시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 정도는 읽어보는 책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메리는 번뜩 생각 하나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
‘보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 훈련은 행군이다.’
연합왕국 장교단은 ‘기본’을 강조했다. 기본적인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군대는 군대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지휘관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없는 군대는 전술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왜 양이들이 우리 일에 신경을 쓰는 겁니까?”
임경문의 지시로 단련과 함께 훈련을 하게 된 녹기 별감 왕유는 별의별 사소한 것까지 간섭하는 양이들에게 강한 불만을 품었다.
“상납도 받지 못하게 하고. 이런 더러운 꼴은 처음입니다.”
지휘관들은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삼삼오오 모여 불만을 토로했다. 상납으로 얻는 수익이 급여를 몇 곱절이나 압도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금지되니 입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저 빌어먹을 양이들이 우리 상전이란 겁니다. 관리사 영감과 오 대인은 뭘 생각하는 거랍니까.”
“에이. 빌어먹을.”
그들은 침을 뱉고는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그래도 집단항명까지 가지 않은 것은 강주 전역에서 명성과 입지를 높인 오승도와 임경문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용기가 없어서였다.
현직 흠차대신과 조정의 고관을 상대로 항명해본들 그들 신상에 좋지 않으니 말로만 떠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휘관들은 입이 석 자나 튀어나왔지만 정작 병사들은 양이들의 지휘를 반겼다.
양이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급여’가 정상적으로 지불되어서였다. 부패의 고리 자체가 끊어지니 병사들의 몫이 늘어나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러니 훈련의 강도가 높아져도 그에 대해 병사들은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난 훈련 강도에 맞게 식단도 좋아지니 반길 일이었다.
병사들이 열과 오를 맞추어 걷는 것을 지켜보던 연합왕국 장교들이 귓속말을 나누었다.
“아무리 보아도 저들은 얼치기들입니다. 저런 자들을 가지고 조국의 군대와 맞싸울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격은 둘째치더라도 병사들의 기본 체력부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합니다. 론디니움의 빈민들로 군대를 채워도 저들보단 나을 겁니다.”
“문제는 저들을 의뢰인의 기준에 맞게 만드는 일인데, 장비는 둘째치더라도 병사들이 기본이 안 되어 있으니, 일정 수준까지 올리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아요.”
“우선 준사관부터 길러내야 합니다. 자질이 있는 자들을 가려 뽑아 하급 지휘관들을 다수 육성해야 합니다. 지금 저 군대는 허리가 없는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왕국 장교들은 간단한 행군을 한 번 시켜보고 대번에 문제를 짚어냈다. 행군은 매우 단순한 군사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그 군대의 자질과 훈련 수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병자라면 다행입니다. 저 정도면 싸울 의지도 별로 없어 보이는 자들입니다. 도대체 저런 자들이 우리 붉은 코트에 맞섰다는 자체가 믿기질 않습니다.”
그들은 혀를 내두르며 병사들에게 맞는 훈련 프로그램들을 입에 담았다. 그들이 제시한 기본적인 훈련은 모두 프리지아 방식에서 따온 것들이었다.
프리지아 식 군사 훈련이란 매우 단순하고 간단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병사들에게 매우 괴롭고 힘들었다.
그 훈련이란 ‘간단한 행군’을 계속해서 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열과 오가 맞추어질 때까지 체벌을 가하여 완성도를 올려가는 방식이었다.
병사 개개인을 군대라는 이름의 전쟁 기계에 어울리는 단순 부품으로 가공해 나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행군이 일정 수준에 오르면 전열을 유지하는 훈련으로 넘어가며, 이 훈련을 강제하기 위해 전열의 앞뒤로 총을 쏘아 전열을 흐트러트리면 ‘죽음’이라는 것도 인식시켰다.
말 그대로 병사를 인격체가 아닌 ‘부품’으로 볼 때나 가능한 가혹한 훈련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기본 훈련들을 모두 이수하고, 총검술과 사격술을 익히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장교의 명령 없이 전열을 지킬 수 있는 칼 같은 군대가 만들어진다 할 수 있었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신의 군대에는 더없이 알맞은 훈련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문제가 있다면 ‘패전’시 군대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행군은 며칠이나 시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루에 10마일씩 열흘 단위로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헨들릭의 말은 프리지아 육군이 전장에서 보여준 가장 빠른 행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속도로 행군을 시키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전장과 달리 정해진 장소만 행군하는 것이라 난이도는 그 정도로 높지 않았다.
훈련 강도가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영양 수준이 썩 좋지도 않고 체격도 작은 병사들에게 그 정도의 행군을 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었다.
“무리한 일이 아닙니까?”
“그 정도 행군은 기본에 속합니다. 그것도 견뎌내지 못하는 자들이라면 병사로 쓰기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군(國民軍)의 개념을 내세워 전 국민을 병역 대상으로 본 로망스조차도 병역 자원을 모두 병사로 징집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군역에 부적합한 자들은 기초 군사 훈련 과정에서 모두 걸러냈다. 훈련의 기본에 속하는 행군을 견딜 수 없는 자들이라면 병역을 수행할 수 없었다.
“병사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장교단은?”
“불필요한 자들은 걸러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우리가 직접 기른 자들을 승진시키는 쪽이 낫지 싶습니다. 전반적으로 부패한 데다 무능한 자들입니다. 기본적인 소부대 단위 전술조차 숙지하지 못한 자들도 허다하고, 총기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습니다. 이런 자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우리 고용주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헨들릭이 붙인 한마디에 하비도 웃고 말았다. 하긴 오승도는 저 잡병들에 그 무능한 자들을 데리고도 잘만 싸웠다.
“만약 고용주가 프리지아 수준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면 우리는 강주에서 더한 낭패를 맛보았겠지요.”
“프리지아 수준의 보병 연대 셋 정도를 가졌다면 처음부터 회전을 걸어왔을 겁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그를 우습게 여기고 덤볐다 아주 박살이 났겠지요.”
장교들은 대화를 나누다 막 앞을 걷던 병사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서 지휘를 돕던 준사관들이 부대 정지를 명령했다.
정지 명령이 내려지고 거의 10초 이상 지나서야 부대가 멈추었다. 부대 통제부터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하지만 동양 군대치고는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저 친구들을 프리지아 수준 근처까지 만들자면 일 년 정도는 부지런히 두드리고 펴야겠군요.”
“일 년 정도로 만들 수 있다면 다행일 겁니다.”
두 장교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