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05화 (105/425)

제105화. 야만 (1)

승도가 서역을 향해 닻을 올린 시각, 지구 반대편 신대륙에 있던 메리는 거대한 평원을 가로지르는 대하에 도착해 있었다.

신대륙 사람들이 ‘콜 강’이라 부르는 큰 강으로 강폭은 무려 3km를 넘었다. 거기에 수심이 깊고 물살이 잔잔하여 천연의 운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 주위로 연결된 작은 운하들이 미완에 가까운 육상 교통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메리는 콜 강 중류의 내륙 항 중 하나인 더치에서 배를 타고 철도가 놓인 남부 내륙 도시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륙 횡단 루트였지만, 이용객의 수는 아직 그리 많지 않았다.

동부에서 서부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주’를 목적으로 한 일회성 이동에 그쳐 교통 물류의 수요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만, 값싼 교통수단이 확보된다면 이 같은 상황은 개선될 여지가 있었다. 정기 마차와 배, 철도를 동시에 이용해야 하는 현재의 횡단보다 단가 면에서 반 이하로 떨어진다면 이용객의 증가는 기대할 만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증기선일까?’

메리는 발을 살짝 들어 선착장에 모여 있는 인파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 조금만 더 컸다면 배를 제대로 볼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내들을 내려다볼 정도의 키가 되지 못했다.

메리가 몇 번이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강 위를 바라보는 동안, 거대한 배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선착장으로 다가왔다. 그 배는 새롭게 취역하여 콜 강의 수상 운항에 투입된 기범선, 웨인 호였다.

메리가 신대륙을 떠날 당시만 해도 증기선은 이곳에 모습조차 비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문명의 파도는 신대륙까지 넘어왔다. 증기선은 변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저기 자리 좀 내주시겠어요?”

메리는 도저히 배가 보이지 않자 남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경호를 맡은 무인들은 그녀가 자꾸 인파 사이로 파고드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

메리는 몇 명의 남자들을 제치고 겨우 배를 볼 수 있는 공간까지 나왔다. 그리고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거대한 기범선을 보았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외륜을 장착한 기범선은 검은 연기를 짙게 토해내며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범선 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탓에 돛과 마스트가 남아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온 배들과 다른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노를 젓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는 배. 물살조차 자유자재로 거스를 수 있는 그 문명의 이기 앞에 그녀는 잠시 압도당했다.

“아.”

그녀가 감탄사를 내는 동안, 서역 사내들 사이를 비집고 따라온 무인들도 동작을 멈추었다. 전날 마주한 동방 원정군의 기범선 네메시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그들은 침부터 삼켰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배는 군함이 아닌 민간 선박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서역과 동양 사이에 벌어진 힘의 격차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승도가 기를 쓰고 서역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서역으로부터 강주를 지키기 위해 기물들을 들여온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이 순간에는 그런 생각조차 싹 사라졌다. 서역 기물의 도입은 호신이 아니라,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결단이었다.

기범선 웨인 호는 모두 700명이 넘는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대형 선박이었다. 강상 운항에 적합하도록 적재 한도를 낮추고, 배의 폭을 좁힌 까닭에 승객 개개인에게 할당된 공간은 상당히 좁았다.

그래도 범선과 비교할 수 없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어 메리는 기범선에 놀라는 부분이 많았다.

첫째는 24시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범선은 선체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진 까닭에 풍랑이 거세지면 주방의 불을 꺼버려 찬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범선은 석탄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까닭에 배 내부의 상당 부분을 철제로 만들어 두었다. 배의 주방도 철제로 이루어져 날씨에 상관없이 더운 식사를 제공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배의 속도였다. 범선과 달리 증기기관까지 동력으로 사용하는 까닭에 기범선의 평균 속도는 강상에서는 범선보다 훨씬 빨랐다. 바람을 잘 탈 때야 범선 쪽이 빨랐지만, 바람이 언제나 부는 것은 아니었다.

세 번째는 배의 안정성이었다. 무거운 기관부가 배의 하층부에 위치한 까닭에 범선보다 전복될 가능성이 낮았다. 해상에서 전복 사고를 많이 겪는 범선과 비교하면 이 점은 단연 강점이라 할 만했다.

네 번째는 화장실이었다. 말하기도 민망한 이야기지만 범선의 화장실은 조잡하다 못해 조악하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랐다.

화장실을 손님을 맞는 접대 공간으로도 쓸 정도로 크고 널찍하게 사용하던 문화를 가진 동방과 비교하면 참담할 정도였다.

그래서 여성들은 선박 항해를 매우 꺼렸다. 정숙한 레이디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불결하고’, ‘천박한’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연합왕국에서는 배를 타고 식민 제국까지 온 여성들을 신분적으로는 상당히 떨어지는 존재로 인식했다. 실제로도 하층민 출신의 여성들이 절대 다수였으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기범선은 그런 문제에서는 다소 나아진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배 갑판에 구멍 하나 뚫어놓고 칸막이를 둘러친 다음 화장실이라고 부르는 범선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에 타봤던 배보다는 좋은 것 같습니다.”

“그건 범선이고 이건 기범선이니까요. 앞으로 증기선이 나오면 더 좋아지겠죠.”

메리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여겼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수록 인간의 편의성은 증가하고 있었다. 그 진보는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전 시대에는 꿈도 꾸지 못할 혜택들을 가져오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건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신문입니다.”

무인은 배에 타기 전에 구해온 신문 하나를 건넸다. 꼬부라진 말로 반복하여 신문을 외운 다음, 어렵게 사온 것이다.

메리는 식당 칸에 털썩 앉아 옥수수와 감자를 곁들인 수프를 스푼으로 대충 떠넘기며 글자를 훑었다.

그녀가 찾으려는 내용은 신대륙 주파 과정에서 마주한 원주민들에 대한 기사였다. 그녀는 몇 개의 면을 뒤진 끝에야 자신이 원하던 내용을 찾았다.

‘하얀 황소.’

기사에 나온 하얀 황소는 다부진 체격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에게 기자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입니까? 가진 것도 없고, 이길 수도 없는데.”

“당신들이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우리는 겨울을 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는 약을 주었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사냥터를 나누어 주었지요. 우리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당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약하다고. 약하니까 계속해서 양보하는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한없이 타협하고 양보하는 자세로 일관한 결과, 우리는 조상의 땅을 빼앗기고 계속 서쪽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을 상대로 무기를 들지 않고 물러섰지요.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신들에게 내줄 땅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보할 것이 없는데 양보를 강요당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이대로 전쟁을 강행한다면 당신들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사라질 바에 무기라도 드는 편이 낫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운이 좋다면 당신들에게 교훈을 남겨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얀 황소의 인터뷰 내용을 훑던 메리는 기사 끝부분에서 기자의 이름을 찾았다.

세르게이.

그녀는 기자의 이름을 기억하고는 신문지를 곱게 접었다. 이 기자를 접촉 창구로 삼는다면 하얀 황소와 접점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원주민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무인들도 있었고, 동방 기사단의 역사에서 얻은 대화의 단초도 있었다.

말만 잘 풀어낸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북방의 강대국 루시는 예로부터 신의 영토를 넘보았다. 그들은 기나긴 세월 동안 부동항을 찾아 동쪽으로 나아왔다. 하지만 언제나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여름철에만 쓸 수 있는 항구밖에 없었다.

연합왕국이 해운업을 독식하고 그 세를 전 세계에 뻗치며 번영하는 꼴을 보면서도 항구 하나가 없어 그 이익에 숟가락을 얹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호기가 찾아왔다. 아니, 호기라고 표현하면 부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진작부터 쇠퇴하고 있었던 남방의 대국, 신의 허상이 ‘전쟁’으로 폭로되었다고 해야 정확했다.

지난 수백 년간 거대한 대국 신의 압도적인 국력을 걱정하여 남방 진출을 접고 있던 루시였지만, 상대가 종이 호랑이라는 것을 안 시점부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인사 또한 그런 변화를 조장했다. 루시의 중앙 정계에서 좌천된 알렉산드르 백작이 동 시비르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르는 야심이 큰 사내로 제국의 수상 자리를 노리는 자였다. 파벌 다툼에 밀려 한직이나 다름없는 동 시비르의 총독으로 밀려와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신의 쇠락은 절호의 호기처럼 비쳤다.

잘만 한다면 중앙 정계로 돌아갈 기회가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아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도를 펼쳐놓고 남쪽 땅을 노려보았다.

“신의 국력은 강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됩니다만, 남하를 고려하기엔 우리 측 준비가 충분치 않습니다. 특히 우시리 강 유역은 현재 역량으로 무리라고 봐야 합니다.”

백작의 보좌관으로 정무를 보좌하는 레이놉스키 남작이 넓은 지도 위로 손가락을 쿡 누르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신과 루시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우시리 강에 멈추어 있었다.

이 강을 경계로 농업 한계선이 구분되어 루시는 언제나 강 남쪽으로 진출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 이쪽의 존재를 어필하려면 그 땅을 얻어내야 하네.”

총독은 호피 가죽으로 장식된 의자에 몸을 묻으며 말을 받았다. 보좌관이 꺼낸 말은 이미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동 시비르의 루시 군대는 아직 그 수가 많지 않았다. 다 합쳐봐야 도합 5천 내외. 서 시비르라면 몰라도 동 시비르에서 신과 한판 대결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시면 신의 전력 투입 한계를 감안해 ‘대군’이 몰려오기 힘든 지역을 골라 보겠습니다.”

동 시비르에서 쓸 수 있는 전력이 만 단위였다면 신중해질 필요가 없었지만, 기천 단위의 군대를 가지고 전면전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차피 신도 이 지역에선 대군을 운용하기 어려운 입장이니 그렇게 신중해질 필요가 있을까? 연합왕국 친구들은 30배도 가볍게 물리친 모양이던데.”

총독은 입맛을 다시며 연합왕국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정예로운 붉은 코트와 루시 군대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남쪽에 동원된 신의 군대는 기강도 약하다고 봐야 할 테니까요. 반면 이쪽에 있는 신의 군대는 제국 내에서도 정강한 전력이 틀림없습니다. 몇 십 년 전의 국경 충돌에서도 증명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좌관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제국 북방군은 이빨이 완전히 나가지 않은 늙은 호랑이였다. 제국 전통의 정예 부대 태반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자네 생각으론 우리가 아직 열세라는 건가?”

“국지전 이상은 무리라 여겨집니다. 우시리 강으로 남하를 고려하신다면 우선 보루를 쌓아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백 년 전처럼 말입니다.”

“알비잔 요새 말이군.”

총독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도 우시리 강을 따라 남하하기 위한 첫 단계로 강 남안에 요새를 쌓고 군대를 주둔시킨 적이 있었다.

신의 보급 차단을 막기 위해 강에 나룻배까지 만드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여 교두보를 다졌지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단시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신의 반격 때문이었다. 루시에서는 이 사건을 굴욕으로 간주했지만, 지금까지 설욕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정된 병력과 불리한 입지 때문이다.

“전면전을 피하면서 남하하려면 결국 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쪽 병력이 현저히 부족하니까요.”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보루를 쌓아 남하를 고려한다면 어떤 방식이 좋겠나?”

내놓은 타협안이 받아들여지자 보좌관은 설명을 이었다.

“강에 소형 포함을 띄워 화력을 보강하고, 강변을 따라 소규모 보루를 연속으로 짓는 편이 유리합니다.”

“적에게 보루가 각개 격파되는 위험이 있지 않을까.”

총독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우로페에서는 그런 방식의 전략은 거의 선호하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에우로페가 아니었다.

“화력의 우세만 보장된다면 각개 격파의 위험성은 낮습니다. 도리어 한 지점에 군대를 집중시키면 긴 수상 보급로 자체를 적의 공격에 노출시켜 알비잔의 실패를 반복할 겁니다.”

“그 말도 일리는 있군. 하지만 진지 구축에 드는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네.”

총독은 건축 기간 문제를 지적했다. 보루를 짓는 와중에 신이 반격을 감행하면 한 군데 보루를 짓는 것보다 위험 부담이 배로 컸다.

“뇌물을 써서 신의 대응을 늦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뇌물이라.”

에우로페에서는 뇌물을 통해 상대를 매수하는 일을 ‘오리엔트’적인 행위라 하여 경멸을 표시했다. 특히 고귀한 귀족 태생들은 그런 경향이 강했다.

“뇌물을 쓰지 않는다면 보루를 세우는 전략은 불가능합니다.”

그 말에 총독은 눈썹을 꿈틀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좋아. 우시리 장군 휘하의 지휘관들에게 금, 은, 모피. 먹일 수 있는 것은 다 퍼먹이게. 보루를 충분히 다질 때까지 놈들이 군말 한마디 할 수 없도록.”

보좌관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자 알렉산드르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손바닥으로 꽉 눌러 움켜쥐었다.

‘야만인들을 제물로 삼아 상트페테르로 돌아간다. 화려한 전공을 가지고.’

야망을 위한 제물, 출세를 위한 징검다리가 그의 코앞에 있었다.

***

루브르망 호는 2주일의 항해 끝에 뭍에 도착했다.

보통의 통상적인 항해라면 이보다 짧은 시간이 소요되었겠지만, 선원 상당수가 경험이 없는 신국 사내들인 데다 태풍까지 만난 탓에 별수 없었다.

“육지다!”

높다란 활대 위에 올라 망을 보던 사내가 고함을 치자 삶은 배추처럼 늘어져 있던 선원들의 눈에 활력이 들어찼다. 그의 말대로 그들의 눈앞에는 곧 희미한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목적지인 연합왕국 령 동 힌디아 제도에 도착한 것이다.

승도는 뱃전이 어수선해지자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심한 뱃멀미로 앓아누운 아내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선실 문을 열고 나섰다.

고용주를 본 조르주가 경쾌한 인사말을 던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 대인.”

“좋은 아침입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져서 일어났는데, 무슨 일입니까?”

“최초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승도는 얼른 뱃전으로 달려갔다. 동 힌디아는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상향처럼 남은 곳이었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한 번도 올 수 없었던 곳. 에우로페에는 그 이름만 알려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이곳이 에우로페 인들에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향신료 때문이다. 향신료는 음식의 보관성을 높이고, 느끼함을 없애주는 역할을 맡아 오래 전부터 에우로페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식료품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처럼 대접받다 보니 그 수요는 매우 컸다. 하지만 공급이 달리고 워낙 먼 곳에서 가져오다 보니 그 값은 같은 무게의 금에 비견될 정도로 비쌌다.

그러다 보니 에우로페 인들은 오래 전부터 향신료 재배지 그 자체를 손에 넣기를 원했다. 그 꿈을 이룬 나라가 바로 로우랜드 공화국과 연합왕국이었다.

로망스 역시 이 향신료 재배지를 탐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도 이 막대한 부의 원천을 손에 넣고 싶어 했고, 그 일환으로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었다.

승도 역시 이곳을 탐냈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이야기로만 들었지 눈으로 결코 볼 수 없었던 전설의 땅. 그 땅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

승도는 어렴풋이 다가오는 녹색 밀림으로 가득 찬 땅을 보며 침을 삼켰다.

이질적인 풍경이었지만 향신료 재배가 이루어지는 땅이라고 생각하니 군침이 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은 처음이십니까?”

천천히 뒤를 따라온 조르주가 묻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어본 곳입니다.”

“이야기라고 하시면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낙원 말입니까?”

“지상낙원이란 얘기는 모르겠지만,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은 들어봤습니다.”

조르주의 농담에 승도는 웃으며 말했다.

“에우로페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지상낙원이란 말도 맞았습지요. 우리가 오기 전엔 하루 20시간 노동이란 말은 없었으니까요.”

“20시간 노동이라니요?”

승도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이 20시간 노동을 할 수 있다는 말 자체에 어이가 없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쉴 때는 쉬어야 하는 존재다. 20시간 노동이면 잠만 자고 숨 쉴 틈도 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곳을 지나는 에우로페 사람들에겐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로우랜드 공화국이 통치하던 시절부터 이곳 원주민들은 하루 20시간 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대규모 항쟁도 일어났지만, 뭐 그뿐입지요.”

조르주는 혀를 끌끌 찼다. 로망스라고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나라인 것은 아니다. 하나 법조문에 천부인권을 명시할 정도로 형식상의 인권은 보장한다.

그에 반해 이곳은 형식은 고사하고 인간을 가축으로 대우하는 지옥이었다.

“지금은 연합왕국이 통치하지 않습니까?”

“연합왕국이 통치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보다 세련된 통치라고 해야 할까요. 일하는 만큼 먹을 것을 주니, 원주민들이 알아서 20시간씩 일을 할 수밖에요. 굶어 죽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조르주의 말처럼 연합왕국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로우랜드 공화국의 그것보다는 세련된 형태였다. 그들은 억지로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도록 밀림에 불을 지르고 야생동물들을 멸종시켰을 뿐이다.

조르주와 씁쓸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는 동 힌디아 최대의 무역항 자말로 성큼 다가섰다. 자말은 중계항으로서의 성격도 가진 탓에 수백 척의 배들로 붐비고 있었다.

승도는 배가 포구에 닿자 선실로 가 반은비를 깨웠다. 그녀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기지개를 쭉 폈다.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선상 생활에 피로를 느낄 만도 했지만, 그녀는 승도를 보고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승도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갑판을 가로질렀다.

예로부터 범선에는 여자를 태우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성욕은 늘 금기를 이기게 마련이라 제 정부나 창녀를 배에 몰래 숨기는 자들은 있어 왔다.

그래서 승도가 배에 반은비를 태운 것에 대해 언짢은 시선을 가진 자들은 있었어도 드러내놓고 불만을 품는 자들은 없었다.

승도는 등에 날아오는 시선들을 느끼며 아내의 손을 잡고 그녀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줄사다리를 쥐고 내려올 때 치맛자락을 밟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다 보니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내려오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겨우 줄사다리를 내려오자 보트에서 기다리던 서역인들이 하품을 하다 말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항구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배들이 많아 작은 보트 편으로 항구에 들어가야 했다.

승도는 자신들의 보트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배들을 일견하며 코를 가볍게 풀었다.

그때 반은비가 손가락으로 배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배에 여자가 타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승도도 고개를 들었다. 범선에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여자를 태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태우더라도 남장을 시키거나 물건들 사이에 숨겨서 태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범선에도 여자를 태우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승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첫 하선 팀에 속한 루이가 말을 받았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닙니다만, 이곳 동 힌디아에서는 관습적으로 허용됩니다.”

“어째서입니까?”

“이곳의 문화 때문입니다.”

루이는 가볍게 설명을 붙였다.

이곳은 ‘현지처’라는 독특한 결혼 풍습이 있어 먼 에우로페에서 온 서역 남성과 현지 여성의 결혼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때 현지 여성은 자신의 재산과 남편의 재산을 함께 관리하며 ‘서역인’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곤 했다.

그래서 이들 여성들이 남편의 대리인으로서 배를 타고 다니는 일은 상당히 흔한 일에 속했다. 향신료부터 금, 은 무역, 사탕수수와 사탕무 거래에 이르기까지 이들 여성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현지 유력자들이나 남성들이 서역인과의 마찰을 꺼려 뒤로 빠지는 상황이 한몫 차지했다. 서역 남성들이 현지의 무역 네트워크를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물론 서역인 중에 현지 무역 네트워크에 능통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경력을 가진 자라면 보다 많은 이윤이 나는 동방 무역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설령 이해도가 높더라도 토착인 간에 이루어지는 이 네트워크에 끼어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루이의 설명을 들은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배를 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군요. 그럼 저 여자들은 모두 일종의 상인으로 볼 수 있는 셈입니까?”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독립된 상인은 아닙니다.”

루이는 설명을 덧붙였다.

서역 남성과 결혼한 현지 여성들은 자신과 남편의 재산을 굴려 부를 쌓았지만, 그 부에 대한 소유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지의 관습법에서는 여성들의 재산권이 인정되었지만, 연합왕국은 그녀들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왕국의 법률이 통치 말단에까지 미치지 않아 관습법이 존중받는 영역이 있었지만, 작금에 와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때문에 남편들이 귀국을 하며 재산을 홀랑 챙겨갈 때는 알거지가 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먹고살기 위해, 혹은 서역인과의 정략혼을 통해 가문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이들의 생각 때문에 이 현지처 제도는 계속해서 온존되어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 여성들은 돈을 벌어다주는 기계나 다름없군요.”

승도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은 점은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만 돌아간다면 저 여자들이 저렇게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진 않을 겁니다. 가끔 행운이 따라 주니까요.”

“행운?”

“풍토병 말입니다.”

루이의 말처럼 풍토병은 에우로페를 떠나온 서역인들에게 무서운 위협이었다. 많게는 현지에 머무는 에우로페 인의 절반이 풍토병에 목숨을 내놓곤 했다.

덕분에 귀국할 남편이 사라진 현지처들은 남편의 현지 재산까지 모두 챙길 기회를 얻곤 했다.

그 같은 행운을 기대한다는 말에 승도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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