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야만 (2)
동 힌디아 제도는 세계 최대의 향료 무역 산지였다. 후추와 정향을 비롯한 향신료의 8할 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으니, 이곳을 장악하면 세계 향신료 가격을 뜻대로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전임 연합왕국 총독 세실이 향신료 가격을 조절한답시고 향신료 밭에 불을 질러 향신료 가격을 20배나 폭등시킨 일이 있었다.
그 정도로 동 힌디아를 장악한 자의 독점적 지위가 막강하다 보니 이곳을 탐내는 나라는 무척 많았다. 숱한 열강의 쟁탈 끝에 최종적으로 이 땅을 손에 넣은 나라가 바로 연합왕국이었다.
왕국은 이곳을 손에 넣고는 타국의 공격 시도를 막기 위해 자말을 포함한 여섯 개의 주요 항구에 대규모 해군 기지를 세웠다.
그것도 모자라 3만이 넘는 정규군을 두었는데, 이는 외부 식민 제국에 대한 주둔으로는 대단한 규모였다.
왕국의 왕관이라 불리는 힌디아 대륙에 상주시킨 회사 군대가 7만에 못 미치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규모라 할 수 있었다.
왕국이 막대한 병력을 주둔시켜 ‘안정성’을 공고히 하자 왕국 본토에서도 무수한 이주민들이 이 땅으로 건너왔다. 대부분이 향신료 무역에 발을 담가보려는 모험가들이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건 뜨내기들뿐이군요.”
승도는 발 디딜 틈도 없는 항구 거리를 걸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항해 경험이 있거나 부가 있는 자들이라면 차림새부터가 다를 테지만, 눈에 보이는 자들은 모두 그런 태가 나지 않았다.
“자말이 원래 그런 곳입니다.”
루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차에 반은비가 팔을 잡았다. 인파가 붐비다 보니 떨어지는 것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승도는 그녀의 팔을 잡고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가 그녀의 입장이 되어도 불안할 만했다. 낯설고 물선 곳에 아녀자의 몸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녀는 메리처럼 강심장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오승도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승도는 그녀의 귀에 속삭여 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역 상인들로 가득 찬 항구 거리를 지나자 현지인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대부분 과일을 팔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승도는 낯선 과일 몇 개를 발견하고는 루이에게 그것을 아냐고 물었다. 몇 번 항해를 해본 루이는 그것이 맛이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용과를 이리저리 돌려본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맛이 없을 것 같은데, 이게 정말 맛있습니까?”
용과(龍果)라고 불리는 드래곤 프루츠는 붉은 표피 아래에 하얀 과육을 숨긴 과일이다. 선상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는 서역 사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음식의 향을 돋우어 주는 별과(스타 프루츠)와 더불어 열대 지방의 보석이라 불린다.
“마음에 드시지 않다면 저것도 괜찮습니다.”
그가 가리킨 과일은 동그란 공처럼 생겼다. 강주에서 그것을 몇 번 구경해본 승도는 반은비를 불렀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승도는 저것을 먹어보자고 말했다.
반은비는 한참 망설이다 맛이나 보자고 했다. 낯선 것에 대해 쉽게 입을 대지 않는 습관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대답이었다.
그녀가 동의하자 승도는 현지 상인에게 야자를 달라고 말했다. 상인은 능숙하게 열매의 꼭지를 따더니 그것을 내밀었다.
“이건 마시는 겁니까?”
“열매의 과육도 먹지만 대체로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승도는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상인이 건넨 야자를 입에 댔다.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자 청량한 감각이 확 번졌다. 그 상쾌한 기분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맛을 본 열매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승도는 자말의 시장을 둘러보고 배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가능하면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낯선 곳에 온 아내를 배려하려는 생각도 있어서였다.
편히 쉴 수 있는 숙소는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승도가 배로 돌아가기 위해 도시의 거리를 걷는데, 한쪽에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별안간 서역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여자의 머리를 홱 잡아채고는 몽둥이로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두들겨 대었다. 그 모습을 본 승도가 놀라 앞으로 나서려 하자 루이가 그를 제지했다.
“이곳에서는 엄격한 신분제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크게 제1계급인 에우로페 태생의 백인, 제2계급인 현지 태생의 백인, 제3계급인 혼혈, 제4계급인 현지 유력자, 제5계급인 현지 일반인으로 나눕니다. 그 공고한 질서 하에서는 상위 계급이 하위 계급에 대해 폭거를 부리는 데 대해 상관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이는 현지인들도 인정한 질서라 개입하셔도 손해만 보실 겁니다.”
루이는 일종의 카스트 제도에 대해 말했다. 근대 사회에서 잘산다는 자들이 만들어낸 야만적인 사회의 단면이다.
적어도 그런 야만적인 세상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승도로서는 경악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레이디에 대한 예절’이며 기사도를 운운하던 서역인들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승도는 루이의 경고를 의식하고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개인의 몸이라면 한번 만용을 부려볼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지켜야 할 아내가 있었다.
“개 같은 년. 한번만 더 내 돈을 가지고 수작질을 부리면 목을 비틀어 주겠다. 이달 말까지 시간 준다. 그 안에 손해 본 돈 다 채워놔.”
서역 사내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고는 몸을 홱 돌려 사라졌다. 정신없이 두드려 맞아 축 늘어져 있던 여자는 그제야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피멍이 든 입술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것을 본 현지인 몇몇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승도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이는 그 옆에 선 채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저 여자 정도면 나쁘지 않은 삶을 사는 겁니다. 서역인과 얽힐 정도라면 이 사회에서 상위 몇 %에 드는 여성이라는 의미이니까요. 현지처를 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승도는 루이의 말을 들으며 저절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한 사회의 상류층이라 부를 만한 이들조차 서역인들의 앞에서는 노예나 개돼지 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전생이라면 몰라도 현생에서는 그 역시 백인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 하물며 그의 가족들 역시 백인이 아니다.
강주가 서역인들의 발아래 놓인다면 저 풍경이 가족의 미래가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만 갑시다.”
승도는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기분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승도가 서역 행에서 마주한 근대의 야만적인 첫 단면이었다.
***
연합왕국의 식민 통치가 남긴 단상은 승도에게 많은 생각을 들게 하였다.
백인을 정점으로 구축된 정교한 카스트 제도는 ‘자유’와 ‘평등’을 이념으로 삼아 혁명을 일으켰던 그에게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였다.
“야만인과 문명인의 차이는 의복 하나에 불과하다더니. 그 말이 틀리지도 않아.”
승도는 쓰게 웃으며 젓가락을 쥐었다. 오늘 자말에서 가져온 신선한 생선과 양고기가 식탁에 오른 덕에 맛없는 식사 대신 그럭저럭 구색을 맞춘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반은비가 반색하며 젓가락으로 조리된 생선의 살점을 뜯어내다 승도에게 말했다.
“아까 도시를 둘러보고 표정이 영 좋지 않으신 것 같아요. 그 일이 마음에 걸리시나요?”
“걱정이 되어서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승도는 걱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지난날과 차이라면 차이랄 수 있었다.
그때는 약한 모습을 친인들에게도 보이지 않으려 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약점을 얼마든지 보일 수 있었다.
“홍모귀들이 야만적이라서요?”
승도는 음식을 입에 문 채로 그 말을 긍정했다. 남편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짓자 반은비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승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요. 지난날 홍모귀들이 강주로 쳐들어왔을 적에 서방님은 걱정을 하고 계셨나요. 아니면 그들과 맞서 싸우셨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승도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쥐었다. 남편이 기력을 찾자 그녀도 빙그레 웃으며 젓가락을 다시 잡았다.
“오 대인. 임검을 받을 시간입니다.”
다소 부산스런 소리에 승도가 갑판으로 올라오자 루이가 배로 다가오는 작은 보트를 가리켰다. 사자기를 펄럭이는 보트 위에는 예의 붉은 코트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아편을 단속하는 배입니까?”
“물론 그것도 단속하고 있습니다만, 주 단속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 말에 승도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뭡니까?”
“무기입니다.”
루이는 붉은 코트들이 배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원칙적으로 왕국 선적의 배가 아닌 선박이 무기를 싣고 왕국의 바다를 지나가는 것은 엄연히 불법입니다.”
“이유라도 있습니까?”
“순전히 연합왕국의 이익을 위한 방침입니다.”
루이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배에 오른 붉은 코트들을 흘낏 보고는 말소리를 낮추었다.
“왕국이 세계 주요 해상 교통로를 장악한 상태에서 무장을 금하게 만들면 당연히 타국의 선박들은 비무장 상태로 항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되면 안전 문제는 어찌 될 것이라 보십니까?”
“해적들에게 위협을 받겠지요.”
“그것이 이 정책의 존재 이유입니다.”
승도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한마디로 경쟁할 국가들의 선박에서 ‘안전’이란 요소를 빼앗아 버림으로써 자국의 강점을 어필하려는 속내가 엿보였다.
“그럼 이 배도?”
승도는 이미 무기를 실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입을 열자 루이가 걱정할 것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선적 등록은 신의 것으로 준비하였지만, 절차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아 ‘형식적’으로 이 배는 아직 ‘동방 무역 회사’의 소유로 돼 있습니다. 공식적인 선적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는 저들도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루이는 왕국이 제정한 항해 조례의 허점을 말하며 냉소를 지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왕국 선적의 선박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상, 자유롭게 바다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붉은 코트들이 뭐라고 말을 하자 조르주가 달려가 항해 일지와 물품 리스트 등을 차례로 제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승도는 기지개를 쭉 폈다. 걸릴 것이 없다면 걱정할 것도 없었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던 붉은 코트들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배에서 내렸다. 서류상으론 여전히 동방 무역 회사의 선박이기 때문이었다.
미심쩍다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척의 선박을 임검해야 하는 그들에게 배 한 척에 할애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말 그냥 가버렸군요.”
“저들이라고 열심히 일하지는 않습니다. 본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여긴 제 나라의 반대편이나 다름없는 이역만리의 타지니까요.”
승도도 그 말에 동의했다. 타국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상인들이야 논외이지만, 군인이나 공무원들이라면 그렇지 않았다.
본국의 감시도 없는 느슨한 환경 속에서 몇 년이나 지내다 보면 기강이 엄한 자들이라도 느슨해지게 마련이었다.
승도도 그렇게 변해가는 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수도 북경에서 머나먼 남방으로 파견을 나온 신의 관료들이 그랬다. 물론 신은 나라 전체가 부패하긴 했지만, 수도에서 멀리 나온 자들일수록 부패의 정도가 더 심했다. 감시가 없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권한)은 부패하게 마련이지.’
그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바로 자신이 그러했다. 공화국의 통령에서 종신 통령으로, 그리고 황제로 올라서며 비판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향유하게 된 순간 그는 타락해 버렸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의 민낯이 바로 그랬다.
임검을 마친 승도의 배는 출항 허가를 받고 자말을 나섰다. 항구 자체가 천연의 방파제를 낀 탓에 수로를 빠져나오는 일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선장을 겸한 루이가 직접 키를 잡고 배를 이끌어야 했다. 승도는 반은비와 뱃전에 선 채로 멀어져가는 자말 수로를 바라보았다.
수로는 강력한 자말 요새의 관제 하에 놓여 있어 지나가는 선박 전체가 대포의 사정권에 들어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요새의 대포가 200문이나 된다고 하니, 어지간한 함대와도 당적할 만했다.
반은비는 거대한 요새를 구경하다 승도에게 말했다.
“강주에도 저런 요새가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양이들이 쉬이 넘보지 못할 거라고 봐요.”
그녀의 말에 승도는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요새도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싸울 의지를 갖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째서요?”
그녀가 반문하자 승도는 기억을 되살렸다.
“오래전에 홍모귀들이 저만한 규모의 요새를 앞에 둔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홍모귀는 요새를 소유한 국가와 전쟁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놀랍게도 홍모귀들은 요새를 지나며 대포 한 발 맞지 않았습니다.”
“요새 지휘관이 뇌물이라도 받았나요?”
그녀의 ‘알맞은 답변’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새를 소유한 국가와 지휘관이 홍모귀들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어차피 싸울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먼저 포탄을 쏘았다가 지는 것과 맞고 지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상대의 심기를 고려하면 말입니다. 지는 것을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으면 그런 것이 떠올라 감히 대포를 쏠 수 없지요. 그래서 저런 규모의 요새도 싸울 의지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승도의 대답에 반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신은 불행하게도 전쟁 이전에 싸울 의지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졌습니다. 다시 전쟁을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번엔 잘 싸우지 않을까요?”
“이제는 상대의 강함을 알았으니, 전쟁 전에 적의 심기까지 헤아리게 될 겁니다. 싸우기가 더 어려워진 셈입니다.”
승도는 쓰게 웃으며 자말 요새의 모습을 눈에서 지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