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이색 (1)
기범선을 타고 콜 강을 가로지른 메리는 새롭게 운영되는 대륙 동부의 증기 기관차를 타고 뉴 론디니움까지 향했다.
뉴 론디니움은 신대륙 북부 전역을 통치하는 왕국의 총독부가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에취.”
증기 기관차에서 내리자마자 석탄 가루 냄새에 재채기를 한 메리는 콧물을 손수건으로 닦고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유리로 가득한 뉴 론디니움 역사의 화려한 정경 때문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이나 헤매다 출입구 방향을 찾았다.
무인들이 짐을 들고 따라오자 그녀는 귀부인들처럼 양산을 펼쳐들고 햇살이 쏟아지는 역사 바깥에 얼굴을 내밀었다.
역사 바깥으로는 손님들을 맞이하려는 마차들이 여러 대 멈추어 서 있었다. 예전이라면 항구 주변에 밀집해 있어야 할 것들이었지만, 요즘에는 역사 주변에도 여러 대씩 대기하고 있었다.
메리는 마차들을 꼼꼼히 살피다 까만 흑마들이 끄는 마차를 골랐다. 무인들을 다른 마차에 태우고 짐을 싣자 그녀는 목적지를 입에 올렸다.
“뉴 론디니움 증권 거래소로 가주세요.”
철도 채권 판매 기능까지 겸한 증권 거래소는 30년 전, 연합왕국의 대 금융 자본가 로스실트 가문의 일원이 건너와 개설한 것이 그 시초였다.
최초에는 면화와 청어, 면직물 등의 거래를 주선하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신대륙 자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거래의 성격도 완연히 달라졌다. 작금에 와서는 론디니움 증권 거래소의 성격을 많이 닮아 있었다.
신대륙 자체의 중앙은행이 있었다면 론디니움 증권 거래소 이상으로 발전했을 거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그 성장세는 가팔랐다. 철강, 철도, 조선 등 굵직한 자본 투자가 이루어지는 종목들의 주식도 거래되기 시작했으니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증권 거래소 주변은 최근 불기 시작한 대학 설립 운동의 영향으로 네 개의 거대 대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대학이라고 해봐야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 부지만 넓고 건물은 몇 동 없었다.
그래서 증권 거래소는 시내에 위치한 것치고는 주변이 매우 한적한 편이었다.
메리는 삯을 지불하고는 증권 거래소 주변을 휙휙 살폈다.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와는 모습이 여러 모로 달라져 있었다.
매끈한 사각형 구조 건물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메리가 결심을 굳히고 걸음을 옮겼다. 외관 자체는 연합왕국의 동방 무역 회사 본사 건물을 닮아 있어 특별한 인상을 주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까만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여럿 오가고 있었다. 일부는 묵직한 서류 더미를 들고 움직이는 것이 일이 바빠 보였다.
그들 사이로 투자를 의뢰하기 위해 찾아온 법조인들이며, 지역 자본가들이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리는 그들을 힐끗 보고는 철도 채권을 모집하는 창구 쪽으로 향했다.
투자 금을 수천 파운드 단위로 받는 곳이라 그곳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담당자는 커피를 마시다 자신의 앞으로 사람이 온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는 그 앞에 선 여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제퍼슨 상회요.”
그녀의 대답에 남자는 기억을 되살려 보려 했다. 제퍼슨 상회가 수천 파운드를 척척 낼 수 있을 정도의 부유한 집안인지. 하지만 그만한 거금을 낼 여력이 되진 않았다.
신대륙에서 그만한 투자가 가능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들 대부분은 남부의 목화 농사에 관심이 있었다.
“실례지만 여기 투자를 하러 오신 것이 맞으신지요? 여긴 최소 투자 단위가 4천 파운드 이상입니다.”
남자는 일부러 ‘액수’를 강조했다. 정부에서 채권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목적에서 덩치가 큰 자금만 받아들인 까닭에 소액은 받지 않았다. 어중이떠중이가 푼돈 얼마를 가져온 것이라면 받아줄 필요가 없었다.
그 말에 메리가 창구로 백지 어음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그것을 힐끗 보았다. 설마하니 수천 파운드는 되겠냐는 눈치였다. 하지만 새우 눈을 뜨고 어음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은 금세 치떠졌다.
‘마, 맙소사. 8만 파운드가 넘는 돈이라고?’
철도 채권의 초기 모집 금액 전액을 합산한 것을 상회하는 거금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이 여자가 직접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경제계 거물의 대리인으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 괴물은 동방 무역 회사에서 수만 파운드어치의 백지 어음을 간단히 끊어올 수 있을 정도의 부자가 틀림없었다. 그 정도의 백지 어음을 받아올 정도라면 수십만 파운드 단위의 거래를 하고 있어야 했다.
수십만 파운드!
말이 수십만 파운드다. 지금 신대륙에서 이루어지는 기본 인프라 투자 전체를 감당하고도 남을 액수다. 그런 액수의 거래를 하고 있는 거물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면.
남자는 메리를 새삼스런 눈으로 보았다.
“그 정도 돈이면 투자가 가능하지 않나요?”
메리는 어떠냐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충분히 가능하십니다. 설마 이 돈을 전부 철도 채권에 투자하실 생각이십니까?”
남자는 설마 하면서도 물었다. 정부가 수익을 보증한다곤 하지만 철도 운영에서 수익이 나지 않으면 나오는 이윤은 목화 사업만도 못 했다.
신대륙에는 철도보다 유망한 투자처로 각광받는 사업들이 여럿 있었다. 하나가 목화이고, 하나는 담배 재배다.
흑인 노예들을 데려다 무임금으로 부려먹으니 당연히 수익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는 사업들이었다.
왕국 본국에서 이들 품목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한 덕분에 투자를 아무리 늘려도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뜻하지 않은 기상재해만 아니라면 수익성이 반 토막 날 일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았다.
‘하긴 안전 자산으로 보자면 철도만 한 것이 없긴 하지.’
남자는 메리가 그 큰돈을 모두 철도에 투자하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목화나 담배 사업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숨어 있었다. 연합왕국 정부에 의해 반포된 ‘노예무역 금지령’과 ‘본국 보호무역 법안’이 그 문제점들이었다.
무임금이 좋다고 하지만 흑인 노예 자체가 보충이 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사양 산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일부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의 수를 늘리기 위해 강제로 짝을 지워주는 등의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국 보호무역 법안의 벽을 고려하면 문제가 많았다. 차츰 식민지의 상품들이 본국을 좀먹어 들어오는 것을 걱정한 왕국 의회에서 식민지산 상품에 대해 관세를 높였기 때문이다.
“네. 모두 투자해 주세요. 그리고 투자자의 명의는 강주양행으로 해주세요.”
‘강주양행?’
남자는 생소한 이름을 곱씹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곧 그 생소한 이름이 그녀의 투자자라는 것을 알았다.
“예. 그렇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하루 기다려 주시면 식민 성과 철도국 관계자를 모셔와 계약서를 꾸미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독점 투자가 되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이미 투자금이 상당히 들어와 최대 지분율은 75%를 넘을 수 없습니다.”
메리는 그 말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독점 투자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안전 자산을 선호하는 투자자들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해 주세요. 내일 이곳으로 방문하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묵고 계신 호텔을 알려주시면 저희가 마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메리는 남자가 내민 약식 계약서에 이름과 숙소를 기입하고 투자 예치금 조로 1천 파운드를 지불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메리는 사인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증권 거래소를 빠져나왔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신문사 기자 세르게이에 대한 것이었다.
***
신문기자 세르게이는 신대륙에서도 유명한 사내였다. 거친 사막과 산맥도 가리지 않는 불굴의 취재로 본국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의 원고는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1면에 실릴 정도였다. 메리는 신문사에 사람을 보내 세르게이와 약속을 잡고 시내 카페에서 기다렸다.
약속을 잡은 곳은 오스티아 태생의 음악가가 차린 것으로 알려진 ‘비엣’이었다. 위치도 교통이 편리한 시내 중심가에 있어 사람을 보기 좋은 장소였다.
카페 ‘비엣’의 내부는 전통 에우로페 풍을 닮아 분위기가 정갈하고 차분했다. 메리는 커피를 홀짝이며 세르게이를 기다렸다.
주변에는 중절모를 쓴 사내들이 앉아 ‘건설적인’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도 자주 나왔고, 다소 무거운 주제를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카페를 일러 ‘페니 대학’이라 부르는 격언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페니 대학이란 값싼 동전 한 닢으로도 고등교육을 귀동냥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에서 나온 별명이었다.
‘페니 대학, 페니 대학 하지만 정말 대학 교육을 들을 순 없지.’
메리는 웃으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커피를 소비하는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팔백 년 전, 십자군 전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가장 파괴적인 행위가 ‘문화’와 ‘소비’를 창조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이 인간사의 묘미이기도 했다.
커피는 전적으로 먼 이역만리 타향에서 조달해온 탓에 그 값이 매우 비쌌다.
보통의 기호품과 비교할 수 없이 비싸다 보니 대개 맛보다는 ‘과시’를 위해 소비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커피 하우스였다.
이들 커피 하우스는 ‘과시’에 돈을 쓰기에는 부가 모자란 중산층들을 위해 등장한 대중적인 ‘문화 공간’이었다. 이것이 보다 대중화된 모습을 가진 ‘카페’로 변모하는 데에는 사백 년이 필요했다.
그 변화는 시민 계급의 성장과 관료제의 정착과도 맥이 닿은 부분이었으니, 그 자체로 에우로페의 근대사를 상징한다고 해도 좋았다.
호사가들은 카페를 가리켜 ‘계몽주의의 산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카페가 자리를 잡은 후, 커피는 대중의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 덕분에 커피를 소비하는 문화는 일반화되어 ‘차’만큼이나 중요한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커피의 생산 방식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기술 혁신에 따른 물류비 절감과 판매마진의 감소, 그리고 가혹한 착취를 발판으로 한 커피 산업의 생산 효율화 정도였다.
메리는 까만 커피에 각설탕 두 개를 집어넣고는 스푼을 느긋하게 저었다.
‘하지만 커피보단 그것에 들어가는 설탕이 더 비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
메리의 생각처럼 하얀 황금이라 불리는 설탕은 커피보다 훨씬 값이 비쌌다. 그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과거 로망스의 식민 제국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로망스가 거느린 방대한 식민지 면적의 0.1%도 되지 않는 손바닥만 한 섬에서 생산된 사탕수수가 식민 제국 전체 수익의 90%를 차지한다.
상인들이 하는 말이긴 했지만 설탕을 독점할 수만 있다면 세계 제일의 거부가 되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웠다.
그녀가 커피 한 잔을 다 비우고 새로 한 잔을 주문하려는 차에 카페의 문이 열렸다.
중절모를 쓴 훤칠한 사내가 들어오더니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신문 기사에서 본 얼굴이었다. 메리는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뉴 론디니움 타임스의 세르게이입니다.”
“제퍼슨 상회의 대표 이사 겸 강주양행 대리인 메리 제퍼슨이에요.”
메리는 장갑을 벗고 악수를 나누었다. 악수는 경례와 더불어 중세부터 정착된 인사의 일부로 상대에 대해 호의를 표시하는 행위의 하나였다.
악수를 나누고 의자에 몸을 묻은 세르게이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고는 시원한 음료를 주문했다.
세르게이가 음료를 주문하는 동안, 메리는 그의 가방에서 불쑥 튀어나온 원고 하나를 보았다. 신대륙에 만연한 부패에 대한 기사 논고였다.
세르게이는 음료를 주문하다 메리가 자신의 기사에 관심을 보이자 그것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가볍게 웃었다.
“이건 제 밥줄이라서 보여드릴 순 없습니다.”
“아쉽네요.”
메리는 투덜거리면서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그녀가 달콤한 검은 황금을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세르게이는 가방을 뒤져 편지 하나를 꺼냈다.
“제게 하얀 황소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하셨지요?”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르게이는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마침 음료가 나와 잠시 말이 끊어졌다. 세르게이는 약간 차가운 기가 도는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얀 황소는 언론에 관대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이유 없이 그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백인이라면.”
세르게이는 하얀 황소의 성정에 대해 말했다. 하얀 황소는 교활하다는 평처럼 언론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관대함은 어디까지나 언론에 국한된 것일 뿐이었다. 그는 그 외의 백인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잔혹한 심판자였다.
“이유라면 있어요. 그에게도 괜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하얀 황소와 거래를 생각한다면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세르게이는 딱 잘라 말했다. 그가 백인과 거래를 하는 경우는 백인을 사냥할 총기와 탄약을 구매할 때뿐이었다.
“어떤 거래인지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하얀 황소를 매수하려는, 혹은 그들과 정부 간의 교섭 창구가 되어 주겠다는 제안이 아닌가요?”
메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럼 뭘 거래하신단 말씀이신가요?”
세르게이는 이 당돌한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미래요.”
그 말에 세르게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래라니. 그런 것을 거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세르게이의 물음에 메리는 대답 대신 커피 잔을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