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이색 (2)
동 힌디아 제도는 예로부터 무역의 요충지로 각광을 받아왔다. 무역이 활발하다는 말은 그만큼 떨어지는 떡고물도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수십 개의 토후국들이 있었을 정도이니 그 난립상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난세가 종식된 것은 초유의 열강, 연합왕국이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전임자로서 동 힌디아를 통치한 로우랜드 공화국과 비교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지고 들어온 연합왕국은 이들 토후국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식민 제국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정복이 너무나 빠른 시간에 이루어진 탓에 기존 권력의 공백을 다 채울 수 없었다.
불완전한 지배는 전통적으로 해상에 진출해온 경험이 있던 지역 주민들이 해적으로 돌변하도록 도왔다. 세계에서 해적이 가장 많은 지역이라는 악명도 그때부터 붙었다.
“세계에서 해적이 가장 많은 바다가 바로 이 앞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뱃사람들은 농담 삼아 ‘정기시’라고 부릅니다.”
“정기시라면 정기적으로 시장을 열던 도시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잘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승도는 정기시란 별명이 참으로 고약하다고 느꼈다. 정기시는 에우로페에서 매 7일 혹은 15일, 30일에 한 번 꼴로 열리는 시장을 말했다.
정기시로 지정된 도시에서만 장이 열렸는데, 그때마다 한철 장사를 노리고 몰려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이곳도 따지고 보면 한철 장사를 노리고 해적들이 몰려오니 ‘정기시’란 별명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한철 장사라고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씁쓸한 별명이군요.”
“물론 상인과 해적을 비교할 수 없으니 잘 지은 별명은 아닙니다.”
에우로페에서는 해군과 해적의 구분이 대단히 모호했다. 전시에는 해적도 정규군의 일부로 소집되어 싸웠고, 평시에는 다시 토벌의 대상이 되어 도망 다니는 모순된 풍경이 당연시되었다.
근대에 접어들어서도 그런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쟁만 발발하면 해군이 국가 공인 해적으로서 사략 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배에 있는 무장으로도 웬만한 해적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루이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해적이라고 해봐야 소형의 정크선이나 보트를 이용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커다란 범선을 타고 해적질을 하는 자들은 세 종류밖에 없었다.
에우로페 태생의 백인 해적들과 아랍 해적, 그리고 전통적으로 악명 높은 바바리 해적들 정도다.
그나마 에우로페 열강들의 세력 팽창과 더불어 급속하게 그 세가 줄어드는 추세라 범선을 타고 다니는 해적과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승도도 귀동냥으로 그 정도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안심해도 좋겠군요.”
“힌디아에서 왕국 쪽 정기 선단에 합류한다면 그때부터는 대규모 해적들이 덤벼도 소용없으니까요.”
정기 선단에 끼는 것의 이점은 승도도 잘 알았다.
전성기 세이비아 역시 막강한 선단을 구성해 신대륙의 은을 자국으로 퍼다 날랐기 때문이다.
이를 탐낸 로우랜드와 연합왕국 해적들이 무수하게 도전했지만, 뜻을 이룬 자들은 거의 없었다.
여담이긴 하지만 세이비아 왕국의 ‘무적함대’보다 더 막강했던 것이 은을 호송하던 정기 호송선단 플로테였다.
그것은 연합왕국도 다르지 않아 본국과 식민 제국 사이를 오가는 정기 선단에 막강한 호위를 붙이고 있었다.
“그럼 한숨 눈을 붙여도 되겠군요.”
“예. 대양에 들어가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루이의 대답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은비와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승도를 선실로 들여보낸 루이는 조르주와 함께 키를 잡고 악명 높은 마하트마 해협을 빠져나가는데 신경을 쏟았다. 고용주 앞에서는 편하게 얘기하긴 했지만, 아주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무장한 선원들을 3교대로 갑판에 세우고, 수상한 것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했다. 하지만 특별히 수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보이는 것은 고기를 잡는 지역 주민들의 배, 또는 과일을 팔러 오는 작은 배들이 고작이었다. 루이는 자신이 너무 과민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단함 항해를 하고 있는 입장이라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전방에 작은 배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과일을 실은 배 같은데요?”
“안 산다고 가서 손이나 흔들어주게.”
루이는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키를 잡은 조르주를 보고 부드럽게 좌현으로 조금 비켜갈 것을 지시하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놀란 루이가 고개를 돌리자 피를 뿌리며 뱃전에서 쓰러지는 사내가 보였다. 이어 갈고리가 뱃전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경험 많은 뱃사람 루이는 금세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깨달았다.
“해적이다!”
그의 외침과 갑판에서 당직 근무를 서고 있던 선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일부는 총 대신 도끼를 찾아 뛰었다. 갈고리를 끊으려면 총보다 도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해적의 습격에 대항해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몇몇은 휴식을 취하는 선원들을 깨우러 내려갔다.
최초로 배 측면에 달라붙은 해적선에서 여러 명의 해적들이 줄을 지어 올라왔다. 미리 던진 갈고리의 줄을 잡고 올라오는 자들의 움직임은 능숙했다.
선원들이 연거푸 총격을 가했지만, 보트에 구리거울을 잔뜩 달아 빛을 반사시키는 그들에게 정확한 공격을 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정확한 조준을 하기 어려운데다 아래를 겨냥할 때 명중률이 떨어지는 전장 식 소총 특유의 단점까지 겹쳐 최초의 사격은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루이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공격자들은 상당히 능숙한 해적들이 분명했다.
배 하나의 해적들에게 공격을 퍼붓는 사이, 다른 해적선들도 배 옆으로 다가왔다. 갈고리가 퍽퍽 찍히고 해적들이 연달아 배 측면으로 달라붙었다.
루이가 선원들을 독려하던 차에 승도가 선실에서 나왔다.
‘해적들인가? 생각보다 숫자가 많아.’
승도는 전장에 서본 경험이 풍부한 자답게 침착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무장은 그리 우수하지 못해. 루이의 말대로 지금의 무장으로도 상대할 만한 적이야.’
그는 해적들과 싸우는 선원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의 옆을 뛰어가던 강주 선원 몇을 불렀다.
“아래 식료품 창고에 가서 밀가루를 좀 가져오세요.”
“밀가루라니요?”
승도는 가타부타 설명을 하지 않고 가져오라고 말했다. 범선에서는 일반적으로 식료품의 보관을 위해 ‘비스킷’과 같은 완전식품을 싣곤 했다.
하지만 가끔은 선원들에게 질 좋은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밀가루를 일부 싣기도 했다.
선원들이 밀가루를 가지러 선창으로 내려간 사이, 승도는 루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갑작스런 해적의 습격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승도는 그런 그에게 자신이 지휘를 맡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루이는 다소 멍해졌다. 육상에서의 전투와 해상의 전투는 그 성격이 꽤 달랐다.
“오 대인. 해상과 육상은 전투 방식이 상이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지켜보았으니까요. 일단 장루 위로 무장한 사람을 좀 더 올려 보내주세요. 육상이든 해상이든 높은 위치를 점한 쪽이 유리한 것은 똑같습니다.”
승도는 몇 번 둘러본 것만으로 어떤 방식으로 싸우면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지 감을 잡았다.
그가 괴물인 이유는 생소한 전투 방식에도 빠르게 적응하여 제 것으로 만드는 응용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승도의 지시대로 장루 위로 저격을 맡을 자들이 기어 올라가는 동안, 밀가루를 가지러 간 선원들이 갑판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밀가루 포대를 들고 오자 그것을 줄사다리 위로 던지라고 말했다.
밀가루 포대는 그 자체로 무거운 질량을 가지는 무기였지만, 포대가 터지면서 쏟아지는 입자가 줄을 타는 자와 그 아래 보트에 있는 해적 전체의 시야를 앗아간다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다.
몇 번 밀가루 포대가 던져지자 금방이라도 뱃전까지 치고 올라올 기세였던 해적들이 그것을 얻어맞고 주춤했다.
그사이 장대로 올라간 라이플 사수들이 총격을 가하며 해적들이 갑판에 발을 딛는 것을 막았다.
“조금만 더 힘내라. 이런 사냥감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
해적 두목 아부 샤이프의 독려에 해적들이 힘을 냈다. 그의 말처럼 단함 항해를 하는 선박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 해협에 들어오는 선박의 대부분은 선단 항해를 했다.
두목의 말에 해적들은 줄에 달라붙어 배 옆으로 기어 올라갔다. 벌써 서른 명 이상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지만, 공격에 동원된 해적들의 수가 워낙 많은 터라, 이 정도 손실은 감당할 만했다.
새로운 보트들이 배 옆에 달라붙을 때마다 갈고리가 걸리고 해적들이 달라붙었다. 악착같이 저항하고 있었지만, 수적 우세를 가지고 공격하는 해적들을 감당하는 것은 쉬울 턱이 없었다.
“멍청한 놈들. 배 한 척으로 이 마하트마 해협을 지나가려 들다니.”
아부 샤이프는 운 나쁜 희생양들을 비웃으며 천천히 뱃전으로 접근하는 부하들을 보았다.
미리 준비한 거울 덕분에 배 위에서 가하는 총격에 의한 피해는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더구나 과일 파는 배로 위장해 거리를 좁힌 것이 주효하여 혹시 모를 대포의 공격도 예방했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계산대로 돌아간 셈이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술탄께 올릴 상납금도 충분히 마련할 수 있겠군요.”
아부 샤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탄이란 이 지역 토후인 마흐무드를 일컫는 말이었다.
연합왕국이 광대한 동 힌디아 전역의 주권자를 자처하긴 하지만, 실상 그 통치가 온전하게 미치는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들 식민 제국의 대부분이 그렇듯 간접 통치가 일반적이었다. 마흐무드 토후국 역시 그러한 간접 통치를 받는 집단이었다.
“아, 슐로섬 친구들이 먼저 뱃전에 올랐습니다. 이번에도 저 친구들에게 상급을 주셔야겠습니다.”
부하의 말에 아부 샤이프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봐도 슐로섬 친구들은 해적질을 위해 태어난 친구들이야.”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뱃전으로 뛰어올랐다.
***
승도는 해적들이 뱃전으로 달라붙을 때부터 대포를 생각하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쓰기 어렵다면 가까이서 쓸 수 있게 만들면 된다.
실제 해전에서 백병전 직전에 갑판을 향해 산탄을 쏘는 방식은 상당히 유용한 전투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처음부터 대포를 가져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을 가져오는 데 시간과 인원이 많이 소모되어서였다.
일단 휴식 중이던 인원들이 동원되면서 여유가 생기자 승도는 대포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무지막지한 중량을 가진 대포를 상갑판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많은 인원이 필요했지만 승도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해적들이 한 면에 집중되어 올라오는 양상이 아니야. 그랬다면 병력의 집중도가 중요하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런 것보단 압도적인 화력이 중요하지.’
승도는 손익 계산을 마쳤다. 웬만한 전장의 변수를 머릿속에 넣고 간단히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는 그에게 이 정도 ‘산수’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에우로페 출신 선원들이 대포를 가지러 내려간 사이, 승도는 강주 출신 선원들을 지휘해 해적들의 갑판 진입을 저지했다.
물론 모든 방면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선미 부분의 방어에 집중했다.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나누는 것은 그의 전술 원칙에 위배되는 짓이기도 했고, 가장 어리석은 지휘관들이 택하는 패착이기도 했다.
승도는 막 뱃전을 타고 오른 해적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권총 사격에 능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코앞에 있는 표적도 맞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발의 총성에 해적이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곤두박질쳤다. 선원들은 저마다 총과 검을 사용해 해적들을 쉬지 않고 상대했다. 일부는 부지런히 도끼로 줄을 끊으러 다녔다.
해적들은 공격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배로 올라왔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의 목숨 값은 동전에 비유될 정도로 싸고 가치가 없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몰려오는군. 이런 각오로 연합왕국과 싸웠다면 왕국도 손사래를 쳤겠어.’
승도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전쟁과 해적질은 엄연히 성격이 달랐다. 해적질은 이익이 나지만 전쟁에서 이익을 내긴 어려웠다. 특히 패배가 확실시되는 전쟁에선 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이 연합왕국을 상대로 악착같이 싸우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류사에서 강자를 상대로 독하게 싸우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해적들이 생각보다 많이 몰려왔습니다. 혹시 모르니 선실에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눈먼 총알이라도 맞으시면.”
루이가 권총을 장전하며 꺼낸 말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좁은 배 안에서 전후방을 가리는 일은 무의미했다. 갑판이 함락되면 배가 넘어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 전투는 강주에서도 겪어 보았습니다.”
승도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루이는 그제야 그가 연합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사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외견 때문에 자주 잊곤 했지만, 그는 엄연히 전장에 서본 지휘관이었다.
루이는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막 뱃전을 타고 오르던 해적이 피를 뿌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선미 부분의 방어는 그럭저럭 이루어졌지만, 방어를 거의 포기한 선수부로는 해적들이 상당히 기어 올라온 상태였다.
승도는 장루 위에 올라간 라이플 사수들을 시켜 선수부의 해적을 저격하게 했다. 개활지나 다름없는 선수부에서 저격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계속해서 총을 쏜 탓에 갑판은 짙은 화약 연기로 가득 찼다. 갑판이 혼잡스런 와중에 무거운 것을 끄는 소리와 함께 대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승도는 씩 미소를 지었다.
대포만 있다면 그에게 두려운 것은 없었다. 수만의 왕당파 반란군도 수십 문의 대포만 가지고 쫓아낸 그였다. 해적들 따위는 대포 1문으로도 위협을 할 수 있었다.
“직사로 쏩시다.”
승도의 말에 선원들이 챙겨온 포도 탄을 조심스레 대포에 쑤셔 넣었다. 그것도 모르고 해적들은 공격이 덜한 선수 쪽으로 꾸역꾸역 올라왔다. 지옥의 불구덩이로 기어 올라오는 희생양들을 바라본 승도는 냉정하게 죽음의 명령을 내렸다.
“발사하세요.”
장루에서 저격이 이루어졌지만, 워낙 뱃전을 타고 오른 해적들이 많아 선수부 쪽에선 거의 오십 명도 넘는 해적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돌격만 하면 승부는 단박에 날 것이다. 아부 샤이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능숙하게 뱃전을 뛰어넘었다.
부하들을 향해 막 명령을 내리려던 그의 눈에 ‘무서운 광경’이 펼쳐졌다.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가능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멀지 않은 선미 쪽에서 대포 하나가 그를 향해 포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 옆에서 돌격을 외치며 뛰어가려던 부하도 뒤늦게 그것을 보고 얼어붙었다.
대포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는 연합왕국 덕분에 뼈저리게 배운 그들이었다.
학습 효과가 없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터. 그들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경악성을 토했다.
“대포다!”
다음 순간 그들을 겨눈 대포가 불을 뿜었다. 거창한 포성과 함께 날아온 포도 탄은 갑판 바닥을 튕기며 폭발했다.
그 자체로도 무지막지한 산탄인데, 나무 파편까지 일으키자 그 살상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공격을 정면으로 뒤집어쓴 해적 열 명이 그 자리에서 잘 다진 고기가 되어 널브러졌고, 살아남은 자들 상당수도 나무 파편을 뒤집어써 제 전투력을 낼 수 없었다.
멀쩡한 자들도 그 참상에 얼어붙어 돌격하려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연사 속도가 느린 대포의 단점을 이용해 그사이에 거리를 좁혔어야 했다. 그들이 머뭇거린 시간 동안, 대포는 다시 포탄을 장전했다. 아부 샤이프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다.
‘공격’을 외치려는 순간, 그의 머리를 향해 포도 탄이 날아왔다. 포탄은 두개골과 충돌한 순간 폭발을 일으켰다.
수십 척의 상선을 털며 마하트마 해협에서 나름 악명을 떨쳤던 해적, 아부 샤이프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포도 탄이 자탄을 쏟아내며 다시 한 번 제 존재감을 드러내자 해적들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지휘관은 죽었고, 대포알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장루의 저격수들까지 생각하면 배를 장악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누구보다 손익 계산에 빠른 해적들은 승산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하자 하나둘 바다로 뛰어내렸다.
줄을 잡고 오르던 자들도 허겁지겁 제 보트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해적들을 물리친 승도는 시체가 즐비하게 깔린 갑판 위를 둘러보았다. 피해는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해적의 습격은 그에게 새삼 해상의 위협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태풍, 전염병, 그리고 해적.
바다를 떠도는 뱃사람들을 위협하는 세 가지 재앙.
머리로 아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루이는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는 고용주의 옆에 선 채로 입맛을 다셨다.
“이자들은 정말 부나방처럼 달려들었습니다. 해적이 원래 이런 것입니까?”
“마하트마 해협의 해적들은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제 한 목숨도 아깝지 않게 여기는 풍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익만 난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왕국에서 이런 실정을 안다면 이곳에 배를 가져다 놓았을 텐데,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군요.”
“왕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은 일종의 필요악입니다. 이들이 있기에 동방 수역에 대한 왕국의 영향력이 확고해지니까요. 어차피 왕국 선단에는 해적도 손을 대지 못하니, 이들을 토벌할 이유도 없지요.”
이를테면 정치적, 경제적 이유에서 내버려 둔다는 말이다.
승도도 정치를 해보았기에 그런 추악한 속성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서방님.”
총성이 그친 것을 알고 선실에서 나온 반은비가 승도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몸을 살피며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난 괜찮습니다. 걱정하셨습니까?”
“당연히 걱정할 수밖에 없지요. 총성이 들리는데 걱정하지 않을 아녀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녀가 조금 성난 음성을 내비쳤다. 아무래도 안전한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나와 손수 지휘를 한 그에 대한 불만이 서려 있는 모양이었다.
“으음.”
승도는 헛기침을 하고는 아내의 시선을 피했다. 수백 해적의 습격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도 아내의 잔소리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사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