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게임 (1)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나라, 연합왕국은 그만큼 많은 적을 가지고 있었다. 잠재적으로 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에우로페의 열강들로부터 미미하기 그지없는 야만인 부족들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와 종류가 다양한 적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적을 고르라고 한다면 광대한 힌디아 변경에 도사린 호전적인 야만인 부족들을 들 수 있었다.
이들을 관찰한 연합왕국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나 문화면에서 여전히 석기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복잡한 사회를 이루어본 경험이 없는 탓에 자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와 관계를 맺는 것에 있어서도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익에 따라 협정은 아무 명분 없이 무시되기 일쑤였고, 어제 환영한 이웃을 오늘에 와서는 이유 없이 죽이기도 했다. 그들 나름의 생활 방식이라곤 하지만 에우로페 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아무튼 이 ‘골치 아픈’ 야만인들 때문에 왕국은 불필요한 군사비를 지출하며 광대한 변경을 지켜야 했다.
이들의 성가신 준동을 막기 위한 왕국의 군사 행동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실효성 있는 결과를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야만족에게 타격을 주고 왕국 군이 물러나면, 다음 해에 식민 제국의 변경을 재차 교란하곤 했던 것이다.
“올해도 지긋지긋한 전쟁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붉은 코트를 입은 장교의 말에 남자가 입에 문 파이프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그는 호박색 눈으로 높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쓸어보고는 담뱃재를 톡톡 털어낸 다음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올해 나이 40세. 식민 제국의 변경에서 제국주의의 첨병에 서온 남자, 키릴 공작은 지긋지긋하게 반복한 이 변경의 전쟁에 대해 이제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했다. 자그마치 이십 년을 싸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올해뿐만이 아니지. 왕국이 이곳에서 철퇴하는 그날까지 전쟁은 계속될 걸세.”
키릴은 뿌옇게 흘러나오는 담배 연기 너머로 아련히 보이는 산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너머에는 왕국의 잠재적 라이벌, 루시 제국의 영토가 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Endless War)이란 말씀입니까?”
“냉소적인 이야기지만 그럴 걸세. 저들 야만족들은 누구의 지배를 받을 자들이 아니니까. 그리고 인간의 속성 자체가 그렇지 않나? 전쟁 없이는 살지 못하는 것이 곧 인간이니까.”
키릴 공작이 그 말을 받던 차에 대포 소리가 울렸다. 왕립 포병대가 지역 부족민들의 마을을 향해 대포를 쏘는 소리였다.
이 지역의 부족들은 이웃끼리도 쉴 새 없이 쟁투를 벌이는 작자들이라 마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요새를 이루고 있어 포격을 하지 않으면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강고한 마을에 보병을 그냥 투입하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당연히 연합왕국 장교들은 그런 무모한 공격을 명령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포병으로 요새를 충분히 무력화시키고 보병을 투입한다. 기본 교리대로만 해도 충분한 싸움이었고,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포병대가 천둥소리 같은 포격을 이어가는 동안, 공작의 눈이 들판에 정렬한 보병들의 전열로 옮겨갔다.
소모품으로서 잘 조련된 병사들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식민지 군대라곤 하지만 다년간의 분쟁을 거친 병사들이라 웬만한 에우로페 군대 앞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굳이 에우로페 군대와 차이를 들라고 한다면 급여 정도일 것이다. 목숨 값으로 백인의 삼분의 일도 안 되는 봉록을 받는 자들이다.
“포병대로부터 신호입니다. 포격이 끝났다고 합니다.”
키릴이 망원경을 들자 포병대 쪽에서 깃발을 부지런히 흔들며 포격 종료를 알리고 있었다. 보병을 투입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진흙과 소똥 따위로 다진 요새 벽이 아이언 볼 세례를 오래 견디는 것이 이상했다.
“좋군. 연대에 투입 명령을 내리게.”
장교는 공작의 허가가 떨어지자 능숙하게 기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연대장의 명령이 내려진 이상 주저할 것도 없었다.
곧 뿔피리 부는 소리와 함께 제34 힌디아 보병 연대가 깃발을 펄럭이며 앞으로 움직였다. 공식적으로 ‘왕국 국가’를 불러야 마땅했지만, 이교도 병사들의 종교를 고려하여 종교색이 짙은 국가는 연주되지 않았다.
대신 힌디아에서 전통적으로 ‘전쟁’을 알리는 피리 소리로 진군 신호를 대신했다.
군홧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오는 힌디아 보병들의 모습에 야만인들이 총기를 고쳐 쥐었다. 모두가 에우로페산 전장 식 라이플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거센 파도처럼 다가오는 붉은 코트들의 해일을 목격한 부족민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된 근대 군사 교육을 받은 모습이었다.
키릴 공작은 누가 총기와 운용에 필요한 훈련을 제공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왕국과 수천 마일에 걸쳐 그 영역을 다투고 있는 신흥 열강, 루시 제국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리전(代理戰)이군. 왕국을 위해 피를 흘리는 힌디아 인과 루시를 위해 왕국에 싸움을 거는 야만인의 구도. 더러운 전쟁이라고 기사를 뽑아도 할 말은 없지.’
공작이 망원경을 들고 서 있는 동안, 양측의 거리가 급속히 가까워졌다. 다음 순간, 부족민들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정확하게 통제된 사격은 아니었지만, 정확도는 꽤 높았다. 오래 전부터 총기를 도입한 자들답게 사격술 하나는 훌륭했다.
붉은 코트들의 전열 여기저기에 구멍이 생겼다. 피해가 상당히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키릴은 그 정도 피해에 동요하지 않았다.
붉은 코트가 최강인 이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힌디아 보병들은 장교의 정지 명령이 떨어지자 발을 맞추어 전열을 멈추었다. 그들이 능숙하게 총구를 겨누는 광경을 본 부족민들이 다음 사격을 준비했다.
“사격!”
장교의 외침과 동시에 힌디아 보병들의 소총이 불을 뿜었다. 정예로 이름 높은 정규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다년간의 실전 경험과 훈련으로 만들어진 군대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무자비한 일제 사격 앞에 수십 명의 부족민들이 시체로 변했다. 사격의 정확도는 엇비슷해도 사격의 집중도는 차원이 달랐다. 개개인의 역량은 집단으로서 완성된 ‘군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 차이는 몇 번의 사격이 오가는 동안 극명하게 벌어졌다. 마침내 부족민들의 방어가 흐트러지자 힌디아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총검을 쥔 보병들이 쇄도하자 부족민들도 단검 따위를 뽑아들고 덤벼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에서 비롯된 저 용맹성 하나 만큼은 경이롭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는 곧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각하. 앞으로 네 차례만 ‘청소’를 진행하면 올겨울은 조용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다분히 우리의 희망 사항 아니겠나?”
공작은 손에 들고 있던 망원경을 내렸다.
***
범선의 하루는 상당히 경직되고 지루한 맛이 있었다. 규칙적이라면 규칙적인 생활을 보장하였지만, 그 생활 어디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혹자는 범선을 일컬어 바다 위를 떠다니는 지옥이라 부르기도 했다.
물론 지휘 체계의 최상층에 위치한 이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승도는 매끈하게 잘 닦인 갑판 위를 딛고 섰다. 전날 피로 얼룩졌던 갑판 위는 선원들이 해면과 돼지기름으로 문질러 닦은 덕분에 조그만 핏자국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승도는 갑판을 한 바퀴 둘러보고 함교로 올라왔다. 함교에는 루이가 서서 항해 전반을 지휘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군요. 하지만 대양에서는 날씨가 수시로 바뀐다고 들었습니다. 혹 태풍이 불지는 않겠습니까?”
태풍. 이 일대 주민들의 말로는 사이클론이라 불리는 열대 폭풍은 범선들의 오랜 숙적이었다. 경험 많은 루이도 그것의 위험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별 걱정할 것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항로에서 태풍의 위협은 없었습니다. 굳이 걱정을 한다면 무풍지대를 만나는 정도랄까요.”
루이의 말처럼 적도와 가까운 저위도 지방에서 태풍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열대성 스콜을 만날 수는 있어도.
“태풍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넓은 대양에서 한 척의 배로 태풍과 마주치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었다. 다행히 경험 많은 루이는 그것도 염두에 둔 듯싶었다.
승도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던 차에 장루에 올라 있던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전방에 선박입니다.”
그 말에 루이와 승도가 망원경을 꺼냈다. 둘 모두 망원경을 꺼내들고 수평선 쪽을 살폈다. 인간의 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한계는 약 15km였다.
연합왕국에서 함대의 원활한 교신을 위해 배치하는 프리깃함의 간격을 15km(약 10마일) 안으로 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한참 상대 선박을 살피던 루이가 망원경을 내리며 말했다.
“포경선이군요.”
“선적은 에우로페의 그것들인데 여기까지 와서 고래를 잡는단 말입니까?”
“고래야 전 세계 바다 어디든지 있으니 지구 어디든 고래만 있다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수익이 많이 나니까요.”
포경에서 얻을 수 있는 고래 기름은 상당히 그 값이 비싼 편이었다. 수요는 많고 공급은 달리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부에서는 조각이나 건축 등을 목적으로 고래 뼈를 모으기도 하니 고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뭐든 돈이 된다고 봐야 했다.
“수익이 많이 난다라. 하지만 험한 일이겠군요. 망망대해를 돌아다니는 일이니.”
“그렇습니다. 많이 죽고 다치는 일입니다. 저들이 사냥하는 향유고래는 결코 만만한 사냥감이 아니니까요.”
인간과 향유고래의 크기 차이는 쥐와 인간의 격차에 비할 만했다. 그처럼 압도적인 동물을 상대하는 일이 안전할 리 없었다.
하지만 저들의 무모함을 승도 자신이 탓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 역시도 압도적으로 거대한 신성동맹을, 세계를 상대로 싸운 전력이 있지 않았던가. 아니, 포경선보다 더 무모했다. 적어도 저들은 고래를 쓰러트릴 무기는 확실히 쥐고 있었으니까.
승도는 고래를 쫓는 포경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망원경을 접었다.
“식사 준비하세요.”
당번이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자 각 식사 조 별로 식사 당번들이 식사를 준비하러 화덕이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식사 당번들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거의 한 시간 전에 주방으로 향하는 것이 관례였다.
식사 준비는 거창하지 않았다. 염장 고기라면 물에 담아 소금기를 빼내고, 밀가루 반죽 따위라면 손질만 조금 하여 굽는 것이 다였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식사 준비를 하기에 제시간에 식사를 준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원들이 분주하게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승도도 식사를 들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군함이었다면 사관들의 회의실 겸 식당으로 쓰였을 공간이었지만, 상선에서는 항해 계통 간부들의 식당으로 쓰였다.
승도와 반은비가 식탁에 앉자 식당의 당번을 맡은 선원 몇이 음식을 내어왔다. 미리 사적으로 준비한 식재료들이 식탁 가득 차려졌다.
상당수는 자말에서 사온 닭과 생선, 신선한 과일이었지만, 일부는 신에서 가져온 ‘꿀’ 같은 것도 있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만찬을 앞에 두고 승도는 가볍게 기도를 올린 후 젓가락을 쥐었다. 포크를 쓸 줄 알았지만, 굳이 아내만 젓가락을 쓰게 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접시에 음식을 옮겨 담자 선원들이 포도주를 내어와 잔에 따랐다. 배가 슬슬 차고 음료가 입에 들어가자 사람들의 입도 가벼워졌다.
“마하트마 해협을 지났으니, 길어도 며칠 안에 힌디아에 도달할 겁니다. 힌디아에 도착하면 왕국의 정기 선단과 합류할 수 있으니, 그때부터는 안전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루이가 항해 일정 이야기를 꺼내자 승도는 젓가락으로 집으려던 닭고기 볶음에서 손을 거두었다.
“다만 힌디아에서 얼마나 지체하느냐가 문제겠지요.”
승도는 힌디아에 일정 기간 체류할 예정이었다. 그 자신이 계획한 일의 일부를 처리하자면 힌디아에서 체재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체류하실 예정이십니까?”
“길면 몇 달도 머물 수 있을 겁니다.”
“몇 달씩이나 말입니까?”
루이는 다소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우로페로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어 하던 고용주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필요하다면 그렇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오래 체재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용병도 투자를 해둘까 합니다.”
“용병이라 하시면 힌디아에서 용병이라도 모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허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사람을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연합왕국은 자국의 통치 영역 안에서 사람을 모으는 행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이의 대답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일반인을 상대로 모은다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다른 쪽을 모은다면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다른 쪽이라고 하시면?”
“산악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승도의 대답에 루이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으로 회유가 되는 자들이라면 진즉에 연합왕국에 넘어갔을 자들이었다. 하지만 돈으로도 말로도 안 되는 자들이니 지금까지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 아니었던가.
“불가능합니다.”
“가능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단언하시는 겁니까?”
“나와 연합왕국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족 전체를 구슬려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쪽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승도는 그 부분은 어렵지 않다 여겼다. 어느 인간 사회든 주류에서 외따로 떨어진 비주류는 있게 마련이었다. 연합왕국이야 그들 전체를 회유해야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주류에서 밀려나 먹고살기 어려운 일부만 회유해도 충분했다. 이것이 식민 제국의 변경을 안정시켜야 하는 ‘양보할 수 없는 선’을 가진 연합왕국과 그의 차이였다.
승도의 대답에 루이는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지만, 그는 그 정도의 어려움이야 감수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들을 병사로 쓴다면 연합왕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보병, 고지 보병에 버금가는 강병을 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근래에 제국의 북방이 소란스럽다는 말이 있더군요.”
연합왕국 신 주재 임시 공사(아직 본국에서 정식 직함이 내려오지 않았다) 하워드는 총리대신을 예방한 자리에서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다.
왕국의 첩보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고, 루시의 남하에 대해 신이 어떤 대응책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루시의 남하에 대해 왕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다소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반혁명 전쟁 이후 연합왕국에 도전할 수 있는 국가는 루시밖에 없었다. 도전할 가능성을 가진 잠재적 라이벌을 견제하는 것은 초강대국의 당연한 ‘책무’이기도 했다.
한때 로망스에 대항해 한배를 탔던 신성 동맹의 동맹국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국제 질서란 원래 그랬다. 어제의 적이 동료가 될 수도,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판에 앉아 도의 운운하는 것이 도리어 웃긴 일이었다.
“설마요.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 정부에 먼저 보고가 들어왔을 겁니다.”
리첸은 수염을 매만지며 의뭉을 떨었다. 그가 정말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하는지, 혹은 동방 관료 특유의 ‘오리발 내밀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그저 지나가는 말로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우리 쪽에 그런 이야기가 돈다는 것만으로도 위험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공사께서는 귀국과 아국의 교섭 문제에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리첸이 내정 간섭이라는 뜻을 넌지시 내비치자 하워드는 입맛을 다셨다. 반란군이 조금만 더 기세를 올렸어도 총리대신이 뻣뻣하게 나오지 않았을 것인데, 반란이 끝나간다는 것이 아쉬워질 줄은 몰랐다.
물론 상품을 팔아먹으려면 제국의 내치가 안정되어야 하니 반란은 진압되어야 마땅했다.
‘세상일에 일장일단이 있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로군.’
공사는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건방진 홍모귀가 차를 홀짝이는 것을 실눈으로 지켜보던 리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시건방진 오랑캐 놈. 감히 어디다 대고 감 놔라 배 놔라 간섭을 하려 드는 거냐. 여긴 천조다. 오랑캐들이 주제도 모르고 주둥이를 나불거릴 나라가 아니야.’
그런 총리대신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워드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주제넘은 말씀을 드렸나 봅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귀국의 안전을 염려하여 꺼낸 말이니 노여워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다만 금후로는 이 문제에 대해 공사께서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국가 간의 일이니 만큼 서로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리첸은 명확한 선을 긋고 나섰다. 하워드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명분도 없이 내정 간섭을 한다는 빌미를 줬다간 왕국의 입지만 좁아질 뿐이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공사는 일단 일보 후퇴를 선택했다. 하지만 포기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외교는 왕국이 바라는 방향으로 관철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타협은 할 수 있어도 포기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왕국 외교의 자존심이다.
공사가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 리첸은 관저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심복들을 불렀다. 군기대신 기영을 비롯한 주요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아까 홍모귀 관료가 내게 와서 북방이 수상쩍다는 얘기를 했네. 한데, 나는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 그럼 대체 그놈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구해 들었단 말인가? 이 나라의 황부 섭정왕 겸 총리대신인 내가 듣지도 못한 이야기를.”
그가 언성을 높이자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그들도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라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는 부정부패와 모순으로 제국의 통치 기강이 해이해지며 발생한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국방에 관련된 사안인 만큼, 총리대신이 진노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도 모르는 일을 외국 관료가 듣고 알려 주었으니 더욱 그랬다.
리첸은 수하들을 한참 질책하다 대책을 물었다.
“우시리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 상세한 보고를 독촉하겠습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네. 당장 경략 대신을 내려보내야겠네.”
황제의 눈과 귀를 겸하는 흠차는 ‘천자’의 허락이 있어야 내려 보낼 수 있는 특수직이다. 권한 상으론 전권을 가진 흠차가 낫지만 새로 하나 임명해 파견하려면 시간과 절차가 꽤 걸린다.
그럴 바에 조정에서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낫다. 오랑캐들의 시선도 있지 않은가?
“경략 대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변방에 경략 대신으로 가는 것은 꺼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원자가 나올 턱이 없었다.
리첸도 자신의 심복들을 경략 대신으로 보내려는 의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
‘내 파벌이 아닌 자를 보내면 뇌물만 받아먹고 잘못된 정보를 보고할 가능성도 있지. 물론 내 파벌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만.’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려버리면 국가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받는다. 그렇다면.
“임경문이 어떨까?”
리첸이 임경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거슬리는 자이긴 하지만 뇌물을 받아먹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만큼 유용한 인사도 없었다.
“강주 관리사로 좌천시킨 그자 말입니까?”
기영은 펄쩍 뛰었다. 겨우 밀어낸 자를 경략 대신으로 부른다는 말은 곧 중앙 정계에 복귀시켜 주겠다는 말과 같았다. 조정의 관례상 경략 대신의 일을 수행하고 돌아온 자는 정계에 요직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사람이 없지 않나? 자네들을 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다른 사람은 아니 되는 것입니까?”
리첸은 그 말에 눈을 감았다. 멍청해서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 정도로 임경문의 중앙 정계 복귀가 싫다는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싫고 좋고의 문제를 벗어났다. 홍모귀 관료가 주둥이를 나불거릴 정도라면 국경에 단단히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 정도의 문제라면 ‘강직한’ 인간을 내려 보내서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무리 부정부패에 눈이 멀었다 해도 사리 판단을 못할 정도면 총리대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
리첸이 단호하게 말했다.
“임경문 외에 가감 없는 보고를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천거해보게. 단, 그 인사에 문제가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할 걸세.”
리첸이 내뱉은 한마디에 수하들이 입을 다물었다. 정치적으로 책임질 일에서는 신중해져야 했다. 정치에 영원한 우군은 없는 법이다.
이 사안이 문제가 되었을 때, 리첸에게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으려면 입을 닫고 있는 편이 신상에 좋았다.
“그럼 임경문을 북방에 경략 대신으로 보내는 일에 이견이 없는 것으로 봐도 좋겠나?”
“뜻대로 하시옵소서.”
수하들이 읍을 하자 리첸은 비로소 표정을 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