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온고지신 (1)
하얀 군복을 입은 루시의 병사들은 열과 오를 맞추어 보루를 나섰다. ‘차르의 영광’을 포함한 두 개의 보루에서 나온 병사가 모두 팔백.
숫자만 놓고 보면 신의 군대보다 열세했지만, 서역과 동방 군대의 격차를 감안하면 이쪽의 우세는 확고했다.
다만 루시의 군대는 여타 서역 군대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었다. 병사와 장교의 자질이 그리 좋지 않은 탓이다.
루시는 ‘문맹률’이 높은 농민 병사들을 병역 자원으로 애용하였다. 병사들에게 명확한 명령을 내리기 위해 ‘읽고 쓰기’ 정도는 교육시키려고 애쓰는 다른 국가들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전방에 신의 군대가 관측되었습니다. 숫자는 모두 천을 간단히 넘는 숫자입니다. 모두 기병입니다.”
“고작 천이 넘는 정도라면 할 만한 숫자군.”
루시 장교들은 상대 전력에 대해 자신감을 보였다. 보통 기병이 보병에 비해 많게는 열 배로 계산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근대 전쟁 혹은 추격전 양상에서나 나오는 셈법이다.
회전에서 기병이 밀려난 것은 이미 한 세기도 더 지난 일이었다. 중장 기병이 장궁과 석궁에 굴복한 이래, 기병 병과는 생존을 위해 진화를 거듭했다.
기동성을 높여 보기도 했고, 제한된 중량을 가슴에 집중해 방어력을 올리는 ‘흉갑 기병’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방어력을 높이고 높여도 더 이상 보병의 화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기병의 전설은 오래전에 지났다.
“피라미드 방진을 준비하라!”
장교들의 외침에 보병들이 전열을 잘게 나누었다. 적 기병이 엄습해오면 즉시 정사각형의 방진을 치기 위함이었다. 훈련이 부족한 루시의 보병들이었지만, 대 기병 전술의 기본인 피라미드 방진 정도는 숙지하고 있었다.
보병들이 전열을 재정비하자 장교들이 다시 칼을 뽑아들고 진군을 명령했다. 흰 물결이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진군을 조율할 장교들의 자질이 썩 좋지 않아 전열이 삐뚤삐뚤했지만, 전투에 아주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적 기병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입니다.”
“야만인들 주제에 정말 회전이라도 걸어볼 생각인가?”
니콜라예프는 코웃음을 쳤다. 서전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공세에 나선 입장이라지만, 저들은 굳이 전투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야전에 응한다는 것은 이쪽을 만만히 보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
“야만인들이 우리 방진을 구경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대 기병 방진도 구경하지 못한 머저리들이라면 보병을 우습게보고 덤빌 만할 테지.”
니콜라예프는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군악대가 큰 소리로 제국의 국가를 연주했다. 연합왕국의 차분한 군가와 다른, 장중한 음색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대의 치세는 영원할 것입니다. 정교회 루시의 황제시여. 이 노래는 먼 옛날 선조들께서 다 함께 큰 소리로 부르셨네. 이제는 전 루시가 다 함께 큰 소리로 이 노래를 암송하고, 그 노래와 함께 황제 폐하의 명성은 온 세상으로 우레와 같이 울려 퍼지네. 흑해로부터 시비르에 이르기까지, 우시리 강에서 네프르 강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그 노래로 화답하며 루시인의 환호가 터져 나오네. 세상의 끝까지 울려 퍼져라. 그리고 모두의 가슴속으로 울려 퍼져라, 우리의 노래여.”
흰 군복의 루시 병사들이 한마음으로 군가를 입에 담았다. 정교회의 수호자이자 수장이요, 제국의 살아 있는 신 황제에 대한 충성심에 절로 우러나온 목소리였다.
배운 것이 없는 농노 출신의 병사들에게 ‘신앙의 중심’인 황제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루시 보병들이 군가의 1절을 모두 부르자 군악대가 연주를 멈추었다. 그들의 전방으로 기병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거리는 꽤 멀었지만 기병의 접근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즉시 방진을 구축할 것을 지시했다. 병사들이 재빨리 방진을 갖추는 동안, 니콜라예프는 망원경을 들고 적의 진형을 살폈다.
적 기병은 두 개의 머리를 앞세운 쌍두진을 이루고 있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적 기병의 포진을 살피던 그가 옆에 선 장교들에게 물었다.
“적은 우리 전열을 분단할 의도가 없는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나?”
“우리 전열을 분단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 전열을 우회하여 배후로부터 기습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기병의 기동성을 살려 앞으로 치는 척하며 뒤를 흔들겠단 말인가? 동양인들치고는 괜찮은 생각이지만 피라미드 방진 앞에선 소용없지.”
니콜라예프는 냉소를 지었다. 하나하나가 완전한 요새나 다름없는 피라미드 방진에 사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깨트릴 포병이 없는 이상 도전은 무리였다. 그가 알기로 신은 방진을 위협할 만한 신형 대포를 갖고 있지 못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우리를 우회하여 요새로 달려가는 경우의 수입니다.”
“이쪽을 무시하고 보루를 친다.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지. 수비병이 최소한만 남은 셈이니, 기동성을 살려 몇 분만 공성을 한다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 입장에선 적 병력을 통째로 잡아먹을 기회가 생기니 나쁘지는 않겠지.”
니콜라예프는 적이 내놓을 전술의 선택지 모두가 이쪽에 유리한 것들뿐이라고 판단했다. 부대를 우회하여 요새를 치건, 뒤를 치건 모두 적이 한 수 뒤지고 들어가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각하. 적 기병 후방으로 새로운 물체가 관측되었습니다.”
“응?”
니콜라예프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적의 후방으로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고 하니 혹시 대포라도 가져왔을까 해서였다. 물론 무거운 대포를 쉽게 끌고 다닐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꼼꼼히 적진을 살피던 그는 그만 실소를 짓고 말았다.
“양과 소를 가져왔군. 우리 군에 바비큐 파티라도 열어줄 생각인가?”
옛 전술 중 소의 꼬리에 불을 붙여 돌격을 시키는 수법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전근대 전쟁에나 통용되는 수법이다.
“각하. 적이 머저리처럼 구는 이상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괜히 적을 과대평가한 것 같아.”
니콜라예프는 가축을 본 순간 적의 노림수를 모두 읽었다고 여겼다. 최초 ‘차르의 영광’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포진할 때만 해도 적의 지략이 상당하다고 판단했지만, 지금에 와서 그 판단은 수정되었다. 적은 동양의 표준적인 수준에 맞는 얼치기들이었다.
“보병은 다시 앞으로 진군한다. 방진을 유지하도록 주의한다. 보병 앞으로!”
장교들의 외침과 함께 흰 물결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넓은 들판을 뒤덮은 흰 보병들의 물결은 마치 순백의 설원을 연상시켰다.
‘일격에 적은 분단당하고, 아군의 제물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수만 대군을 불러 모은다고 해도 기세가 꺾인 적은 우리에게 도전할 수 없겠지.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다.’
니콜라예프는 승리를 자신했다.
***
“대인. 적 보병이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정말 그 전략으로 양이들을 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내가 병법에 밝지 못하니 이미 역사에서 실증된 방법을 쓰는 것이 옳지 않겠나?”
임경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피라미드 방진은 아문에서 오승도와 더불어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정면에서 대적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필요에 따라 생각을 짜내는 동물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면 모르되, 패인을 예상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은 수십 가지도 더 짜낼 수 있었다.
임경문은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그 앞으로는 강고한 흰 벽이 벌판을 가득 메운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벽은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기병이 계란으로 보일 정도로 단단해 보이는 ‘바위’와 같았다.
임경문은 그 강고한 벽을 바라보다 손을 들었다.
무관들은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깃발을 흔들었다. 그 신호에 따라 기병들이 미리 준비된 진형을 유지하며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기병들은 기병총 대신 전장식 라이플을 들었다. 기병총을 주 무장으로 사용한 그들에게 어울리는 무기는 아니었지만, 임경문의 작전 방침상 기병총은 이 작전에 불필요한 무기였다.
전마들은 가볍게 호흡을 하며 정해진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통상 기병의 돌격은 전열의 300m 앞에서부터 가속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말의 체력을 아끼고 돌입 직전 최고의 속도를 내기 위한 기본적인 운용 방법이었다.
말들은 점차 적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속도를 조금씩 올려갔다. 전신에 피가 돌자 근육에 비축된 에너지가 빠르게 소모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전마들이 적 보병의 방진을 앞둔 시점에서 폭발적인 가속이 시작되었다. 육중한 울림과 함께 말들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사격 준비!”
기병이 다가오자 하얀 군복의 병사들이 총탄을 밀어 넣고 총을 당겨 쥐었다.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은 이 시점에서 지레 겁먹고 달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보병이 기병의 밥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 정도로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은 아니었다. 병사들은 3m가 넘는 괴물처럼 보이는 기병들의 접근을 보면서도 제 위치를 지킨 채 할 일을 묵묵하게 해냈다.
“조준!”
장교의 명령에 병사들이 총구를 전방으로 겨누었다. 이제 결정적인 거리에서 파멸적인 사격을 퍼붓기만 하면 되었다. 장교들이 침을 삼키며 공격 시점을 보는 찰나였다.
“응?”
그들이 명령을 내리기 직전에 기병들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방진을 좌우로 우회하여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반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번 찔러볼 것이라 여겼던 장교들은 입맛을 다셨다.
기병들은 그대로 방진의 전열을 돌아 움직였다. 그것을 본 장교들은 일단 사격 명령을 내렸다.
“사격!”
일제 사격에 좌우로 갈라진 기병들 대열에서 몇 명의 기병이 낙마해 땅바닥을 굴렀다. 그들은 뒤따르던 동료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비참한 몰골로 죽었다.
기병들은 그에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무능하다고 욕을 먹긴 하지만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정예인 효기영의 기병들이다.
“효기영의 이름을 그릇되게 하지 마라. 우리는 팔기의 마지막 후예다.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군관들의 외침에 기병들이 이를 악물고 사격을 견뎠다. 조정으로부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천대받는 처지이긴 했지만, 그들은 제국 중앙군의 정예라는 자부심 하나로 국경을 지켜온 자들이었다.
그 지휘관들이 부패하고 썩었을 뿐, 그들까지 그 기상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그들이 무능했다면 루시가 우시리 강을 넘기 위해 뇌물까지 쓸 필요도 없었다.
몇 번의 사격이 이어지는 동안, 효기영의 기병들은 백 가까이 바닥을 굴렀다.
전술적 견지에서 보자면 멍청한 행위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는 계산된 손실이었다. 이 움직임 자체가 바로 임경문이 그린 전투에 필요한 행위였다.
효기영의 기병 선두가 포화를 받아가며 전열의 후미까지 도착하자 임경문이 입술을 움직였다.
“신호를. 전 기병을 하마시켜 적에게 사격을 가하도록 하라.”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수들이 깃발을 움직였다. 그것을 본 기병들은 재빨리 말을 멈추고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린 다음 전장식 라이플을 손에 들었다.
그들은 말을 방패 삼은 다음, 그 뒤에서 총탄을 장전했다.
니콜라예프는 경악했다. 적이 보여준 수법은 지난날 악명 높은 유목 국가의 칸, 아단이 구사한 것으로 악명 높은 ‘낙타진’의 변형이다.
아단은 루시와 신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은 인물이었는데, 포위만 당할 것 같으면 가축 떼를 방패로 세워 ‘천연의 엄폐물’을 만드는 전술, 일명 ‘낙타진’을 구사하곤 했다.
이를 우습게보고 덤볐다간 ‘살아 움직이는 방벽’ 뒤에서 총격을 퍼붓는 아단의 병사들에게 쓴맛을 보기 일쑤였다.
화력의 열세를 ‘살아 있는 방벽’으로 상쇄하고 우위를 만드는 ‘아단의 수법’은 피라미드 방진의 천적이나 다름없다. 방진이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엄폐물을 만들어 대항해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도리어 지금처럼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는 일방적으로 총격을 맞을 뿐이니, 밀집 대형 자체가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단의 전술입니다. 하지만 신의 머저리들이 어떻게 저런 변칙을 사용한단 말입니까?”
니콜라예프는 너무 어이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전근대의 전술’을 근대 전장에서 직접 보니 기가 막혔다. 더 기가 막히는 사실은 그 ‘전근대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루시의 장교들이 얼이 빠진 사이 신의 기병들은 말을 방패 삼아 총격을 퍼부었다. 기병총이 아닌 전장식 라이플을 사용하고 있었던 까닭에 당연히 그 명중률은 월등히 높았다.
루시 병사들은 전열을 지키라는 명령에 충실했던 까닭에 제 위치에서 총격을 퍼부었지만, 공격은 대부분 말에 명중하기 일쑤였다. 말이 죽어 넘어져도 엄폐물로서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병들이 하마하여 총격을 퍼부은 직후부터 쌍방의 교환비는 서역과 동방 군대의 ‘교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터무니없는 결과를 보였다.
이는 당연히 정상적인 교전이라 보기 어려웠다. 신의 기병들이 총기의 숙련도가 조금만 더 높았어도 교환비가 십 대 일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대론 안 돼. 병사들에게 착검 돌격을 준비시켜야겠어.”
“하지만, 각하. 착검 돌격을 하기엔 수가 한참 열세입니다.”
“그럼 이대로 전멸 당하자는 말인가?”
니콜라예프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들을 빙 둘러싼 채로 총격을 퍼붓는 적과 이대로 전투를 벌이다간 남은 것은 파멸밖에 없었다. 그의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이대로 공격을 더 받았다간 돌격을 할 전력조차 남지 않을 것이 뻔했다. 결단은 빠를수록 좋았다.
운이 좋다면 착검 돌격으로 적의 포위망에 구멍을 내고 반전의 계기를 얻을 수도 있었다. 일단 원형으로 얇고 길게 분산된 적이니만큼 병력의 집중도는 이쪽이 우위에 있었다.
“알겠습니다. 돌격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제군들, 전원 착검하라!”
“착검하라!”
장교들이 착검을 지시하는 동안, 니콜라예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서전에 값진 승리를 따내 기선을 제압하기는 고사하고 참담한 패배를 맛볼 판이니, 이 상황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