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16화 (116/425)

제116화. 온고지신 (2)

“포위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대인. 양이들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입니다.”

무관의 보고에 임경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법에 능하지 못한 그였지만 이미 역사에서 실천에 옮긴 전범(典範)을 보고 흉내 내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가 유목 민족 지도자 아단의 전술을 빌리기로 한 것은 그것 이상의 방법이 달리 없어서였다. 엄폐물을 구하기 힘든 평야를 전장으로 정한 순간부터 그는 엄폐물이란 화두를 머리에 담았다.

그 화두를 생각한 것은 오승도가 강주 전역에서 보여준 ‘전례’ 때문이다. 그는 연합왕국 보병들 앞에서 논두렁을 사용해 대항하기도 했고, 참호를 파서 엄폐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엄폐물을 이용하려 안간힘을 썼고, 그렇게 했기에 세계 최강의 붉은 코트들과 대등한 싸움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 놀라운 싸움을 바로 옆에서 똑똑히 지켜본 임경문이 ‘엄폐물’을 의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양이들의 전력은 그리 만만하지 않네. 저들을 궁지에 몰았다하여 방심해선 안 될 것일세.”

임경문은 우세를 점하고도 방심을 하려 하지 않았다. 저들 양이와 이쪽 동방 군대의 질적 격차가 얼마나 큰지 절감했기 때문이다.

루시 군대가 이류 취급을 받긴 하지만 동방 군대를 상대로 한 번의 역전승을 이루어볼 만한 저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임경문의 염려에 무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총성이 오가는 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무관이 망원경을 내렸다.

“적이 착검 돌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그냥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 같은데, 어찌 대응하면 좋겠습니까?”

“서역 군대는 경험이 풍부하고 군이 정강하여 쉬이 당할 자들이 아니니 착검 돌격이 우습진 않을 것이네. 이쪽도 그 공세를 받아칠 준비를 해야 할 터이니, 착검을 하도록 명을 전하게.”

임경문은 백병전을 벌이면 상대적으로 이쪽의 이점이 상쇄되리라는 점을 의식했다. 지금과 같은 교전만 벌인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적은 뻔히 보이는 파국을 바라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근대적인 사관 교육을 제공하는 나라의 장교와 전근대 국가의 무관이 갖는 차이는 컸다. 대부분의 인재가 범장인 현실에서 ‘패착’을 가능한 한 줄이도록 교육하는 것만으로도 군대가 무너지는 일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간다면 병졸들까지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범장이 지휘해도 천재가 지휘하는 군대와 능히 자웅을 겨루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임경문은 신의 군대가 갈 길이 멀다고 여겼지만, 주어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로서는 나라의 녹을 먹는 관료로서 주어진 것으로 싸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착검 돌격의 실행은 전투의 최종 국면에 주로 시행되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었다. 궁지에 몰렸을 때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서도 사용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신대륙 독립 전쟁 당시 신대륙 독립군을 지휘한 아브라함 장군이 자신들을 포위한 연합왕국 육군을 상대로 착검 돌격을 감행, 포위를 모면한 사례를 보면 이 같은 행위가 아주 무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시 군대 역시 그러한 요행을 기대하였다. 전술적 견지에서 보자면 그들은 내선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병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장교들이 검을 뽑아들자 병사들도 총검을 곧추세웠다. 하지만 정예롭기로 이름난 연합왕국이나 로망스 군대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전자의 군대는 장교들이 솔선수범하여 선두에 나섰지만, 루시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보병 앞으로!”

장교가 칼을 빼들고 외치자 흰 군복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새하얀 물결이 방진을 허물고 한 방향을 향해 쇄도했다.

해일과 같은 흰 물결과 제방을 연상시키는 노란 줄이 가까워졌다. 신의 병사들이 연달아 총을 발사했지만 다가오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일순 말의 시체를 뛰어넘은 보병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누런 군복들과 뒤섞였다.

총검과 총검이 부딪치고 비명이 울렸다. 체격이 크고 총검술에 능한 루시 보병들이 총검을 휘두르자 신의 병사들이 뒤로 밀렸다.

“놈들은 뼈밖에 없는 가죽부대다! 짓밟아라!”

덩치 큰 루시 보병의 총검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 그어졌다. 하지만 동료의 엄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큰 동작을 펼치는 것은 위험했다. 난전에서 눈먼 칼을 맞기란 아주 쉬웠다. 루시 보병은 총검을 내려치기도 전에 배에 총검을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시체가 겹겹이 쌓이는 와중에 루시 장교 몇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푸른 피라 불리는 귀족 장교들은 검술에 능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현 황제 이반 5세의 치세 동안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황제 개인이 ‘중세의 유물’인 기사단 놀이에 심취하여 자신을 ‘그랜드 마스터(기사단장)’라 칭하는 터라, 그 눈에 들기 위해 기사 수련을 하는 귀족들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요 20년간은 사냥과 승마를 주로 하던 귀족들의 취미도 상당히 달라져 검술과 마상 무예 수련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주 우스운 일이긴 했지만, 그 덕분에 귀족 장교들은 총검술에 익숙하지 않은 신의 병사들을 잡초 베듯 넘기며 진격을 독려할 수 있었다.

열 명이 넘는 보병들을 잡초처럼 베어낸 루시 장교들이 길을 열자 루시의 병사들은 사기를 회복했다. 어렵지만 구멍이 뚫린 이상 살 길이 눈에 보였다.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다. 모두 돌파하라!”

장교들이 독려하자 흰 파도는 제방을 힘차게 두드렸다. 조그만 구멍 주위로 균열이 번지더니 한순간 제방의 한쪽이 무너졌다. 그 간극으로 도도한 물결이 터져 나왔지만 전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총격을 가하며 루시 보병들을 사냥하던 신의 보병들이 포위망을 압축하며 그 뒤를 추격했다.

“양이들을 주살하라!”

달아나는 자와 추격하는 자의 총검이 교차하며 피는 쉬지 않고 대지를 적셨다.

군복을 입은 시체들이 벌판에 즐비하게 널렸다. 그 위로 까마귀 떼만이 반색하며 날개를 펼쳤다. 불길하게 우는 그것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북적의 피해는 얼마나 되는가?”

“정확치는 않지만 얼추 오백 이상은 뼈를 묻은 것 같습니다.”

오백이라면 최초에 교전을 걸어온 적 보병의 6할은 괴멸되었다는 의미였다.

“생각보다 많은 적을 주살하였네. 이 기세를 몰아간다면 양이들의 보루를 공략하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그대들 생각은 어떠한가?”

“적세가 크게 꺾였으니 좋은 기회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대인께서 결정을 내리신다면 한 번 공격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 지금의 병력으론 만전을 기하기 어렵습니다.”

효기영 장수들은 입을 모아 당장은 공격이 어렵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이번 회전으로 당장 효기영이 전투에 투입한 천이백 기병 가운데 삼백 이상이 상한 상태였다.

그나마 멀쩡한 자들도 대부분 전마를 잃어 전력이 크게 떨어진 처지였다.

“만전을 기하는 것이 어렵다. 제장들의 생각은 공격을 미루자는 뜻이요?”

“공성을 시도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군이 지쳐 있는 상태라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적 보루들이 공성을 그냥 지켜보고 있지도 않을 터이니, 병력 증원을 기다리는 편이 좋다 여겨집니다.”

효기영 지휘관들의 대답에 임경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오승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승세를 타고 패잔병을 쫒아 보루까지 취했을 테지만, 임경문은 그런 과감한 성향의 지휘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만사에 있어 완전한 인간은 있을 수 없었다.

전쟁에서 타고난 천재인 오승도도 전장에서 실수를 하는 일이 있는 판에, 전장 경험이 적은 임경문이 오승도와 같은 수준의 지휘를 하는 것은 당초부터 무리였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

루시 군대는 비참한 패잔병의 모습으로 보루에 복귀했다. 의기양양하게 전장에 나설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장교들은 보루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니콜라예프의 방에 모여 이번 패배를 두고 떠들었다.

“우리가 적을 너무 얕보았습니다. 이쪽 보루를 주 타격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안목이 있는 적인데, 황제 폐하께서 들으신다면 작위를 박탈당하고도 남을 일이겠습니다.”

“작위 박탈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동방 군대 따위에게 패하다니. 세상에 웃음거리가 된 강주의 연합왕국 군대조차도 실제 교전에서는 몇 배의 피해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데 우린 뭡니까?”

“수치를 씻어야 합니다. 당장 이웃 보루들에서 병력을 증원받아 재전(再戰)을 걸어야 합니다.”

일부 장교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복수를 입에 담았다. 특권 의식 못지않게 그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드높은 장교들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모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지금 우리 군의 사기가 바닥을 친 마당에 승세를 탄 적과 다시 싸우다니요. 안 될 일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지난날 유리 대제께서 어떻게 전사 왕을 꺾었는지 말입니다.”

유리 대제는 루시 근대화의 주역으로 제국의 기틀을 놓은 황제였다.

그는 당대 최강국으로 군림하던 북방의 강호, 스와질란드의 걸출한 제왕, 전사왕 카를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 서전에 참혹한 패배를 겪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 굴하지 않고 절치부심하여 역전승을 따낸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그 한 번의 역전승을 얻어내기 위해 스와질란드 군대의 예리한 예봉을 피했다. 그 과정에서 국토의 절반이 초토화되는 참혹한 피해도 감수했다. 신하들에게 겁쟁이라는 욕을 얻어먹고 명예도 모른다는 비웃음을 사면서도 승리 하나만을 바라보며 참았다. 그 무서운 인고의 시간 끝에 승리를 얻어낸 대제가 본다면 웃을 일이었다.

전투에서 패하자마자 성급하게 재전을 걸어 패한다면 웃음거리 정도가 아니라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했다.

“진정 복수를 하고 싶다면 철저히 준비하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결정적인 기회에 보복을 한 유리 대제처럼 싸워야 합니다.”

“그 말이 맞소. 우리는 한 번 패한 상태요. 한 번 더 만용을 부릴 입장은 아니지. 위대한 유리 대제께서 그러셨듯이 잠시의 수모를 감내하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 같소.”

니콜라예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 번 패하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루시 장교들은 논의 끝에 설욕전을 포기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쉽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유리 대제의 이야기까지 나온 이상 자존심을 마냥 내세우기도 어려웠다.

신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보루를 공격하는 대신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집중했다. 루시는 이에 대항해 ‘차르의 영광’에 병력을 다소 보강하긴 했지만, 다른 보루들을 비울 입장이 아니어서 대규모 증원은 하지 못했다.

평야에서 교전이 벌어진 지 나흘이 지난 시점에서 쌍방의 전력 차는 거의 10배 이상 벌어져 있었다.

요새를 지킬 수비 병력조차 태부족이던 며칠 전보다는 사정이 나아진 셈이었지만, 공격자의 병력 우위가 확고해진 상황이라 ‘특별히’ 좋아졌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는 당초 루시가 예상한 병력 격차이기도 했다. 우시리 장군 휘하에는 약 3만에 달하는 대군이 있어 유사시 한 전장에 2만 이상의 군대를 투입할 역량이 있었다.

“적의 병력은 이쪽의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적 보루에 집중된 병력은 많이 잡아도 칠백 남짓. 그 정도로는 우리 군의 5푼도 되지 않으니 공성전을 폄에 있어 충분한 우세를 자신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강상에 있는 양이들의 포함입니다. 보루로 접근한다면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적의 화력은 이쪽의 곱절이 넘을 겁니다.”

장수들의 말에 임경문은 깍지를 꼈다. 통나무를 써서 적 포함들을 쫓아내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강이 ‘차르의 영광’을 배후에 두고 굽이쳐 내려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보루에서 통나무를 제거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기 쉬웠다. 따라서 보급을 차단하건 포함을 쫓아 내건 뭘 하려고 해도 보루부터 함락을 시켜야 했다.

그러니 공격 시에 포함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의 화력이 곱절이 넘는 상황에서 공성이 쉽진 않을 터인데, 계책이 있다면 말씀들 해보시오.”

임경문이 말을 꺼내자 장수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장수들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대인.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투는 야간에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의 화력을 상쇄하기엔 야간전 이상의 방책은 없습니다.”

“좋은 생각이요.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없소?”

장수들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임경문이 말을 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거창한 공성 장비 대신 간단한 사다리만 가지고 공성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루 앞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적의 화력이 빛을 볼 기회만 줄 뿐입니다.”

그 말에 임경문도 동의했다. 원거리 투사 병기에게 거리를 주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었다. 적과 근접할수록 안전해지는 것이 근대전의 철칙인 만큼, 공성전에서 적 화력을 상쇄하자면 이 방안도 채택할 만했다.

“다른 생각은 더 없소?”

“보루의 전면이 협소하고 아군은 대군이니 부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교대로 공격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효기영이 전력으로 공격하기에는 요새 주변이 너무 협소합니다.”

실제 ‘차르의 영광’ 주변은 공격할 공간이 좁았다. 요새의 삼면은 강이 둘러싸고 있어 사실상 공격할 공간은 한쪽 구획밖에 없었는데, 이 구획은 길이가 백 미터에 불과해 대군이 일시에 들이치기엔 공간이 부족했다.

대군이 좁은 장소에 운집하는 것은 작전의 효율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적의 원거리 투사 병기에 의한 피해를 늘릴 뿐이었다. 더구나 예비대가 없는 군대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오승도가 누누이 강조한 바 있었다.

“부대를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면 부대를 셋으로 갈라 하나는 예비대로 두고, 하나는 다른 보루의 증원을 차단하는 역할을, 나머지 하나가 요새 공격을 전담키로 합시다.”

“현명하십니다.”

장수들이 읍을 하자 임경문은 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짓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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