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18화 (118/425)

제118화. 영웅이란 (2)

‘나는 강주 거상 오유도의 아들, 오승도일 뿐이다.’

전날의 깨달음을 명쾌하게 한마디로 정리한 승도는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이 깊어질 수도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그는 오랜 시간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군략에 있어 신중을 기하는 습관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에 국한된 것일 뿐이었다.

일행은 간단한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섰다. 아침이 간단한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기 쉬웠지만, 사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 열량 소모가 큰 농업 혹은 광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빼면 ‘아침’을 간단히 먹는 것이 에우로페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식도락’의 즐거움을 내세운 남방소국 출신 사람들의 경우에는 직업과 상관없이 아침도 진수성찬을 차려 먹곤 했다.

“소화가 되지 않아 영 꺼림칙하군요. 어제 먹은 까르뷔소를 주문할 걸 그랬습니다.”

승도는 얇은 베이컨과 달걀, 감자로 이루어진 아침 식사를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단백질 소화 능력이 그리 우수하지 않은 동방인에게 단백질로 꽉 찬 아침 식단은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빵을 먹기는 거북스러웠다. 아침 식사로 빵을 먹는 것은 더욱 입맛을 떨어트렸다. 빵을 마주하면 범선에서 삼시 세끼 먹을 수밖에 없던 비스킷, 바구미가 들끓던 그것이 절로 떠올랐다.

루이처럼 그것에 익숙해졌다면 빵을 먹어도 좋겠지만, 승도는 그 정도로 비위가 좋지 못했다. 식탁에서 혐오스런 광경을 연출하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피해야 할 음식이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다면 우유를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우유는 몸에 맞지 않아 입에 대고 싶지 않더군요.”

그의 대답에 루이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유처럼 달콤하고 착착 감기는 음료를 마시지 못하다니, 루이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탓에 승도는 속이 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다양한 경물들이 휙휙 지나갔다. 처음에는 ‘거북한’ 속을 참기 위해 창밖을 보던 승도였지만, 금세 그것에 정신이 팔렸다.

한참 그것들을 바라보던 승도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루이에게 물었다.

“방금 건물마다 붉은 꽃이 수놓아진 걸 보았는데, 저게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겁니까? 이유 없이 걸어둔 것 같지는 않아 궁금합니다.”

“붉은 꽃이라면.”

루이는 그 물음에 잠시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기억을 한참 더듬다 손뼉을 쳤다.

“아, 그건 바로 카드레의 수호성인, 성 기욤을 기념하는 겁니다. 붉은 꽃은 고귀한 희생을, 건물에 수놓는 행위는 그 희생으로 도시가 구원받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성 기욤 축일에만 볼 수 있는 전경입니다.”

“성 기욤이라니요?”

승도가 의아하다는 듯 반문하자 루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연합왕국 측에 포위된 카드레는 오랜 항전 끝에 항복을 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 연합왕국 국왕 헨리 4세는 ‘도시의 주민 전체’를 살려주는 대가로 사흘 안에 속죄양으로 쓸 11인의 목숨을 내놓을 걸 요구했다.

‘지나치게’ 오래 항전하여 왕국군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그 정도 응징은 해야 ‘참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요구의 논지였다.

항복 조건을 전해들은 카드레 시민들은 눈치만 보았다. 수만 명의 시민 중 겨우 11명만 나서면 되는 일이었다.

‘딱 11명만 희생하면 되는 일이야. 그게 꼭 내가 될 필요는 없어.’

모든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목숨을 아까워하며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고 눈치를 살폈다. 이대로 사흘의 유예 기간이 지나면 도시 전체의 주민이 몰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기욤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도시 전체를 위해 제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그는 도시의 시장도 아니었고, 참사회의 의원도 아니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구두 수선 장인에 불과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기개는 도시의 그 어떤 명사보다 빛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명예를 내려놓고 목숨만을 구하려던 도시의 명사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용기에 부끄러움을 느낀 명사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기로 했다.

그렇게 시민 11명이 자원하여 제 목숨을 내놓기로 하자, 그들의 결연한 태도에 감동한 헨리 4세는 도시뿐만 아니라 그들의 목숨도 살려주기로 했다.

그런 연유로 기욤은 도시의 수호성인이 되어 ‘성 기욤’이라는 ‘성인’으로 대접받았다. 오늘은 바로 연합왕국이 이 도시에 항복 조건을 제시한 날로, 성 기욤의 용기가 빛을 발한 날이었다.

그 용기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시의회는 매년 오늘을 ‘성 기욤의 날’로 지정해 그 의미를 기려오고 있었다.

승도는 그 자신이 지배했던 땅에 그런 이가 사는 줄은 미처 몰랐다. 심지어 그가 연합왕국을 치기 위해 야망을 불태운 도시에서 말이다.

“카드레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저도 카드레에 자주 기항하지 않았다면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테지만, 대단한 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지요.”

“…….”

승도는 붉은 꽃잎을 내건 건물들을 다시금 보았다.

성 기욤의 고귀한 희생을 상징하는 그 꽃잎을 보니 절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고귀한 이가 있는 반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정치가들이 있었다. 바로 자신과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소위 말하는 ‘위대한 영웅’, 요컨대 전날의 자신은 수많은 피와 주검을 먹고 ‘거대한 명예’를 쌓아올려 대중의 위에 군림하지만, 저 이름 없는 구두 수선 장인 기욤과 같은 자는 타인을 위해 제 목숨을 내놓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 자신이 감히 기욤의 위에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승도 자신이 평생을 꿈꾸어도 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도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겨우 구두 수선 장인의 몸으로.

그렇다면 그는 어떨까.

수백 년이 지났을 때도 대중이 과거의 그를 위대한 황제로 기억해줄 것인가. 그 치세를 경험하지 않은 학자들은 그를 무어라고 부를까. 기욤처럼 경의를 표하며 그 이름을 칭송해줄까.

업적이야 많이 남겼지만 과거의 자신은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며 위로 올라간 사람이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타인을 구하려 한 자와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다.

승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요.”

승도가 마차에서 내리며 던진 한마디에 루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도로 사정이 전반적으로 좋아지며 마차의 운행이 편리해진 덕분이었다.

오승도의 치세 때만 해도 마차가 제 속도를 낼 수 있는 도로는 전체 도로의 1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비율이 40%를 넘었다. 주요 도로만 따진다면 거의 모두 최고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승도가 마차에서 내리자 루이가 앞장을 섰다. 로망스에서는 전적으로 로망스 국립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만 통용되는 까닭에 은행에서 로망스 법폐(法幣: 법정통화)로 환전할 필요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은행의 로비에 들어서자 흰 제복을 입은 여성 고용인이 허리를 숙였다. 여성 보조원의 고용을 통과시킨 것은 제정 말기에 입안된 진보적 정책 중 하나였다.

그 덕분에 제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은행 사무로 근무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의 치적이라 할 만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썩 기분이 좋은 곳은 아닙니다.”

루이가 꺼낸 말에 승도가 반문했다.

“기분이 좋지 않으시다니요?”

“여자가 일을 하지 않습니까?”

루이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자 승도는 헛기침을 했다. 그 역시 특별한 신념을 가지고 여성 고용을 강행한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긴 전쟁으로 젊은 남성들이 지속적으로 전방에 불려나가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진 결과 자연스레 여성의 사회 진출을 용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가 일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본인이 딱히 신념을 가지고 추진한 정책은 아니었지만, 그 공과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갖는 것은 정치가로서 당연한 생리였다.

“맙소사, 대인. 동방이라면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물으시다니요?”

“하지만 특별히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는군요. 듣기론 연합왕국에선 간호사 등으로 상류층 여성들도 진출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승도의 답변에 루이는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 에우로페가 아는 그 창녀들 말입니까? 그네들은 천박하기 그지없는 행실로 가문에서도 의절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이의 말처럼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시선은 예로부터 곱지 않았다. 에우로페 남성들이 바라는 표준적인 여성상은 ‘기사 문학’에 나오는 손수건이나 건네주는 ‘레이디’면 족했다.

그 질시를 뛰어넘어 사회로 나선 여성들에 대해서는 갖은 혹평이 쏟아졌다. 그 벽을 넘어선 여성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위를 받은 이도 있었고, 제 나름의 명예를 얻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여성성’을 버리고 ‘남성’의 일부로 포섭되며 ‘인정’을 받았을 뿐이었다.

“소문일 뿐이지요. 동방에선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셋만 있으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 격언이지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말은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승도의 답에 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승도도 굳이 루이에게 항복을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논쟁을 끝내고 대기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줄을 선 신사들이 가득 있었다. 대부분 수익성이 없어진 농지를 처분하고 투자처를 찾아온 중소 지주들이었다.

승도는 그들을 힐끗 보고는 은행 창구로 다가가 직원을 불렀다.

“돈을 좀 환전하고 싶습니다.”

그의 부름에 직원은 상당히 거만한 태도로 반응했다. 동방인이 이곳까지 온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부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착각은 백인 동행자 없이 홀로 창구에 다가온 승도의 모습으로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승도가 느긋하게 백지 어음을 제시하자 직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은행 지점장이 헐레벌떡 달려 내려와 승도의 신발 아래에 머리를 조아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피부색’이나 ‘신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부터 나왔다.

“돈을 좀 환전하고 싶습니다.”

승도가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조금 전과 판이했다. 지점장은 황제로부터 어명이라도 받은 듯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손님께서 환전을 원하신다니 당장 준비하게.”

환전 따위에 은행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환전 수수료’를 생각하면 이런 반응도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승도가 환전하기로 한 엄청난 금액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3만 파운드가 넘는 거금을 앉은 자리에서 환전하겠다니. 정말 터무니없는 거부야.’

수만 파운드를 들고 다니며 간단히 현금화할 수 있는 수준의 부자는 에우로페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젊어 보이는 사내가 그런 거금을 가졌으니, 동방의 왕공 정도 되는 신분일지도 몰랐다.

잘만 구슬리면 예치금을 수십만 파운드 이상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만 되면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지점장은 침을 삼키며 손을 비볐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다른 건 없고 유명한 해운 조합 하나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해운 조합 말입니까?”

지점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은행과 거래 관계에 있는 해운 조합들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곳이라면 하나 생각하는 곳이 있었다.

“벨포드 조합이 유명합니다.”

그 대답에 승도가 맡겨 놓은 것을 요구하듯 다시 물었다.

“혹시 소개장 하나 써주실 수 있으십니까?”

보통 고객이라면 그런 귀찮은 서류 작업을 해주지 않겠지만, 이런 큰 손님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즉시 써드리겠습니다.”

지점장이 즉답을 내놓자 승도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소개장은 에우로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용 보증’과 같았다. ‘나는 이 사람의 신분을 절대적으로 신용하기에 당신에게 소개합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관후보생들이 배에 오르면서 해군 고위직에 있는 인척의 ‘소개장’을 들고 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신분을 확실히 보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맥’을 과시하는 목적도 있었다.

은행의 지점장 정도라면 좁은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돈을 다루는 자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만큼 힘이 있다는 의미를 가졌다.

“굳이 지점장의 소개장을 받으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루이가 다가와 묻자 승도는 긍정했다.

“아무래도 동방인인 내 신분은 쉬이 신용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럴 바엔 이렇게 지역 명사들의 소개장을 얻어 가져가는 편이 유리합니다. 연합왕국에선 동방 무역 회사의 어음 하나면 충분하지만, 로망스에선 사정이 다르니까요.”

승도가 신용을 입에 담자 루이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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