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제안 (2)
오승도는 본디 인재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좋은 인재라면 반드시 그 휘하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능력만 좋다면 그 출신과 국적,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그러한 인재 수집 욕은 그를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만들어 주었지만, 거꾸로 그 자신의 한계를 만들기도 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지나치게 많은 인재가 그의 판단을 둔하게 만들었다.
제정 말기 그의 사령부에 무려 1만 명의 참모가 있었다. 70~80명의 참모 장교만 데리고 전쟁을 했던 전쟁 초기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수뇌부’가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머리가 비대해지자 판단력은 당연히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개인의 천재성과 직관력, 그리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몇몇 참모의 ‘신중함’으로 이루어져 온 성공의 원리는 그 순간부터 소멸해 버렸다.
좋은 인재도 불필요할 정도로 많이 모이면 쓸모가 없었다.
프리지아의 명장 호르스트도 ‘범재’ 한 사람이 낸 책략 하나를 쓰는 것이 ‘세 명의 천재’가 낸 책략을 모두 실천에 옮기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승도는 이 말의 의미를 제정이 무너진 다음에야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 교훈을 살려 인재 수집에 있어 3가지의 대원칙을 세웠다.
첫째,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전문 분야의 인재.
둘째, 그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인재.
셋째, 현시점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인재.
승도가 에우로페에서 모집한 인원은 모두 이 분류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해운 조합의 선원들과 그랑드 제콜의 퇴역 교수들은 모두 세 가지 조건을 충족했다.
만약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탁월한 전문가라 할지라도 기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이 지난날로부터 배운 인재 경영의 철학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모아들인 이들에게 신뢰를 주고, 믿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지.’
승도는 그 사실을 의식했다. 제정이 침몰하자마자 그의 등에 비수를 꽂은 수하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의 강주는 한 번의 배신으로도 치명타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약했다.
“서역의 음악이라니 참 기대가 돼요. 한 번 정도는 꼭 들어보고 싶었어요.”
반은비가 오페라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호들갑을 떤 덕분에 승도의 상념이 깨졌다. 그들은 루테티아를 온 기념으로 이곳에서 유명한 오페라 좌를 방문하여 ‘오페라’를 한 편 감상할 참이었다.
마차가 16구의 오페라 극장 앞에 도착하자 수행원들이 먼저 내려 주변을 살폈다. 루테티아의 16구는 치안이 나쁘지 않은 곳이긴 했지만, 최근 유혈 사태가 벌어져 주의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극장이 아주 크고 좋네요. 동방에도 이런 곳이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반은비가 짤막한 감상을 내뱉는 동안, 승도는 오페라에 대한 기억을 되새겼다. 하급 장교 출신의 그가 이런 ‘고급문화’와 접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마담 로제의 전폭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보는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승도는 그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는 반은비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쪽으로 인도했다.
좌석에 앉자 무대 위로 조명이 비쳤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배우가 무대 위를 이리저리 오가며 꽃잎 같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관중들이 숨을 죽였다.
여자가 흰 손가락을 뻗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매만질 때, 승도는 속이 거북하다고 느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 역시 오페라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에티켓에 어긋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페라에서 ‘박수치지 말 것. 소리 내지 말 것. 일어나지 말 것.’은 기본적인 예의에 통했다.
하지만 생리적인 현상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마 점심때 먹은 흰 빵이 잘못된 듯싶었다.
‘그러게 빵은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승도는 투덜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 복도로 나온 그의 옆은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한창 오페라가 진행 중이니 사람이 없을 수밖에 없긴 했지만.
‘화장실이 이쪽이던가?’
승도가 기억을 더듬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몇 차례의 증축이 다시 이루어진 극장은 그의 기억과 다소 달랐다. 때문에 승도는 쉽게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정화조’를 땅에 파묻어놓고 그 위에 화장실을 배치하는 ‘구조’ 때문에 그것들은 대개 지하의 후미진 곳에 배치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페라 극장은 지하에 각종 무대 연출 장치와 배우 대기실을 배치하는 까닭에 화장실을 일반적인 위치에 두기 어려웠다.
그래서 극장의 화장실은 건물의 구석진 곳에 자리하여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승도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배를 붙잡고 어기적어기적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때 꺾어진 복도 앞부분에서 불쑥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좋은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모두가 한 사람을 경호하듯 둥글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 앞을 지나면 전용 박스가 있던 곳이었나?’
승도는 기억을 되새겼다.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그들 사이에 낀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일견하기엔 예전의 자신을 빼닮은 모습이었다. 별로 폼이 나지 않는 망토와 원수복과 같은 차림새도 똑같았다.
‘정말 그 녀석인가.’
그의 생각이 정확하다면 남자는 옛 조카 루이. 로망스의 현직 국왕이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국왕을 감싼 수행원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선 채로 물었다. 왕의 동선에 불시에 나타난 자이니 경계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정적이 많은 왕에게는 언제나 암살의 위험이 따라다녔다.
보통은 이렇게 무례하게 묻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할 수도 있었지만, 한 무리의 수행원을 거느릴 정도면 범상치 않은 신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역만리 동방의 제국, 신에서 온 오승도라 합니다.”
“신에서 온 동방인?”
인파 사이에 묻혀 있던 사내가 그 말을 듣고 반문했다. 그 음색은 서늘했지만 익숙한 빛이 숨어 있었다. 전생의 조카 놈이 확실했다.
“그렇습니다.”
승도는 공손하게 허리를 구부렸다. 자유 왕정을 표방한 조카 놈이라지만, 이놈이 얼마나 권력욕이 대단한 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뻣뻣하게 허리를 펴고 강한 인상을 주려다간 악감정만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신에서 온 사람이라. 신기하군. 짐의 나라에 그 같은 방문자가 찾아오다니. 그대의 신분이 무엇인가?”
왕의 물음에 승도는 잠시 생각을 했다. 듣기로 조카는 부르주아지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신분에 연연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들리는 이야기론 ‘신분’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측근들이 모두 고위 귀족들로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출신이 미천한 자도 작위를 주어 ‘신분’을 만들어 줄 정도로 의식하는 사람이 신분에 연연하지 않을 리가 없다.
승도는 상대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는 어떻게 답을 할지 결정했다.
“저는 신의 명예직 정3품 관료입니다. 그와 동시에 오호관의 계승자이자 강주 군의 사령관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승도의 거창한 소개에 왕은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이역만리의 동방 국가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있을 턱이 없으니, 그것이 대단한 것인지 별것 아닌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정확하게 로망스의 관제로 어느 정도쯤 되는 것이요?”
왕이 수행원들에게 물었다. 승도는 그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신 답해주었다.
“가진 관품은 로망스 기준으로는 명예 백작으로, 궁정 고문직 정도를 가진 것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집안의 부를 보면 로망스 중앙은행 총재 정도이며, 강주 군의 지위는 변경 야전군의 장성 계급에 해당됩니다.”
궁정 고문은 전통적으로 중앙 귀족 정도 된다는 뜻이고, 중앙은행 총재라면 경제계에서 세 손가락에 든다는 의미다. 군의 장성 계급이라는 것도 대단한 지위로 볼 수 있다. 대개 직업 군인의 성공 잣대를 대령 계급 이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왕은 잠시 승도를 이리저리 살피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 고위직에 있는 경이 어찌하여 이런 먼 곳까지 걸음을 하게 된 것이요?”
“사람을 구하러 왔습니다.”
“사람을 말이요? 무엇 때문에?”
왕의 물음에 승도는 잠시 생각을 골랐다.
“신을 로망스처럼 만들어보기 위함입니다.”
“로망스처럼 만들어본다?”
승도의 말은 반은 진담이었다. 비록 강주 군에 프리지아 군제를 채택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로망스에 버금가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요. 먼 동방에서 그 같은 꿈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왕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승도를 보았다.
“과찬이십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궁에서 하루 식사나 함께하는 것이 어떻겠소?”
“궁에서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왕의 초대에 승도는 허리를 구부렸다.
“폐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시종장. 초대장을 하나 꺼내주시오.”
왕이 나지막이 말하자 시종장이라 불린 사내가 품에서 고급 크라운 종이로 만든 초대장을 건넸다. 밀랍으로 봉인이 된 것이 평소에도 미리 몇 장 준비해서 들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승도가 그것을 받아들자 왕은 작별을 고하고 제 박스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승도는 천천히 사라지는 왕의 모습을 쫓으며 초대장을 품에 넣었다.
***
이튿날, 승도는 왕실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평화의 궁’으로 향했다. 평화의 궁은 로망스가 신성 동맹에 가입한 기념으로 세운 궁전으로 에우로페의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현 시민 왕정 역시 이 궁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이는 신성 동맹의 일원으로서 현 질서를 존중하겠다는 뜻을 각 가맹국에 분명히 하여, 혹시 모를 왕당파에 대한 원조를 차단하려는 포석이었다.
‘영원한 평화라.’
사실 평화의 궁이 의미하는 ‘영원한 평화’는 현실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장 프리지아와 오스티아 군대가 중부 에우로페에서 벌인 한바탕 전쟁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마차가 궁의 정문에 멈추자 위병들이 다가왔다. 마부가 승도의 초대장을 제시하자 위병들은 문장을 확인하고는 철문을 천천히 열었다. 철문 너머로는 끝없이 펼쳐진 광대한 정원이 있었다.
마차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정원을 가로지르자 함께 탄 왕실 시종이 물었다.
“저희 궁에 오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괜찮군요.”
승도는 짤막하게 답했다. 평화의 궁 자체는 분명 화려한 멋을 가졌지만, 승도 본인이 거주하는 강주의 장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천하제일 거상이 자랑하는 ‘압도적인 규모의 장원’에 비하면 이 궁은 되려 왜소하게 여겨졌다.
“놀라지 않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승도는 씩 웃었다.
“동방에는 어지간한 왕공 정도면 이 궁에 버금가는 크기의 장원을 갖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런 집에서 살고 있으니 놀랄 필요가 없지요.”
승도의 태연한 대답에 시종은 입을 다물었다. 동방 사내를 놀래게 해주려다 도리어 기만 꺾인 것이다.
마차가 궁의 정문에 도착하자 고용인들이 나와 그를 맞았다. 보통 궁에서 연회를 베풀면 수십 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초대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적으로 단 한 사람, 오승도만을 초대했기에 고용인들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대했다.
이런 경우는 ‘국빈’이나 그에 준하는 인사가 방문했을 때나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예로는 프리지아의 왕제가 방문했을 때 정도였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의 말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평화의 궁이나 그가 거주했던 궁이나 구조상의 차이는 없었다.
왕실 가족들의 적응성 문제를 고려한 설계인 듯싶었다. 덕분에 승도는 익숙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쪽으로 가면 되는 겁니까?”
승도가 앞서 나가며 묻자 시종은 다소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언제 다른 궁전을 방문해보신 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냥 감입니다.”
승도는 우스갯소리를 던지고는 백합 문양이 깔린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투명한 유리벽돌을 쌓아 수정 궁전 같은 느낌을 주는 복도를 지나자 왕의 알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도는 망설임 없이 알현실에 발을 디뎠다.
“어서 오시오. 경의 이름이 오승도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폐하.”
승도는 조카의 물음에 답하며 시종이 안내해준 의자에 앉았다. 왕은 투명한 눈으로 승도의 얼굴을 훑다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아시오?”
“모르겠습니다, 폐하.”
“무엇일 것 같소?”
왕의 여유로운 태도에 승도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조카 놈이 뒷조사라도 한 건가?
하지만 로망스에 해가 되는 일을 한 건 아니다. 그런 게 의심됐다면 비밀리에 납치해서 조사했을 거다.
낯선 동방인 하나 어쩌지 못할 만큼 로망스가 힘이 없는 나라도 아니고.
‘제법. 날 당황하게 할 만큼 컸구나.’
승도는 조카의 성장을 조금은 인정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