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제안 (3)
“그것을 왜 제게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어제 경을 ‘일부러’ 만나본 이유가 그것이라서 그렇소이다. 사실 그대를 뒷조사해본 결과가 그 안에 들어 있거든.”
왕이 수염을 매만지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제야 승도는 어제의 석연찮은 조우와 오늘의 초대가 모두 예정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왕은 승도가 서류를 들여다보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 비밀경찰에서 그랑드 제콜의 퇴임 교수들과 접촉하고 있는 동방인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소. 그랑드 제콜의 명예 교수들 사이에 감시대상이 포함되어 있는 터라, 우연하게 얻은 정보였지. 그 자리에서 우리가 처음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스파이 혐의입니까?”
“그 말대로요. 하지만 귀하의 신분이 동방인이라는 것이 걸렸지. 해서 연합왕국 쪽에 있는 우리 사람을 시켜 귀하의 뒷조사를 했고, 그대의 신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소. 거기에 더해 ‘연합왕국’을 물 먹인 사내이기도 하다는 것을.”
승도는 조카가 생각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느꼈다. 그에 대해 이만큼 많은 것을 짧은 시간에 조사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신분 때문에 절 직접 만나보신 겁니까?”
“그렇지 않다면 짐이 극장에 직접 갈 이유가 없지 않겠소?”
‘그랑드 제콜까지 비밀경찰로 감시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군.’
승도는 왕의 여유로운 얼굴을 보다 말문을 열었다.
“제 뒷조사도 해보시고 이리저리 재보시기도 하신 것 같은데,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으신 겁니까?”
“정치가라면 권력을, 자본가라면 돈을, 학자라면 명예를, 그리고 군주라면 부국강병을 꿈꾸는 것이 기본이요. 나 역시 군주로서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 있소.”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왕은 왕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신에 우리 쪽의 공식 국서를 전달해 주시오. 신은 관료에게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라 말이요.”
“저는 중앙 정계에 영향력이 없어 국서를 전해도 효과가 없을 겁니다.”
“물론 그대가 그것을 전달해 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연합왕국이 자유자재로 신에 드나드는 마당에 마냥 손 놓고 기다리기엔 우리 입장이 난처해서 말이요.”
왕의 답에 승도는 팔짱을 꼈다. 사자가 날뛰는 곳에 맹수 한 마리를 더 집어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두 맹수가 서로 물고 뜯고 싸울까. 아니면 사이좋게 먹이를 나누어 먹을까. 답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승도 본인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중앙 정부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그의 입지는 넓어지고 확고해진다. 어느 정도의 치안만 유지된다는 전제하에.
“국서를 전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리스크가 큰일을 도와드린다면 이쪽도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맨입으로 도와달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100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를 로망스 정부의 비용으로 지원해 주겠소. 경이 원하는 그 인재를 말이요.”
루이가 달콤한 제안을 꺼냈다.
그 정도의 인재라면 승도가 굳이 에우로페를 돌며 비싼 비용으로 사람을 더 살 필요가 없었다. 제안 자체는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물론 국서 하나만 노리고 꺼낸 말은 아닐 것이다. 로망스의 인재들을 오승도 주위에 심어 ‘친 로망스 파’를 신 내에 자리 잡게 할 의도도 숨어 있을 것이다.
달콤하지만 독이 발린 사과다.
‘하지만 독주라도 아쉬운 게 우리 처지지. 생각만 떠볼까?’
승도가 물었다.
“국서만 전해드리면 충분합니까?”
“그거면 충분하오.”
로망스가 이 거래를 역으로 이용하여 강주를 신 내에서 고립시키고 강주를 위협할 수단으로 써먹을 위험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럴 위험성은 배제해도 좋았다. 언제나 ‘세력 균형’을 중시하는 연합왕국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결과를 책임지라 말하진 않으리다. 짐의 이름으로 약속하겠소.”
왕이 승도의 망설임에 쐐기라도 박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정도면 망설일 것도 없지.
승도는 손익 계산을 마치고 답을 내놓았다.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승도는 로망스 왕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국서를 받아들고 숙소로 돌아온 그는 다음 일정을 재고하였다. 주변국을 쭉 둘러보며 순방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귀국을 서두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외국에 오래 체재하는 것도 좋을 것은 없지. 제국의 국내 사정이 그리 안정된 것도 아니고.’
승도는 제국 내부에서 머지않아 문제가 터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불합리와 인내의 ‘공식’을 생각하면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보통 인간은 탐관에게 수탈을 당한다 해도 그것에 쉽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불만을 표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것부터가 큰일인 데다, 그렇게 신고를 한다고 해도 제국의 부패한 시스템에서 ‘좋은 관리’가 온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부패에 순응하여 머리를 굽히는 편이 이익이다. 하지만 그 ‘인내’에도 한계는 있다. 조정의 수취와 약탈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 불만은 먼 길을 떠나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반란으로 폭발한다.
왕조 교체의 원리는 바로 이런 메커니즘 하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현재의 신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슬아슬한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고 보아도 좋았다.
세제의 붕괴, 탐관들의 발호, 계속된 전란으로 인한 농지의 황폐화, 막대한 전비부담의 전가. 모든 면에서 제국은 불안정한 요소를 안고 있었다. 계기만 주어진다면 어디선가 폭발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휴화산. 그것이 제국이었다.
거기다 바깥에도 문제가 있다.
제국의 영토를 호시탐탐 엿보는 루시.
그들이 발호하기라도 하면 한바탕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인명손실에 상대적으로 무감각한 루시라면, 특별한 명분 없이도 싸움을 걸고도 남았다.
승도 본인이 괜히 육방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귀국을 서두를 필요가 있긴 하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도 없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강주에 일이 쉽게 생길 가능성은 없었다. 제국을 뒤흔들 만한 싸움이 벌어진다고 해도 강주에는 상승군과 왕국 출신 지휘관들이 버티고 있었다.
단시간에 강주가 위험해질 만한 상황은 일어나기 어려웠다. 연합왕국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단언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로망스까지 와서 못 본 얼굴들이 많군. 모두 배신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았는데, 몇 명 빼곤 죄다 소식조차 알 길이 없어.’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근위대장까지 해먹는 인간도 있었지만, 태반은 정치적 격변에 휩쓸려 알량하게 보존한 목숨까지 날려먹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했다. 격변 속에서는 무엇이 안전을 보장해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신도 그렇지 않았던가? 망할 것 같으면서도 반란은 모조리 진압해내며 버티는 나라였다. 반란군에 줄을 대었다 패가망신한 자들을 본다면 줄을 잘 보는 것도 능력이었다.
‘하긴 황금이 있다면 격변도 쉽게 넘길 수 있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무력이 아니라 돈이야.’
승도도 연합왕국과 싸우며 그 사실을 느꼈다. 전쟁에서 이길 순 있어도 황금을 이길 수는 없다는 걸.
승도는 남은 서류에 모두 사인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국은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루브르망 호는 그간 상품을 처리하고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만재하고 있던 터라, 주인이 오자마자 금세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선원들 또한 며칠의 휴식 기간을 가진 터라 출항에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다만 숨은 문제 하나가 승도를 골치 아프게 했다. 그것은 태풍도 해적도 전염병도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항해를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항해가 아니라 나라도 결딴낼 수 있는 문제였다. 예로부터 이 문제를 우습게 본 자들치고 뒤끝이 좋은 이는 없었다.
루이의 보고에 승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배에 숨어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뱃놈들이 여자들을 몇 숨겨둔 모양이더군요.”
그 대답에 승도는 골치가 아프단 표정을 지었다. 배에 여자를 태우지 않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기강이 해이해지고, 둘째로 애정 문제로 폭력 행위가 발생하기 쉬우며, 셋째로 성병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모두 선상에서 치명적인 문제들이다.
“여자가 탄 것을 전혀 몰랐습니까?”
“출항을 서두르는 터라 인원 점검에 다소 소홀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귀국을 서두르며 독촉을 해댄 터라, 이는 루이의 책임이라 보기 어려웠다.
설령 꼼꼼하게 확인한다고 해도 여성의 탑승을 원천 봉쇄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자를 태우는 방법은 정말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커질 수도 있겠군요.”
승도는 본인 스스로가 병사들을 지휘해본 경험이 풍부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짚었다.
“해서 다음 항구에서 그녀들을 모두 내리게 할 생각입니다. 제 선상 생활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땐 그렇게 처리해 왔습니다.”
루이의 대답에 승도는 머리를 긁었다.
“항구에서 여자를 하선시키는 것 다음이 중요합니다.”
여자를 내리게 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할 경우, 여자를 태운 선원들의 불만이 쌓인다는 것도 있었다.
처음부터 태우지 않았다면 몰라도 태우고 항해를 한 상태에서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나 선주인 승도 본인이 아내와 동행한 처지다보니 그 불만을 받기가 아주 쉬웠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선상 반란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뱃사람들은 아주 단순하고 거친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면 어찌 처결하시겠습니까?”
“여자를 하선시킨 다음, 불만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근무를 느슨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승도의 대답에 루이는 눈을 크게 떴다. 현재 근무는 3교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아직 연근해를 벗어나지 않은 터라, 이 같은 항해는 기본적인 안전 수칙에 해당되었다. 인원을 줄이면 그만큼 배의 항해 일정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근무를 느슨하게 한다면 항해에 지장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감수해야지요.”
승도는 사람을 다룸에 있어 마냥 채찍만 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박탈할 때는 그것을 잊을 정도의 메리트를 제공해야 했다. 당분간 눈가림 정도라고 해도 그런 절차는 반드시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하면 그리 처결하겠습니다.”
루이가 허리를 숙여 보이고 물러나자 반은비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서방님. 여자를 태운 것이 그리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까? 하면 저도 배에 탄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렇진 않습니다. 처리하기에 따라 간단한 문제입니다. 문제란 복잡하게 보면 한없이 복잡해지게 마련이고, 쉽게 보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옛날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던 왕에게 지혜로운 신하가 문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구멍이 뚫린 구슬에 실을 꿰어 주며, 이것을 풀어보라 하였지요. 그때 왕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들어본 이야기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왕은 단칼에 구슬을 박살낸 다음 풀었다고 답했습니다. 세상일은 그런 것입니다. 지혜로써 풀어보려 하였다면 그 문제는 한없이 어려운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단순한 해결책으로 대한다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풀리기도 합니다. 정치도, 상업도, 전쟁도 말이지요.”
“알 것 같기도 한 말씀이에요. 하면 이 여자 문제가 간단히 풀릴 수도 있단 건가요?”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보다 어려운 문제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승도는 풀리지 않는 숙제들을 떠올렸다. 거대한 파고 앞에 던져진 강주의 생존, 그것을 생각한다면 여자 문제 정도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축에 속했다.
승도는 기지개를 쭉 펴고는 침상에 누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여자 문제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머리를 채운 것은 강주에 대한 생각이 전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