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23화 (123/425)

제123화. 위험한 거래 (1)

승도가 귀국을 서두르는 동안, 우시리 강변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그간 지지부진한 대치를 이어오던 임경문이 중앙 조정으로 소환되고, 신임 흠차대신 장방이 내려왔다.

물론 전황이 지지부진해서 소환한다는 건 구실이었다. 실상은 다소 유리해 보이는 전쟁의 공을 날름해보려는, 리첸 파벌의 수작이었다.

장방은 부임 명령을 받으면서 임경문의 소심함을 비웃었다. 그가 볼 때 보루들을 모두 쓸어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전력이 있는 판에 지지부진한 대치가 이어진 것은 겁이 많아서였다.

“머저리 같은 책상물림에게 지휘를 맡기니 결국 이런 게지. 이번 전쟁을 단숨에 끝내고 내 입지를 높이겠다.”

장방은 전쟁 경험이 비교적 풍부한 녹기 출신의 지휘관이었다. 그 전쟁 경험이란 것의 태반이 ‘반란 진압’에 편중되긴 했지만, 그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장방이 군막에 들어서자 군 지휘관들이 일제히 기립하여 그를 맞았다. 신임 사령관은 기골이 장대하여 그간 그들이 모셔온 임경문과 대조적인 인상을 주었다. 박력이 있고 힘이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수하들을 쓱 훑어본 장방은 상석에 가 턱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수하 장수들도 엉거주춤 서 있다가 엉덩이를 붙였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장방이 입을 열었다.

“제장들의 노고에 대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그간 북적들을 상대하느라 고생이 많았소.”

그는 장수들의 공을 치하하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그런 여러분이 지금껏 이 황량한 땅에서 아무것도 못 한 채 눈치 싸움만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무능한 문관 임경문 때문이요. 나는 그자와 다른 싸움으로 그대들을 지휘할 거요.”

장방은 느긋하게 임경문을 격하하며 자신의 전술에 대해 설명했다.

“본관은 지금 북적의 머리를 노리는 포진이 전혀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소. 따라서 적의 허리를 쳐 적에 결정타를 가하고, 적의 철퇴를 강요할 생각이요.”

임경문이 루시의 요새 최북단을 쳐 없애고, 그곳을 발판 삼아 강상 보급을 차단할 의도를 가졌다면 장방은 보루의 중앙을 차단함으로써 루시 군대 전체의 전략적 입지를 흔들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 말대로만 된다면 임경문의 전술보다 훨씬 큰 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허리를 차단한다면 그곳에 대포만 가져다 두어도 각 요새의 상호 협력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루들의 중앙은 적 병력이 전력을 집중해 대항해올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임경문이 몰라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본관의 생각이 어떠시오?”

“나쁜 생각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다만 북적의 저항이 거셀 것인데, 그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신지요?”

“나도 생각이 있소. 북적의 중앙 보루를 친다면 저쪽에선 어떤 형태로든 회전을 걸어올 가능성이 있을 거요. 내 생각이 틀렸소?”

“문제는 그 상황에서 우리가 견딜 수 있는가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그런 나약한 소릴 하는 거요. 북방의 효기영이 제국 최정예라 알고 있는데, 그 이름이 허명인 거요?”

“아닙니다.”

“그런 나약한 소리는 입에 담지 마시오. 본관은 회전 한 번으로 보루들을 모두 쓸어버릴 생각이니.”

장방의 말에 장수들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장방의 호기로운 작전에 위험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지부진한 대치를 끝내고 전쟁을 마무리 지을 최종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다.

장방은 작전 회의에서 주장한 대로 정말로 포진을 바꾸었다. 그는 2만의 대군을 집중해 루시 진영의 중앙 보루를 정면에서 공격할 의도를 드러냈다.

기치창검을 높인 대군은 드넓은 평원이 비좁다 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발하였다. 보병이라도 수만 대군이면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터인데, 이들은 모두 기병이었다.

기병 수만의 위세는 보병 수십만이 발하는 것에 비견할 정도였다.

보통 기병은 그 수가 과장되게 보이는 인상이 있었다. 말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도 그렇지만, 전마에 탄 기병 하나하나가 크게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하, 정말 대군이로군. 차르의 창에선 지금까지 저 많은 대군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인가?”

루시 병사들은 대규모 기병을 보고 주눅이 들었다. 겁을 먹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적의 규모는 대단했다.

“야전으로 나가면 정말 죽겠군. 방진이고 뭐고 간에.”

병사들은 대군을 보고 그 위세에 겁을 먹었지만, 루시 장교들은 비교적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있었다. 전날 신의 기병들에게 야전에서 대패한 이유도 분석해둔 터라, 적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첫째, 적 기병을 상대할 때 야전은 가능한 회피할 것. 해군의 화력 원조만 받는다면 이쪽이 불리할 것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

둘째, 야전을 하더라도 강변을 따라 움직임으로써 배후까지 적에게 둘러싸일 여지를 없앨 것.

셋째, 야전 시 각 보루의 병력을 상호 유기적으로 움직일 것.

그것이 그들의 대응 방법이었다.

“적의 의도가 눈에 보이긴 하지만 확신 없이 싸울 입장은 아니요. 두 번의 패배는 우리를 자멸시킬 테니까.”

기병을 보는 장교들의 눈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한 번의 패배는 감수할 수 있지만 두 번은 허용할 수 없었다.

그 정도의 패배를 감내할 병력도 없거니와, 병사들의 사기도 문제였다.

“신중을 기하잔 말이군요. 하지만 기병을 상대로 한다면 역시 방진이면 충분할 것 같지 않습니까? 피라미드 방진에 대포를 갖고 나간다면.”

“상대가 기병이란 점을 고려하면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건 큰 약점이요. 적이 돌격을 해온 다음, 한 번에 하마해서 공격해오면 어쩔 거요? 적이 변칙에 능하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소. 그래야 두 번 허를 찔리지 않을 테니까.”

지레 겁먹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부분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장교들이 기병들을 보며 수군거리는 동안, 효기영의 일부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양이들에게 호된 교훈을 내려줄 것이다. 제국 기병의 위엄을 보여라!”

장방의 명이 떨어지자 한 무리의 기병이 앞으로 나섰다. 이들은 기병총 대신 활을 장비한 전형적인 북방 기병이었다.

활이 총에 비해 뒤지는 부분은 많았지만, 숙련된 궁사의 경우에는 활을 총보다 능수능란하게 다루곤 했다.

궁 기병들이 앞으로 나오자 루시 병사들은 보루 위에서 ‘야만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런 그들 앞으로 궁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전진해왔다.

거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보루를 향해 달려오는 궁 기병들을 보자 장교들이 사격 준비를 명령했다.

병사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 사격 준비 자세를 취하는 동안, 기병들이 소총의 유효 사거리 바깥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기병들은 그곳에서 함성을 지르며 보루 벽을 따라 빙 돌았다. 그 수가 많았다면 대포를 쏘았겠지만, 소수의 기병에게 대포를 발사하기엔 포탄이 아까웠다.

궁 기병들은 그 아슬아슬한 간극을 달려가다 전통에서 화살을 꺼냈다. 그들은 곧장 활을 시위에 걸더니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았다.

팽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들이 일제히 보루 벽에 박혔다. 유효 사거리로 따지면 활은 총보다 우월한 면이 있었다.

전장식 라이플의 최대 사거리는 활보다 우월했지만, 그것을 다루는 병사 개개인의 역량 때문에 유효 사거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화살이 연거푸 보루 위로 박히자 루시 장교들이 응사를 명령했다. 한바탕 총성이 울렸지만 궁 기병들에게 명중한 총탄은 한 발도 없었다.

보병들의 숙련도 문제도 있었지만, 방금 이루어진 화살 공격 때문에 루시 보병들이 겁을 먹고 제대로 조준하지 않고 총을 쏜 탓이 컸다.

장방은 그것을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결국 양이들은 별것 아니었다. 이것 봐라. 우리 병사들이 활을 쏘는 동안 고개만 숙이는 자라 새끼들 아닌가? 이런 적을 상대로 공연히 시간만 끌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제장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처음에는 장방의 호언에 반신반의하던 장수들도 이 일대 활극에 생각이 달라졌다.

모두의 생각이 그렇게 기울어갈 즈음, 장방이 칼을 뽑아들었다.

“일군을 동원해 적의 사기를 시험하니, 자라 새끼라는 사실만 드러났다. 황제 폐하의 강토를 더럽히는 자라 놈들이 뭐가 두렵단 말이냐? 놈들은 홍모귀가 아니다. 이참에 제국의 위엄을 세우고 천조가 북적의 위에 있음을 보여주리라. 전군 진군하라!”

장방이 직접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리자 기수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수천 기병이 일순간에 노도처럼 보루를 향해 내달렸다. 그 거대한 파도가 보루의 코앞까지 내달렸다. 기병들은 보루 앞에 도착하자 능숙하게 말에서 내린 다음 미리 휴대한 갈고리를 보루 위로 던졌다.

***

함성을 지르며 줄사다리를 타고 오른 첫 병사의 목에 총검이 박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수 미터 아래 바닥으로 떨어진 병사의 팔다리가 일순 움찔했다. 파르르 떠는 그를 돌아봐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죽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적의 공성을 저지해야 하는 방어 측과 반드시 보루를 넘어야 하는 공격 측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질수록 죽음의 천사가 거두어들이는 전리품도 늘어났다.

계획된 일제 사격이 보루를 사이에 두고 아래위에서 연달아 퍼부어졌다. 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반대로 오르기 위해. 양측의 총성이 울리는 사이에도 총검과 도끼, 칼이 줄사다리를 놓고 팽팽한 격전을 이어갔다.

“빌어먹을 야만인들.”

이반은 총검을 쥔 손을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이토록 치열한 전장을 경험할 줄 알았다면 시비르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로망스의 대 육군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던 그였지만 이런 지독한 싸움은 난생처음이었다.

“총검을 쉬지 마라. 놈들에게 간격을 내주면 우린 끝이다. 야만인들에게 틈을 주지 마라.”

장교들이 독려하자 이반은 침을 뱉어내며 투덜거렸다.

“말이 쉽지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쉴 때는 쉬어주어야 한다. 계속해서 팽팽한 긴장감 속에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면 당연히 피로가 누적된다. 그 피로는 때로는 죽음을 불러올 정도로 무서웠다.

이반은 투덜거리면서도 총검을 당겨 쥐고 반사적으로 앞으로 내질렀다. 체격이 크고 근육이 있어 그의 일격은 둔중한 기사의 차징을 연상시켰다. 단 한 번의 찌르기에 적병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보통 전쟁에서 총검이나 칼, 총과 같은 살상 병기에 의해 죽는 자의 비율은 의외로 그리 높지 않았다. 많아야 3할 정도다. 실제 나머지 7할의 사망자를 결정하는 것은 세균 감염과 전염병이다. 특히 쇠붙이에 상처를 입은 자들은 파상풍 등으로 죽기 십상이었다.

“비키게.”

뒤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리자 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키가 큰 척탄병 셋이 서 있었다.

로망스 근위대를 본떠 황제가 만든 병과이긴 하지만 사실 키가 크다는 것 말고는 별 차이가 없었다. 황제에게는 ‘귀족 근위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척탄병이니 만큼 다른 병과가 하나의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기였다. 척탄병들은 손에 쥐고 있던 뭉툭한 것들을 이반 앞으로 내던졌다. 그것들이 보루 아래로 떨어진 순간 둔탁한 폭발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수류탄의 폭발을 처음 본 이반은 다소 놀란 눈을 크게 떴지만 그 폭발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수류탄의 폭발을 신호로 각 포대와 포함들이 밀집된 신의 병사들을 향해 포문을 개방했다.

루시 포병들의 숙련도는 루시 군대의 일반적인 수준과 많이 달랐다.

그들은 에우로페에서도 수준급에 속하는 포병 교육 기관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육군 내에서도 많은 배려를 받아 장비 면에서 에우로페 유수의 군대에도 손색이 없었다.

일부 병과에서는 그것을 빗대 전쟁성(육군성)을 가리켜 포병성이라 부를 정도였다. 포병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개입하자 화력의 격차가 갑자기 벌어지기 시작했다.

꽝. 꽝. 꽝.

포탄이 잇따라 쏟아진 자리로 말과 병사가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유산탄부터 산탄, 심지어 아이언 볼에 이르기까지 쏠 수 있는 포탄은 종류 별로 다 날아왔다.

공격군이 대단히 밀집되어 있어 뭘 쏘아도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야만인들을 다 죽여 버려! 쓸어 버려!”

루시 보병들이 환호성을 내긴 했지만 전투는 여전히 위태로운 양상이었다. 워낙 공격자의 수가 많아 정작 보루 앞에서는 루시 보병들이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

“질긴 놈들. 웬만하면 물러날 법도 한데.”

이반이 총검을 휘두르느라 뻣뻣해진 어깨를 주무를 때, 신의 군영에서 이상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기세 좋게 공격을 가하던 신의 군대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가 싶더니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했다.

장방은 공성의 승리를 자신했다. 비록 막강한 적의 집중 포화를 두드려 맞고 있었지만,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곧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의 생각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은 그런 시간을 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적이 양 측면으로부터 보루를 나와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목표는 바로 이곳입니다.”

“뭐, 뭐요?”

장방은 갑작스런 말에 당황했다. 대군을 거느린 터라 안전한 곳에서 전투를 지휘한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자신의 사령부가 공격받는다는 사실은 패닉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천리경을 보시지요.”

휘하 지휘관이 건넨 망원경을 뺏어 든 장방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내 그는 자신의 지휘부를 목표로 천천히 다가오는 적의 피라미드 방진을 보고 침을 삼켰다.

적을 보루에서 꾀어내었으니 만사가 잘 돌아간다고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공격받는 상황은 결단코 원치 않았다.

“후퇴를 명령하시오. 당장 후퇴를.”

“아니, 대인. 지금 후퇴를 하면 공성에 실패하게 됩니다. 구태여 희생을 감수해가며 대군을 투입하신 것 아닙니까?”

“수뇌부가 공격을 당하면 군은 머리를 잃게 되니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요. 당장 전 병력을 회군시키시오.”

“대인. 그리하면 우리는 피해만 보고 보루 공격에 실패하게 됩니다.”

장수 하나가 반박하고 나섰다. 사령부가 비록 공격을 받는 입장이긴 하지만 지휘부를 보호할 병력이 없는 게 아니다. 공성을 벌인 주력 병력이 돌아올 시간을 벌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그는 무책임하게 작전을 바꾸려는 사령관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이 싸움의 승부처라는 걸 아는 모든 장수들이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때 장방이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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