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위험한 거래 (2)
장수가 격론을 쏟아냈지만, 장방의 귀에 그의 이야기는 한 음절도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결론은 내려져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소. 일단 끌어낸 양이들의 병력을 치는 것이 먼저요.”
장방의 말은 이론상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이는 상당한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함락이 가능한 보루를 남겨두고 부대를 물리는 것은 병사들의 사기를 깎기 쉬웠다.
약속된 승리를 허망하게 날리는 것만큼 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주는 것도 없었다.
“하오나 대인.”
“그만하시오. 내 이미 명을 내렸소. 명을 전할 거요, 말 거요?”
장방이 인상을 쓰자 지휘관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북을 쳤다. 이어 피리 소리가 울리자 개미떼처럼 성벽에 달라붙어 공격을 퍼붓던 효기영의 병사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산을 이룬 시체가 남았다.
피해는 피해대로 보고 승리 직전에 철수를 하게 되었으니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장방은 그 상태로 적 방진을 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실책이었다. 루시 군대는 이미 기병의 장단을 계산하고 방진을 치고 나온 입장이었다.
그들은 한차례 기동을 감행한 기병이 높은 전투 피로를 안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런 기병으로 잘 갖추어진 대 기병 방진을 상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다. 더구나 방진에는 낙타 진에 대항할 수단으로 포병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흰 방진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기병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도륙을 당했다. 지친 데다 전의까지 사그라진 기병으로서는 무리한 전투였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자기편이 우세를 점한 것을 본 보루의 루시 군대까지 성문을 열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루시 군대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교과서처럼 실현했다. 처음에는 보루가 모루의 역할을 맡으며 적의 압력을 받아냈고, 그 틈을 타 양 측면에서 망치와 같은 공격을 가했다. 후에는 양 측면에서 적 기병을 다시 붙들고 정면에서 망치 같은 일격으로 전환했다.
전투에 모범적인 사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그 사례에 해당되었다. 졸렬하기 그지없는 전투 지휘를 보여준 장방에 비해 루시는 ‘운’이 따라주긴 했지만 기본 전술에 충실한 정석적인 대응으로 승리를 따냈다.
‘가장 단순한 것이 승리를 만든다.’라고 말한 프리지아의 프레드릭 대왕의 격언 그대로였다.
양옆도 모자라 앞으로부터도 공격을 받게 되자 효기영의 기병들은 그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채, 대군의 단점만 폭로했다. 기동할 공간을 상실한 채 밀집된 군대는 그저 죽음만 받아놓은 도살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슬슬 반 포위 상태를 이루며 압력을 가해오는 루시 군대에 밀린 신의 군대는 산 같은 시체를 남기며 정신없이 뒤로 밀렸다.
지난날의 승리가 거짓말이었던 양, 일방적인 학살의 연속이었다. 전투의 최종국면에 이르러 루시 보병들이 방진을 해체하고 총검을 쥔 채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신의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전열을 흐트러트리고 뒤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날 신의 군대는 단일 전투에서 최대 규모인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참담하게 무너졌다. 루시는 이 승리를 활용해 우시리 강 남안에 멈추었던 보루 공사를 보다 남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루시의 남하가 신의 목줄을 죄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루시가 제국에 전쟁을 걸다니. 북방의 둔한 곰들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군요.”
고대 루미풍으로 만들어진 탕 안에 앉은 로스실트가 혀를 찼다.
“신이 굴복해 놈들에게 부동항이라도 허락하는 날엔 겨우 구축한 질서가 무너지겠지요. 우리 내각이 걱정하는 점도 그 부분입니다.”
로스실트가 손짓을 하자 알몸의 미녀가 다가와 차가운 포도주 잔을 건넸다.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지요.”
“손을 쓰기 전에 루시가 승리했을 수도 있단 게 문제 아닙니까?”
수상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이곳 론디니움과 동방의 신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만큼 정보가 상당한 시차를 두고 넘어온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지나친 걱정입니다.”
“지나친 걱정이라니요?”
로스실트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곤 미녀에게 잔을 건넸다.
“제국이 약하다곤 하나 루시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 금융계가 놈들의 철도에 투자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전쟁 수행 능력엔 한계치가 있지요. 염려하시는 것처럼 승부가 갈릴 가능성은 없습니다.”
“육군에선 루시의 승산을 꽤나 높게 보던데, 의원님의 생각은 다르시군요.”
“그자들의 생각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실제로 루시 땅에 들어가 본 사람이 자본가들입니까, 아니면 육군 장교들입니까?”
잠재적 적국의 장교들을 자기 나라 땅에 들일 멍청이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자본에는 국경이 없는 법. 앙숙 같은 루시와 왕국 사이에도 자본은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다.
그 말에 수상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우리가 개입할 시간은 남아 있다라. 하하하.”
“설사 조금 늦었다 해도 이쪽에서 손을 쓰면 됩니다.”
로스실트가 단언했다.
허약하기 그지없는 루시 산업계에 대한 대출을 회수하고 압력을 가하면 그만이다. 자존심 강한 루시가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해도 타협점을 이끌어내는 정도는 가능하다.
부동항.
그 양보할 수 없는 이익선 코앞에서 멈추게 하면 결국 왕국의 승리다. 곰들은 재주만 실컷 부리고 쓸모없는 변경의 황무지 조금을 얻고 멈출 것이다.
“의원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놓입니다.”
로스실트는 웃으며 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그래도 적당히 손은 써주셔야 합니다.”
“당연한 말씀을. 의원님께 모든 걸 맡길 만큼 이 나라 정부가 무능하진 않습니다. 페테르에 특사를 보내지요.”
수상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
루시 군대가 남하를 거듭하던 어느 봄날, 범선 한 척이 금포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돛을 활짝 편 범선이 돌아오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루로 마중을 나왔다.
강주의 행상들과 그 식솔들이 나루터를 메우자, 그에 호기심을 느낀 서역인들도 구경을 나왔다.
지난 전쟁에서 강주에 체재하는 서역인들에 대한 각종 제한이 철폐된 터라, 구경을 나온 서역인들 사이에는 여성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라비아도 그런 여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에우로페에서 나고 자란 이였지만, ‘일자리’를 찾아 동방으로 온 약혼자를 따라 이 먼 이역만리까지 동행한 참이었다.
신기한 눈으로 화려한 비단 옷차림의 동방 남녀들을 구경하던 라비아가 붉은 입술 위로 손수건을 가져갔다. 치열이 고르지 않아 이를 내놓고 싶어 하지 않던 처녀는 말을 할 때마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는 습관이 있었다.
“누가 오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온 걸까요?”
약혼녀의 조용한 물음에 예케는 그녀가 보던 사람들의 옷차림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 모두 고위 관복을 입고 있으니, 그걸 보면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까만 관복에 관모를 쓴 사람들이 보이지요?”
“네. 별로 폼은 나지 않지만요.”
약혼녀의 대답에 예케는 웃고 말았다. 사실 그도 그런 생각은 했었다. 문제는 그의 나라 연합왕국의 법관들도 그에 못지않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저들은 모두 강주의 행상들입니다. 모두 관직을 가진 상인들이지요.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은 아마 그 식솔들일 겁니다.”
“상당히 신분 있는 사람들이군요. 돈을 주고 관직을 사는 귀족들 같은?”
라비아가 연합왕국의 매관매직을 입에 담자 예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약혼자의 대답에 라비아의 눈이 다시 강주 행상들을 훑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하단 거죠?”
“저들 중 제일 부가 떨어지는 이가 후안 공작 정도의 부를 가졌다고 해야겠지요.”
예케가 후안 공작을 입에 담자 라비아의 눈이 커졌다. 후안 공작은 세이비아 왕국의 국부를 한 손에 거머쥐었던 서역의 전설적인 거부였다. 그런 대단한 부호가 저 자리에서 서도 말석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거상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올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러네요.”
두 남녀가 범선을 바라보는 동안, 배가 나루 근처에 닻을 내렸다. 배에서 보트가 내려지더니 수십 명의 서역 사내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저 배는 서역 상선인가요?”
“서역 상선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행상 전원이 나와 맞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동방 무역 회사의 대반이 강주를 방문해도 행상 한 사람 마중을 나온 적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회사의 집행 위원회 전원이 방문을 해도 행상 전원이 나올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럼 저 사람들은 누구죠?”
라비아의 물음에 예케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강주에는 서역인들을 휘하에 두고 부리는 한 사람의 거상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강주 오호관에서 부리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럼 이번에 배에서 내리는 사람은 그간 부재중이었던 오승도란 사내일지 모르겠습니다.”
“오승도요?”
예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도는 뱃전에 선 채로 마중을 나온 행상 사람들을 보았다. 중도에 미리 도착 일정을 통보한 터라 마중을 나올 줄은 알았지만, 모두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한 차였다. 언제 도착할 줄 알고 미리 나온단 말인가?
그는 그리 생각했지만 이는 강주에 대한 그 자신의 강력한 영향력과 위태로운 정세를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작금 강주에 닥친 위기를 해결할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기에 모두가 눈이 빠져라 그의 귀국을 기다렸다.
“서방님. 아버님도 나와 계세요.”
“어찌 모두가 나와서 기다리시는 것인지.”
승도는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모두가 나와 그를 맞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큰일이 생긴 걸까요?”
“그러지 않길 바라야지요.”
승도는 반은비와 함께 보트에 옮겨 탔다. 힘센 서역 선원들이 양쪽에서 줄을 잡고 보트를 내렸다. 숙련된 선원들이라 보트의 하선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선원들은 보트를 내리기가 무섭게 노를 잡았다.
천천히 뭍에 가까워지자 오유도와 반진유가 대표로 앞에 섰다. 그들의 얼굴이 확연히 가까워지자 승도는 보트에서 양손을 모아 읍을 했다. 보트가 나루에 닿자 그들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거라. 원로에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오히려 유람이라 생각하고 편히 다녀왔습니다.”
“할 말도 많고 들을 말도 많으니 어서 가자꾸나.”
반진유가 반은비의 손을 잡고 앞장서는 동안, 승도는 오유도와 나란히 그 뒤를 따랐다. 네 사람이 나루를 건너자 행상과 식솔들이 몰려왔다.
“오 대인.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대인이 돌아오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행상들이 꺼내는 말에 승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오유도를 돌아보았다.
“임경문 대인께서 강주를 비우는 일이 생겼다.”
“임 대인이 소환되셨단 말입니까?”
승도가 급히 반문하자 오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북적이 준동하여 그 일을 맡아 북으로 올라가셨다.”
“북적이 진동하다니요?”
승도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에 당황했다. 제국 내부만 소란스럽지 않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당혹스런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처음에 소식을 듣고 놀랐다. 홍모귀들이 날뛰니 북적들이 기회라 여긴 모양이더구나.”
북적은 예로부터 어느 나라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승냥이처럼 끼어들어 물어뜯는 모습을 보였다.
루시에서 최고의 군주라 추앙하는 ‘유리 대제’만 해도 그랬다. 어린 군주가 즉위한 스와질란드를 물어뜯기 위해 ‘삼국 동맹’을 체결하고 북방 전쟁을 일으킨 것이 바로 유리 대제였다.
“하면 현임 강주 관리사는 누구입니까?”
“연운이란 자인데 위해충과 별다를 바가 없는 인물이다. 돈을 찔러주어 우리 뜻대로 구슬리고 있다만, 임 대인이 있던 시절처럼 편하지 않구나.”
“여러 모로 일이 꼬이겠군요. 일단 들어가서 자세한 말씀을 듣겠습니다.”
승도의 말에 행상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강주 나루를 가득 메웠던 행상들과 그 식솔들이 오씨의 장원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
임경문의 부재는 실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가장 많이 바뀐 것을 들라면 관리들의 부패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임경문이 재직하던 기간 동안 기강이 바로 서 있던 것이 예외에 속하는 시간이었으니,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잠시나마 탐관들의 횡포를 겪지 않고 지내온 행상들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신임 관리사 연운은 강주가 전비 부담을 짊어지지 않는다는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돈을 우려낼 기회로 보았다.
강주양행이야 아문으로 이동했다지만, 강주의 모든 것을 아문으로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서 연운은 사소한 것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임경문 공덕비’ 건설이었다.
공덕비는 전임 관료가 떠나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 지역 유지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이미 임경문이 떠나던 당시에 행상들이 돈을 각출하여 작은 공덕비를 세운 터라, 따로 만들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공덕비 공사를 통해 한몫 챙기려고 마음먹은 연운은 공사를 다시 하자고 주장했다.
사소한 건수를 시작으로 탐관이 발호하자 행상들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때문에 아문의 연합왕국 측에 약간의 돈을 주어 그들의 위세를 빌려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신의 관료들은 그런 점에서 ‘불굴의 의지’를 가졌다고 보아도 좋았다.
“하면 지금도 그자들이 발호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오유도의 이야기를 듣던 승도가 입을 열자 행상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물이고 외부의 영향력이고 동원할 수단은 다 동원했음에도 나날이 그 요구가 커지니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대답에 승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승군은 우리 쪽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습니까?”
승도가 다른 것을 묻자 오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탐관들도 왕국 장교들이 수장으로 앉아 있으니 선뜻 손을 대지 못하더구나.”
“예상하지 못한 이득이군요.”
승도가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왕국 장교들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신의 한 수가 된 셈이었다.
탐관들이 돈을 우려낼 수단으로 신식 의용군 지휘관 자리를 탐냈을 것이 뻔했지만, 왕국과의 충돌까지 감수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