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25화 (125/425)

제125화. 위험한 거래 (3)

“하나 여러모로 우리 일에 일부 차질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추진하는 일들만 해도 그 서류 처리는 모두 연운과 그 심복들의 손을 거쳐야 하니 말이다.”

서류 처리는 전적으로 관료들의 손을 거쳐야 하는 문제였다. 제국법에 따라 절차를 밟아 처리해야 하는 것들은 ‘얼마나’ 기름칠을 하느냐에 따라 처리 속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곤 했다.

행상들은 그것을 알기에 돈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출혈을 감내해야 했다.

“하면 한 가지 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책이라면?”

오유도가 묻자 승도는 한 가지 생각을 입에 올렸다. 노회한 상인은 생각할 수 없지만 정치가인 그는 가능한 발상이었다.

“강주 주변에 위기를 조장할 생각입니다.”

“위기를 조장하다니? 그 무슨 소리더냐?”

“예로부터 겁이 많은 자들은 불이 난 곳에 머물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충분히 겁을 주면 제 발로 강주에서 나가게 되겠지요. 연합왕국에 단순한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터트릴 것을 제안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승도는 대담한 발상을 입에 담았다. 정략가들은 위기를 이용해 입지를 다지는 경향이 강했다. 그것은 승도 역시 자주 사용해본 수법이었다.

국민적인 신망이 실추될 때면 적당한 상대를 골라 대외적인 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이라니?”

“연합왕국은 지난 전쟁에서 얻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을 겁니다. 이번 참에 그들에게 일을 한 번 더 벌릴 것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소소한 충돌 같은.”

“양이들을 강주 근방으로 끌어들이잔 말이더냐?”

“별로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아문 쪽과 입을 맞추고 금포강을 항해하는 왕국 상선을 향해 대포를 한두 발 쏴주면 그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그 책임은 모두 현임 강주 관리사란 자가 질 테니, 그는 물러나든지 겁을 먹고 도망가든지 양자택일을 하게 될 겁니다. 왕국 쪽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낼 기회이니 이 제안에 응할 테고요.”

“그건 무서운 이야기로구나. 그리하면 난이 터질 수 있지 않겠느냐?”

거상에게 전쟁은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하여 그런 발상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난이 터져도 강주에 여파가 미치진 않을 겁니다. 연합왕국의 생리를 안다면 그것은 쉬이 장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거대한 식민 제국을 거느린 왕국은 먼 극동에 힘을 투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 무력으로 신을 굴복시킬 정도는 되어도 직접 지배를 할 역량은 되지 않았다.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 된다고 하더냐. 하물며 전쟁이다. 그것은 함부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하나 탐관들에게 그저 끌려다닐 수만은 없습니다.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우리 오호관이 행사해야 합니다. 판은 우리가 짜고 우리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승도는 작금의 중대한 시기에 사소한 일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고 여겼다. 변혁의 시기에 일이 지지부진해지면 그만큼 그 이후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음.”

아들의 단호한 대답에 오유도는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인가 아들의 결단력은 그 자신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버님. 망설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돌아와서 이 상황을 보고 생각한 해결책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정녕 그런 위험한 길밖에 없더냐?”

“상행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것을 얻고 싶다면 그만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법입니다.”

“하나 이번 일에는 강주의 안위가 걸렸다.”

“그 강주의 안위를 지키려면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아들이 답을 재촉하자 오유도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녕 그 길밖에 없는 것이더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승도는 그 부분에선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반란이라도 획책한다면 모를까, 지금 단계에서 그리할 수는 없으니 그 선택은 그의 선택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오유도는 한참을 망설였다. 이것은 아편 무역 못지않은 위험한 도박이 될 공산이 있었다.

“좋다. 하면 일을 어찌 꾸미면 좋겠느냐?”

비로소 아버지의 입에서 동의의 뜻이 나오자 승도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일을 꾸밈에 있어 결코 꼬리가 밟혀선 안 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연합왕국 측의 손을 빌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일이 잘못되었을 때 연합왕국이 우리를 흉수로 지목하고 책임을 덤터기 씌울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여 강상의 선박을 포격한다면 그 대포를 밀수해오는 것부터 왕국의 철저한 개입을 유도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발을 들이면 그쪽에선 결코 우리에게 책임을 넘길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안전장치입니다.”

이 안전장치란 것은 서역에서 종종 사용하곤 했던 수법이었다. 승도 본인은 신성 동맹의 국가들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그 여로에 있는 ‘중립국’들에게 비스킷을 포함한 군수물자의 제공을 요구한 바 있었다.

그렇게 군수물자를 제공하면 그들 국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로망스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로망스가 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자신들도 지기 때문이었다.

즉, 같이 손을 더럽히면 이쪽을 물어뜯기 어려워지는 것이 정치의 더러운 속성이었다.

“두 번째는 대포를 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연합왕국 상인을 통해 부랑자들을 고용, 이들에게 대포를 쏘도록 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이 부분 역시 연합왕국의 손을 빌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네 말대로라면 연합왕국이 하나부터 열까지 오물을 손에 묻히게 될 터. 그자들이 그리할 이유가 있겠더냐?”

아버지의 물음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역의 정치가들은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해진 임기 안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 첫째요, 둘째는 제한된 예산의 범위 내에서 그것을 해내야 한다는 것, 셋째는 그들이 오만하다는 것입니다.”

“오만하다?”

아버지가 마지막 약점을 입에 담자 승도가 설명을 붙였다.

“서역 정치가들은 동방을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들의 힘으로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이 그 머릿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니 오물을 손에 묻힌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같은 이유에서 그들을 이용해 네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보느냐?”

“제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저는 그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도록 만들어줄 뿐입니다. 제가 믿는 것은 제 계획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입니다.”

“이익이라.”

몇 푼의 이익이면 부모도 팔아먹는다고 욕을 먹는 서역인들이다. 그들의 이익을 우군으로 삼는다면 만사를 뜻대로 이끌 수 있다는 승도의 생각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오유도는 아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뜻대로 하라’고 말했다.

***

아문 총독부에 주재하는 서기관 해리스는 강주로부터 방문한 사내의 접견을 받고 상당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내의 요청은 당돌하다 못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자국을 침공해 달라고 요구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미친놈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는 혀를 내두르며 상대에게 말을 꺼냈다.

“함대를 금포강으로 보내달라니. 지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시오? 신과 왕국의 전쟁을 재개해 달라는 요청과 같소.”

“알고 있습니다. 해서 귀측이 협조만 해주시면 우리 쪽에서 명분을 만들어 드린다는 것이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침략자의 오명뿐이요. 가뜩이나 이번 전쟁에 대한 시선도 좋지 않은 판에.”

해리스의 말처럼 연합왕국 본토에서는 이번 전쟁에 대한 시선이 썩 좋지 않았다. 브루스 의원의 강경한 발언이 아니더라도 전쟁에 회의적인 시각들이 많았다.

그런 차에 또 일을 벌였다간 집권 보수당 정권은 말 그대로 ‘세계 제국’ 건설에 미쳐 날뛰는 전쟁광이 될 판이었다.

“전쟁을 꼭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단지 제스처만 취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엎어 치나 메치나 매한가지 아니요?”

“아닙니다. 귀측에서 이번 일을 평화적으로 처리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를 겁니다. 단지 ‘시위’를 한 번 한다는 것만 다른 것이겠지만요.”

건문의 말에 해리스는 팔짱을 꼈다. 이 미친놈의 제안은 왕국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들어주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전쟁의 결과에 불만족스러워하는 시선들이 많았다.

“우리 요구는 딱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귀측이 책임지고 대포와 포탄을 금포강 중류에 가져다주는 것, 철제 난간으로 봉쇄한 강 중류 위로 군함이 올라와 줄 것, 이번 사안에 대한 총독 명의의 서약서를 줄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건문은 다시 한 번 요구 사항을 입에 올렸다. 왕국에 명분을 주는 대신 자신들은 일이 커졌을 때, 발을 빼겠다는 의도가 여실히 보이는 요구 사항이었다.

“그것이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침략이란 말입니다.”

“한 번 침략을 해본 귀국에서 침략에 치를 떠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한 번 한 일, 두 번 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건문의 말에 해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보다 귀측에서 원하는 것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동방 사내의 말이 이어지자 해리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무엇을 말입니까?”

“통상장정.”

지난 전쟁을 매듭지으며 체결한 상경 조약에서 신과 연합왕국 양국은 추후 통상장정을 체결하여 분쟁의 소지를 없앨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녹록지 않았다. 제1차 통상장정, 일명 금포 통상장정을 체결하여 차후 관세 문제의 추가 협상 등에 대한 논란은 끝냈으나, 내륙 통항 등을 포함한 민감한 문제들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신에서는 이에 대해 논의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협상 일정에 대한 계획조차 내놓지 않았다.

금포 통상장정으로 왕국 쪽의 요구를 들어줄 만큼 들어주었으니 더는 들어주기 싫다는 의사표현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왕국 입장에서는 ‘통상장정’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문제라 할 수 있었다. 새로운 통상장정을 체결하여 신에 대한 무역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않고는 지난 전쟁의 뒤처리가 끝났다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해리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딱 잘라 말했다. 확실히 외교에서 무력 일변도로 가는 것은 국민에게도, 국가에게도 좋지 않았다.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세이비아의 몰락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근 한 세기 이상을 쉬지 않고 전쟁만 벌였던 세이비아는 신대륙의 은과 금을 수백 만 리라씩 퍼오던 전성기에 이미 재정 파탄에 직면해 있었다.

전쟁 일변도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 국가의 파국은 모든 정치가들의 머릿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지름길도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건문은 여유로운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가능한 시급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는 왕국의 입장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그 지름길이 몹시 위험하게 들립니다. 굳이 그 길을 고를 이유가 없습니다.”

“정권을 내놓을 거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총독 각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식민 성 장관이 임명하는 총독들은 모두 정권을 장악한 정파의 사람들이었다. 내각의 핵심인 장관 자리부터가 정권을 창출한 정당의 의원들 몫이다.

그러다 보니 각지의 총독들은 기본적으로 집권 정당의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 정권에 이익이 된다면 충분히 제국주의적인 길도 고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기관의 입장은 다소 달랐다. 임명직 관료인 총독과 달리 식민 성의 행정 관료들은 정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일하는 쪽이었다. 정치인 출신이 아닌 이상 총독 자리를 꿰차기 어려우니, 굳이 정당에 충성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각하께선 생각이 다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무력시위를 하며 신과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진 않으실 겁니다.”

“명분이 없을 때의 이야기 아닙니까?”

건문이 다시 원점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해리스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통상장정 건으로 신과 충돌할 의사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난다면 충분히 해결이 될 거라 믿으니까요.”

“그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어째서요?”

“최근 북적이 북방에서 남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계실 겁니다.”

건문의 말에 해리스가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거랑 이 건이 무슨 상관이란 거요?”

“상관이 많습니다.”

“무슨 뜻이요?”

“북쪽이 소란스럽다면 제국 정부가 남쪽에서 통상 문제에 응하지 않을 구실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사소한 구실로도 협상을 미루는 제국 정부인 터라 그럴 개연성은 충분했다. 해리스도 내심 그것을 염려하던 터라 그 말을 들으니 입맛이 썼다.

“하지만 전쟁이 아주 길어지진 않을 거요.”

“그럴 겁니다. 전쟁엔 끝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왕국의 국익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건문이 묻자 해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이익이 침략으로 잃을 국가 위신보단 중하지 않을 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침략이 아니라 정당한 ‘조처’가 될 겁니다.”

“정당한 조처?”

“상선이 포격을 받는다면 엄연히 보장된 금포강의 자유 통항이 막히는 일. 왕국 입장에선 자유로운 군사 행동이 될 겁니다.”

“하나.”

아무리 법적으로 보장된 것이라 해도 타국에 대한 무력 개입임은 변하지 않는다. 해리스는 건문의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건문 역시 이 이야기에 왕국 쪽이 쉽게 넘어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아문으로 떠나오며 오승도가 단단히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연합왕국 쪽에선 이쪽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이익이 있더라도.’

‘어째서입니까?’

건문이 그렇게 반문했을 때 승도는 이렇게 답했다.

‘체면 때문입니다. 강대국은 약소국들과 달리 위신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지난날 우리 신이 조공책봉질서에서 천자의 존엄을 중요하게 여겼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설득을 하면 결국 넘어올 겁니다. 체면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연합왕국 정치가들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건문은 승도의 말을 떠올리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해리스의 얼굴을 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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