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족쇄 (1)
날씨는 맑고 푸르렀다. 쪽빛 하늘 아래 움직이는 것은 흰 물결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열과 오를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좁은 길을 따라 행군했다. 진창과 숲이 기동 가능한 거리를 좁혔기에 대열은 길고 얇았다.
장교들은 자신들의 좌측에 위치한 호수를 의식하고 있어 그쪽 방향으로부터 적의 공격이 가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시 측이 전장으로 선택한 분지는 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분지의 좌측면으로는 호수가 접하고 있었고, 우측으로는 산지가 자리하고 있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은 남북을 관통하는 도로 하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루시 측에서는 적의 공격이 가해진다면 남쪽으로부터 가해질 것이라 예단했다. 군사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판단이었다.
느릿느릿 남하하는 대열의 선두에는 흰 제복에 훈장을 매단 여자가 있었다. 아름다운 갈색 말 위에 탄 여자는 제법 숙련된 티가 나는 장교였다.
남자들이라면 군문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에 대해 자신의 실력만 고려해도 좋았다. 하지만 여자는 군문 진출에 부정적인 사회의 시선까지 이겨내야 했기에 실력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여성이기를 포기하는 독기. 남자 이상을 해내야겠다는 각오 없이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나타샤는 피식 웃고는 망원경을 들었다. 먼저 앞서간 공병대가 진지를 구축해 두었는지 긴 호가 여기저기 깊게 파여 있었다. 주도면밀한 군의 작전 준비는 만족스러웠다. 적만 나타나 준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다.
그녀는 망원경을 내리고는 바람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겼다. 섬세한 귀가 훤히 드러나자 바람이 절로 코끝까지 와 닿았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상쾌하다기엔 조금 이상한 향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향이라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행군 속도를 높인다. 급속 행군이다.”
나타샤는 꺼림칙한 느낌을 털어내기 위해 병사들이 보다 빨리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인간은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급속 행군이다. 속보로 행군한다!”
뜻하지 않은 명령에 루시 병사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무거운 군장을 짊어진 상태에서 행군 속도를 올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그들에게 명령 불복종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 가까웠다.
“백합이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오늘 선두 자리를 따내고 기분이 좋은 모양이던데.”
장교 몇이 수군거렸다. 예기치 않은 급속 행군 명령은 그들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들은 코끝에 닿은 묘한 냄새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인간은 집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의식하지 못하곤 했다. 더구나 다른 무언가에 정신을 팔고 있다면 더욱.
이내 그 묘한 향은 그들의 코에 익숙하게 다가왔고, 그들은 그 향을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자극적인 향을 잊게 해준 인체의 배려였지만, 그 배려는 그 주인을 위태롭게 했다.
선두가 분지에 들어설 즈음, 대열의 중간을 지휘하고 있던 니콜라예프도 분지에 가까운 협로에 다다랐다. 그는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폭풍전야의 긴장감을 억눌렀다.
“이곳만 해도 동 시비르보단 살긴 좋은 땅인데. 아무리 잘 싸운다고 해도 신이 여기까지 할양할 가능성은 없다는 게 아쉬워.”
“이 싸움을 이기고 총독이 10년을 노력하면 여기까지 접수하겠지요.”
“나도 그러길 희망하네. 그러자면 확실히 이겨 두어야겠지.”
니콜라예프는 희죽 웃고는 코트 자락을 여몄다. 바람이 스며들어 오는 것이 약간 차갑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호숫가라 바람이 거센지도 몰랐다.
“그건 그렇고, 나타샤에게 선두가 돌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백작께서 그녀를 총애한다는 소문이 사실일까요?”
“총애하는 정도 이상일지도 모르지. 자기 애첩에게 공을 세우게 해주는 속셈일지 누가 아나?”
니콜라예프의 말에 빅토르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스쳤다. 여성의 진출이 터부시되는 곳에서 성공한 여성에 대한 시기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 성공을 성적인 것으로 보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공작 가문의 수치로군요.”
“수치라고 할 것까진 없겠지. 서녀 정도는.”
일반적으로 에우로페 인들은 적자와 서자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서자에게도 계승권을 주었고 필요하다면 그 지위를 공인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지위는 언제나 팔푼이 정도로 보았다.
동방에 비한다면 그래도 관대한 처우이긴 했지만 한 끝 아래로 대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니콜라예프가 서녀의 일탈을 수치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빅토르가 그 말에 동의하려다 문득 냄새를 맡고 코를 홀짝였다. 그의 반응에 니콜라예프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아니, 무슨 냄새가 나지 않으십니까?”
“냄새?”
그의 반문에 니콜라예프는 미약한, 그러나 불쾌한 냄새가 대기 중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냄새는 그가 예전에 복무했던 제국 서남부에서 종종 맡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을 떠올린 니콜라예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까만 돌은 나프타 화염으로 이야기되는 악마의 병기에 들어가는 소재였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본 빅토르가 물었다.
“아시는 냄새입니까?”
“이건 나프타에 들어가는 검은 물의 냄새야.”
악마의 병기 나프타 화염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로 유명했다. 그 끔찍한 무기의 위력을 생각하면 이 냄새는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설마 야만인들이 화공을 생각했겠습니까? 이 지역에서 검은 물이 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까지 제국 북변에서 검은 물이 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네.”
“맙소사.”
전사 왕조차 낚아버린 계략을 간파하고 덫을 파는 적이라니.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일단 부대를 정지시키게. 당장.”
니콜라예프의 말에 빅토르가 급히 손을 들었다. 장교의 명령이 내려지자 걸음을 옮기던 병사들이 일제히 발을 멈췄다.
니콜라예프가 부대를 뒤로 되돌리라고 명령하려던 차에 호숫가 위에서 까만 연기가 몇 줄 올라왔다. 그것을 본 니콜라예프가 입술을 깨물었다.
“당했다.”
***
“불이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까만 연기가 훅 존재감을 드러냈다. 장교들은 갑작스런 불길에 당황하면서도 적의 위치를 찾아 주변을 살폈다. 건조한 계절이라지만 불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망원경을 쥔 나타샤는 전혀 경계하지도 않았던 호숫가에서 적의 그림자를 찾아냈다. 적은 교활하게도 나룻배에 탄 채로 화시를 날려대고 있었다. 심리적인 허를 이용한 완벽한 기습이었다.
나타샤는 적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낮에는 강렬한 햇빛 때문에 불을 피워도 그것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햇빛이 반사되는 호숫가라면 더욱 그렇다. 적이 의도하고 호수에 배를 띄워놓고 화공을 준비했다면 교활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위님. 적의 화공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훅 치밀어 오른 불길이 탐욕스런 혀를 날름거리며 그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대지에 깔린 석탄과 석유를 동력으로 삼아 그 기세를 키운 불길은 이제 큼직한 나무들까지 집어삼키며 도로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당장 병사들을 후퇴시켜!”
나타샤는 선홍빛 입술을 잘근 깨물며 차마 내리고 싶지 않은 명령을 입에 올렸다. 이대로 머뭇거리다간 모두 붉은 악마의 밥이 되고 만다.
장교 하나가 급히 명령을 전하는 동안, 나타샤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번지는 산불을 보았다. 산불은 한 번 일어나면 가장 무서운 공격자로 돌변하곤 했다.
거센 화마가 빠르게 다가오자 루시 병사들도 마음이 급해졌다. 가장 먼저 무거운 수레를 방기했다. 각종 보급품이 실려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으니까.
장교들도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 보급품을 하나하나 챙기다간 구워지기 십상이다. 장교들은 병사들이 보급품을 버려도 못 본 척하며 대열만 유지하도록 신경 썼다.
기본적으로 군대와 민간인의 차이를 든다면 조직력의 유무에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그 조직력은 빛을 볼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고대의 군대였다면 화공을 받는 즉시 조직 자체가 와해되어 수십만 대군도 공중 분해되었겠지만, 근대 군대는 그리 허술한 조직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장교의 명령에 따라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하지만 막대한 보급품을 순 손실하는 자체로 엄청난 손해였다. 기본적으로 보병이 먹어야 할 기본 식료품과 탄약, 그리고 피복이 불 속에 남겨졌다.
“저 많은 보급품을 싸워 보지도 않고 방기해야 하다니. 이럴 수는.”
“미련을 가지면 안 됩니다. 저 보급품을 끌고 가려다간 우리 부대 전체가 전몰하고 맙니다.”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저 많은 보급품을 날려버리면 백작 각하를 어찌 뵈라고.”
“패배는 병가지상사입니다. 이미 잃어버린 것에 미련을 가져선 안 됩니다. 엎질러진 물을 주우려 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다가오는 불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수레들을 바라보다 말의 배를 군화로 걷어찼다.
“화공으로 병사를 잡지는 못하겠군요.”
루시 군대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화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적의 눈을 피하자면 도로까지 석탄과 석유를 뿌려둘 수 없어 거리를 두고 작업을 해야 했다.
때문에 화재가 루시 군대까지 도달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미리 라이플 사수라도 몇 명 배치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그것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지금의 성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의 보급품을 상당 부분 불태워버린 이상, 적의 보급 문제는 상당히 커질 테니까요.”
헨들릭의 말에 승도도 수긍했다.
“그건 그렇고, 저들이 보급 수레를 부대 선두까지 끌고 온 것이 눈에 밟히는군요. 아무래도 바리케이드로 써먹기 위해 대열에 포함시켜둔 것인 듯도 싶지만.”
“바리케이드로 쓴다면 당초 저들의 계획이 지연전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헨들릭의 물음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지연전을 의도하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약간 미심쩍었던 부분도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적이 준비했던 것은 망치와 모루 전술. 이쪽을 회전에 끌어들여 일격에 분쇄하려 들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을 겁니다.”
“망치와 모루라고 한다면 좌측 통로로 들어간 부대가 단시간에 우측으로 도달해야 가능한 작전 아니겠습니까?”
헨들릭의 지적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망치와 모루 작전은 불가능했다. 전 부대를 한 방향으로 투입한다면 애초 그 전력을 십분 살리기도 어렵거니와 포위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하면 좌측으로 기병 전력이라도 집중해서 우리 뒤를 치겠다는 전략인 셈인데, 그럴 경우 적은 보병 전력만 가지고 우리 쪽 1만을 상대해야 했을 겁니다. 너무 무모한 계획인 듯싶습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저들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겠지요. 실제로 써먹지는 못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국을 너무 얕잡아본 작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두 시간은 대인의 전 병력과 맞서야 하는 입장인데, 임기응변 정도로 버틸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얕잡아볼 만하니 아주 틀려먹은 작전은 아닌 셈입니다. 정말로 전군을 가지고 이 덫에 들어가 주었다면 우리 병력 전체가 전몰했겠지요.”
“그들의 계산대로라면 그랬겠지만 대인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압니다.”
“하하. 오합지졸의 잡병들을 가지고 어찌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헨들릭은 손에 망원경을 든 채 불길로부터 정신없이 달아나는 루시 보병들의 모습을 훑었다. 총 한 번 쏴보지 못하고 달아나는 모습은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이번에 저들의 보급품 상당량을 손실시켰으니 앞으로 전투가 어떻게 돌아갈 거라고 보십니까?”
“애초 말씀하신 것처럼 유빙과 결빙이 찾아올 시점이 되면 저들은 몹시 심각한 보급난에 시달릴 겁니다. 그리되면 저들의 움직임도 멈추게 되겠지요.”
“그렇게 하면 우리는 군대를 훈련시킬 시간을 충분히 벌게 될 겁니다.”
둘은 무섭게 휘몰아치는 불길을 느긋하게 바라보다 말 머리를 돌렸다. 오랜 시간 여유를 부리기에 이곳은 상당히 위험한 장소였다.
***
연합왕국의 공사 하워드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1시간 걷기 운동을 한 다음,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정무를 본다.
생활이 규칙적이다 보니 그가 무엇을 하는지 보면 대충 시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덕분에 공사관의 연합왕국 사람들은 공사를 가리켜 ‘시계 공사’라 불렀다. 그를 보면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웃기지도 않은 이유에서였다. 공사도 그 별명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시간을 정확히 엄수한다는 것은 외교관에게 가장 큰 명예다. 그러니 그것을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공사의 털털한 반응 덕분에 ‘시계 공사’라는 별명은 공식적으로 쓰일 정도였다.
공사가 식사를 하는 시간에 맞추어 주재 무관 에버튼 백작이 그의 방을 찾았다. 공사는 나이프를 들고 닭고기 한 점을 썰어내다 말고 그것을 내려놓았다. 생활 패턴이 달라지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그였지만, 급한 보고에 있어서는 융통성을 발휘하곤 했다. 에버튼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에버튼이 보고서를 내밀자 공사는 외알 안경을 품에서 꺼내 눈에 끼었다. 눈이 침침해져 새로 맞춘 안경이었는데, 그 하나의 값이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었다.
공사야 부유하니 하나 사서 쓸 만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물건이기도 했다.
“신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뜻밖에 승전보가 빨리 들어왔군.”
“정확하게 말하면 교전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지요.”
백작은 교전에 대한 공사의 평을 정정했다. 공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생각보다 전쟁이 빨리 끝날 수도 있겠군. 그렇지 않나?”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요.”
“그렇게 상황이 변하면 곤란하지. 곤란해.”
공사는 반쯤 썰어두었던 닭 가슴살을 다시 나이프로 베어내며 중얼거렸다. 왕국 측이 이익을 제대로 얻어내자면 전쟁이 좀 더 길어질 필요가 있었다.
전쟁이 길어져야 신에 차관을 많이 떠넘길 수 있을 것이고, ‘전쟁 불안’을 이유로 북경에 공사관 경비대 등의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사는 닭고기를 한 입 입에 밀어 넣고는 우물거렸다. 매콤한 양념이 입가에 묻었다. 공사는 그것을 냅킨으로 훔쳐내며 무관에게 말했다.
“이번에 거둔 신의 승리는 방금 내 입가에 묻은 얼룩과 같지. 우리에게 불필요한 승리였다는 말이네.”
“양자 모두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질질 끌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건 어려울 거라 봅니다.”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전쟁에 끼어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개입할 수는 있겠지.”
“어떤 방식입니까?”
백작이 묻자 공사는 감자를 포크로 쿡 누르며 답했다.
“신이 좀 더 승리를 만끽하게 내버려 뒀다가 내부에서 문제를 하나 만들어주는 것이지.”
“문제를?”
“어려운 것도 아니네. 신에게 제공하기로 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의 무기를 원래 제공가대로 넘겨주면 해결된다네.”
“그것이 어떻게 해결책이 된다는 건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에버튼의 물음에 하워드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곳 신의 관리들은 말일세. 아주 부패하고 썩었다네. 그런 자들이 여분의 무기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은가?”
“무기를 빼돌린다?”
“맞네. 하지만 빼돌리는 정도로는 그들에게 별 이익이 되지 않겠지. 그자들은 그걸 팔아넘길 걸세. 민간으로 말이네.”
“일부러 빼돌리도록 여분의 무기를 주고 무기 유출을 조장한다. 그것이 신 내부에 문제가 되겠습니까?”
“충분히 된다네. 현재의 신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그리 강하지 않아. 무력만 뒷받침된다면 정부에 반기를 들려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지. 그런 자들이라면 이런 호기를 그냥 넘기려들지 않을 것이네.”
“탐관의 손을 빌려 반정부 세력들에게 무기를 넘겨주고, 제국에 분쟁을 유발한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상대를 흔들어놓는 방식이군요.”
에버튼은 공사의 교활한 방식에 감탄했다. 손 하나 더럽히지 않고 상대를 흔드는 수법이라니.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외교관의 그것이라기보다 정치가의 노회한 술수 같다.
“맞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리할 필요는 없지. 아직은 신이 이길지, 질지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이 건은 신이 유리해졌을 때 시작해도 늦지 않네.”
“과연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변수가 있긴 하겠군.”
“변수라면?”
에버튼이 묻자 공사가 보고서를 툭툭 두드렸다.
“이 승리를 만든 자. 오승도 말일세.”
에버튼도 그에 공감했다.
오승도. 그자를 구실 삼아 공사관에 남았던 만큼 그 능력을 모르지 않았다.
“그자는 지난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왕국 섬을 공격해 우리의 허를 철저하게 찌른 사내. 어떤 식으로든 일을 만들지 몰라.”
하워드는 지난날 직접 마주한 오승도의 역량을 상당히 높게 보았다. 그라면 충분히 이적을 이루어낼 수 있다. 그렇게 판단했기에 그를 적당히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하면 그를 견제해야겠군요. 하지만 어떻게?”
무관의 물음에 하워드는 어렵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치에서는 사람 하나를 견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네. 누군가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면 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주면 되지. 그렇게 하면 자연히 그 성공을 질시하는 자들이 견제의 손길을 뻗치게 되니까.”
“제국 정계를 이용해서 견제한다. 정론이지만 위기 상황에서 장수를 쉽게 쳐내겠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적당한 시일을 골라 황궁을 방문해 욜란드 경의 저서 쿠데타를 총리대신에게 넘겨줄 생각이네. 물론 번역본으로.”
공사의 태연한 이야기에 에버튼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쿠데타’가 보여주는 교훈이 하나 있다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에게 군사력을 맡기고 ‘통제’를 하지 않을 때 정부는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총리대신이 그 저작을 본다면 좌천시킬 수도 있겠군요.”
“그렇진 않을 거네. 하지만 감시를 붙여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하게 될 것이네. 군기대신이나 그에 맞먹는 직분을 가진 고위급 관료로. 그런 자가 오승도의 옆에 붙으면 그 역량은 그만큼 반감되겠지.”
공사는 그 정도는 되어야 오승도가 원하는 대로 전쟁이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설령 오승도가 패한다고 해도 왕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 그 정도는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공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바라보는 오승도의 역량은 그런 제약 속에서도 루시를 상대하기에 충분하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정도만 되어도 확실히 오승도란 변수는 통제 가능하겠군요.”
“물론 그렇다네. 그럼에도 백 퍼센트라고 확신하기는 어렵겠지. 그는 그런 괴물이니 말일세.”
“괴물이라.”
에버튼은 공사의 표현을 곱씹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자의 의도대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다. 백작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