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족쇄 (2)
“이번 화공으로 우리는 시간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승리에 만족하고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제국 영토에서 북적을 격퇴하는 것까지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지금의 승리에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승도의 말에 지휘관들이 동의의 시선을 보냈다. 모두가 강주군에서 복무한 자들이기에 그가 무엇을 경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승리를 기뻐하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군데군데 앉아 있던 보좌역, 즉 구 지휘관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아첨을 좀 하여 승도로부터 점수를 좀 따보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승리라기에는 민망한 성과입니다. 여기에 의미를 둔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적의 보급품이 상당량 타버렸다곤 하지만 병사들이 굶주릴 정도로 식량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부족한 분량이야 짐말을 좀 도살하여 그것들이 소비할 귀리와 콩을 병사들의 몫으로 돌리면 된다. 말이 소비하는 식료품이 병사들이 소비해야 할 분량의 10배 이상이기 때문이다.
기동을 하지 않는 입장이라면 짐말도 굳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 얼마든지 선택 가능한 옵션이었다.
“봄에 수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참령 하나가 묻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수세를 취하는 것은 꼭 필요한 때만 해야 합니다. 병법에서도 공격자는 3배의 우위를 점한다고 말합니다. 수성이라면 몰라도 넓은 야지에서 교전을 벌인다면 공격자의 우위는 절대적입니다. 적의 전력이 강해진다 해도 이쪽의 병력만 제대로 운용할 수 있다면 오히려 공격적인 태세를 취해야 합니다.”
승도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믿는 공세주의자였다. 지금까지 그 여건이 따라주지 못해 그러지 못했을 뿐, 그 본성은 호전적인 전략을 선호했다. 그의 롤 모델인 프레데릭 대왕과 판박이인 셈이다.
“하면 대인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승도의 답에 지휘관 하나가 물었다.
“봄이 오면 전군을 거느리고 북상할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적당한 기회를 보아 회전을 걸 겁니다.”
“전군을 동원해서 말입니까? 지금 진정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보좌역을 맡은 구 지휘관들은 모두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단 한 번의 회전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것도 강병으로 이름난 양이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시 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어찌하여 그런 무모한 작전을 고려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면 뒤가 없습니다. 전군이 몰살할 수도 있는 선택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전쟁은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병가에 이르길 뒤를 돌보지 않는 계책만큼 무모한 것도 없다 하였습니다.”
“그 무모함도 때론 필요한 법입니다. 옛 장수 연단을 생각하면 쉬운 일입니다.”
고대에 활약한 명장 연단은 압도적인 규모의 대군으로부터 침공 받은 자국의 방어를 포기하고 역으로 적국을 침공해 들어가는 수법을 구사했다.
그 덕분에 연단의 조국을 침공한 대군은 왕의 구원 요청을 받고 급히 회군했다.
무모함이 나라를 살린 예시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제국의 존망이 위태로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장 하나가 반문하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위태롭습니다. 작금의 신은 당장 한 푼의 돈도 국고에 없어 하나부터 열까지 돈을 빌려 쓰는 입장입니다. 남의 나라 돈을 빌려 쓰는 입장에 전쟁을 질질 끄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차관 상환을 요구하면 그땐 이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조정에서는 그 원금을 갚기 위해 세율을 높일 것인데, 그리되면 백성의 분노가 폭발할 터. 제국이 위태로워지고도 남습니다. 하니 제국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전쟁을 조기에 끝내는 것이 옳습니다.”
승도의 대답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승도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흘러 넘쳐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 대한 연합왕국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염려해서다.
“하지만 적이 회전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 지적 또한 일리가 있었다. 회전은 쌍방 모두가 결전을 원할 때에 성사되게 마련이다. 어느 일방이 원한다고 해서 회전이 성립되지는 않았다.
“그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적이 교전을 회피하는 전략으로 일관할 경우에는 교전을 걸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이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상대의 보급을 교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적은 지나치게 남하해온 상황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적을 회전으로 끌어낼 방법이 있었다.
승도는 바로 그 점을 찔러 결정적인 기회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
승도를 괴롭힌 것은 무능한 정부와 눈앞의 적만이 아니었다. 그를 무엇보다 괴롭힌 것은 부패한 제국의 사회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누적된 부정부패는 사회 전반에 만연하여 그 해악은 전쟁 수행에까지 악영향을 주고 있었다.
“쌀과 건초의 보급이 지연된단 말입니까?”
승도가 서찰을 쥔 채로 묻자 그것을 가져온 상인 유연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뭘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조운선이 사고가 나 남방에서 조달키로 한 쌀과 밀, 건초의 수송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다시 조정에서 물자를 징발하기로 하였으니 한 달 정도는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 이전의 왕조들만 하더라도 수도에서 북방의 군대에 직접 물자를 보급한 전례는 없었다.
수도 인근의 인구 부양 능력 자체도 빈약한 데다, 수도가 그 자체로 막대한 소비 도시로서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왕조들은 상인과 위탁 계약을 맺어 먼 지역으로부터 물자를 사서 북방에 직접 제공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신 역시 왕실 창고의 은을 대금으로 지불하는 대신, 상인이 직접 물자를 북방으로 수송토록 하는 경사 연례 은 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와 물자 수송 계약을 맺은 상인들이 정상적으로 구매한 물자를 가지고 수도까지 운송을 해오는 과정에서 ‘고의’로 조운선을 침몰시키는 사고를 저질렀던 것이다. 침몰 사고를 일으키기 전에 정상 물자를 빼돌리는 것은 물론이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한 제국 정부의 감시 감독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패한 탐관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연이 된다, 지연이. 그렇게 되면 병사들에게 먹일 식량이 모자라게 됩니다. 그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을 부를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여 대인께 이렇게 인사를 드리려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인께서도 상인이시니 저희 사정은 훤히 아실 것이고. 잘 좀 봐주십시오.”
유연이 웃으며 비단주머니를 슬며시 찔러주었다.
“흐음.”
승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찰을 다시 펼쳤다. 콩과 밀, 쌀을 포함하여 무려 2달분의 식량이 수장되었다고 한다.
그 양이라면 그걸 빼돌린 상인 놈은 못 해도 은자 2만 냥 이상은 앉은 자리에서 벌었을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승도는 그 뻔질뻔질한 얼굴을 보고는 서찰을 탁 내려놓았다. 사정을 다 아는 상인인 만큼 더 용서가 되지 않았다.
화를 낼 수 없다면 상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을 찌르는 수밖에 없다. 바로 이문이다.
“액수가 작군요.”
승도가 툭 던진 한마디에 유연이 손을 비볐다.
“액수가 작다 하시면 절충을 해보겠습니다. 얼마나 만들어 드리면 되겠습니까?”
“오만 냥.”
“오, 오만 냥이라고요?”
유연의 여유롭던 표정이 굳어졌다. 이문을 한 톨도 남김없이 다 긁어내고도 모자라 이번에 투자한 비용까지 합쳐야 나오는 거금이다.
그 당황한 기색을 즐기며 승도가 말을 이었다.
“뭘 그러십니까? 아는 사람끼리. 본관도 상인 출신입니다. 이문이 아주 쏠쏠하실 터인데, 그 정도 이익 정도는 배분해 주셔야 눈을 감아 드리지요.”
“그건 도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도가 지나치다니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쌀과 콩, 밀을 빼돌린다고 해도 그 정도 이익은 남지 않습니다. 어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저지르신 일 아닙니까?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로 보입니까? 나는 정북대장군으로서 북방을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이번 전쟁에 패한다면 무거운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그런 내게 귀하께서는 ‘패전’을 감수할 수도 있는 거래를 입에 담았습니다. 하니 그 ‘무례’를 눈감아 드리는 대가로 그만큼은 내놓으셔야지요.”
승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유연은 그 서늘한 음성에 침을 삼켰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오만 냥을 내놓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패가망신을 하시겠습니까?”
“대인. 이렇게 나오시면 다음 거래는 없습니다.”
“다음 거래?”
승도가 반문하자 유연은 기회라는 듯 말을 붙였다.
“적당한 선에서 말씀을 해주셔야 다음에도 인사를 올릴 것 아닙니까? 계속해서 이익을 받으시면 대인도 좋고 저희도 좋은 일입니다.”
“그건 유감이군요. 내 다음 부임지는 강주입니다. 귀하와의 거래에 목을 맬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대인!”
“그럼 어찌하실 참이십니까? 여기서 오만 냥을 내놓지 않으시겠다면 귀하를 굶주릴 병사들 앞에 내놓아야겠지요. 군심이라도 가라앉히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니 말입니다. 아마 높으신 분들도 천한 상인 하나 때문에 나를 들들 볶진 않을 겁니다.”
승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조정의 고관들은 상인들을 제 돈주머니 정도로만 여기지 ‘진정한 협력자’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그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상인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돈줄을 따라 올라와 죄를 캐물을 때다.
유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같은 상인이라 말이 잘 통할 줄 알았던 승도에게 협박을 당하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인. 저는 염상의 일원입니다. 신안 염상 말입니다. 저희 염상을 진정 적으로 돌리시려 하시는 것입니까?”
신안 염상의 명성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 강력한 경제력이 제국 제일이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승도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관료다.
그런 그에게 상인 집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염상이란 이름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이 통하는 상대가 있고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는 법입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승도의 반문에 유연의 말문이 막혔다. 오승도가 누군지 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아니 잘 안다. 제국 제일의 거상 가문의 후계자다.
거기에 반 씨의 자산까지 등에 업어 단일 상단의 자산으로 염상 전체의 반절에 육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돈은 모일수록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법. 그런 가공할 재력을 가진 괴물이라면 염상의 위협도 그리 두렵지 않을 법하다.
“하니 통하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지 말고 양자택일하기 바랍니다. 오만 냥을 내어놓든지, 일주일 안에 없는 군량을 만들어 오든지.”
승도의 요구에 유연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인의… 요구에… 따르겠습니다.”
“무슨 요구를 말입니까?”
“군량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만 냥을 내놓을 바에는 숨겨둔 군수 물자를 가지고 오는 편이 싸게 먹힌다. 승도는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인의 생리를 훤히 아는 터라, 그는 그들이 가져올 물자가 북경 근처에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물자를 다시 사오도록 조정으로부터 위탁을 받아도 남방으로 가서 물자를 구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숨겨둔 물자를 그대로 가지고 오면 운송비를 그대로 남겨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승도도 상인이기에 그 같은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딱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가보세요.”
승도는 군상 유연을 내보내고 서찰을 등잔불 위에 올렸다. 천천히 타들어가는 서찰을 바라보았다.
‘제국은 썩고 부패했다. 적은 하나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적 루시. 등 뒤의 부패한 탐관. 그리고 썩어버린 제국 그 자체. 이번 전쟁을 이기자면 이 모든 적을 꺾어야 한다. 난제다.’
그러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웅의 자격을 타고 난 자라 할지라도 그 같은 시련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역사가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었다.
승도는 가족이 보낸 서찰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