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타타르 (2)
“보급 기지 건설이 좀처럼 진척이 없다. 이거 곤란한데.”
승도는 서찰을 집어든 채로 표정을 살짝 굳혔다. 전진 기지 구축은 처음에는 순조로웠지만 적지 깊숙이 나아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졌다. 이제는 그 진척조차 쉽지 않았다.
하비 대령은 그 같은 문제를 보고하며 타타르 기병의 위협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의 손에 이백이 넘는 보급 부대가 도륙이 났다는 보고를 받고 마음이 편치 않던 차였다.
“그놈의 타타르 기병들 때문이겠지요.”
헨들릭의 말에 임경문이 말문을 물었다.
“그자들이 무엇이기에 그리 방해가 되는 것인가?”
“소규모 교전과 약탈에서는 악명이 높은 자들이라 그렇습니다. 제국 북방의 야만족들과 비슷한 습속을 가진 자들이라 이해하시면 충분합니다.”
“야만족들이라.”
임경문은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국 북방의 유목민족들과 비슷한 습속을 가진 자들이라면 확실히 곤란한 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일정한 근거지 없이 돌아다니며 예상치 못한 곳을 찌르고 빠지는 자들을 상대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었다.
지난날 광활한 대륙을 통일한 신 이전의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들에게 고전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을 제거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승도는 표정을 굳힌 채 서찰을 구겼다.
“하지만 타타르 기병을 포착하여 격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쉬웠다면 루시와 우스만 등의 강국들이 그들에게 골머리를 앓을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쥐를 잡으려면 치즈가 필요합니다. 그들을 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승도가 묻자 헨들릭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타타르 인들이 전장에서 가장 갈망하는 것은 사람의 목이다. 루시 정부에서 그들이 수확한 인간의 수급만큼 수당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들의 전공에 필요한 목일 겁니다.”
승도 역시 그들의 습속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어 그 말에 동의했다.
“하면 보급 부대를 다시 보내며 덫을 만들어야 합니다.”
“미리 매복이라도 하신다는 겁니까? 하지만 타타르 인들의 눈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이 불리한 싸움은 철저히 회피하는 자들을 교전에 끌어들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승도도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보급 부대만 보냅니다. 그 보급 부대 그 자체를 덫으로 쓸 생각입니다.”
“보급 부대를 덫으로 쓴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가능합니다.”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역사에서 예를 찾자면 연합왕국의 국왕 에드워드가 로망스 인들을 기망한 수법 하나가 있더군요. 평범한 마차 보급 수송으로 위장한 무장 부대를 보내 로망스 인 게릴라들을 끌어들인 후, 한 번에 섬멸해버린 방법 말입니다.”
그런 수법도 있었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없진 않았다. 만에 하나 적의 위장 보급 부대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 이상으로 몰려올 때는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그것은 위험한 방법이 아니겠나? 양이들에게도 머리란 것이 있을 터인데.”
임경문이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사에서도, 전쟁에서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이문을 얻을 수 없습니다. 높은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많은 이문을 얻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번 전쟁의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그 타타르 기병을 치워야 합니다.”
승도의 말에 임경문은 수염을 매만졌다.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이문을 취한다.”
위험을 벗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상인이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써 이문을 취한다는 말을 쉽게 긍정하긴 어려웠다. 이것은 장사가 아니라 전쟁이다.
“보다 확실한 성과를 얻기 위해 제가 그 사냥을 직접 지휘할 생각입니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네. 자넨 일군의 총수일세. 그런 몸으로.”
“그 위험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북적을 몰아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대인.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난 강주 전투에 비한다면 그렇게 위험한 일도 아닙니다.”
승도가 강주 전투를 입에 담자 헨들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승도는 임경문과 상의 끝에 타타르 기병을 잡기 위한 ‘보급 부대’ 편성에 동의했다.
이틀 후, 승도는 삼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보급에 나섰다. 그 휘하 구성원의 대부분은 상승군 출신의 장원 무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휘관 대부분이 잔류하여 그와 동행한 장교는 작전을 책임진 하비 대령뿐이었다.
하비가 참가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 의식 때문이지 계약에 대한 신의성실 원칙을 준수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어쨌든 승도는 이 정도의 전력으로도 타타르 기병을 사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승도는 보급에 필요한 물자 대신 기병 사냥에 필요한 물자를 위주로 싣고 움직였다. 기병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한 철질려를 비롯하여 보병들이 쓸 전장식 라이플 등이 그것이었다.
승도는 천천히 보급 부대를 움직이며 수시로 기병을 앞뒤로 보내 적정을 살폈다. 한편으로는 적이 나타났을 때 즉시 대응이 가능한 지형도 눈으로 살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완만하고 평탄한 개활지라 하더라도 사소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도랑이나 작은 둔덕, 자갈길 따위가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활용하기에 따라 전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소규모 교전에서는 더욱 그랬다. 잠시 잠깐 전력을 활용하고 하지 못하고에 따라 실제 전투력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승도는 이 같은 점을 의식하며 움직였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이런 세심한 부분에 서투른 면이 있었다. 그 사소한 차이가 결정적인 전투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나타나기 쉬웠다. 명장과 범장의 차이는 때로는 이 작은 간극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타타르 기병의 움직임이 보입니까?”
막 전방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기병을 향해 승도가 물었다. 그 물음에 기병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교대해서 조금 쉬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기병이 군례를 올리고 물러가자 승도는 하비를 불렀다. 그는 지도를 펼쳐놓은 채로 도로를 따라 손가락을 그었다.
“적 기병이 일전에 우리 보급 부대를 습격한 위치 근처인데, 적이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적 쪽이 활동 주기를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하비는 지도를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기병의 정찰 주기를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보급 부대를 한 번 사냥했다면 오히려 주기를 좁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다른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그렇다면 적을 불러들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비의 말에 승도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연기를 크게 내는 겁니다.”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난다. 하지만 그것을 찾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부러 연기를 많이 낸다면 적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적의 주의를 지나치게 끌지 않겠습니까?”
“더 북쪽으로 가는 것이 걸리신다면 여기서 승부를 보는 것도 좋습니다.”
하비의 말에 승도는 지도를 품에 넣었다. 그는 왕국 장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병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불을 지필 준비를 하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젖은 나무로 불을 피웠으면 좋겠습니다.”
“젖은 나무를 쓰면 연기가 많이 나게 됩니다. 대인.”
“알고 있으니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승도의 말에 강주 무인들은 군소리 없이 그 명을 따랐다.
곧 타타르의 악마들을 불러들일 초대장이 푸른 하늘 위로 천천히 펼쳐졌다.
***
하비 대령은 품에 있던 회중시계를 보았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타타르 인들이 근방에 있었다면 벌써 나타났어야 옳았다.
그는 승도에게 그만 잘 것을 권했다.
승도는 옷깃을 여미고는 하비에게 먼저 취침에 들 것을 권했다. 경계에 나선 병사들을 돌아보며 승도는 옛 생각에 잠겼다.
차가운 칼바람 속에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삼삼오오 모인 병사들의 얼굴을 보니 한창 고생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승도는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숙영지를 한 바퀴 돌고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타타르 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승도는 한숨을 내쉬고는 막사의 가림막를 잡았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총성이 연거푸 울렸다. 승도는 급히 횃불을 집어 들고 숙영지 가운데서 피워진 모닥불가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북과 피리가 있었다.
마침 총성에 놀라 잠을 깬 병사들에게 승도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불라고 했다. 그 소동 속에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승도는 침착하게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야습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초병을 세워두지도 않았을 터, 초병이 있었기에 총성이 울린 것이다. 지휘관인 그가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자 불시의 소동에 놀란 병사들도 냉정을 찾았다.
최고 지휘관이 위기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는 군 조직의 통제력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아무리 막강한 정예 강군이라 하더라도 지휘관이 전시에 우왕좌왕하면 제대로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백전의 경험을 가진 승도는 그 같은 부분을 의식하여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음에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총을 뽑아든 채로 병사들에게 대열을 갖추라 지시하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비교적 신속하게 방어 태세가 갖추어지는 사이 최초의 기병이 숙영지 안으로 난입했다. 그는 뜻밖에 대항하는 적의 수가 많다는 것에 흠칫 놀랐다. 언뜻 눈에 들어온 라이플 사수만 수십이 넘었다.
단순한 보급 부대가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노련한 기병은 칼을 수직으로 내려쳐 왔다.
기병의 공격은 보통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공격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 공격 방식은 기본적으로 베기. 주로 머리에 출혈을 일으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도록 훈련받은 살인자가 경기병들이다.
무인들은 그 공격에 대항해 총검을 들어 올렸다. 위에서 내려치는 공격이 우세하다곤 하지만 총검 쪽이 훨씬 길이가 길기에 먼저 공격하는 쪽은 총검이다.
기병은 그것을 의식한 듯 말의 방향을 살짝 바꾸어 총검을 피하려 했다. 그때 승도가 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명사수는 아니었지만 불과 성인 장정 한두 사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비껴가는 기병을 맞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에우로페를 호령한 흉갑 기병이었다면 권총 탄 정도에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라면 신체의 주요 부분에 방어력을 집중하여 생명을 보호하도록 한 방호 구를 걸치고 있어 권총 정도로는 쓰러트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타타르 기병은 달랐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규전이 아닌 비정규전을 상정한 자들이라 기본적으로 화기에 대한 저항 능력이 거의 없었다.
설령 흉갑 기병과 같은 장비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그것을 입을 수는 없었다.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북방에서 금속 갑옷을 입게 되면 신체의 체온을 금방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말을 탄 기병 하나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뒤를 이어 제2, 제3의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꽁지머리를 길게 기른 야만인, 타타르 기병들이었다.
그들 역시 예상치 못한 적의 숫자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적인 보급 부대라면 외곽에 선 초병들 이외에 준비된 전투 병력은 없어야 옳았다.
두 번째 기병이 주변을 살피고는 크게 외쳤다.
“함정이다!”
승도는 그 말을 듣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소싯적에 루시 어를 교양으로 공부한 그였다. 적이 입에 담은 말 정도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적의 기만이다. 공격하라!”
갑자기 터진 정반대의 말에 뒤따르던 타타르 기병들은 혼란스런 얼굴을 하였다. 동방인들이 자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웠기에 어떤 말을 따라야 할지 몰라서였다.
물론 동방인들이라고 해서 루시 말을 모르리란 법이 없긴 했다. 그들도 국경에서 루시와 교역을 하고 협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태반이 역관이다. 역관은 무역에 손을 대는 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한 거부들로 관료만큼은 아니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결코 위험한 전장에 나오지 않는다. 야만인이라고 욕을 먹는 타타르 인들도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그럼 이게 함정이란 말인가? 아니면 공격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들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로 앞서간 기병을 따라 숙영지로 들어섰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단히 준비된 방진이었다. 총검을 빽빽하게 세운 채 기다리고 있던 보병들은 능숙하게 기병을 향해 총검을 뻗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상승군 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 공격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보병이 기병을 상대할 때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에 있었다.
거인처럼 보이는 기병의 높이, 압도적인 속도. 그것이 주는 두려움만 극복할 수 있다면 보병에게 기병은 무서운 적이 아니었다.
보병들이 일제히 총검을 내지르자 탄력 있는 말의 근육에 칼날이 박혔다.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발굽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는 옆으로 쓰러졌다. 한 번 낙마한 기병은 그저 사냥감에 불과했다. 말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상당한 데미지를 받은 데다, 수적으로 열세인 입장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뒤늦게 숙영지로 돌입한 타타르 기병 중대장 데미르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외곽의 초병들이 워낙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어 주력의 돌입이 다소 지체되었는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먼저 돌입한 부하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냥 공격도 아니고 야습을 가한 입장에서 도리어 괴멸당할 처지가 되다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미개한 동방 군대, 그것도 보급 부대 따위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놀랄 틈이 없었다. 금세 적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적병들이 총검을 쥔 채로 달려들었다. 데미르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일단 총격을 가했다. 그러면서 부하들을 향해 악을 썼다.
“함정이다. 모두 후퇴하라! 후퇴하라!”
혼란스런 상황이라 그 말은 잘 전달되지 않았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총성 소리, 알 수 없는 욕설과 비명 소리가 터지다 보니 한 번 소리쳐서 명령을 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가 다시 목청을 돋우려는 차에 승도가 같이 고함을 질렀다.
“적을 섬멸하라!”
똑같은 언어로 내려진 명령이었지만 그 내용은 꽤 달랐다. 데미르는 교활한 적의 행동에 이를 갈며 권총을 내던지고 칼을 뽑아들었다.
적은 이쪽의 명령에 혼선을 주려하고 있었다. 데미르는 말을 탄 채 승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승도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허깨비가 아니었다. 그들 중 몇몇이 재빨리 사격을 가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가해진 총격이라 어둠 속임에도 데미르의 전마는 몇 발의 총탄을 뒤집어써야 했다.
데미르는 그대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하나 그는 마상에서 나고 자란 전사. 타타르 인은 이내 낙상의 충격으로부터 회복되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갈며 승도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대체 뭐냐? 동방인 주제 어떻게 우리말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거냐?”
“타타르와 루시에 빚이 많은 사람.”
승도는 권총을 내던지고는 허리춤에서 천천히 칼을 뽑아들었다. 과거 타타르 인들은 루시로부터 후퇴하던 로망스 대 육군의 병사들을 가축 사냥하듯 추격하며 수도 없이 살육한 바 있었다. 그 과정에서 승도는 아끼던 부하들을 많이 잃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도 그의 부하들을 죽였다.
승도가 검을 마주 뽑자 타타르 인은 칼날을 쥔 채로 이를 드러내 보였다.
“애송이놈가 겁도 없군.”
승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상대를 보았다. 그가 익힌 검술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에우로페에서도 악명 높은 타타르 인과 맞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산을 점칠 수 없는 승부. 그렇기에 승도는 검으로 승부를 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둘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승도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그가 권총을 버린 것을 본 데미르는 상대의 움직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새로운 권총을 뽑아든 것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는 두 자루의 권총을 차고 있었던 것이다.
승도가 총을 뽑아든 찰나에 데미르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승도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데미르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저지력이 있는 탄환은 아니었지만, 총격의 충격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데미르는 이를 갈며 상대를 향해 증오 섞인 일갈을 던졌다.
“명예도 모르는 더러운 야만인 같으니. 칼로 이길 자신이 없는 거냐?”
명예로운 싸움에 권총을 쓰는 것에 대해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는 이들은 많았다. 낭만이 사라진 전장이라지만 아직 옛 기사들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하찮은 싸움에서 목숨을 거는 것은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용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승도는 적에게 권총을 겨눈 채 입을 열었다.
“명예가 목숨보다 귀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물며 네가 말한 것은 명예가 아니라 필부의 어리석은 만용에 지나지 않아. 지옥에 갈 때 잊어버리지 않도록 머리에 새겨주마.”
승도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