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출기불의 (1)
타타르 기병은 단 한 번의 야습을 감행하고 그 자리에서 전멸해 버렸다.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던 타타르 기병의 호전성이 스스로를 파멸시켰다 보아도 지나치지 않았다.
타타르 인들은 연기를 보고 오승도의 부대 위치를 눈치챘다. 그들은 상대를 일거에 섬멸시키기로 마음먹고 야간을 기해 야습을 가하기로 했다.
그 판단은 허를 찌르기에 좋았지만 반대로 그들의 작전에서 정교함을 빼앗았다. 야간에는 수신호로 지휘를 할 수 없어 전적으로 소리에 의존해 지휘를 해야 했는데, 그 효율성은 수신호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온갖 소음으로 들어찬 전장에서 명령 하나를 정확하게 골라듣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악기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병과의 특성상 여분의 장비를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적의 탈출을 우려하여 여러 방향에서 돌입하였으니 애초부터 조직적인 작전은 불가능했다.
이 같은 문제 때문에 타타르 기병들은 오승도의 ‘위장 보급 부대’와 충돌한 직후, 그것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기습이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오승도와 그 부하들은 총성을 듣고 이미 전투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더구나 그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가병 출신이 많아 야습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타타르 기병을 파멸로 인도했다.
“시체가 50구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생존자의 보고대로 정찰대는 완전히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타샤는 시체의 셈을 마쳤는지 전과를 확인해 주었다.
“50구라면 우리 정찰 기병 전체가 한자리에서 몰살당한 셈인가?”
우는 아이도 그치게 만든다는 지옥의 타타르 기병. 그 악명에 어울리지 않는 참혹한 패배였다.
“상대를 지나치게 경시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나 적을 과소평가하면 큰코다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기병 중대가 야습을 가하고도 패할 정도라면 상대가 평범한 보급 부대가 아니라는 뜻. 적의 덫에 걸려든 걸로 봐야겠지.”
보좌관은 숙영지를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필시 적은 완전히 준비된 전투 부대였음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타타르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부대가 자리한 진영도 그런 의도를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얕은 개울을 끼고 있어 야습을 받을 때 살얼음 깨지는 소리를 초병들이 들을 수 있게 한 것도 그랬지만, 수목을 미리 정리하여 기병의 접근을 눈치챌 수 있도록 한 조처도 그랬다. 야간이라도 횃불을 적당히 피워둔다면 상대의 야습을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 떨어진 권총 하나를 주웠다. 전장 정리(전리품 수거 및 유기 장비 수거 등을 의미)를 할 시간도 없이 적이 빠져나간 것을 보면 적도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굳이 보급부대를 가장해가며 최정예(타타르 기병을 상대할 정도라면 그 정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부대를 이 위험한 곳까지 보낸 의도가 수상할 수밖에 없다.
그는 권총을 매만지다 나타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적이 이곳까지 정예 부대를 보내 우리 기병을 낚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정찰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원론적인 이야기네.”
그는 손에 쥔 권총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로우랜드 공화국의 콜트 권총이다. 상당히 역사가 깊은 총기로 에우로페 쪽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이는 무기다.
그녀는 그것을 보다 의아한 눈으로 보좌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총을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에우로페 장교용으로 많이 쓰는 무기네. 하지만 타타르 기병의 무장에 포함된 무기는 아니지.”
“그럼?”
“연합왕국의 무기를 받은 놈들이 여길 다녀갔단 소리다. 그렇다면 그런 적의 핵심 병력이 위험을 감수하며 이곳에 온 이유가 단지 정찰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나?”
“정찰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보좌관은 뒷짐을 진 채로 남쪽을 바라보며 단언했다.
“우리 눈을 가리고 뭘 하려는 속셈이 아니겠나.”
‘신이 누군가를 멸하기 전에 그의 눈부터 멀게 하신다.’라는 격언처럼 전쟁에서도 상대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계략을 부리는 자들은 적지 않았다.
이는 전쟁의 기본 원칙만 생각해도 간단히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정보가 적다면 지휘관은 그만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고, 적의 의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거꾸로 적용하면 적에게 정보를 주지 않으면 이길 수 있는 요건을 쉽게 갖출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겨울 동안 대규모 부대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수레의 도움 없이는 대군을 지탱할 수 없다. 전쟁을 하려면 먼저 먹고 입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급품의 도움이 없는 전쟁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원론적인 측면만 놓고 보자면 눈이 쌓인 겨울철에 대군을 움직이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소규모 부대를 비효율적인 보급에 의지해 움직이는 정도라면 모를까. 즉, 제대로 이쪽을 위협할 만한 수준의 대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눈과 귀를 막아놓아도 불가능하다. 보좌관 역시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나타샤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찜찜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네. 하지만 겨울 동안 꼭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 실제로 적은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니까.”
레이놉스키는 그간 적의 보급 부대가 꾸준히 근처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구태여 위험천만한 곳에 보급 부대를 계속 보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적지로 말이다.
“하면 적의 보급 부대 자체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일단 그렇다네.”
“하지만 실제로 적이 물자를 가져왔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땅속에 파묻어둔 보급품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타타르 기병들은 우연치 않게 조우한 보급 부대를 사냥하고도 그들이 보급품을 실어 날랐다는 증거까지는 찾아내지 못했다.
“기만인지 아니면 보급품을 가져왔는지 단정하긴 어렵지만 내 생각은 뭔가 있다는 데 있네.”
보좌관의 말에 나타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적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태여 우리 지역까지 보급품을 구태여 옮겨두는 데 어떤 이점이 있겠습니까?”
“적이 정말 보급품을 갖고 왔다면 이점은 불 보듯 훤한 일이지. 이미 에우로페에서 유명해진 전략이니까.”
“이점이라면.”
“보급품을 적지에 확보해두는 것은 로망스 황제가 구사했던 전략이지. 적지에서 미리 상인들과 계약을 맺거나 지역 군주들을 협박해 보급품을 마련하게 해두고 자기 부대는 몸만 가지고 고속으로 기동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으로 보자면 이점이 아주 많은 방식일세.”
로망스 군이 구사한 놀라운 전격전의 비밀이었지만, 제정 말기에는 제국군 포로와 망명자들의 입을 통해 그 노하우는 전 에우로페에 폭로되었다.
하여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이 같은 진격 방식을 정교하게 가다듬는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물론 이 척박한 땅에서 그런 전략을 쓸 수는 없었다. 보급품을 미리 조달할 마을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을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급품을 미리 전진 배치시킨다면 그 같은 단점을 극복하고 군대를 고속 기동시킬 수 있다. 보좌관은 그 같은 이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적이 옮겨둔 보급품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속단할 순 없지. 간이 보급창 하나도 찾지 못했으니까.’
보좌관은 고개를 젓고는 병사들에게 전장 정리를 명하였다.
이미 눈과 귀에 상처를 입었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자신의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봄이 다가오자 승도는 공격을 서둘렀다. 물론 얼어붙은 대지가 풀리는 계절은 전투에 그리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지대가 낮은 곳은 물에 흠뻑 젖어 수레와 사람을 흙 속으로 끌어들이기 일쑤였다. 진창이 된 도로에서 수레를 동반하면 그만큼 기동이 둔해지기 쉬웠다.
승도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다수의 간이 보급창을 건설해둔 터라 초기 작전이 실시되는 동안은 수레를 동원하지 않고도 움직임에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수레를 이용한 보급은 한참 뒤쳐진 채로 따라올 예정이라 작전 개시 15일 후부터는 어떠한 보급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승도와 왕국 장교들은 15일 이내에 결정적인 전과를 거두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본다면 보급 한계에 작전 일정을 맞춘 위태로운 계획이었다.
작전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났다. 진창이나 다름없는 길을 따라 수천 명의 병사들이 길게 늘어섰다.
발을 맞추어 걷는 병사들 사이로는 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날 말을 타고 달렸을 효기영의 기병들조차 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기병더러 보병이 되라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네.”
“그럼 어쩌겠나? 위에서 내려온 지시가 그런 것을.”
기병들은 투덜거리면서 보병들 사이에 끼어 걸음을 옮겼다. 기병이 보병으로 전용되는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런 전례가 있던 에우로페에서는 기본적으로 기병이 보병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로망스 제국이 운영한 용기병들이 그랬다.
말을 병사의 운반수단으로 쓰고 전투 자체는 하마하여 진행한 용기병들의 경우에는 애초부터 걸어 다녀도 전투력에 별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효기영은 그렇지 않았다. 날 때부터 철저한 기병으로 훈련받은 이들이라 보병으로 전환 교육을 받는다 해도 하루아침에 익숙해질 리 없었다.
기병으로 발휘할 수 있었을 전투력이 보병으로 전환되며 대폭 반감된 셈이다. 전력의 감소를 염려하는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피해야 할 일이었다. 효기영에 말이 부족하다면 몰라도 말이 그렇게까지 부족하진 않았다.
패전 직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황실의 마장에서 말을 지원받아 기병들이 타고 다닐 말은 대충 수급을 마친 상태였다.
말을 포기한 건 순전히 보급의 제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건초나 콩, 귀리 등을 필요로 하는 말을 동반했다간 병사가 소비하는 식료품의 10배를 먹어치우게 마련이다.
그렇게 했다간 간이 보급창에 비축한 소량의 식량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부대 구성은 순수한 ‘보병’으로 채워졌다 보아도 좋았다. 병과의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상당한 약점이었다. 승도도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잠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쉬던 차에 승도의 수행을 맡은 무인 하나가 말린 참외 하나를 들고 왔다. 말린 참외는 위장이 불편한 이들에게 좋은 음식이었다.
뜨거운 물에 담그면 금방 신선한 과육을 되찾기에 겨우내 승도는 이것을 자주 먹곤 했다.
차로 내어 먹어도 좋고 말린 것 그대로 먹어도 좋았다. 그래도 승도는 과육 자체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여 물에 불려 먹는 것을 좋아했다.
보통 30분 정도 물에 담그면 과육이 정상적인 모습을 찾았는데, 휴식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승도는 반 정도 제 모습을 찾은 참외를 씹어야 했다. 참외를 마저 씹어 넘긴 승도는 지도를 펼쳐들었다. 그가 정한 행군로는 미리 설치해둔 간이 보급창을 따라 설정되어 있었다.
오래전 전략가들이 주장한 ‘근대 군대는 보급에 종속된다.’라는 격언 대로였다.
승도는 상대가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공격에 주안점을 두었다. 상대가 대처하려 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적은 자연히 제때 손을 쓸 기회를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유리한 전장을 고를 수 있는 쪽은 신이 된다.
전장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전투에서 유리한 입지를 가진다는 의미를 가진다.
상대가 교전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유리한 위치를 잡혔다는 것은 그에 응하지 않을 때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 어떤 형태로든 적에게 출혈을 강요할 수 있다.
‘문제는 생각한 만큼 행군 속도가 나오느냐. 이 부분인데.’
승도는 이 부분에서 자신이 없었다. 일일 10마일 진군 목표를 세우고 간이 보급창을 줄지어 건설했지만, 실제 병사들의 체력이 그것을 따라갈지는 미지수였다.
책상 위에서 이론상으로 고민한 전략은 언제나 그 자체로는 완전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쳤을 때 이론은 생각지도 못한 난관을 만나 쓰레기통로 들어가고 만다. 전쟁의 신이라 불리었던 그에게도 그런 경험은 많았다.
오래전 루시 침공에서도 그런 문제는 발생했었다. 병사들의 과도한 약탈 때문에 현지에서 충분히 징발할 수 있었던 물자도 제대로 확보할 수 없게 되자 ‘이론상’으로 문제가 없다 여겼던 진격 도상에서 식량 부족이 나타났던 것이다.
‘모든 계획은 종이 위를 떠나면 파국을 맞는다.’라는 격언을 인용할 필요도 없다.
지난 며칠간의 행군에서 겨우 목표를 지켰다는 점을 생각하면 병사들의 체력이 떨어질 시점부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더구나 적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도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문제지.’
루시 쪽은 겨울 동안, 타타르 기병중대가 격파당한 것을 계기로 정찰 활동을 대폭 축소하여 이쪽의 움직임에 대해 눈뜬장님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이쪽도 사정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는 점이다.
말을 가지고 왔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이쪽도 마필을 다수 가져오지 않아 제대로 된 정찰 활동은 불가능했다. 물론 말을 가진 병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숫자로는 진격 도상에 장애물이 있는지 정도를 확인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승도가 지도를 유심히 읽다 말고 그것을 품에 넣었다. 그는 말을 가져오라 이르고는 그것에 올랐다.
머리가 꽉 막히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는 직접 정찰병들과 함께 적정을 살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명쾌하게 떠오르곤 했다.
승도는 말고삐를 쥔 채 부츠로 말의 배를 가볍게 걷어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