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출기불의 (2)
기마 정찰은 본 부대로부터 10마일에서 15마일의 거리를 두고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정도 거리까지만 살피는 이유는 인간의 눈으로 탐지할 수 있는 시계의 가시권이 10마일 내외였기 때문이다.
그 범위 안에 적의 정찰병이 있다면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쉽기에 사전 정찰은 대개 아군의 10마일 범위 근처를 둘러보는 정도로 이루어지곤 했다.
승도는 주력 부대가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둔덕에 서서야 말을 멈추었다. 그와 동행한 정찰병들은 말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승도는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전방을 살폈다. 시야의 가시권에 드는 10마일 전방까지 꼼꼼하게 살피며 혹시 모를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까지 시선이 쭉 뻗었다. 보이는 것은 아직 녹지 않은 새하얀 눈과 어렴풋이 드러난 붉은 땅, 약간의 굴곡진 지형 정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평온한 세상의 풍경이었다.
느긋하게 망원경을 돌리던 승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언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승도는 주위에 손짓을 해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저기, 적 기마가 보이나?”
승도가 망원경을 건네며 묻자 정찰병들이 그것을 받아 쥔 채 전방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먼 거리에서 말을 몰아가는 적병 하나가 눈에 밟혔다.
승도는 그를 잡아오라고 지시했다. 그가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적병을 잡아오라고 지시한 것은 멀리서 망원경으로 본 그의 복장이 평범한 병사의 그것이 아니어서였다. 언뜻 보기에도 사병용과 다른 깔끔한 코트를 입은 것이 장교처럼 보였다.
대개 군대에서는 연락을 위한 업무에 장교를 보내곤 했다. 이는 사병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연락 업무에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하면 군에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문맹률이 높은 동 에우로페 군대에서는 사병을 믿고 쓰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연락 업무는 장교가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그가 발견한 자는 연락 장교일 가능성이 높았다. 승도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그를 잡는다는 것은 적의 의도를 알아낼 중요한 단서를 얻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승도는 정찰병들을 보내고는 망원경을 든 채 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한 무리의 기마를 발견한 연락 장교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적의 정찰병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했다. 이것은 승도가 구사하는 전격전의 이점 중 하나였다.
불과 며칠 전 수십 마일 떨어진 남쪽 숙영지에 머물던 적이 이곳까지 정찰병을 보내리라 상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력 부대가 이 근방까지 다가온 이상 정찰병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락 장교는 급히 말을 몰았지만 측면으로부터 부채꼴로 퍼져 다가오는 적을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장교는 권총을 뽑아든 채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말의 다리를 겨눈 채 기병총을 쏘아대는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마침내 말이 넘어지자 장교는 그대로 낙상하여 앞으로 굴렀다. 그런 그를 빙 둘러싼 정찰병들 중 하나가 말에서 내린 채로 총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적에게 포위당한 연락 장교는 자신을 겨눈 총구 앞에 손을 들었다. 달리 다른 수도 없었다.
곧 적 장교가 앞으로 끌려오자 승도는 상대를 우묵한 돌 위에 앉게 하고는 말을 걸었다.
“귀하의 계급은?”
승도의 물음에 연락 장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귀족의 체면을 지키려는 생각에서다.
승도가 그의 무반응에 피식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위는 중위인가.”
승도가 자신의 계급을 알아보자 루시 장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장교 계급이라는 것은 포로로서 상당한 가치를 가진다는 뜻을 가진다. 적에게 그런 굴욕을 당하길 원치 않았던 장교는 얼굴빛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연락 업무를 맡은 장교 같은데. 아닌가?”
루시 장교는 승도의 말에 정곡이라도 찔린 듯 입술을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협조하지 않겠다. 뭐, 좋습니다.”
승도는 루시 장교의 옷을 수색하게 했다. 병사들은 그의 의복을 샅샅이 뒤졌다. 장교의 체면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그런 낭만적인 풍습은 반혁명 전쟁 때부터 무시되어 왔다.
하물며 이곳은 에우로페가 아닌 동방이다. 동방에서는 상대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처우는 포로를 잡은 자에게 달려 있었다. 심하면 노예로 만들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
비록 수십으로 갈라져 있긴 해도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에우로페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병사들은 장교의 겉옷을 모두 벗겨 수색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본 승도는 속옷까지 모두 수색하라고 말했다. 에우로페의 직업윤리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때문에 다소 간의 명예가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제 일을 하려는 의식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다소 민망하긴 하더라도 속옷에 편지 등을 숨기는 일도 종종 있었다.
승도의 명령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속옷에 손을 대자 비로소 루시 장교가 입을 열었다. 하긴 더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이런 야만인들 같으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서신을 찾는 것이라면 그런 건 없다.”
“이제야 말을 하시는군요.”
승도가 태연하게 그 말을 받자 루시 장교가 이를 갈았다.
“내 신분은 장교다. 이런 대우를 받지 않을 자격이 있는 위치에 있어. 지휘관을 불러라.”
그의 거센 항의에 승도는 팔짱을 끼고 답했다.
“내가 지휘관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심문에 순순히 협조했다면 이런 경우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요.”
승도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꾸하자 장교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에우로페도 아닌 곳에서 ‘근대 이전의 신사적인 전쟁 룰’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승도는 태연하게 속옷까지 모두 뒤지도록 했다. 장교의 체면을 깡그리 무시한 조처였다. 물론 승도는 그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대가 앞으로도 두고두고 보고 지낼 연합왕국 쪽이었다면 손속에 사정을 두었겠지만, 곰돌이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습니다.”
물론 나온 것이 없진 않았다. 속옷에서 겨울철 동안 피둥피둥 쌀이 찐 이와 벼룩이 나왔으니.
장교들이라고 해도 씻지 않으면 그것들이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온수를 얻기 힘든 전장, 그것도 추운 혹한기에 제대로 씻고 지내는 사람이 더 이상한 법이다.
“아무것도 없다.”
승도는 팔짱을 낀 채로 장교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단순한 군인이었다면 그 같은 심리를 읽지 못했겠지만, 그는 상대의 심리를 읽어야 이문을 취할 수 있는 상인이기도 했다.
승도는 상대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을 여는 것은 쉽지 않을 터. 고문을 한다고 해도 정보를 얻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지난 이후에 얻는 정보는 그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승도는 장교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은 앳된 기운이 남은 젊은 귀족 남자였다. 세월이 좋았다면 고향의 따스한 밀밭에서 제 가족들과 승마나 하며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를 사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터이고 그는 승도와 신의 적이었다.
‘내가 강자라면 아량을 베풀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강자가 아니야. 약자가 아량을 베푼다는 것만큼 웃긴 소리도 없지.’
승도는 젊은 장교의 불안에 찬 표정을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냉혹한 결정을 내릴 수 없겠지만, 그의 지위와 입장은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만들었다.
“저자를 단단히 결박하세요.”
승도의 명령에 병사들이 우악스럽게 장교의 팔다리를 붙들었다. 그 거친 행동에 장교가 거칠게 항의했다.
“내 의복을 모두 수색하지 않았나?”
“물론 모두 수색하긴 했습니다.”
“그럼 날 고문이라도 할 셈인가? 그런 것은 소용없다. 나는 긍지를 가진 귀족으로….”
“고문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자존심을 모르진 않으니까요.”
승도도 에우로페 귀족들의 자존심은 잘 알고 있었다. 명예 의식에 찌든 귀족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에 언젠가는 입을 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당장 정보를 얻기 원했다.
“그럼 왜?”
“아직 살펴보지 못한 곳을 찾아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승도는 그리 답하고는 병사들에게 장교의 배를 갈라보라고 명했다. 그는 에우로페에서 전쟁을 벌이던 당시에도 몇 번 연락 장교들의 배를 갈라본 경험이 있었다.
대개 포로로 잡히기 직전 연락 장교들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신을 집어삼키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포로에 대한 명예로운 대접을 의식한 상대측에서 손을 쓰지 못하곤 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정보를 지키려 한 용감한 행동이긴 했지만, 귀족에 대한 증오를 지니고 전쟁을 일으켰던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행동은 존중해줄 가치가 없었다.
그는 그런 자들을 보면 기꺼이 배를 갈라 서신을 꺼내곤 했다.
그 정보의 가치가 낮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지만, 전쟁에서는 사소한 정보 하나도 수백, 수천의 목숨을 좌우하게 마련이다.
아군의 일부도 비정하게 내버릴 수 있는 승도에게 적의 목숨 하나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자, 잠깐. 내 배를 가르다니. 포로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건 야만인들이나 할 짓이다.”
루시 장교가 급히 말을 꺼냈지만 승도는 고개를 젓고는 명령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곧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승도는 뒷짐을 진 채로 그 죽음을 돌아보지 않았다. 전쟁에서 하나하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에 속했다. 사람의 목숨은 그리 값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죽음을 종이에 적힌 잉크 한 방울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괴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 모든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식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죽음에 대해 애써 무덤덤해지는 것으로 그 자신을 지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승도 역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일’이 끝나자 병사 하나가 피에 젖은 가죽 주머니를 승도에게 가져왔다.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서 밀랍으로 봉한 서신 하나가 나왔다.
그 내용은 과연 죽음으로써 지키려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사흘 후에 야만인들의 북상에 대비해 흩어져 있는 부대를 전부 소금강 유역으로 집결시킨다. 귀 부대의 이동 계획은….’
아마 적 쪽에서는 겨울이 끝나갈 즈음에 이쪽의 숙영지를 정찰하고 군사 행동이 가까워졌다고 판단, 그에 대응한 선제적 조처를 강구한 모양이었다. 하나 이렇게 정보가 새어나가면 그 계획은 그 자체로 전군을 파멸시킬 수 있는 죽음의 명령이 되고 만다.
그것은 진정 목숨으로 지킬 만한 정보였다. 하지만 그 도박은 실패했고, 그 정보는 승도 본인의 손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연락 장교는 개죽음을 한 것이다.
‘개죽음.’
승도는 문득 떠올린 그 생각에 입맛이 쓰다 느꼈다.
***
루시 군대는 소금강에 부대를 집결한 후, 북상하는 오승도의 군대를 상대할 작정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비교적 유리한 전장에서 방자의 이점을 누리고 신의 수적 우세를 상쇄하며 괜찮은 전과를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은 두 가지 변수로 인해 완전히 무너졌다. 첫 번째로 오승도의 북상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신속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 때문에 부대를 집결하여 유리한 전장을 골라 싸울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두 번째로 그들의 작전 계획이 오승도의 손에 넘어가버려 그들의 의도가 훤히 드러나 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의 의도를 알면서도 넘어가줄 바보는 없었다. 하물며 승도는 멍청함과는 거리가 먼 지휘관이었다.
이런 이유로 루시 군대는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였다. 작전 계획이 헝클어진 군대만큼 위험한 입장도 없었다.
“정오까지 부대 합류가 완료되어야 하는데, 꾸물거리는 게 너무 심하군. 그렇지 않나?”
알렉산드르 백작은 망원경을 쥔 채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가뜩이나 동계 이전에 끝내려던 전쟁이 길어진 것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은 판에 부하들까지 협조해주지 않으니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진흙 수렁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늦진 않을 겁니다, 각하.”
“하나 그런 사정 다 따지면 작전은 어떻게 계획하고 실행하나? 그저 말뿐이라면 그건 계획이 아니라 망상이지.”
백작은 혀를 끌끌 차고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집결지 전체를 한눈에 관제할 수 있는 둔덕 위에 가져다 둔 의자라 그곳에 앉아서도 부대의 합류를 지켜보기엔 문제가 없었다.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말은 되었네. 합류가 생각보다 늦어졌으니 전진 배치도 그만큼 늦어질 텐데, 적에게 전장을 선점당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나?”
“그리 높진 않을 겁니다. 적이 몸만 달려오고 있다면 모를까, 수레를 동반하고 있다면 그만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겁니다.”
“몸만 달려온다. 로망스 황제 이야기로군. 하긴 여긴 우리 루시나 본국이나 마찬가지인 척박한 땅이니 보급 없이는 무리지. 불태울 곡물도, 약탈할 마을도 없는 황무지에서 맨몸으로 내달릴 수 있는 군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레이놉스키는 그리 답하면서도 일전에 떠올렸던 가능성을 찜찜하게 여겼다. 보좌관의 대답에 미심쩍은 기색을 느낀 백작이 그를 향해 물었다.
“대답은 그리하면서도 아직 걱정거리가 남아 있나?”
“그건 아닙니다.”
“하면 인상부터 펴게. 곧 적 병력 전체를 괴멸시킬 것인데 뭐가 그리 걱정인가?”
백작이 어깨를 툭툭 치자 레이놉스키도 자신이 너무 과민했다 여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뭔가 의심이 들면 거기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게 나쁜 일은 아니지. 사소한 것에서 단서를 얻는 것은 참모의 가장 중요한 책무가 아니던가?”
“지당하십니다.”
보좌관은 백작의 말에 답하며 회중시계를 다시 보았다. 비싼 연합왕국 산 시계의 초침이 짤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정오로부터 네 시간은 족히 지났어. 곧 해가 떨어질 터인데. 이렇게 되면 하루 일정을 날려먹게 되나?’
레이놉스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순간 나팔소리가 울렸다. 전방에서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는 급히 망원경을 들었다. 백작도 뒤따라 망원경을 들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것에 시선을 주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석양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군. 제 시간에만 맞춰 나타났어도 잘 보였을 텐데.”
백작은 불평을 내뱉으면서도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내뿜는 불그스름한 광선 때문에 다가오는 군대를 제대로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들은 아군임에 틀림없었다.
계획상 이 루트를 통해 이곳으로 접근해올 군대는 아군 부대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적은 그런 루트를 취해 다가올 수가 없었다.
보좌관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둘은 잘 보이지도 않는 좁은 시계를 통해 저편의 군대를 한참 동안 보다 망원경에서 눈을 떼었다. 백작이 말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 친구들의 군복 색이 흰색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틀렸나?”
“아닙니다. 저도 흰색이 아닌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 저 친구들은 대체 뭔가? 진흙탕에서 구르고 오기라도 한 건가?”
백작의 반문에 보좌관은 다시 망원경을 쥐었다.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상대의 정체는 보다 분명해졌다.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저들은 이쪽에서 다가오기로 한 아군이 아님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저들은 단 하나의 수레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제국의 야만인들 같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보십시오.”
백작이 놀라 다시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이럴 수가.”
보좌관이 언덕 아래에 모인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동안,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적은 날개가 달렸는지 예상치 못한 곳에 출현했고, 완벽하게 이쪽의 작전을 찌르고 들어왔다.
‘위험하군. 매우 좋지 않아.’
백작이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레이놉스키는 급히 장교들을 닦달해 방어 태세를 갖추게 했다. 허를 찌르며 다가온 적과 대적하기에는 여러 모로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싸우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전투를 위해 모든 보급품을 이곳으로 이동시켜둔 터라, 여기서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났다간 전군이 그대로 굶어 죽을 판이었다. 지든 이기든 여기서 적과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포병대가 급히 방열을 하는 동안, 레이놉스키의 명령을 받은 장교들이 병사들을 다섯 개의 전열로 재편하였다. 각 전열은 둔덕을 중심으로 긴 선을 이루어 저지선을 구축했다.
그나마 미리 전개를 하고 있어 재편은 비교적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측면의 기병 연대는 예비대로 쓰기 위해 후방으로 물렸다.
적은 병력이나마 최대한의 효율성을 내도록 재배치를 했지만, 승산은 솔직히 그리 높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상정하고 전투 준비를 전혀 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대는 상당히 낮아 진창이 곳곳에 늘어서 있어 기병의 전투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고, 포병의 주 무기인 아이언 볼은 제구실을 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이런 요소들은 순수 보병만 몰고 들어오는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아 전력을 십분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황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얼핏 가늠해본 신 측 장병 숫자는 최소 육천 이상. 당장 눈에 들어온 숫자만으로 가늠한 것이니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다.
최대 일만의 적 전 병력이 몰려왔다고 가정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일만. 에우로페에서 벌이던 대규모 전쟁에 비하면 소꿉장난 같은 숫자에 불과했지만, 이곳 극동의 이름 모를 변방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대군이다.
‘놈들이 로망스 황제의 수법이라도 썼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진격할 수가. 기가 막힌 노릇이다.’
알렉산드르는 상대의 경이적인 속도에 침음성을 삼켰다. 하지만 적의 속도에 대한 경탄도 잠시였다.
당장 그에게 주어진 문제는 적의 속도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1만에 육박하는 적을 격파하고 루시 군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포대 방열 완료되었습니다.”
포병 장교의 보고가 올라오자 백작은 적이 다가오는 방향을 가리켰다.
“포격을 가해 적을 지연시켜라.”
효율성이 없다는 것은 백작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수선한 상태에서 교전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맞지 않는 위협이라도 해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다.
포병 장교가 거수경례를 붙이고 제 포대로 돌아가자 알렉산드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싸움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뜻하지도 않은 형태로 시작될 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