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회전 (1)
“북적들이 단단히 준비했군요. 허를 찔린 것치고는 대응이 괜찮은 편입니다. 다만 포병의 배치는 낙제점을 주고 싶다고 할까요?”
승도는 망원경을 쥔 채로 적을 품평했다. 포대의 배치는 그가 보기에는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보통 포병은 가장 안전한 진지의 안쪽에 방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적은 방열을 서두르는 바람에 최적의 입지를 고르지 못하고 다소 노출된 위치에 포대를 전개시킨 듯싶었다.
이런 배치를 하게 되면 돌입하는 기병에 의해 순식간에 포병대가 격파당하는 결과를 부르기 쉬웠다. 그나마 승도에게 제대로 된 기병 전력이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부대 배치 자체도 썩 훌륭한 편은 아닌 듯합니다. 양쪽 날개는 튼튼한 편이지만 정면은 상당히 부실해 보입니다.”
헨들릭의 분석에 승도도 공감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도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병력이 모자라다 보니 중원 혹은 날개 중 하나를 비워야 했는데, 어느 쪽이든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양익 날개에 힘을 주게 되면 중원이 붕괴해 부대가 분단당하고, 중원에 힘을 주면 양 날개가 부러지며 포위당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쪽에 힘을 실어주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평면적으로 부대를 배치했다간 어떤 가능성도 기대하지 못한 채 정면 힘 싸움에서 그대로 무너지고 만다.
양익 날개에 힘을 실은 것은 나름의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었다.
“양 날개에 힘을 실을 거라면 중앙 전열을 한 걸음 안으로 물려 충격을 완충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배려가 엿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급조한 티가 역력하군요.”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적을 어떻게 깨트리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승도는 적의 우측을 가리켰다.
“적 포병이 위치한 좌익은 기병이 없으니 공격해봐야 피해가 커질 겁니다. 따라서 우측부터 집중 공격해 반시계 방향으로 적진을 쓸어나가는 형태로 전투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전투 자체는 물론 전형적인 전열 전투로 진행할 참이었다. 하지만 병력을 집중하여 전열에 충격을 가하는 총검 돌격은 적의 우익부터 행하여 차례로 붕괴시킨다는 것이 승도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포병을 조기에 무력화시키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돌출된 상황이나 화력을 본다면.”
“아닙니다. 어차피 진창에서 포병의 위력은 반감되게 마련. 북적이 산탄을 대량으로 보유한 군대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리 부자들이라고 볼 수 없는 친구들이니까요.”
“일리 있는 판단입니다.”
진창에서는 산탄이 없는 포병은 무시할 수 있다. 이것은 악명 높은 고지 전쟁에서 증명된 전훈이었다.
고지 전쟁 당시 고지왕국의 왕 로버트가 이끌던 4만 대군은 구릉을 점한 데다 약 200문에 달하는 압도적인 포병 세력까지 보유하여 여러 모로 우세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공격자인 연합왕국의 게이츠 공작은 겨우 1만 5천의 군대와 100문의 야포를 가진 데다 저지대에 진을 친 채 도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누가 봐도 로버트가 승리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 전투에서 로버트는 철저한 대패를 맛보았다. 고지대에서 진창을 향해 쏜 포탄이 바닥을 튕기는 대신 그대로 진흙탕에 푹 박혔기 때문이다. 고지대를 점한 포병이 유리하다는 상식을 부정해버린 것이다. 그 변수를 만든 것이 바로 저지대의 진창이었다.
결국 고지대의 포병이 힘을 쓰지 못하자 저지대에 위치한 연합왕국 포병이 역으로 고지대를 두드렸고, 고지왕국의 군대는 애써 점한 유리한 진지를 포기한 채 늪지까지 내려와 지친 상태로 전투를 걸어야 했다. 그 결과는 압도적인 참패.
이처럼 진창은 포병을 무용지물에 가까운 수준으로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산탄이 없다면 그 살상력은 평상시의 1/3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니 승도가 무시하겠다고 판단할 만했다.
“전열은 18열 전열로 짜주시기 바랍니다.”
승도는 지형을 고려하여 대군이 지나치게 밀집되지 않도록 부대를 나누도록 지시했다. 전열이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 전장은 그리 넓은 곳이 아니어서 병력을 밀집시킨다고 하여 꼭 좋은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18열 전열이라. 전투를 꽤 길게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전장이 협소하니 단시간에 승부를 내긴 어려울 테니까요.”
승도는 좁은 전장에서 거의 만 하루에 걸친 공방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럴 경우 얼마나 많은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결정적인 시점에 제한된 예비대를 투입하는가로 승부가 갈리게 마련이었다.
승도 본인이 예비대 투입의 시점을 오판할 가능성은 없었으므로,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서로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투입할 카드가 많은 쪽이 유리한 것은 자명한 이치다.
헨들릭이 물러가자 승도는 자신의 옆에 늘어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전투 자체를 여유롭게 바라보는 하비와 북적의 강함을 경계하여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임경문, 그저 그를 믿고 신뢰하겠다는 듯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무인들. 각양각색의 얼굴이 보였다.
신의 군대는 18개의 전열로 부대를 나누었음에도 루시 쪽을 압도하는 규모를 자랑하였다. 루시가 하나의 전열에 약 300명의 병사를 배치한 데 비해, 신은 자그마치 500명이 넘는 병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물론 수적인 열세는 질적인 우세로 만회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같은 차이는 루시 측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가용 가능한 예비대의 격차는 너무 심했다.
마지막 카드로 준비한 기병 연대를 제한다면 5개의 전열로 18개의 전열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니 그 열세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승도는 여유롭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신호기를 든 기수들이 깃발을 흔들자 누런 군복을 입은 병사들의 일렬이 앞으로 나섰다. 일전의 오합지졸들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날이 선 군기가 엿보였다.
겉보기 하나는 그럴듯했다. 일시에 발을 맞추어 움직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열 자체는 몇 걸음 가지 않아 울퉁불퉁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훌륭하다고 봐줄 만했다. 단기 속성 훈련의 성과인 셈이었다.
천천히 적진을 향해 신의 병사들이 전진하자 루시 군대의 포병이 재차 포문을 개방했다. 종전까지 접근을 막기 위해 쏘던 아이언 볼은 병사들을 정확히 겨냥하고 날아왔다.
바닥을 튕기지 못하고 땅에 푹푹 박히는 탓에 제 위력을 내지 못하긴 했지만 살상력을 가진 포탄인 것은 분명한 사실.
운이 나쁜 병사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승도는 그 과정에서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염려하여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쉽게 전열을 흐트러트리고 달아나지 않았다. 약간은 겁을 먹은 기색들이 엿보였지만 아직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승도가 내린 엄포가 주효했다.
‘퇴각하는 자들은 그 가족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에우로페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연좌제다. 하지만 이곳 동방에서 그것만큼 무서운 협박도 없었다. 문제만 생기면 사돈에 팔촌까지 엮어 한 번에 목을 날려버리는 세상이니 그 말이 공갈처럼 들리지 않는 것이다.
병사들이 흔들리지 않고 전진하자 임경문이 승도를 보며 말했다.
“제국 수도에서 출발할 적에는 모두 오합지졸이라 들었지만, 지금 보니 제국 중앙군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군기와 기율을 갖춘 강군이 됐어.”
“강군은 아닙니다. 그저 겉치레만 그럴싸할 뿐입니다.”
승도는 그리 말하면서도 겉치레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겉으로 강해보이는 군대의 이미지 효과는 당연히 적에게 심리적인 위압감을 주게 마련이다.
총 한 번 쏴보지 못하는 허깨비 군대를 앞에 두었다면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방 맞더라도 반드시 다가와 한 방 쏜다는 느낌을 주는 적은 그 수가 적더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겉치레도 중요한 법이 아니겠나?”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능한 그런 요소를 전력의 일부로 포함해 계산하지는 않았다. 계량화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는 어찌 되겠나? 허를 찔렀다는 것도 알고 유리한 시간과 장소를 골라 결전을 강요했다는 것도 알지만 걱정이 많아 염려가 되니.”
임경문이 뒷짐을 진 채 말을 꺼내자 승도가 말을 받았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하늘의 뜻을 모두 얻어 전투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천문과 지리, 인사를 일컬어 하늘의 뜻이라고 말하는 동방 병법가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임경문도 승도가 무얼 말하는지 알았다.
천문이란 하늘을 살펴 고른 시간, 즉 싸우기 좋은 때를 말한다. 승도는 적의 의도를 읽고 전투 시간을 골랐으니 천문을 가졌다. 적이 준비하지 않은 전장을 골라 싸움을 걸었으니 이것은 지리에 해당되었다.
마지막으로 승도 본인이 준비한 사전 준비, 요컨대 인간의 노력으로 적의 허를 찔러 이 기회를 얻었으니 인사에 해당되었다. 이 3요소를 모두 얻었으니 가히 하늘의 뜻이라 칭해도 틀리진 않았다.
“하늘의 뜻. 정말 하늘의 뜻이 있어 북적을 멸하는 것이라면 좋겠네.”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
승도가 힘주어 대답한 순간 누런 군복들의 물결이 흰 물결과 약 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
두 군대가 마주한 순간 팽팽한 공기가 전장을 감쌌다. 대포알이 떨어지며 일으킨 짙은 포연이 병사들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긴장도 잠시, 장교의 명령과 함께 흰 군복을 입은 루시 병사들이 일제히 총구를 겨누었다.
유효 사거리라 보기에는 다소 먼 거리였지만 신의 병사들이 이 지점에서 멈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승도는 전열 전투의 중압감을 훈련도가 낮은 신의 병사들이 견디기 어렵다 보았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손실을 볼 수 있는 거리에서 교전을 하고 부대를 물림으로써 적의 피로를 높이려 하였다.
루시 쪽에서도 구태여 거리를 좁혀 공격을 할 정도로 여력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라서 신이 정한 교전 거리에서 전열 전투가 벌어졌다.
“사격!”
루시 장교의 명령과 동시에 라이플이 일제히 불꽃을 뿜어냈다. 요란한 총성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루시 쪽도 사격 통제는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병사와 장교의 자질이 연합왕국에 한참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차례의 사격이 휩쓸자 십여 명의 병사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교전 손실로 보자면 아주 적은 피해였다. 이 정도의 사상률라면 신의 병사들도 그리 겁먹을 수준은 아니었다.
한 번의 공격에 수십 명씩 죽어 나갔다면 그들도 긴장을 했을 테지만, 자신이 죽을 확률이 적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소 안정된 상태에서 총을 쥘 수 있었다.
누런 군복들이 총구를 겨누자 이번에는 루시 병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격!”
수백 발의 총탄이 인간의 육체를 물어뜯기 위해 날아왔다. 루시 병사들은 장교의 명령에 따라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그 무자비한 공격을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태반은 그리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를 입거나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할 것이다. 전열 전투의 경험이 많은 병사들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탄환이 명중한 순간,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있던 루시 병사들 사이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그들에게 쏟아진 총탄의 특성 때문이었다.
승도는 신대륙 독립 전쟁 당시 대륙 독립군이 둥근 공 모양의 탄환에 칼로 흠을 내어 가공한 방식을 알고 있었다.
이 총탄은 할로우 포인트 탄의 효시 정도 되는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공을 하면 인체 내에서 탄환이 산산조각 나며 살상력을 확실히 발휘하였다.
승도는 이 지식을 활용해 병사들의 탄환을 전부 손질하였다. 신대륙 독립 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일 루트가 없던 루시로서는 이 무지막지한 탄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부상자를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인도적인 무기였지만 전쟁에서 ‘효율성’을 중시하는 승도에게 그것은 별 고려 사항이 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루시 장교들은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혀를 내둘렀다. 쓰러진 병사의 숫자는 신 쪽과 비슷했지만 피해의 정도는 차원이 달랐다.
신은 잘 봐줘도 두셋 정도 죽을 것처럼 보였지만, 이쪽은 당장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다섯은 넘어보였다.
웬만하면 ‘치명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어깨나 허벅지 등에 총탄을 맞은 자들도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긴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적의 무기는 이쪽과 다른 것이 틀림없었다.
일선의 장교들이 충격에 얼어붙는 동안, 둔덕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알렉산드르 백작도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막 부대의 전개를 마친 보좌관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입을 열었다.
“지금 손실, 이쪽이 조금 더 많은 것 같은데. 이상하지 않나?”
“손실 말입니까?”
레이놉스키는 둔덕으로 올라오느라 첫 사격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는 백작이 건네준 망원경을 받아들었다.
마침 그가 망원경을 든 찰나에 두 번째 사격이 교환되었다.
“어떤가?”
레이놉스키는 사격을 지켜본 다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 쪽의 대열이 촘촘하고 화망이 두터워 총격 자체로 인한 사상자 비율이 엇비슷한 것은 상식 범위 안의 것이긴 합니다. 한데 이쪽의 사망자 비율이 좀 이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뭔가 적이 새로운 무기라도 들고 나온 것이겠나?”
백작의 물음에 보좌관이 고개를 저었다.
“적이 사용하는 총기는 연합왕국에서 만든 전장식 소총입니다. 제가 본 것이 틀림없다면 저쪽의 무기가 특별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면 저 결과는 뭔가?”
백작이 손가락을 뻗자 루시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대포로 인한 사망자를 포함해야 손실 인원이 비슷할 지경이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추론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소수의 천재들. 하지만 레이놉스키와 백작은 그 정도의 천재는 아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미치겠군. 설마 저들이 연합왕국의 붉은 코트들만큼 잘 훈련되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이해할 수 없는 적의 ‘놀라운 살상력’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이 같은 전투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백작은 네 번째 사격을 주고받는 보병들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이렇게 교전이 진행되면 우리 쪽은 절대적 열세 속에 병력을 소모하다 일순간 와해당할 걸세. 전투 방식을 바꿔야 하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당장 교전 거리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전열 자체도 압축하여 삼열로 재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무슨 의미인가?”
“적이 소모전에 자신이 있는 이유를 알았으니 그 방식을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단시간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적의 선두 전열들을 전부 쳐부수고 기병을 투입, 적 부대의 혼란을 유도해야 합니다. 모 아니면 도인 방법이지만 소모로 자멸하지 않으려면 이 수밖에 없습니다.”
“로망스 황제가 말년에 벌인 최후의 결전과 같군. 안스바흐의 처참한 실패 말이야.”
안스바흐 전투는 로망스 제정 말기에 벌어진 결정적인 일대 회전이었다. 당시 전투에서 로망스 제국 황제는 제국 근위대를 주력으로 한 6만의 군대를 가지고 연합왕국을 상대로 승부를 걸었었다.
이 전투에서 로망스는 예비대를 남기지 않고 전 병력을 일시에 쏟아부어 연합왕국 측의 잘 준비된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잘 준비된 연합왕국 육군의 강력한 방어와 로망스 지휘관들의 불협화음, 지형의 문제가 겹쳐 실패로 돌아갔다.
천재가 지휘한 돌격조차 실패한 전례가 있다. 백작은 바로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각하.”
백작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교전을 이어가다간 적에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승리를 헌납할 뿐이다.
“삼열로 전열을 압축한다면 적도 이쪽의 의도를 눈치챌 텐데,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할 수 있겠나?”
“자연스레 부대를 뒤로 물리며 전열을 압축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일시에 전 부대를 전진시켜 승부를 걸겠습니다.”
“좋아. 자네 뜻대로 하게.”
백작은 그 의견을 수용하였다. 어차피 달리 시도할 방책도 없었다. 보병이 적의 선두 전열을 와해시키고 돌파구만 연다면 기병이 기동할 공간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병을 삼열로 재편한다. 기수는 최전방 전열에 후진을 명하고, 제2 전열에 제1전열과 합류할 것을 전한다.”
그 명령에 기수들이 급히 깃발을 움직였다. 그사이 보좌관은 연락 장교를 불러 후미에 위치한 전열들에도 재편 명령을 전달하도록 했다.
백작은 기수들이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보다 지도를 꺼내 살폈다. 긴 대롱 형태를 한 좁은 평지의 중간에 위치한 것이 루시 군대였다. 그리고 그 입구를 막고 있는 것이 바로 신의 군대였다.
백작은 지형을 보며 피아의 위치를 대강 식별했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아군의 진격로를 확인하던 그의 표정이 일순 찌푸려졌다. 애초 이곳에 집결할 때 의식하지 않았던 장애물이었다.
“전열 서너 개는 넘을 수 있어도 그다음이 문제군. 하필 양쪽으로 작은 둔덕을 하나씩 끼고 있다니.”
전열 전투에서 고지를 점한 쪽이 얼마나 유리한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위치 에너지를 가지면 그만큼 탄환이 멀리 나가기 때문이다.
“적이 이쪽의 의도를 눈치채기 전에 이 둔덕까지 밀어붙인다면 협로는 전부 열 수 있다. 그다음부터는 기병을 제대로 쓸 수 있을 테니 조금의 승부는 걸어볼 수 있겠지.”
백작은 승부의 핵심을 작은 둔덕 두 개에서 찾았다. 이 난관만 극복한다면 이 도박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믿는 귀족 기병대의 전투력은 신의 미개한 야만인들을 흔들어 놓을 수 있으리라. 아마도 그럴 것이다.
백작은 지도를 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