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희망의 끝 (1)
흰 물결은 4겹의 전열을 돌파하여 작은 둔덕을 낀 지점까지 밀고 나왔다. 그 과정에서 신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발생한 사상자만 천에 육박했다. 그 과정에서 루시 병사들은 상당한 체력을 잃었지만, 기세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재정비할 틈도 없이 둔덕에 포진한 신의 부대까지도 공격했다. 파도처럼 밀어붙이는 적을 바라보던 승도가 망원경을 내렸다.
“생각보다 적의 공격이 거세군요. 그렇다고 해도 그 예봉은 이미 무뎌지고 있을 테니, 승부는 이제 끝이 날 겁니다.”
“확실히 그렇게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피로를 체감하는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비의 말에 승도도 동감의 뜻을 보였다. 실전을 뛰어본 사람이라면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만 하루를 싸운 경우가 있었다. 그럼에도 싸우는 동안은 전혀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생명에 대한 위험, 그 긴장감이 피로를 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적당한 시점에 둔덕에서 소모전을 마치고 우리 쪽은 한 발 물러날 겁니다. 하면 적은 우리가 사기가 꺾인 줄 알고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몰려나올 테지요. 예의 기병 전력을 투입해서 말입니다.”
“기병을 투입하면서 보병을 잠시 쉬게 할 거라 예상하시는 겁니까?”
“내 생각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한 번 쉬게 되면 오히려 피로를 자각하고 일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기병을 느긋하게 상대한 다음, 적을 한 번에 쓸어버리면 그걸로 승부는 끝납니다. 물론 쉬게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건 이상 내 생각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승도가 막 뒷짐을 지려는 찰나에 루시 보병들이 깃발을 들고 둔덕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탄막을 뚫고 총검을 휘두르는 적을 주시하던 승도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전투를 이끄는 것이 여군 장교로군요.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전장에 나온 걸로 봐선 신분이 상당히 높은 여성 같은데.”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장에 여성을 세우는 경우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면 아주 지체가 높은 귀족이거나 왕족일 수도 있겠군요.”
승도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 가끔 천지분간을 하지 못하는 일부 왕족들이 전쟁터에 실력도 없이 기어 나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성이 그런 경우는 보지 못했지만 딱 보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족이라. 아주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겁니다. 현 루시 왕가의 방계 왕족들은 그 수가 상당히 많은 편이니까요.”
현재 루시의 왕가인 고토노프 가문은 그 역사가 그리 긴 가문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신생 가문에 가까워 초대 황제를 가문의 시조로 보아도 그리 틀린 시각은 아니었다.
가문의 역사가 짧아 그 구성원의 수가 적을 거라 예단하기 쉽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초대 황제와 그 뒤를 이은 황제들이 모두 호색한이었던 탓이다.
그들은 왕가 제1의 의무, 가문의 계승권자 생산에 충실하여 몇 대가 지나기도 전에 수백 명의 왕족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후대에 이르러 왕족의 범위를 제약하는 왕실 의례 개정 등이 계속해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토노프 왕가는 공식적으로 2,400명의 구성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머릿수가 그 정도로 많으니 전장에 기어 나올 정도로 정신 나간(?) 왕족 여성 하나쯤 있다고 해도 확률적으로 무리한 계산은 아니었다.
“왕족 여성, 아니 귀족 가문의 영양 정도만 되어도 좋겠군요.”
“저 여자를 포로로 잡으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포로로 잡아서 나쁠 것은 없지요. 물론 그렇다고 무리하게 잡으려고 명령을 내릴 생각은 없지만 말입니다.”
승도는 귀족 여성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흔해 빠진 귀족가의 차남 이하 남성들이야 포로로 잡아봐야 별 돈이 안 된다.
하지만 가문의 자산(?)으로 취급되는 귀족 여성들은 다르다. 그녀들은 혈연 동맹 등에 쓰이는 유용한 도구인 까닭에 가문으로서는 잃기 아쉬운 존재다.
그러니 그 아쉬움의 크기만큼 이익을 토해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귀족들이 실권을 가진 동 에우로페 국가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귀족 태반이 명예직 혹은 몰락의 수순을 밟는 서 에우로페 지역에서는 공작 혹은 왕족 여성이라 해도 그리 메리트를 부여하긴 어려웠다.
“뭐 말씀처럼 포로로 잡는다면 나쁠 건 없을 겁니다.”
하비도 승도의 생각에 부정적인 견해는 보이지 않았다.
루시 보병들은 치열한 줄다리기 끝에 둔덕을 손에 넣었다. 그들이 힘껏 깃발을 흔들자 눈이 빠지게 신호만을 기다리던 루시 기병대가 일제히 말에 올랐다.
전마는 사람을 태우는 것 자체로 체력을 잡아먹기에 기병들은 지금껏 제자리에 선 채 돌파구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만인들의 목을 따 루시 제국의 두려움과 힘을 보여준다. 긍지 높은 제국 기병의 힘을 놈들의 뼛속까지 새겨주고 와라.”
기병 연대장의 훈시에 기병들이 함성소리로 답했다. 모두가 귀족 출신으로 긍지가 높고 자부심이 높은 자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제국군의 위기를 구원하라는 임무를 받는 것만큼 명예로운 일도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옛 종교 전쟁에서 전세를 뒤집어 놓은 헤카펠 기병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수의 기병만으로 강건한 수천의 적세를 격파하여 전세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기병의 전설. 그 영광을 지금 이 자리에서 재현하리라.
전마에 올라탄 기병 중대장들이 기병들을 재편했다. 전통적인 루시 기병 중대는 70명을 1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연합왕국이나 로망스가 30~50명을 1개 중대로 편성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는 중무장 기사의 전통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기인했다. 중장 기사가 있었던 서 에우로페에서는 기병이란 병과를 소규모로 나누어 쓰는 데 능했다. 지형적으로 산지가 많고 평지가 좁아 대규모 기병을 운용하는 데 불리했다.
그런 이유에서 기본 편제인 중대가 30명 내지 50명이 되었다. 반대로 루시 측은 산지가 적고 광활한 평야와 접하여 일찍부터 대규모 기병을 운용하기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타국들이 중무장 기사들을 운용할 때 타타르 인들의 경기병에 짓밟히며 절치부심하는 세월을 보낸 터라, 소규모 중대 편제와는 더욱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중대의 규모가 크다 보니 전체 기병 연대의 규모도 여타 에우로페 국가들의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큰 편이었다. 다만 겨울 동안 폐사한 마필들이 있어 편제를 완전히 채우고 있지는 못했다.
모두 1,400명이 넘는 대규모 기병이다. 말이 천 단위의 기병이지 사실 그 기병을 넓게 펼쳐 놓으면 그 위압감은 1만 대군과 버금간다.
무엇보다 기병은 그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병이 내달리며 일으키는 먼지 구름과 전마를 탄 기병의 크기 때문이다.
1,400이라고 해도 전장에 출현할 때 병사들의 눈에 비치는 기병의 규모는 1만에 육박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시 군의 지휘관들은 기병의 돌격에 희망을 걸었다.
보병으로 승부를 걸어 적의 사기를 꺾어놓고 무너진 적에 대해 기병을 투입, 결정타를 가한다. 정리하자면 대충 이런 수순으로 전략을 짰고 승부를 건 셈이다.
전마를 탄 루시 기병들이 천천히 앞으로 말을 몰았다. 전마의 체력을 아껴 최후의 순간에 그 힘을 폭발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사기가 꺾인 적에게 그들의 규모를 제대로 인식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야만인들에게 죽음을!”
“황제 폐하께 영광을!”
기병들이 구호를 입에 담으며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기병 연대가 가까이 다가오자 둔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던 보병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제 몫을 다했고 이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우라!”
보병들의 외침에 기병들도 칼을 뽑아 그에 답했다. 그들은 보병들이 보내는 함성을 진군가로 삼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루시 군대의 운명은 그들에게 달려 있었다.
***
기병들의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커졌다. 진흙을 밟으며 움직이는 전마들이 내는 진동은 흡사 지진을 연상시켰다. 지축이 흔들린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적 기병의 출현에 신의 병사들은 침을 삼켰다. 시각과 청각이 주는 압도적인 연출 앞에 조금의 동요도 없을 수는 없었다.
새하얀 코트를 입고 백마를 탄 거대한 기병 부대의 위압감에 압도당한 병사들이 총검을 쥔 손을 가늘게 떨었다. 전근대전이든 근대전이든 병사들이 기병에 대해 품는 감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제 위치를 지켜라. 위치를 고수하라!”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병사들의 귓가를 때렸다. 그들은 전열을 이루는 병사들의 위치를 일일이 확인하고 자세를 교정했다.
강주에서 이미 기병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던 무인들로서는 한 번 틈을 보이게 되면 기병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기병들의 깃발이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위치까지 다가왔다. 기병 연대는 루시 제국의 깃발 대신 자신들 고유의 문장을 들고 있었다.
에우로페에서는 자신들을 상징하는 상징물을 문장으로 만들어 장비와 깃발 등에 새기는 전통이 있었다. 기병 연대는 두 자루의 칼을 쥔 독수리를 문장으로 삼고 있었다.
독수리는 황제를 상징하였고, 두 자루의 칼은 황제의 검으로서 제국의 위협을 응징하는 그들 자신을 의미했다.
기병 연대의 문장기가 눈으로 식별될 정도가 되었을 때 기병들이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삼열 종대로 이루어진 긴 쐐기꼴 진형을 이룬 채 신의 보병들을 향해 다가왔다.
전근대전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 같은 기동 방식은 대단히 멍청한 짓에 속했다. 전근대에는 근접전을 위주로 하는 기사 전력이 최대한의 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가능한 넓게 전개된 채로 돌격하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는 보병의 강력한 화력에 대한 노출 면적을 줄이기 위해 기병이 열을 좁게 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루시 기병들은 표준적인 전술에 따라 기병의 열을 좁게 잡아 적진으로 돌입하는 과정에서 노출을 줄이는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루시 기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전마를 재촉했다. 말들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산소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팽팽하게 데워진 피가 전신을 돌며 근육을 달구었다.
처음에 초당 일 미터를 걷던 전마들이 십 미터 이상을 내달렸다. 폭발적인 가속이 이루어지면서 말발굽을 따라 튀는 흙덩이가 기병들의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이내 그들은 최고 속도에 도달했다. 보통 기병이 최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길게 잡아도 200미터 내외다. 기병은 최고 속도를 내는 시간 동안 보병들의 허점을 찌르고 지나가야 했다.
만약 돌격이 실패한다면 뒤로 후퇴하여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돌격을 감행해야 했다. 보병의 전열을 뚫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최대 10회 이상의 돌격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럴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보병이 어렵게 전열을 뚫어내고 만들어준 짧은 타이밍을 놓치고 나면 적 보병들이 다시 공간을 좁혀버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루시 기병들은 일제히 기병총을 뽑아들었다. 그들에게는 전열을 무너트릴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기병은 단일 지점을 향해 곧바로 몰려들었다. 그것을 본 보병들이 총검을 세웠다.
중세 시대나 근대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보병이 든 무기가 기병이 든 무기보다 길다는 점이다. 똑같이 검과 총검을 휘두른다면 총검을 쥔 쪽이 유리했다.
하지만 기병들은 중세 기사들조차 뚫지 못한 방진을 무턱대고 돌격해 뚫을 생각은 없었다. 선두의 기병들은 목표로 삼은 지점 앞에서 비스듬하게 방향을 바꾸며 방아쇠를 당겼다.
“빌어먹을.”
요란한 총성과 함께 보병 방진 사이에 선 보병들이 피를 뿌렸다. 무인 육씨는 채찍처럼 다가와 공격을 가하고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적 기병의 공격에 이를 갈았다. 적의 대열이 그리 넓지 않아 공격할 면적도 별로 넓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격!”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보병들의 총이 불을 뿜었다. 강철 원통 속에서 정확한 방향성을 획득한 탄환이 직선으로 쭉 뻗어 나갔다. 수백 발의 탄환이 쏟아지자 기병들도 피를 뿌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사람인 이상 총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기병들이 잇따라 낙마했지만 기병의 공격은 보병과 달리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회전해서 지나가는 순서대로 총탄을 계속 퍼부었다.
쌍방이 한 지점에서 총격을 주고받자 좁은 전장은 금세 새하얀 화약 연기로 가득 찼다. 화약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일부 보병은 전투 중에 기침을 했다.
“사격 준비!”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종이포를 급히 주머니에서 꺼내 입에 물려했다. 하지만 연기가 너무 짙어 그 과정에서 허둥대다 종이포를 놓치는 자들도 있었다. 한 번 떨어트리면 짙은 안개 때문에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병들 역시 사격의 정확도가 떨어지긴 마찬가지였다. 표적이 보이지 않는 데다 어디서 방향을 바꾸어야 할지도 명확치 않았다. 그나마 연기를 뚫고 빠져나와 선회하는 기병들 덕분에 대강의 거리감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기병들은 그 화약 연기 때문에 총격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지점으로 들어가 반복적으로 총을 쏘았다. 보병들 역시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총을 쏘았다.
짙은 연기 때문에 시야는 계속해서 나빠졌다. 총격이 되풀이될수록 전장의 안개는 짙어져 시야를 제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훈련이 되지 않은 보병들은 기병의 말발굽 소리에 겁을 먹게 마련이었다.
시야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적이 앞을 오가며 총을 쏘아대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그 심리적인 공포가 보병들의 전열에 희미한 균열을 만들었다.
포탄이 떨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연합왕국의 붉은 코트들이라면 몰라도 신의 얼치기들에게 그런 배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병들은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며 같은 지점만 계속해서 타격했다.
당연히 심리적인 공포와 현실적인 이유(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장의 안개 속에 있던 병사들은 좌우로, 혹은 뒤로 한 발씩 물러섰다. 지휘관들도 한 치 앞만 겨우 구분하는 상황이라 병사들을 제대로 통솔하기 어려웠다.
육씨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챘다. 병사들의 피해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더듬거리며 대열을 살피다 알게 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