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41화 (141/425)

제141화. 희망의 끝 (2)

“자라 새끼들. 제자리를 지키지 못해? 자리를 비우면 네놈들이 모두 죽는단 말이다. 이 머저리들아!”

그는 버럭 화를 냈지만 대열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적의 집중 공격이 가해지는, 더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울 용기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휘부와 제국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 자들만이 제 위치를 지켰지만, 그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이내 보병 전열에 의도한 것처럼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직감한 기병들이 회전을 멈춘 채로 곧바로 전열로 돌입했다.

그들의 거침없는 질주에 지휘관들이 뒤늦게 보병들을 긁어모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도도한 기병의 해일을 막기에 방파제는 너무나 얇고 나약했다.

일부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이 총검을 마주 내질렀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기동할 공간이 없을 때는 전마가 주저하며 옆으로 비켜가려는 탓에 총검의 거리가 위력을 발휘하였지만, 공간이 생기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다.

그렇게 될 경우 기병은 총검을 피해 옆으로 이동하며 위에서 아래로 칼을 내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보병은 도륙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병은 말을 몰아 지나가며 그대로 칼을 내리그었다.

“으악!”

선연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 보라가 뿌려졌다. 기병들은 ‘우라’를 외치고 보병들의 목을 치며 전열을 돌파했다. 저항하는 자들은 차례로 목이 달아났다. 기병이 뒤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보병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심리적으로 등 뒤에 적을 두면 제 전투력의 절반도 내지 못한다. 언제 적이 내 목을 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황한 보병들의 모습을 본 기병들은 양떼를 모는 늑대처럼 그들을 쫓으며 칼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몇 번 회전 돌격을 하는 과정에서 기병의 손해가 더 컸지만, 전투 국면이 전환되자 양측의 손실 비율이 뒤집혔다.

일방적으로 보병이 죽어 나가니 손실 비율이 유지될 리 없는 것이다.

기병들이 함성소리를 내며 달려올 때마다 보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전열 하나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손실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같은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기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열이 와해되자 병사들 자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루시 측이 처음부터 바랐던 승리의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순간이었다. 루시 기병 장교들을 피에 젖은 칼을 휘두르며 ‘승리의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궁지에 몰린 아군을 구원하고 ‘역전’을 연출한다. 이보다 멋진 시나리오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들은 영웅담의 주인공이 된 듯 의기양양하게 깃발을 흔들었다.

***

“전열 하나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피해가 커지는 것 아닙니까?”

하비의 물음에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장에서 의도대로 돌아가는 일은 별로 없다. 작전 계획은 언제나 헝클어지기 일쑤이고,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해 발목을 잡아끈다.

전략가도 사람이기에 전략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을 모두 염두에 두지는 못한다. 승도 역시 적 기병의 예상치 못한 선전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까지 적이 선전했던 것은 그가 적에게 ‘약간의 전과’를 허락했기 때문이지, 적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조금 그런 면이 있군요. 생각지 못한 피해라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닙니다.”

“대책은 있으십니까?”

“물론 없진 않습니다.”

승도에게는 아직 예비대가 많이 있었다. 예비대가 많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 임기응변을 좋아하는 전략가에게 반전의 여지가 많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카드가 그의 손에 여러 장 들려 있는 이상 기병의 선전 정도는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다.

“대책이 있으시다면 저 친구들이 멧돼지처럼 날뛰는 꼴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적이 전열을 하나 더 뚫기 전까지 나머지 부대를 V자 꼴로 전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V자로 말입니까?”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V자 꼴로 전열을 짜는 것은 화력의 집중에 있어 그리 유리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전 돌격을 구사하는 루시 기병들에게는 충분한 대응책이 될 수 있었다.

V자 꼴로 구축된 방진 앞에서는 회전을 할 공간 자체가 없다. 양끝을 노린다면 그럴 공간을 만들 수야 있지만, 그렇게 하면 돌파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애초부터 적의 돌파가 원천 봉쇄된다 할 수 있었다.

“V자 꼴 대형이라. 알베르트 공이 사용한 대기병 전열이군요.”

“맞습니다. 채찍처럼 치고 빠지는 기병에 대항하기에는 가장 이상적인 전열입니다.”

승도는 상대의 전술을 보자마자 금방 대응책을 꺼냈다. 한때 에우로페를 호령했던 군략의 천재가 기본적인 대응 방법 하나 떠올리지 못할 턱이 없었다.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충분한 대응책이 될 겁니다.”

전령들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둔덕을 내려가는 동안 승도는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기병을 묶는 정도로는 불충분합니다. 애초 생각은 적을 이 반격 한 번으로 섬멸하려는 데 있었으니까요.”

“확실히 V자 전열을 펴는 것으로는 적을 섬멸하기엔 부족할 테니까요.”

V자 보병 전열은 공세를 취함에 있어 특히 좋지 않았다. 냉병기 시대에도 보병만으로 V자 전열을 펴 공세를 취한 전례는 없었다. 양익 날개의 기동성이 좋지 않아서다.

“하면 처음 계획에서 많은 부분이 어긋난 이 상황을 어찌 바꾸려 하십니까?”

승도는 적 기병이 위치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비도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시간으로 바꿀 생각입니다.”

“시간 말입니까?”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지나면 일몰이 시작됩니다. 그때 우리 병사들로 하여금 해를 등지게 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전열 따윈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전열이 중요하지 않다.”

하비는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태양을 등지고 공격하는 공격자의 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상대의 시야를 빼앗는다는 점, 반대로 이쪽은 시야를 온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대표적인 이점 중 하나다.

태양을 등지고 공격을 가하여 승리를 가한 사례는 전사에 상당히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승도 본인도 햇빛을 우군으로 삼아 공격해온 연합왕국 해병대에 쓴맛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열을 바꾸고 공격을 한다면 적 기병이 구경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말은 예민한 동물입니다. 그림자에 놀라기도 쉽지요.”

태양을 등진다는 이점에는 이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마는 그림자를 의식한다. 때문에 긴 그림자를 끌며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과감하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 얘기도 들은 적은 있습니다.”

하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승도가 물었다.

“지금이 몇 시나 되었습니까?”

하비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그러고는 째깍거리는 시침을 보며 시간을 대강 가늠하였다.

“오후 네 시가 지난 지 좀 되었습니다.”

“적도 초조해질 만한 시간이군요. 저들도 오래 끌고 싶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럴 겁니다.”

“어쩌면 지친 보병들이 전투에 합세할지도 모르겠군요. 우리 전열을 파괴하기 위해서.”

승도는 불그스름한 빛을 내는 태양 쪽으로 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광선이 흘러나와 그의 다갈색 눈동자를 찔렀다.

“기병대가 해냈습니다. 이제 전열 하나만 더 걷어내면 적은 전면적인 붕괴 양상을 보일 겁니다. 동방 군대의 수준이란 결국 이렇습니다. 각하.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물론일세. 기병이 아주 잘 해주었어.”

백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보좌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처음 돌격이 시작될 때만 해도 다소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그들이었지만 몇 차례의 회전 이후 일순간에 이루어진 돌파에 그들의 얼굴은 흥분과 승리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전투만 이긴다면 놈들은 두 번 다시 우리에게 회전을 걸어올 용기를 내지 못할 겁니다. 그리되면 우시리 강 남안의 영유권 정도는 확실히 굳힐 터. 아쉬운 대로 각하께서 영전하실 만한 공은 충분히 획득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그들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기병의 돌파 이후 전면적인 붕괴 양상을 보이는 적이다. 저런 얼치기들이라면 몇 겹이 더 버티고 있어도 이쪽 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보병을 다시 전장에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적은 완전히 붕괴된다. 승부는 이제 볼 것도 없었다.

보좌관과 공치사를 나누던 백작이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이제 승리를 확신한 터라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는 망원경을 들고 적진을 살피다 퇴각하는 적병들의 후방에서 기이한 방진의 모습을 발견했다.

“저건 뭔가?”

백작이 묻자 레이놉스키도 망원경을 들었다. 그러곤 한참 그것을 보다 코웃음을 쳤다.

“알베르트 공이 사용한 대 기병 전열입니다. 이쪽 기병을 저지하기 위한 고육책입니다.”

“하면 기병의 돌격은 쉽지 않겠군.”

“문제없습니다.”

“어째서인가?”

백작이 망원경을 내리고 묻자 보좌관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답변을 내놓았다.

“적이 우리 기병을 의식해 내놓은 V자 전열은 본질적으로 수세의 입장에서 취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적은 이쪽의 공세로부터 시간을 벌려는 목적이 강할 겁니다.”

“하면?”

“보병을 투입해서 끝내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 보병들은 교전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치지 않았나? 저곳까지 다시 이동을 시키면 탈진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일 텐데?”

“예로부터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을 때는 놓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리 대제께서도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스와질란드에 결정타를 가하지 않으셨습니까? 각하께서도 지금 그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승리의 단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승리의 단맛이라.”

백작은 ‘흐음’ 소리를 내며 전장을 보았다. 확실히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았다. 전장에서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보여주는 때는 몇 번 되지 않는다. 그 기회에 모든 것을 건 구혼자는 여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러지 못하고 머뭇거린 자들은 그녀의 냉담한 반응만 살 뿐이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알겠네. 명령을 전하게.”

“예, 각하.”

레이놉스키는 최후의 명령을 하달했다. 사실상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루시의 전 병력이 한꺼번에 전투에 돌입하는 국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 줌의 예비대도 남기지 않고 몽땅 쓸어 넣은 이상, 전장의 국면 변화에 대응할 수단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비대가 없는 지휘관은 대사건의 구경꾼에 지나지 않다.’라는 격언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루시 군의 지휘관들은 그 위험성을 머릿속에서 깡그리 무시했다. 그들은 이 순간을 결정적인 기회로 보았고, 여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바야흐로 전투는 종막을 향해 치달았다.

***

루시 보병들의 대열이 앞으로 나섰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승리를 자신한 터라 피로도 잊은 얼굴들이다.

장교들의 외침에 발맞추어 움직이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희망이란 빛이 맴돌고 있었다.

누런 군복을 입은 신의 보병들은 다가오는 적을 보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지휘관들은 상대의 접근을 보고 앞으로 노출된 병사들의 전열을 뒤로 물렸다.

전장에서 전열의 재편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단순히 뒤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V자 전열 역시 그런 식으로 만든 것이라 전열 정비는 비교적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루시 장교들은 상대의 신속한 전열 정비를 보고 병사들에게 앞으로 걷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상대와의 거리가 일정하게 좁혀지자 ‘정지’를 명령했다.

루시 보병들이 정지하자 신의 보병들이 일제히 총구를 겨누었다. 총성과 함께 화약 냄새가 전장에 진동했다. 보병들은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총격을 주고받으며 제자리를 지켰다.

사격의 정확도와 화망의 집중도는 루시 쪽이 위였지만, 총탄의 살상력은 신 쪽이 위여서 양쪽이 낸 사망자는 거의 대등했다.

나타샤는 아군 보병의 전열 사이로 뻥 뚫린 공간을 보았다. 그 공간 너머로 기병 연대가 보였다. 그들은 일시에 구멍이 난 지점으로 쇄도하기 위해 전마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들은 마지막 일격을 가할 시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보병을 지휘하는 나타샤도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아군의 후방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전진 명령이었다.

“설마 여기서 거리를 좁히란 말이야?”

현재 교전 거리는 약 70미터로 충분히 살상력이 나오는 거리였다. 물론 적 보병의 살상력이 좀 더 발휘되기 좋은 거리였기에 거리를 좁히라는 명령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친 보병들이 거리를 좁히는 동안 입을 손해가 적을 리 없다.

“부대 전진!”

나타샤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 사이 동료 장교들이 나팔 소리에 맞추어 명령을 내렸다. 그녀도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병사들이 발을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적 보병들의 총구가 이쪽을 조준했다.

곧이어 오렌지 빛 섬광이 번뜩이는 가 싶더니 보병들이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좁히도록 명령을 받은 거리는 약 30미터.

그 짧은 거리를 다가서는 시간에 최소 두 차례의 사격을 뒤집어써야 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향해 악을 쓰는 적병의 얼굴이 보였다. 쓰러지지 않는다고 저주라도 퍼붓는 것일까?

그녀는 그런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적과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긴장감이 치밀어 올랐다.

보통 100미터에서의 명중률이 3%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들면 명중률은 그 제곱으로 올라간다.

즉,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만큼 사형수의 처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전열 전투에서 보병의 전진을 가리켜 사형수의 행진이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사격을 한차례 넘겼으니 다음 번 사격이 문제다. 그녀는 그것을 애써 기억 너머로 넘겼다. 죽음의 공포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전진을 할 수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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