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희망의 끝 (3)
“전열 정지!”
장교들의 외침과 동시에 보병들이 발을 멈추었다. 대열이 멈춤과 동시에 그를 환대라도 하듯 요란한 총성이 재차 울렸다. 이번 사격은 그야말로 파멸적이었다.
충분한 거리가 되기를 기다렸다 퍼부어진 사격인 까닭에 사상자는 그 이전과 궤를 달리했다. 단 한차례의 사격에 백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나타샤의 옆에 있던 농민 병사 하나도 머리가 으깨진 채로 피를 줄줄 흘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무지막지한 탄환이 두개골을 휘젓고 나갔는지 병사는 멍청하게 보이는 눈을 끔뻑이다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파멸적인 손실은 ‘승부’가 곧 날 것임을 알려 주었다. 이쪽이 받은 손실만큼 돌려줄 수 있다면 적의 전열에도 금방 구멍이 뚫릴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인지했기에 손을 든 채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사격 준비!”
병사들이 신속하게 종이포를 입에 물고 총구를 하늘로 향했다. 장전을 서두르는 손길이 신속했다. 반대편에서 신의 보병들은 총구에 장대를 쑤셔 넣고 있었다.
나타샤는 병사들의 사격 준비가 끝나자 조준을 외쳤다. 병사들이 총구를 적 쪽으로 향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장갑을 낀 손을 내렸다.
우렁찬 총성이 터지며 신의 누런 군복들 사이에서 피가 튀었다. 상상치도 못한 피해가 일순간에 터지자 적병들 사이에서 당혹감에 찬 감정들이 분출되었다. 오합지졸과 제대로 훈련받은 정규군의 차이였다.
루시 군대가 비록 이류라곤 하지만 이런 점에서는 신 쪽보다 월등히 위였다. 겨울 동안 전열 유지 및 사격 훈련, 정신 무장에 공을 들였다곤 하지만 단시간에 그 격차를 완전히 메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병사들이 허둥거리는 것을 본 신의 지휘관들이 표정을 굳혔다. 그때 신의 진영 뒤편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루시와 정반대로 뒤로 물러나라는 명령이었다.
신의 병사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본 나타샤가 얼른 뒤쪽을 보았다. 갑작스런 적의 반응에 지휘부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싶었다.
기병을 투입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적이 전열을 유지하며 뒤로 물러나는 형국이라 자칫 잘못하다간 맨땅에 머리를 박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시간을 끌려는 건가?’
그녀는 적이 시간을 끌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적은 시간만 적당히 끌면 이쪽의 피로를 높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풍부한 예비대를 투입하여 이쪽을 단박에 끝장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을 그렇게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후퇴란 것은 그만큼 사기를 담보로 벌이는 행동이기에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잠시 후, 후미 쪽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다시 적을 향해 전진하란 명령이었다. 이번에는 얼마까지 거리를 좁힐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다.
‘아마 적 보병이 후퇴하다 전열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추격하란 거겠지.’
그녀는 지휘부가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보았다. 후퇴 과정에서 스스로 자멸하는 군대는 수도 없이 많았다. 정예 강군이라 불리는 군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바로 후퇴였다.
진격 명령을 받았는지 기병이 후퇴하는 적의 전열을 와해시키기 위해 방진 사이의 회랑을 벗어나 앞으로 튀어나왔다. 적 보병들의 대열이 혼란 속에 무너지도록 위협하기 위함이었다.
보병이 충분히 할 일을 했다고 판단한 기병의 돌입. 전투의 최종 국면을 상정하듯 그들의 진격은 거침이 없었다. 기병이 빠른 속도로 나아간 순간, 나타샤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전투는 끝났다. 만사가 끝났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적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이 사전에 미리 조율된 각본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는 큰 소리로 명령을 외치며 불길한 예감을 떨쳐냈다. 병사들이 군홧발 소리를 내며 힘차게 걸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된다.
병사들도 승리가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발걸음도 조금씩 빨라졌다. 척척 소리를 내는 추격자들과 도망자들의 사이가 조금씩 좁혀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쪽을 경계하느라 뒷걸음질을 치는 신의 보병들이 제 속도를 낼 리 없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거리를 좁히면 다시 일제 사격을 퍼부을 수 있다. 그럼 끝이다.
나타샤는 입술을 깨문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막 적 보병들과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든 차에 눈부신 햇살이 망막을 찔러왔다.
그녀는 그것을 보고 일몰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햇빛이 자꾸 눈을 찌르자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려 했다. 그녀는 햇살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얼핏 비친 햇살을 바라보던 승도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짓에 기수들이 있는 힘껏 깃발을 흔들었다. 그것을 본 고수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었다.
어느 순간 달아나던 보병들이 불쑥 모습을 보인 두 번째 전열을 통과해 물러났다. 전방에서 고전을 한 병사들을 뒤로 보낸 전열은 달아나는 동료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똑바로 전진했다.
교전을 치르며 전열이 흐트러진 부대를 예비대로 돌리고 지금껏 쉰 생생한 전력을 전투에 투입한 것이다.
멍청한 지휘관들이라면 후퇴하는 병력까지 전투에 투입하려다 새로운 부대까지 혼란에 휘말리게 만들었겠지만, 신의 지휘부는 그런 우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롭고 강력한 적이 패주하는 적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기병들은 일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개 전면적인 붕괴 상황에서는 패잔병들을 수습하려다 후방의 부대까지 휩쓸려 함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곤 했기 때문이다
루시 기병들이 원했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딱 한 번만 그렇게 만들면 그들은 바라 마지않던 승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지금껏 적들이 보여준 모습만 믿는다면 그렇게 되어야 했다.
신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패잔병들은 마른땅에 물 스며들 듯 자연스레 동료들을 통과해 지나가 버렸다. 혼란은 파급되지 않았다.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병은 아직 적 보병 사이에 보이는 틈을 노리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패잔병들을 따라붙으려 했다.
전마들이 흙을 튀기며 질주했다. 마지막 남은 기회를 잡기 위한 그들의 말발굽 소리는 이내 절정에 이르렀다. 최고 속도에 이른 말들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보병들의 전열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기병들이 벼락같이 달려들자 신의 지휘관들이 손을 들고 소리쳤다. 최종 돌입까지 그냥 구경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사격!”
소총이 불을 뿜자 기병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자, 낙마한 채 동료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자, 피를 흘리며 말고삐를 잡고 내달리는 자. 기병 연대의 선두는 금세 참혹한 한 편의 비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기병은 기병이었다. 단거리를 기준으로 보면 보병의 열 배 이상의 속도를 내는 것이 기병이란 병과. 그들은 단 한차례의 사격만 받고 보병과의 거리를 좁혔다.
기병들의 눈에는 아직 그들이 기동할 틈이 보였다. 그들은 손에 쥔 칼에 힘을 준 채 함성을 질렀다. 적을 위압하여 자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보병들의 전열 틈새로 다가선 찰나였다.
누런 군복의 전열 사이로 말을 몰던 기병 하나가 불현듯 눈을 찔러온 햇살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 짧은 순간에야 ‘위험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것은 승마를 배울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의 눈은 적 보병들 앞에서 섬뜩할 정도로 긴 그림자를 발견했다. 오후의 햇빛이 그려낸 길고 긴 그림자. 처음 돌파할 때는 전열에 확실히 구멍이 뚫려 있었던 데다 연막이 있어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말들이 그림자를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예민하고 섬세한 말들에게 그림자는 상당히 위험한 장애물이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총검이 여느 때보다 날카롭고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린 말들이라면 더욱 그런 두려움에 먹히기 쉬웠다. 하필 동방의 혹한으로 말미암아 말들이 수시로 죽어나간 탓에 그들이 탄 말들은 태반이 어린 것이었다.
히히힝!
전마들 중 상당수가 이상 반응을 보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주인의 의도와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들의 이상 행동은 길게 늘어진 보병들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전마들의 주인은 이 갑작스런 말들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했다. 일부는 급격한 방향 전환으로 말미암아 칼을 놓치기까지 했다.
기병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당연히 돌파는 불가능해졌다. 단단히 결집되어 모두가 한마음으로 달렸다면 아직 어수선한 적의 전열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전마가 엉뚱한 길로 가버리면서 돌파 능력이 떨어지자 기병의 공격은 그 마법 같은 힘을 잃어버렸다. 제대로 방향을 잡아 내달린 소수의 기병들은 양옆에서 총검을 찔러오는 보병들의 도전을 이기지 못하고 낙마했다.
“맙소사.”
그 광경을 보던 나타샤는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속하던 기병들은 허겁지겁 양옆으로 갈라진 동료들을 따라 옆으로 반전했다. 그들은 칼을 쥐고 있어 사격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잘 아는지 보병들이 반전하는 기병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근거리에서 집중적인 사격을 두드려 맞은 터라 기병의 손실은 엄청났다. 언뜻 보인 것만 수십 명이 낙마하고 있었다.
“기병은 이걸로 끝났다.”
서전에서 본 피해에 지금 입은 손실, 거기에 축적된 전마의 피로를 생각하면 기병은 큰 전력이 되어줄 가능성이 없었다. 신의 보병들도 그것을 아는 눈치였다. 눈에 띄게 줄어든 기병의 수를 본다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긴 했지만.
기병의 돌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신의 보병들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쭉 앞으로 나아왔다. 기병을 물리친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루시 보병들은 도로 밀려온 아군 기병들이 전열 앞을 가리면서 혼란스런 모습을 보였다.
신의 보병들은 거칠 것 없이 거리를 좁혀왔다. 앞은 아군 보병이고 뒤는 적의 보병인 상황이니 루시 기병들도 속이 타긴 마찬가지였다. 일부 장교는 길을 막은 보병들을 향해 호통을 치기도 했다.
추격을 위해 전열을 재편하고 따라온 보병들에게 왜 중앙을 메워 두었냐고 따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길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격!”
그사이 루시 기병들을 따라잡는 신의 보병들은 혼란스런 전열을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적이 혼란을 수습할 틈 따위를 주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무자비한 총격이 쏟아지자 기병과 보병이 뒤엉켜 있던 루시 군 전열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적이 일제 사격을 퍼붓자 루시 보병들도 급히 총구로 총탄을 밀어 넣었다.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에서 맞부딪치기엔 역부족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냥 두드려 맞다 몰살할 수야 없는 일이다.
기병에 공간을 내어주려고 전열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면 상황이 좀 더 나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귀한 귀족들로 이루어진 기병들을 희생양으로 던지고 농노 병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은 루시 군대의 상식에 맞지 않았다.
농노들이 희생하고 기병이 전열을 재편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것이 루시 장교들의 판단이었다. 전력상으로 별 도움도 안 될 기병을 살리기 위해 전열의 혼란을 방치한 대가는 컸다.
누런 군복들이 황톳물 홍수처럼 밀려와 총탄을 퍼부어 대었다. 그냥 싸워도 수적 열세로 쉽지 않은 싸움인데 전열까지 헝클어져 있으니 싸움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기병들도 말에서 내려 기병총을 쏘았지만, 압도적인 머릿수를 앞세워 달려드는 적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체가 겹겹이 쌓이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무수한 주검을 남기며 루시 군대는 조금씩 뒤로 밀렸다. 죽어 나가는 쪽은 대부분 루시 병사들이었다. 사격을 하려 할 때마다 햇빛이 그들의 눈을 찔렀다. 그러니 정확한 사격은 쉽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무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총검을 들고 백병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경험과 기술, 조직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백병전도 체력의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친 병사들은 총검 한 번 휘두르는 동작에도 허점을 드러내기 일쑤였고, 상대는 그것을 놓치지 않을 만큼 체력에 여유가 있었다.
집중 사격을 몇 번이나 뒤집어쓴 중앙 전열이 삽으로 푹 퍼낸 듯 움푹 파였다. 파멸적인 피해가 집중되자 살아남은 병사들도 급히 뒤로 물러섰다. 자연히 루시 군대의 진도 뒤로 구부러졌다.
진이 한 번 뒤로 밀리자 ㅡ자로 반듯한 모습을 보이던 진은 U자로 휘어졌다. 중앙이 구부러지는 모습은 냉병기 시대를 기준으로 보아도 패전 직전에나 나오는 광경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이 부서질 경우에는 군의 패배까지 결정되었다 볼 수 있었다.
승도는 애초 햇빛과 예비대의 효과만 염두에 두었지, 적의 혼란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까지 계산하지 않더라도 전투는 충분히 그의 의도대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적 기병이 자기편 전열까지 흩어 놓은 덕에 전투는 한결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면 붕괴 양상을 보이는 적 부대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몇 번의 사격을 더 퍼부을 것도 없어 보였다.
“전원 착검! 돌격!”
충분히 피해를 주었다고 판단한 승도가 결단을 내렸다. 보병들이 착검을 마치고 적진을 향해 쇄도했다. 그 뒤를 재편을 마친 후방 전열의 보병들이 가세했다. 전투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일격이었다. 나타샤는 권총을 뽑아 쥔 채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그 전력의 한계에 도달한 루시 군대가 그 가공할 공세를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리가 꺾인 독수리는 힘없이 비틀거렸다. 억센 제국의 손아귀는 이내 쇠약해진 독수리의 날개를 잡아 비틀었다.
날개 꺾인 독수리는 구슬픈 비명을 지르다 수백 구의 시체를 남긴 채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뒤로 수천 명의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붙었다. 전투에서 일방적인 학살로 전환되는 수순이다. 이제 신이 와도 루시 군대를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