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공평무사 (1)
제국과 공화국 간의 면직물 무역은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상호 간의 손실을 담보로 한 신뢰 무역의 성격이었다.
신뢰 무역이란 거래 물품은 가져오면 반드시 그것을 인수해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거래’였다. 이는 인수자나 제공자나 모두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선 주문, 후 지불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거래인 까닭에 면직물을 가져오는 상인들은 수송 중 발생하는 모든 위험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만약 주문을 받은 물품을 가져오다 문제가 생기면 그 부담은 전적으로 제공자가 져야 했다. 납기 계약의 위반에 따른 위약금도 물어야 했다.
행상도 부담을 짊어지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가져오기만 하면 상품의 변질 혹은 납기일 지연 등에 따른 손실에도 불구하고 ‘인수’를 해야 하는 책무가 뒤따랐다.
당연히 이쪽이 짊어지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뢰 무역이 성립한 것은 원양 무역에서 장시간 거래를 지속하자면 상호 간의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행상과 공화국 상인들의 거래에서 송사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에서는 ‘송사’까지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행상 곡상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데 있었다. 곡상은 비싼 고리대를 짊어지고 있어 자금을 빠르게 순환시키지 않으면 목이 졸리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는 다른 행상들처럼 납기일 전후로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볼 처지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곡상은 ‘관례적’으로 납기일에 늦어도 인수를 받아주곤 하던 면직물의 인수를 정면으로 거절하고 나섰다. 계약에 따른 것이니 그로서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두 번째는 인수를 거부한 면직물의 관세 문제였다. 무릇 수입품은 들어오면서 관세를 물게 마련이다. 만약 인수가 되지 않으면 다시 해외로 가지고 나가며 수출 관세를 또 짊어져야 했는데, 그렇게 될 경우 공화국 상인의 부담이 너무 커졌다.
이상의 이유로 행상과 공화국 상인 양자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승도는 부친과 마주한 자리에서 이 송사에 얽힌 이야기를 대충 듣고는 혀를 찼다.
“이번 송사가 간단한 일은 아닌 줄 알았지만, 그것을 푸는 것 자체가 상당한 난제가 되겠군요.”
“문제는 이 송사를 어찌 처리하든 골치가 썩을 수밖에 없단 게지. 일을 잘못 처리하면 행상 중에서 앙심을 품는 이가 나올 수도 있고, 혹은 공화국 쪽에서 반감을 살 수도 있다.”
오유도는 상인다운 면을 보였다. 적을 만드는 것은 두 배의 손해를 얻는 것과 같다고 배운 거상의 경험대로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면 뜨거운 감자를 왜 손에 쥐려 했더냐?”
아버지의 물음에 승도는 비단 주머니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을 본 오유도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제 답입니다.”
오유도는 비단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주머니 안에서 딱딱한 금속의 촉감이 느껴졌다.
“이건 돈이 아니더냐?”
“예. 이문이 달린 문제는 오래 방치할수록 해결이 어려워지게 마련입니다. 아편처럼 말입니다.”
아들의 대답에 오유도도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편도 처음에는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방치하자 곧 나라 전체를 전란에 휩싸이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고 말았다.
“하나 돈이 얽힌 문제는 함부로 손을 대는 것 역시 문제를 키우는 법이다.”
부친의 말에 승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민지에서 조세를 좀 더 걷겠다고 차세며 인지세며 세금을 붙인 결과 대규모 반발을 샀던 연합왕국이 그 예시다. 남의 이문에 함부로 손을 대면 반감을 사게 마련이다.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곡상과는 만나볼 생각이더냐?”
“예. 참고인으로 만나 뵐 생각입니다.”
승도의 대답에 거상은 잠시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관에서 말이더냐?”
“예.”
“상인의 몸이지만 범의 심장과 용의 마음을 갖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것이 바로 행상이다. 그런 사람을 관에 부르는 것이 과연 정도이겠느냐?”
오유도의 말은 독이 든 사과를 기꺼이 씹으며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행상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탐악한 탐관과 강력한 외국인들에 앞뒤로 포위되어 갈 곳 없는 벼랑 끝에 선 채로 강주의 경제를 떠받치는 경제인들. 거인들은 나름의 긍지와 자존심이 있게 마련이었다.
오승도 역시 행상의 일원이기에 그 말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단순히 행상의 명예 의식만 놓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관에 모시는 것에 대해 마음이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원리원칙을 중시해야 합니다. 좋은 것이 좋다고 행상의 울타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면 만인은 우리를 가리켜 공정함이 결여된 천박한 돈 벌레라 할 것입니다. 그 시선이 하나하나 모이면 결국 우리의 뿌리는 그만큼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원리원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너도 장사를 해보아서 알지 않느냐? 경영이야 냉정하게 선을 긋더라도 사람 간의 정리는 그리할 수 없는 법이다.”
“소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가능한 예를 표시하여 정중하게 모시려 합니다.”
“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관으로 행상을 출두케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지금껏 우리 행상이 관으로 나가 좋은 꼴을 본 적이 있더냐? 수십, 수백만 냥의 벌금을 내러 나갈 때나 얼굴을 비쳤을 뿐이다. 그런 곳에 그런 일로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분이 좋지 않아.”
“하오나 앞서 말씀드렸듯 일은 처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주에 소란이 일기 전에 말입니다.”
“그저 묻어두어도 되지 않더냐? 홍모귀들처럼 말이다.”
오유도는 묻어둔다는 표현을 썼다. 지난날 행상 중 한 사람이 연합왕국까지 가서 송사를 벌인 끝에 파산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왕국 상인 쪽과 왕국 사법 당국은 일을 질질 끌어 문제를 덮어버리려 했다.
“저희는 홍모귀가 아닙니다, 아버님.”
연합왕국과 같은 초강대국이라면 타국의 불만을 사도 문제될 것이 없다. 강력한 경제, 군사력으로 상대를 억눌러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행상에게 그런 힘은 없었다.
오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이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하면 곡상을 불러 무얼 하려 하느냐?”
“간단한 조사를 하고 거래 계약서와 관습법의 위배 수준을 확인하려 합니다.”
승도의 대답에 오유도가 나지막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 정도는 본인이 나가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대리인이 출석하는 정도로 곡상의 면을 세워주라는 말이다. 출석 명령을 받는 것 자체로 기분이 상하긴 하겠지만 직접 나가는 것보다는 면이 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승도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꼭 그분이 오셔야 합니다.”
“이유가 있느냐?”
오유도는 화를 내는 대신 이유를 물었다.
부친의 물음에 승도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서역인들의 눈 때문입니다. 강주만큼은 공정한 사법 절차가 진행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이더냐?”
오유도는 정치가가 아니라 상인이었기에 그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승도 본인은 그것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공정한 사법 절차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곳의 문화와 법치를 존중할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존중받을 만한 사법 체계라 느끼면 서역인들이 과도하게 행동할 수 있는 부분도 ‘말’로 처리하게 할 수 있었다.
“지역 사회의 안정입니다, 아버님. 우리 가문은 행상의 영수이기도 하지만 지역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다면 더는 말하지 않겠다. 하면 내가 행상 곡상을 만나 이 일에 대해 양해를 구하도록 해두마. 너도 송사가 끝나면 곡상을 한 번 만나보고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계속 볼 사람끼리 사이가 틀어지는 것만큼 좋지 않은 일도 없다.”
“그리하겠습니다, 아버님. 그리고 감사합니다.”
부친 오유도가 굳이 나서서 양해를 구한다는 것은 향후 승도가 행상들 사이에서 안 좋은 인식을 받을까 저어되어 미리 고개를 숙이러 간다는 뜻이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 고마운 것이 무에 있겠더냐. 그 정도는 해주어야 제삿밥이나 얻어먹을 수 있지 않겠더냐?”
“제삿밥보다는 손녀가 아침상을 차려 올릴 때까지 오래 사셔야지요.”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느냐.”
오유도는 아들의 덕담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송사가 열리자 상관거리의 외국인들과 각국의 영사들이 재판을 구경하러 왔다. 개항장에서 벌어진 범죄라면 영사 재판권을 가진 영사들이 재판을 주재했겠지만, 이 일은 어디까지나 강주에서 일어난 사안이었다.
강주는 지난 조약에서 특별한 배려를 받아 ‘개항장’이 설치되지도 않아 영사가 낄 여지가 없었다.
다만 자국민의 보호 차원에서 재판을 참관하는 정도는 가능하였다. 방청석에 연합왕국의 강주 주재 영사와 대반, 로우랜드 공화국의 영사와 대반, 로망스의 대반이 자리했다.
이외에도 동방 무역 회사 등의 상인들이 대거 참관하여 이 사건에 대한 외국인들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착석.”
재판의 진행을 맡은 강주 관청의 관료가 외치자 방청석의 외국인들이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번에 재판을 주재하는 관리사가 행상 출신의 오승도라 하더군요. 판결을 한다면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지 않겠습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동방에서 자주 쓰이는 격언이다. 서역에서는 초상화를 붓으로 그린다는 좀 더 품격(?)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격언을 쓴다. 신임 대반 브라운 경은 동방에 자주 드나든 경험이 있어 이런 말을 알고 있었다.
브라운 경의 말에 찰리 경은 고개를 저었다. 강주에 영사로 오기 전에 이 지역에 대한 상당한 공부를 하고 온 영사는 오승도의 성향을 그리 단순하게 잘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씨 가문 자체가 상당히 개방적인 가문이라 의외의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강주에만 안주하는 여타 행상들과 다른 사람들이니, 의외로 국제 표준에 맞는 판단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곳 동방 사람들은 ‘지연’과 ‘혈연’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혼사로 얽히고 같은 동향 사람으로서 동지애를 가진 행상이 자기 동료에게 불리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겁니다.”
브라운 경은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말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경험에 의한 정보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책으로 보고 배운 것을 죽은 지식, 경험을 산지식이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평범한 동방 상인의 입장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동업자로서의 의리도 있을 것이고.”
찰리 경은 부정하지 않고 안경을 슬쩍 밀어 올렸다.
피고석에는 행상 곡상이 앉아 있었고, 원고 석에는 공화국 상인 마리우스가 앉아 있었다. 고소장을 관료가 들고 와 건네자 승도는 그것을 가볍게 읽고는 물었다.
“면직물 거래에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 소장의 내용입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마리우스의 대답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장을 내려놓았다.
“곡 대인께 묻겠습니다. 거래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피고의 주장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왜 지불하지 않았는지 대답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아버지와 곡상으로부터 사정을 청취한 터라 저간의 이야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판에서는 아는 것도 공식적으로 구술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나를 사기죄로 고발한 서역 상인 마리우스 씨는 납기일을 한참 어긴 채로 상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납기일을 맞추지 못한 물건을 매입하는 것은 상인에게 대단한 손실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계약서를 쓰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지 않습니까? 늦은 만큼 그 부담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마리우스 씨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원칙대로라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간 강주에서는 관례적으로 납기일에 늦은 상품도 인수해 주었습니다. 원양 무역의 특성상 납기일에 늦는 경우는 더러 있고 행상들도 이를 이해해 왔습니다. 한데 이번 경우에는 그리 못 하겠다고 하니 이는 서로의 신뢰를 무너트린 행위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에 승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역 상인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니 마리우스가 억울하다는 투였다.
“하면 곡 대인께서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관례는 관례일 뿐입니다. 계약상에 명시한 사항이 우선입니다.”
“관례도 관습법의 일부입니다.”
둘이 팽팽하게 맞서는 것을 본 승도가 손을 들자 관료가 ‘정숙’을 외쳤다.
“이번 면직물 거래에서 대금으로 지불해야 할 액수가 얼마입니까?”
“은으로 20만 냥입니다.”
20만 냥. 대단히 큰 액수였다. 파격적인 보수를 받는 연합왕국 장교들의 예가 있긴 하지만 그건 파격일 뿐이다. 실제 보통 사람은 평생 은 10냥 정도의 현금도 만지기 어렵다.
“거래 계약상으로는 그 액수가 맞습니다.”
둘이 같은 대답을 내놓자 승도는 턱을 문질렀다.
“자리에 참관하신 왕국 영사 각하께 조언을 한마디 청해도 되겠습니까?”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제3국 입장으로 들어와 구경하고 있던 찰리 경은 자신을 부르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내 조언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영사는 승도의 물음에 의아하게 여겼다. 서역과 동방의 재판 풍토는 전혀 달랐다.
“말씀해 보시지요.”
“서역에서는 관습을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인정합니까? 이런 사안에서도 관습법이나 관례의 구속을 받습니까?”
승도는 연합왕국에서 관습법의 영향력이 꽤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관습법이라는 것이 엄밀히 말하면 일상에서의 민법 등을 포함한 것이다. 외국인이 얽힌 경제 범죄 건에서 관습법은 운운할 가치도 없었다.
“우리 연합왕국은 이런 경우에 판례만 인정합니다.”
“감사합니다.”
승도는 이전 사건들의 판례를 가져오게 했다. 이전의 판례들은 행상이 채무를 갚지 않아 발생한 것들이 전부였다.
승도는 판례를 가볍게 살펴본 후 대중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서역 쪽에서 관습법을 중요하게 여기듯 우리 역시 관습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전범이 있다면 그를 보고 따르며, 그것이 없다면 유사한 사례를 찾아내어 그를 근거로 판단합니다.”
승도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서역인들은 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여 우리 강주 관청은 150년 전, 행상 금원의 사건을 참작하여 판결을 내리려 합니다. 계약 불이행과 대금 지급이라는 공통점을 고려하면 이 판례가 유일한 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건은 황실의 명령을 받고 서역의 시계와 자명종 등을 주문한 행상 금원이 파산하며 일어난 전대미문의 ‘계약 불이행’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강주 관청은 행상 금원을 대신하여 상품을 인수하고 대신 대금을 지불하였다. 하지만 전액을 지급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공식적인 수매 가격에 따른 것이었다.
“하여 금원 사건을 참고하여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먼저 행상 곡상의 미지급액인 은화 20만 냥의 약 절반에 이르는 10만 냥을 우리 강주 관청에서 지불하겠습니다. 대금 액을 절반으로 제한한 것은 납기일을 지키지 못해 이행지체의 과를 범한 마우리스 개인이 손해의 반을 짊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상품을 처분하여 관에 변제할 책임은 행상 곡상에게 맡기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묘한 판결이 내려졌다. 승도의 판결에 서역인들은 재빨리 이 판례가 앞으로의 무역 송사에 끼칠 영향을 계산해 보았다.
“하오나 대인.”
손해를 본 마우리스 본인도 똥 씹은 표정이었지만 곡상도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상품의 처분을 맡게 된다는 것은 그것을 팔아 10만 냥을 채우라는 말이다.
시기에 맞지 않게 다량의 면직물을 떠안고 처분하게 됨은 당연히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판결에 불만이 있으십니까?”
“판례에도 없는 처벌을 왜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곡상이 이의를 제기하자 승도는 말을 이었다.
“관에서 면직물을 처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무엇보다 이 손해는 전적으로 대인과 마우리스 사이에서 일어난 일. 설마 조정에 이 손실을 떠안기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승도의 말에 곡상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그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표정을 찌푸리는 척하면서도 승도의 판결을 수용하고 있었다.
전날 승도와 만난 자리에서 곡상은 처벌 내용을 통보받았다. 당연히 곡상은 그에 대해 펄펄 뛰었지만, 승도의 다음 말에 입을 다물었다.
“대인께서 사정이 좋지 않으신 것은 압니다. 면직물을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으실 겁니다. 하여 행상 기금 쪽에서 당분간 대인의 이자 부담을 덜어드리도록 자금을 융통해 드리겠습니다. 그리 도와드릴 터이니, 대인께서도 이번 한 번은 판결을 수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움의 손을 내밀며 적당한 처벌을 제시했으니 곡상으로서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썩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를 아주 궁지로 모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똥물과 동아줄을 함께 주는 미묘한 거래인 셈이다.
판결을 지켜보고 있던 서역인들은 이 판결의 미묘함(?)에 뭐라 판단을 내릴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행상의 편을 들지도, 그렇다고 서역 상인에 유리한 판단을 내리지도 않았다. 판례상으로 보자면 앞으로도 ‘과실’을 중점으로 판단을 내릴 것이라 보이는 정도다.
“아주 묘한 판결이군요.”
재판을 지켜보던 영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브라운 경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나름 이쪽이 납득할 만한 판결을 내리면서도 행상의 손해는 최소화시켰습니다. 양쪽에 다 악감정을 살 수도 있는 판단인데 용케도 그런 결정을 내렸군요.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신의 관료로서는 어려운 판결입니다. 이런 일에서 악감정을 양편에 사봐야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기이하군요. 특히나 인간관계에 민감한 상인이라면 무척 힘든 결정 같은데 말입니다.”
“혹은 그것에 대해 미리 손을 써두었는지도 모르지요.”
찰리 경은 모자를 눌러쓰고는 방청석에서 일어났다.
승도는 서역인들에게 나름의 공정함(?)을 어필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이전에는 군인으로서, 그리고 상인으로서 자신의 색을 보여 주었다면, 이번에는 동방 관료답지 않은 관료로서의 면을 과시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