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야심가들 (2)
여름의 대하 주변은 거센 강바람이 분다. 강가를 따라 늘어선 반군의 진영 위로 붉은 깃발들이 무섭게 펄럭였다. 춤추는 깃발 사이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누런 의복을 걸친 반군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는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그를 따르는 수행원들은 산뜻한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반군 진영을 제집처럼 자연스레 가로질렀다.
이윽고 도열한 반군 병사들을 다 가로지른 그들의 앞에 한 무리의 반군 장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별을 받았습니다만,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왕 대인.”
“별말씀을.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왕 대인이라 불린 이는 가벼이 읍을 했다. 그 앞에 선 자는 반군의 책사라 불리는 양유였다. 둘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막사로 들어섰다.
양유는 왕 대인에게 자리를 권했다. 관청에서 가져온 호피로 장식된 의자는 보기에도 화려했다. 왕경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조금은 껄끄러움을 느낄 법한 호피 의자에 자연스레 앉았다.
“왕 대인께서 이리 찾아주시니 저희 교주님께서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양유의 말에 왕경은 껄껄 웃으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잡았다. 양유는 눈앞의 노회한 상인을 보며 수염을 매만졌다. 그의 앞에 있는 자는 상경 제일의 거상이자 강상의 거두인 자로 상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내가 양주군이 패배한 직후 기별을 넣고 방문을 청했으니, 이는 필시 자신들과 손을 잡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보아도 좋았다. 반군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역적이 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아닙니다. 진정 교주님께서는 왕 대인의 방문을 기꺼워하십니다. 빈말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희 교주님을 찾아오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양유가 슬슬 본론을 꺼내자 왕경이 찻잔을 만지며 답했다.
“상인이 사람을 만나는 이유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장사하기 위함입니다.”
“하하. 장사라. 왕 대인, 저희는 관에 역당으로 몰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와 장사를 하시겠다는 말은 역당이 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문만 남는다면 역당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확실한 이문만 보장된다면 나라가 아니라 선산도 내다팔 수 있는 것이 상인입니다.”
“이문이라. 대인께서는 우리가 승산이 있다 여기시는 것입니까?”
상인은 이익이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려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상인보다 정확한 눈을 가진 자는 없다.
“이문이 보이니 투자를 하려는 것이지요.”
“이문이 보이니 투자를 한다. 그럴 만한 근거나 확신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나도 조정에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그 정도의 계산은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대인을 위험한 도박에 나서게 만들었습니까?”
양유가 묻자 왕경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승도가 진압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쪽의 승산은 충분해진 셈이지요. 행동이 굼뜬 조정에서 오승도에게 명을 내리기 전에 상경을 포함한 남부 지방을 전부 손에 넣을 것이 자명해 보이니 내 입장에선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근거지가 모두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니 미리 우리에게 줄을 대어두는 것이 이문이다. 그 말씀이십니까?”
양유의 물음에 왕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의 편에 선들 내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낙원교의 편에 서면 기반도 지키고 이문도 취할 수 있으니 이쪽을 고를 수밖에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대인, 협조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를 찾아와 인사하는 정도로는 불충분합니다. 그건 알고 계십니까?”
“모르지 않습니다. 하여 세 가지 선물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낙원교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 가지 선물이라. 기대가 되는군요.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양유의 물음에 왕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는 오두계의 대포입니다.”
“오두계라 하면 건국 초에 반란을 일으켰던 번왕 오두계를 말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번왕 오두계는 국초에 난을 일으켜 제국 남부 지방 전역을 휩쓸었던 최악의 역적이었다. 그의 군대는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제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결국 진압되긴 했지만 그 이름은 수백 년 동안이나 금기 아닌 금기가 되어 있었다. 책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자의 대포라면?”
“오두계가 자랑하던 거포 말입니다. 상경을 함락시키시려면 꼭 필요한 물건이지요.”
오두계의 대포 역시 그 창조자만큼이나 유명했다. 그의 대포는 소 60마리가 겨우 끌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 괴물은 너무 무거워 실전에서 별 쓸모가 없었지만, 성벽을 파괴하는 능력 하나는 끔찍할 정도였다.
정부군으로부터 입수한 구식 대포 십수 문이 고작인 반군이 상경을 공격할 때 오두계의 대포는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오두계의 대포는 벌써 이백 년도 전의 물건입니다.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단 겁니까?”
양유가 반문하자 왕경이 품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건넸다.
“아직 땅속에 그대로 묻혀 있습니다. 오두계가 전쟁에서 패하며 자신이 가진 대포들을 모두 땅에 파묻었습니다. 그 대포 묻은 자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땅을 파 확인해 보았으니 확실합니다.”
후일을 기약하며 무기를 묻는 관습은 대륙에 흔한 것이다. 양유도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법하다 여겼다. 오두계의 대포가 쓸 만한 것인지는 상태를 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머지 두 개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군자금입니다.”
“군자금이라.”
“은자 오십만 냥의 쌀과 돈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낙원교가 상경을 함락하고 나서도 쉼 없이 세를 불릴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겁니다.”
“그 정도라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양유는 마침 근처에서 양곡과 돈을 어느 정도 징발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던 차에 군자금을 준다고 하니 진심으로 그것을 반겼다.
양민에 대한 약탈을 최소화하여 정부군과 자신들을 차별화함으로써 세를 불리려는 낙원교로서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군자금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세 번째로 배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상경을 함락한 후 강북으로 즉시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강북으로 올라가 염전을 장악하면 제국의 돈줄이 마를 터. 승산이 10할로 바뀌게 될 겁니다.”
“배까지 주신다는 말씀, 진정이십니까?”
양유는 배까지 내어준다는 왕경의 말에 놀랐다. 수상 운송업에 기반을 둔 왕경으로서는 그 밑천을 모두 준다는 뜻이다.
“역적이 될 각오를 하고 투자를 한다면 여력을 남겨 무엇 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후회 없는 투자가 되겠지요.”
“그 많은 것을 우리 교에 주신다 하시면 우리에게는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대하의 모든 권리. 그것을 원합니다.”
“대하의 모든 권리? 독점적인 통행권을 바라신다 그 말씀이십니까?”
“이해가 빠르시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그것을 원합니다.”
왕경의 대답에 양유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대하의 독점 통행권은 실로 엄청난 이권이었다. 이것을 가진 자는 지금껏 천하에 아무도 없었다. 가질 수만 있다면 천하제일의 부를 누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의 원천인 강남 수상 교통의 대동맥을 쥔다는 의미를 가졌으니까.
“생각보다 큰 것을 원하시는군요.”
그 정도의 이익이라면 향후 일어설 신생 제국의 경제를 한손에 틀어쥐겠다는 의미다. 과연 이문을 탐하여 찾아온다는 말에 걸맞은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큰 요구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건다면 그 정도 이문을 탐해야 이치에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 자리에 모든 것을 걸고 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으니 모든 것을 얻겠다. 재미있는 말씀이군요.”
“상인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이문이 커진다. 대인도 이 말이 사리에 맞다 여기지 않으십니까?”
“사리에 맞는 말씀입니다. 좋습니다. 교주님께 진언을 올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대답 기대하겠습니다. 하나하나만 기억해 두십시오. 식은 차는 다시 끓인다고 해서 향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왕경의 말에 양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교섭은 단 한 번. 자신의 패를 모두 내보인 지금뿐이라는 것을 내비친 것이다.
***
반군의 진영을 나선 왕경이 뒷짐을 졌다. 거센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거상은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강의 손길을 느끼며 푸른 강물을 돌아보았다.
“반적들이 제안을 수락하리라 여기시는 것입니까? 설령 받아들인다 해도 이는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 여겨집니다.”
왕경은 자신의 혈족이자 몇 안 되는 심복, 조카 왕고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아야.”
거상은 사적인 호칭으로 조카를 불렀다. 그 부름에 왕고 역시 사적인 관계로 돌아갔다. 공적인 관계를 엄격히 지키는 사이긴 하지만 사적으로 조카와 숙부의 사이였다.
“예, 숙부님.”
“내 일전에 네게 몇 가지 가르침을 준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느냐?”
왕경의 물음에 왕고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무얼 말씀입니까.”
“상인은 현실에 안주한 순간 퇴보하며 이문을 내지 못한 순간 죽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 말이다.”
왕경이 꺼낸 말은 어릴 적 왕고가 처음 상점의 점원으로 일할 때 내린 가르침이었다. 상인으로서 반드시 새겨야 할 말이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면 내가 이 위험한 도박을 한 이유를 너도 알 거다. 양이들과 전쟁이 있은 후 이 제국에는 몇 번의 격변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강상은 몰락을 거듭했다. 제국 내부가 요동칠 때마다 물류가 막히고 우리 숨통은 죄어졌다. 무뎌지는 현실에 안주하며 박해지는 이문에 만족하는 것이 상인의 길이겠느냐?”
왕경의 물음에 왕고는 고개를 저었다. 숙부가 위험한 돌다리를 건넌 이유는 충분히 이해되었다.
“아닙니다. 하오나 위험도 감수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 가르치신 것이 숙부님이셨습니다.”
“그리 가르쳤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위험은 모두 감수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반적이 상경을 치지 않더라도 결국 우린 고사될 수밖에 없느니라.”
“제국에 안정이 찾아온다면 상황은 호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카의 반박에 왕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전란은 그칠지 모르나 그때가 되면 양이들이 제국 내부를 좀먹어 들어올 게다. 아문에 놓였다는 철도와 강주를 드나드는 범선이 대하까지 들어오면 그땐 어찌할 셈이냐? 그때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남을 성싶으냐?”
왕경은 현상 유지조차 쉽지 않다는 현실을 입에 담았다. 전란으로 말미암아 선택을 강요받은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이 반상 위에서 돌을 두다간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판을 새로 짜는 것 외에는.
“관에서 그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숙부님. 관은 미덥지 않은 존재이나 그만큼 보수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숙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쉽게 굽히진 않을 게다. 하지만 결국은 양이들에게 굽히고 말 것이다. 지금의 제국은 우릴 지켜줄 힘이 없다. 제국이 우릴 지켜줄 힘이 없다면 바꿔야겠지.”
왕경의 대답에 왕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이었다.
“숙부님. 이 도박, 승산은 확실히 보이는 것입니까?”
“있다. 강주의 오승도만 나서지 않는다면.”
“오승도. 그가 무서운 자인 것은 알고 있지만 숙부께서 이리 경계하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승도가 세운 공적은 실로 놀랍다. 하지만 그의 놀라운 공적은 약관에 지나지 않은 나이와 출세에 관심이 없는 태도에 가려져 반절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왕고 역시 오승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강상 출신인 그가 거래도 크지 않은 행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까닭에서다.
하지만 왕경은 조카와 달랐다. 그는 행상을 주목해오고 있었고, 오승도가 쌓아온 화려한 공적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자다. 당금 천하에서 몇몇만이 그의 실력을 제대로 엿보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드러난 그림자만 본다면 그의 능력을 알 수 없다.”
“그가 두렵다면 역당들과 손을 잡는 것을 피해야 하지 않습니까?”
“나서지 않기에 손을 잡은 것이다.”
숙부의 아리송한 대답에 왕고가 되물었다.
“그가 나서지 않는 것은 어찌 확신하시는지요.”
“조정에 끈이 있다. 노회한 정치가들은 오승도의 힘과 위상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니 그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조정에서는 난을 진압하는 것보다 오승도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까.”
“너도 사서를 읽어 알겠지만 지방 세력의 성장은 무엇보다 두려운 것이다. 오승도는 그런 지방 세력으로 볼 수 있는 자다. 그런 자에게 세를 키울 기회를 열어주는 것은 중앙에선 경계할 일이지. 제국 정부에서는 일이 어지간히 커지기 전에는 그라는 칼을 검집에서 뽑지 않을 게다. 나는 그런 정치가들의 생리를 믿고 있다.”
“오승도가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숙부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하나 그 외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상경의 성벽을 이백 년도 더 된 오두계의 대포로 뚫을 수 있는 것입니까?”
상경을 둘러싼 성벽은 자그마치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무수한 황제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개보수해온 위대한 유산이었다.
황제들이 들인 공과 시간의 힘은 막강한 대포로도 쉬이 뚫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성벽의 두께만 10미터에 달할 정도다. 대포알에 금이나 갈지 의문이다.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오두계의 대포는 천 근을 쏘아 보낸다는 소문이 있는 거포다. 그런 대포라면 상경 성벽이 아니라 북경의 성벽이라도 능히 뚫어낼 터.”
“상경의 성벽을 능히 뚫을 수 있는 대포라면 가망이 없는 건 아니군요.”
공성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역시 성벽을 넘는 것이다. 수성군이 어지간히 무능하고 약해도 공격자는 성벽이라는 이점을 쉽게 넘어서지 못한다.
현재 반군의 규모는 수성군의 배에 이르지 못했다. 수적으로는 수성군보다 열세였다.
유리한 점은 왕성한 사기와 조직력, 그리고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주도권 정도다.
대치전으로 흘러가게 마련인 공성전에서 제 능력을 십분 살리기는 어렵다.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성벽을 허무는 것밖에 없다.
“성벽만 뚫리면 반군은 승리한다. 염려할 것 없다.”
왕경은 왕고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시대가 구시대의 잔재를 밀어내듯 대하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며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처럼 상인들도 하나둘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몸을 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