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60화 (160/425)

제160화. 출병 (1)

거센 강바람을 만난 세 개의 별이 요동쳤다. 천국의 세 상징, 천부와 천형과 천제를 상징하는 별들이다. 천부를 상징하는 태양이 중앙에, 천형을 상징하는 달이 우 측방에, 천제를 상징하는 샛별이 좌 측방에 있다.

그 세 개의 별은 위대한 천부의 아들로서 지상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 천왕 금수전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름의 상징과 의미를 담은 깃발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푸른 군복들에게는 딱 하나의 느낌밖에 주지 않았다.

반역도당의 것이라는.

그들은 그 깃발을 보고 위축되지도 겁을 먹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지휘부의 명령밖에 없다. 반군에 대한 두려움은 한 오라기도 없었다.

백마에 탄 채 반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도 역시 두려움이 전혀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자신의 용병술에 대한 믿음이 있고 왕국 장교들이 조련한 병사들의 실력도 낮지 않았다. 반군 따위가 두려울 턱이 없었다.

숫자야 거의 두 배에 이르렀지만 전근대 군대의 수적 우세는 별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더구나 반군의 장비 수준은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화승총과 칼, 창, 심지어 죽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장비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처음부터 예상된 바였다. 신의 무기 통제가 허술하다곤 하지만 단기간에 팽창한 반군이 정규군과 대등한 무기를 모두 갖출 정도로 빼돌리게 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도 하지 못했다면 신이란 나라가 존재할 수 없었을 터다.

“보병 앞으로.”

승도의 짤막한 명령에 푸른 군복들이 앞으로 쭉 나섰다. 한 줄에 삼백 명이 넘는 병졸들이 섰다. 그들이 전열을 갖추자 천국 쪽도 전열을 갖추었다. 그들은 보유하고 있던 대포를 앞으로 내세웠다.

상승군이 기동 문제 등으로 대포를 한 문도 가지고 오지 않은 데 비해 천국 쪽은 관에서 노획한 대포를 이십 문이나 가지고 있었다. 수적 우세와 포병의 우세. 두 가지를 생각하면 반군도 싸움을 해볼 만한 여지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승도는 전투 자체가 일방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군의 장비가 형편없지만 대포가 있습니다.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저쪽의 대포는 모두 구식입니다. 사거리도 짧고 연사 능력도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반군이 숙련된 포병을 가졌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원래 포를 가지고 있었던 제국군조차도 제대로 된 포병을 운용하지 못한 판이다. 하물며 대포를 노획해 쓰는 천국 군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진격의 뿔피리 소리가 울리자 열과 오를 갖춘 푸른 군대가 군홧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거 에우로페를 집어 삼켰던 로망스 근위대의 푸른 해일을 연상시켰다. 그 진군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것은 없다.

승도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번질 즈음 첫 포성이 울렸다.

우렁찬 포성과 함께 열 발이 넘는 포탄이 상승군을 향해 날아왔다. 최대 사거리 근처에서 쏜 공격이라 포탄은 바닥에 착탄하여 진흙 덩이를 튕겼다.

“최대 사거리 근처에서는 명중률이 0%군요.”

“예상한 바입니다.”

승도는 뒷짐을 진 채 답했다. 미리 정해진 양각에 맞추어 쏘는 것이라면 몰라도 무작정 쏘고 보는 포격에서는 숙련되지 않은 천국 포병의 명중률은 상상 이하였다.

푸른 군복 차림의 보병들은 멀리서 이는 흙먼지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동방 군대라면 포격 그 자체에 겁을 먹기 일쑤였지만 상승군은 예외였다. 그들이 척척 소리를 내며 다가가자 천국 쪽에서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무리 잘 훈련된 단련이라도 대포 소리를 들으면 조금은 주저하는 빛을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저들은 한 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채 죽음이 기다리는 포병의 사정거리 안으로 기꺼이 들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력을 가하며 다가오는 상승군의 진군에 천국 쪽 병사들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이어 두 번째 포성이 울렸다. 이번 포격은 상승군의 첫 번째 전열 근처로 쏟아졌다.

일부 포탄이 착탄하는 과정에서 병사 몇이 폭발에 휩쓸렸다. 구식 대포라 해도 대포는 대포. 살상 병기의 공격을 받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상승군의 진격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들은 절규하는 동료들의 비명을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비명이 들리지 않기라도 한 양 장교의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프리지아가 자랑하는 양철 군대와 같은 방식으로 길러진 군대다. 두려움이 거세된, 전열 전투에 가장 알맞도록 만들어진 서역식 군대. 포격을 뒤집어쓰고도 태연하게 전열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푸른 해일은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전열 전투에서는 물러서지 않는 자가 승리하는 법. 우리 병사들이 대포에 겁을 먹지 않도록 훈련된 이상 승패는 정해진 것입니다.”

승도는 망원경을 내린 채로 적진을 보았다. 상승군의 진군에 압도당한 천국 쪽은 이 기괴한 전투 방식에 겁을 집어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깃발을 보면 달아나는 제국군, 대포만 쏘면 저지는 할 수 있는 단련과 차원이 다른 상대다.

죽음조차 개의치 않고 다가오는 상승군의 접근에 천국 지휘관들도 동요했다.

마침내 적과의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자 장교들이 전열의 정지를 명령했다. 수백 걸음을 걷는 동안 충분히 맞아주었다. 이제 그들이 되갚아줄 시간이었다.

“사격 준비!”

장교의 외침과 동시에 병사들이 신속하게 종이포를 꺼내 입에 물고 총구를 하늘로 향했다. 수천 번도 더 반복한 동작이다. 그 절도 있는 움직임에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기계적인 움직임은 몇 초 만에 끝났다.

이들이 총탄을 장전하는 동안 적은 수의 천국 병사들이 화승총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짤막한 총성과 함께 화승총이 아무렇게나 총탄을 쏟아냈다. 사격의 통제는 없었다.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진 사격은 총알의 대부분을 무의미하게 허비했다. 화력이 집중되지 않으니 명중률은 기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화승총을 쥔 사수들의 사격 솜씨도 끔찍했다.

첫 사격에서 상승군은 단 한 명도 쓰러지지 않았다. 화승총 사수들의 사격이 가해짐과 동시에 상승군의 첫 번째 대열이 총구를 겨누었다.

“사격!”

명령과 함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겨우 사 초 사이에 모든 총구가 불을 뿜었다. 잘 통제된 사격의 위력은 대단했다. 집중된 탄막을 두드려 맞은 천국 병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거리를 둔 교전은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았다. 대포의 이점을 누려볼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견에 지나지 않았다. 거리를 둔 싸움에서 천국 군대는 제국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천국은 이 전투 국면을 극복하고자 병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상승군에게 더한 전투력을 과시할 기회만 주었다.

함성을 지르며 천국 병사들이 달려오자 상승군은 세 개의 전열을 압축하여 그들을 기다렸다. 적당히 거리가 좁혀지자 푸른 군복들의 첫 번째 대열이 무릎을 꿇고, 두 번째 대열이 허리를 굽혔다. 세 번째 대열은 바로 선 채로 총구를 겨누었다.

바로 전열 전투의 꽃이라 불리는 일제 사격이다. 천국 병사들은 그들 앞에 기다리는 지옥을 모른 채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참혹한 살인 명령이 내려졌다.

“사격!”

요란한 총성과 함께 전장이 짙은 화약 연기로 뒤덮였다. 단시간에 발사된 천 발이 넘는 납탄이 천국 병사들을 강타했다. 탄환이 집중된 탓에 그 사격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첫줄에서 돌격한 병사 열 중 일곱이 시체가 되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그들은 일방적인 학살에 경악한 듯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사격에 사기가 무너지자 천국 군은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개미 새끼처럼 적이 꽁무니를 빼자 승도가 하늘로 치켜든 엄지를 내렸다.

적의 기선을 제압한 이상 질질 끌 것도 없었다. 적에게 확실한 압력을 가하고 전투를 매듭지을 시간이었다.

“전군 돌격하라!”

착검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은 총구에 검을 끼우고 함성을 지르며 패잔병을 쫓았다. 전투에서 대부분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는 후퇴 과정에서 발생한다. 전과 확대를 노리기에 가장 좋은 시간인 것이다.

푸른 군복들이 총검을 쥐고 달려오자 아직까지 위치를 지키고 있던 자들도 제 무기를 버리고 뒤로 뛰었다. 위세 등등하게 펄럭이던 천국의 깃발은 이내 달려온 병사들의 발길질에 깃대가 꺾여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제국이 천국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

오승도가 지휘하는 상승군의 승리는 천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무난하게 세를 확장해나갈 것이라고 판단했던 서쪽에서 뜻하지 않은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적은 천국의 수도 천경을 향해 꾸준히 나아오고 있었다.

천경의 중심, 총독 관저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던 금수전은 이 놀라운 소식에 천국의 수뇌들을 불러 모았다. 북벌에 나선 서익 등 몇몇 수뇌의 자리가 비긴 했지만 중지를 모으기엔 충분했다.

이 자리에서 천국 정부는 서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물리치는 데 자원을 우선 배분하기로 결의했다. 제2차 서정군의 수장은 천경에 남아 있던 천국의 주요 사령관 중 하나인 풍겸이 맡기로 했다.

풍겸은 천국이 거병하자 이에 투항하여 지위를 얻은 군인 출신 비적이었다. 그는 과거 연합왕국이 제국을 침입했을 때 군관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라 병법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시세를 알고 죽을 자리를 읽을 줄 알아 천국에서 몇 안 되는 군사 전문가였다.

풍겸은 천왕 금수전의 명을 받들어 천경 내의 군사 삼만을 받았다. 일만의 군대를 단박에 깨트린 적이니 이것도 많은 전력은 아니었다. 그나마 더 많은 병력을 얻지 못한 것은 낙원교의 천경 주변 장악이 불확실한 탓이 컸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천경 주변으로 군대를 풀어 지역 단련들과 정규군을 청소해 세를 확실히 하였겠지만, 천국이 천경을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그럴 여건이 못 되었다.

풍겸은 천국 정부가 내준 병력이 당장 동원 가능한 최대치라는 것을 알고 병사를 더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천경에 유지해야 할 최소한도의 전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받은 입장이니, 이것으로 승부를 보아야 했다.

운이 좋다면 서쪽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비적 떼 등을 흡수하여 군세를 불려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풍겸은 그런 계산을 품고 서정군을 출발시켰다.

천국 군대가 천경을 출발하던 날, 반듯하게 정비된 대로 위로 수만 명의 백성들이 모여 장발의 군인들을 보았다. 천국의 교리에 맞추어 상투를 풀어 병사들의 머리는 하나같이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동방에서 쉬이 보기 어려운 이질적인 모습이다. 천경에 사는 유자들은 몇 번이나 보았음에도 저들이 괴이하게 여겨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덕과 예의를 모르는 오랑캐들도 저런 꼴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야만인들이 따로 없어. 오랑캐들보다 더 하구만.”

“저치들이 하는 말이 상투를 트는 것이 오히려 미개한 것이라고 하던데?”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람이 어찌 상투를 틀지 않고 사람이라 하나? 저 꼴을 보게. 남녀가 유별한 법인데 분별조차 되지 않는 모습이야. 에잇, 퉤.”

일부 상류층 인사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기치창검을 세운 병사들이 열과 오를 맞추어 그들 앞을 스쳐 지나갔다. 미개한 오랑캐들의 꼴을 하고 있었지만 질서 하나는 인정해줄 만했다. 부패하여 훈련 한 번 하지 않는 제국군보다 군대다운 군대라는 점 하나는 말이다.

“이번에 관군이 천경으로 온다는 소리가 있던데, 저들이 이길 수 있을까?”

“아마도 이기지 않겠나? 백성들 등만 잘 치는 탐관 놈들은 성이 없으면 싸우지를 못하니.”

“저들이 이겼으면 좋겠어. 듣자하니 땅을 분배해 준다는 소문도 있고. 제국이 지배하고 있다면 그런 이야기는 들어볼 수도 없을 테니.”

“땅을 나눠준다면 저들이 이겨야지. 암.”

도시의 하층민들은 천국 군대가 도시에 입성하며 저지른 약탈에 대한 반감과 혹시 모를 개혁에 대한 기대감이 반반 섞인 묘한 눈빛을 던졌다.

풍겸은 그런 천경 주민들의 시선을 읽으며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그의 부장이 풍겸의 깃발을 든 채 말 머리를 나란히 했다.

“이번 전투는 반드시 이겨야 하네. 진다면 천국의 존립 기반이 흔들릴 거야. 우리는 천경을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일대에 대한 장악력이 부족해. 지배자로서의 실력을 보여준 시간이 짧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연패를 당하면 이쪽의 실력을 두려워하여 엎드려 있던 자들도 만만하게 보고 일어날 수 있어.”

단 몇 번의 패전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경우가 없지 않다. 고대 왕조에서 일어났던 7왕의 난이 그랬다. 7왕의 반군은 황제를 상대로 승승장구하며 대륙의 삼분의 일을 단시간에 장악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수도를 코앞에 두고 거짓말 같은 두 번의 패배를 당한 다음부터 정신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들의 지배력을 의심한 제후들이 하나둘 이반한 탓이다.

“신생 왕조의 실력에 대해 의심하는 시선이 생기는 것은 위험한 부분입니다.”

부장의 말 대로다. 왕조의 실력을 의심받는 순간 통치는 끝이다.

“그러니 이번 전투는 깨끗하게 이길 필요가 있어.”

“그렇다면 금번에 상대할 적을 가벼이 대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은 서두를 수 없다. 가능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결전에 임해야 한다. 사실 시간을 끈다면 유리한 것은 천국 쪽이다. 민심이 이반한 제국 쪽에서는 승리를 거듭한다고 해도 병력을 크게 늘리긴 어려웠다.

단련 등을 끌어모아 세를 불릴 수는 있겠지만, 천국 군대의 병력 증가 속도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가벼이 대하지 말란 뜻은 가능한 오래 시간을 끌며 병력을 늘리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알탄의 고사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알탄은 신 이전에 대륙을 통치한 북방 이민족 왕조의 승상이었다. 그는 강남에서 들끓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국의 가용할 모든 병력을 긁어모으는 사전 준비를 거쳤다. 그가 모으려 한 군대는 자그마치 팔십 만. 질적으로 퇴보한 제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양으로 반군을 압도하려 한 현실적인 진압 방법이었다.

하지만 알탄은 지나치게 시간을 질질 끈다는 의심을 사 조정으로 소환되었다. 그 후임으로 온 예투는 준비도 끝나지 않은 진압군을 거느리고 남벌에 나서다 패하고 말았다. 질적으로 충분하지 않은 군대를 가졌다면 압도적인 수적 우세라도 확보해야 했다.

“우리 군은 사기가 높고 질적으로 제국군에 뒤질 것이 없어. 그 정도까지 신중해질 필요는 없지 않나? 적당히 세만 불려서 대전해도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보네.”

지나치게 신중하게 움직일 경우 적에게 많은 영역을 넘겨주게 된다.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천국이 영토를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대하변의 알토란 같은 땅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상대가 여타 제국군과 격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과 기천의 군대로 거양 장군의 일만 군세를 단번에 깨트린 적이니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수가 적다곤 하지만 거양의 군대를 단번에 깨트린 적을 쉽게 볼 수는 없지. 얼마나 병력을 불려야 적과 대전이 가능하리라 보는가?”

“소장은 오만 이상 모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석현에 나타난 적의 수는 약 삼천이다. 거기에 승세를 타며 단련 등을 흡수했다면 그 수효는 약 오천 내외까지 불었을 것이다. 오만이라면 딱 열 배다.

병법에 이르길, 수가 두 배이면 우세를 점하고 세 배이면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물며 그 수효가 열 배라면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적의 사기를 꺾을 수도 있다.

“오만 군세라면 움직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인데.”

풍겸은 대군을 다루어본 경험이 없었지만 소부대를 운용해본 기억이 있어 대군 운용의 단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5만은 하나의 기동로가 소화할 수 있는 병력의 최대치에 해당한다. 그 이상의 규모는 여러 개의 기동로를 쓰거나 혹은 군대의 이동 일시를 조율해야만 했다.

에우로페에서 가장 좋은 도로를 기준으로 삼아도 5만 대군을 100km 정도 이동시키는 데에는 족히 열흘은 걸린다. 대군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몸이 둔해진다는 뜻이다. 이를 피하려면 에우로페의 군략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분군 행군 총군 전투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장군.”

“하면 군을 다섯으로 갈라 석현 동쪽으로 나아가도록 하세. 그 과정에서 세를 불린 다음 집결을 한다면 병력을 불리는 시간도 줄이고 기동에 걸리는 시간도 단축할 수 있지 않겠나?”

풍겸은 분군 행군 총군 전투의 개념을 입에 올렸다. 작전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을 실전에서 제대로 쓸 수 있느냐의 여부다. 군을 나누는 것은 각개 격파의 위험을 초래하기에 적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수반되어야 했다.

“다섯으로 나눈다면 길어도 닷새면 석현 동쪽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비적 떼들을 적당히 흡수한다면 사만까진 모을 걸세. 거기서 적을 적당히 압박하며 군세를 더 증원한 다음 승부를 본다면 괜찮지 않겠나?”

풍겸은 적의 침입 저지와 격파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적지 근처에서 신속하게 병력을 집결시키는 쪽을 택했다. 전쟁 경험이 풍부한 프리지아 참모 장교들이 보았다면 비웃었을 전략이다.

프리지아 인들은 필요하다면 자국에서 가장 발전된 영토의 대부분, 심지어 수도까지 포기하고 가급적 안전한 위치에 집결하여 적과 결전을 치르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위험한 적지로 진군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서정군의 원수 풍겸은 그 위험한 전략을 골랐다. 위험한 적수라도 기천에 불과한 적이다.

풍겸은 적이 서정군의 접근을 알면 무리해서 다가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습니다. 천경 서쪽에 대한 지배력도 공고히 하면서 제국군의 압력도 경감시키는 묘수라고 생각됩니다.”

“좋아. 대충 고민이 정리되는 것 같군.”

풍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고삐를 잡았다. 육중한 서문을 향해 나아가는 천국 군대의 행렬 위로 세 개의 별이 힘차게 펄럭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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