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61화 (161/425)

제161화. 출병 (2)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까마귀들이 불길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붉게 물든 석양 아래 꺾인 창과 깃발들이 을씨년스럽게 널려 있었다. 승도는 뒷짐을 진 채 시체들이 즐비하게 깔린 전장을 돌아보았다.

승도의 눈이 닿는 곳에는 누런 군복을 입은 젊은 사내들이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생명을 잃은 자들이 던지는 생기 없는 눈빛은 묘한 감상을 주었다.

“반군의 손실이 최소 천은 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교전으로 석현 동쪽으로 나아가는 길이 확실히 열렸습니다. 우리 후방을 교란할 만한 가능성을 가진 반군 세력은 없다 해도 좋을 겁니다.”

“진격로가 확실히 열렸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군요.”

승도의 군화가 죽은 반군 사내의 손가락을 밟았다. 물컹한 느낌에 승도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로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대하를 따라 동진을 계속하면 나흘 안에 반군의 수도 상경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상경이라. 계륵이군요.”

승도의 말에 헨들릭이 의아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계륵이라니요?”

“분명 군침이 도는 표적이지만 입에 넣어서는 안 될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상경은 반군의 중심지다. 이 도시로 나아간다는 것은 반군의 전체 전력과 교전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위험이 가시화된다면 동서남북으로 흩어진 반군의 모든 병력이 상경으로 되돌아와 승도에게 도전해올 것이다. 그 결과는 엄청난 소모전이다.

무엇보다 반군을 지금 단계에서 쓰러트려 봐야 이문이 없었다. 반군이 행상의 물류를 교란하여 입은 손해를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그 손해를 뛰어넘는 이문을 얻어내야 했다. 상인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법이다. 승도는 이 내전으로 입은 손실을 만회하고 싶었다.

“상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전략적 이익을 탐하기 어렵습니다.”

반군의 요충지라 부를 만한 곳은 그들이 거병한 진강과 수도 상경이다. 하지만 진강은 알맹이가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천국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상경이었다. 상경 외에 정치, 군사적 이익을 극대화할 장소는 없었다.

“전술적인 이익을 취하면 됩니다. 그것이 나와 강주의 전략적 이익이 될 것입니다.”

“전반군의 군마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전술적 목표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결국 반군의 병력밖에 없다. 헨들릭의 물음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군의 군세를 꺾어둔다면 반적들은 그 기세를 크게 떨치기 어려울 겁니다. 무능한 제국이라도 기세가 주춤해진 반적들에게 쉬이 밀리진 않겠지요.”

“제국이 반군을 진압하는 것도 쉽진 않을 겁니다.”

“나는 반군과 제국 양쪽이 쉽게 이기지 못하길 바랍니다.”

“대륙에 두 개의 국가가 공존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왕국 장교는 승도의 속셈을 알겠다는 듯 물었다. 두 세력이 대치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강주는 그 세를 키우기 쉬워진다.

“아닙니다.”

“두 개의 국가가 존립하는 상태를 원하신 것이 아니십니까?”

“셋이 되어도 좋겠지요.”

승도는 느긋하게 답했다. 그의 뜻하지 않은 대답에 헨들릭이 크게 놀랐다.

“대륙을 셋으로 쪼갠다면 강주가 자립하겠다는?”

“못 할 것도 없습니다. 반군이 오래 버티고 있다면 제국 정부는 우리 손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반대로 반군 쪽도 우리 공격을 덜 받기 위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양자 모두 우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국호를 내걸고 나라를 세우고 싶다는 것은 아닙니다. 에우로페에는 대공국이니 하는 국가 안의 국가들이 여럿 있다 들었습니다. 나는 그런 형태의 자립을 원합니다.”

요컨대 제국 내에 제후국을 세우고 싶다는 말이다. 독립을 해봐야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은 하나도 없다. 승도는 명분보다 실리를 탐하는 상인이다.

형식적으로 제국의 울타리 안에 남아 있어야 행상과 강주의 부를 극대화할 수 있다. 제국 입장에서도 아예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는 제후로 잡아두는 것을 원할 것이다.

“전시에 가능하다 해도 반군이 토벌되면 대인의 입장이 난처해지시지 않겠습니까?”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이니 압력을 가해 오겠지요. 하나 내전이 쉽게 끝나진 않을 겁니다. 내가 손을 떼면 반군의 명줄이 길어질 테니.”

승도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적이 그냥 놀고 있진 않을 것이고 우리 공격에 반응을 보일 터인데, 여기에 대해 생각해두신 것은 없으십니까?”

“한동안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 놓인 채 싸우겠지요. 하니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할 생각입니다.”

승도는 자신의 앞으로 보이는 제방을 가리켰다. 고대부터 이천 년 동안 치수가 이루어진 덕에 제방의 높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강을 이용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근방을 둘러보니 우리 군의 주둔지를 제외하면 지대가 대부분 낮더군요. 적당한 시점에 제방이 무너진다면 반군은 우리 군에 대해 전력을 투사하기 어려울 겁니다.”

고의적으로 범람원을 따라 진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질적 우세가 아무리 압도적이어도 수적 열세가 심할 경우에는 피해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적이 수적 우세를 살리기 어렵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강이라는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편이 유리했다. 제방을 터트리면 낮은 지대는 단번에 물에 잠기게 마련이다. 물론 반군 역시 수공의 위험을 알고 있어 제방 파괴에 따른 피해는 적을 것이다.

하지만 저지대가 침수되면 대군이 움직일 공간이 줄어든다. 승도가 노리는 이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 번에 투입 가능한 전투 병력이 줄어들면 질적으로 우세한 병력의 우세는 확고해진다.

“제방을 터트리는 것은 대인에 대한 민중의 신망을 떨어트릴 겁니다.”

정치적으로 제방 파괴는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었다. 물론 이를 불식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가 오는 시기를 골라 제방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처럼 연출하는 것이 그 방법 중 하나였다.

도의적으로 대단히 악랄한 방법이었지만 전장의 지휘관들에게 방법이 악마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전쟁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가 중요할 따름이다.

“이번에 반군이 감당 못 할 대군을 몰고 왔을 때 우리가 패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이길 수 있도록 손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대인께서 부담을 짊어지실 수 있다면 제방 파괴는 쓸 만한 옵션입니다.”

승도는 뒷짐을 진 채 걸음을 멈추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장 파괴적인 행위, 전쟁. 그것을 벌이는 이상 그는 철저히 괴물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 자신의 야망과 가문, 가족을 지킬 수 있었다.

“물론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장수의 도리.”

승도는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제방을 일별하며 돌아섰다. 누군가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저 위대한 구조물을 지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파괴하려 했다. 그 모순된 간극은 어디에서 유래한단 말인가?

***

맹수는 사냥하기 전에 바람의 방향을 살핀다. 사냥감이 자신의 냄새를 맡으면 사냥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군대도 맹수와 같다. 상대에게 자신의 움직임을 들키지 않아야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상승군 역시 이 철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승도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척후를 풀었다. 그의 척후들은 상대의 정찰병을 죽여 적의 눈과 귀를 막는 한편, 적의 동향에 대한 정보의 수집에 전념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는 큰 도움이 되었다. 에우로페에서는 직접 첩자와 돈을 뿌려 적의 움직임을 조사했지만, 이곳에선 행상이 눈과 귀가 되어주기에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대륙 남부에서 승도보다 정보가 빠른 자는 없었다.

승도는 적이 다섯 갈래 길로 나뉘어져 전진해오는 것을 알았다. 적의 규모가 큰 탓이기도 했지만 빨리 움직여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승도는 적의 의도를 간파하자 상승군의 행군 속도를 높였다. 하루 평균 10마일을 주파하던 군대는 높은 피로를 감수하며 행군 속도를 2배로 올렸다. 보병 부대가 이 같은 강행군을 오래 버티긴 쉽지 않았지만 며칠 정도는 감내할 만했다.

석현을 출발한 지 이틀 만에 승도의 군대는 석현 동쪽의 주요 요충지인 중양 서쪽에 도착했다. 중양현은 북으로 대하를 건널 수 있는 협곡을 끼고 있었고, 동으로는 상경과 접하고 있었다. 좌우로는 대하가 범람할 때 만든 호수가 있어 대규모 적의 공격으로부터 측면을 방호하기에 좋았다.

제방이라도 무너트린다면 이들 범람호 주변이 모두 강물에 침수되어 현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은 하나로 줄어들고 군대가 전개할 수 있는 평지도 반으로 줄어든다. 방어자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버텨볼 수 있는 천혜의 요지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천경으로부터 나뉜 도로들이 합쳐지는 교차점으로 천국 입장에서는 결코 내줄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곳을 승도가 먼저 선점해 버렸다.

펄럭펄럭.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비상하고 있었다. 용이 승천했기 때문일까.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리고 싶은 듯 까만 먹물을 머금었다.

“우리가 한발 늦었군.”

풍겸은 흑마에서 내려선 채로 낯빛을 찌푸렸다. 나름대로 상대의 이동 속도를 감안하여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그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었다. 보병이 150리에 달하는 거리를 이틀 만에 주파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원수는 자신의 투구를 벗어 수하 장수에게 건네고는 칼집에 손을 얹은 채 중양현을 노려보았다.

“믿을 수 없습니다. 제국군이 이토록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만큼 강병이란 뜻이겠지. 며칠 사이에 중양까지 달려오는 강행군을 견딜 정도라면.”

풍겸은 상대의 전력을 이제야 실감했다. 적은 말도 안 되는 행군을 감당할 정도로 훈련이 잘된 군대였다. 평범한 제국 군대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기마가 아닌 보병이라면 하루 10리도 못 가는 것이 제국군이다. 저들은 보통의 정규군과는 격이 다른 자들이라 해야 마땅했다.

모두 풍겸의 말에 동감의 뜻을 보였다. 기병도 아닌 보병으로 저 정도의 속도를 낸다는 것은 잘 조련된 군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경계심을 높여야 했다.

“저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 없던가?”

“아직 들리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소문보다 빨리 움직이는 자들이니 그에 대한 동향을 수집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습니다.”

상승군은 숨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강주에서 군마가 떠났다는 소문이 따라오기도 전에 전진을 하다 보니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저들은 정병 중의 정병이야. 이 근처에서 나타날 만한 제국군의 정예라면 우선 전봉우익을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지난 몇 번의 전쟁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 하물며 저들은 기병이 아니야.”

“그만한 군대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강주겠지.”

풍겸의 말에 장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주군대는 지난 전쟁에서 양이들을 쳐부순 제국 최강의 강병이다. 그것이 실력이든 운이든 그들은 불가능한 위업을 해냈다. 백만 제국군도 하지 못했던 일을.

그들을 더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강주군대의 수장이다. 약관의 나이로 제국의 남쪽과 북쪽에서 홍모귀와 북적을 연파하고 중원을 격동시킨 천지회를 일격에 쓸어버린 괴물, 오승도의 이름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제국은 두렵지 않아도 그는 두려웠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이 강주군대라면 교전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군이 다섯으로 갈라져 있어 조직적인 연계는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공격하지 않을 수도 없어. 제각각 후퇴하면 적은 단박에 뒤를 잡고 따라와 우리 군세 중 하나둘을 꺾어놓을 걸세. 하면 대패한 것과 같아.”

풍겸은 쉬이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이 되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집결지를 선점당하면 이 같은 위기를 초래할 수 있었다. 군대 하나를 물려도 나머지가 각개 격파당하면 삼군이 함몰한 것과 같다.

연락이 수월하게 되면 좋겠지만 길이 아닌 곳에 전령을 보내긴 쉽지 않았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나 싸우는 것도 난처한 일 아닙니까? 한꺼번에 연수를 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

“자네 연 날려보았나?”

“예. 날려 보았습니다.”

풍겸의 물음에 장수가 답했다. 원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과거에는 낙성이라 하여 별이 떨어지는 것을 흉조로 여겼네. 해서 연에 불을 붙인 다음 지면 가까이로 내리면 그것을 본 병사들의 사기가 뚝 떨어지곤 했지. 그처럼 연에 불을 붙여 땅으로 내리는 것을 신호로 삼으면 어떻겠나?”

풍겸은 연에 불을 붙여 하강시키는 것을 신호로 공격 일시를 조율하자는 말이다. 단시간에 의사소통을 나눌 수 없는 불리한 입장을 타개하는 하나의 묘수였다. 군관 시절 봉화대를 책임져 보았기에 해볼 수 있는 발상이었다.

“묘책이십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시차를 두지 않고 군을 한 번에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적이 선점한 목을 풀어내고 우리 군대를 집결시킬 수 있을 걸세. 그다음은 강주가 아니라 강주 할아비라도 우릴 감당 못 할 거야. 우리는 사만 대군이고 저들은 오천 남짓한 소수가 아닌가?”

“옳으십니다.”

“하니 전투를 긴 흐름으로 볼 필요는 없네.”

풍겸은 눈앞의 지세를 보며 말했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대군이 동시에 공격을 감행한다면 수적으로 열세한 적은 모든 방향을 막진 못할 것이다. 전투가 그렇게 진행된다면 군세의 일부만 적의 측면으로 돌아가도 적은 확실히 전멸하고 만다.

“적 쪽에서 수공을 쓸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쓸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 군의 합류를 방해하기 위해 전진 배치되어 있다면 저들 역시 저지대에 포진해야 하네. 그 말은 수공을 쓸 수 없단 거지. 시간을 맞추어 수공을 쓰려 해도 그때는 우리 군대와 적이 뒤엉킬 터이니 아군에 대패할 수밖에.”

풍겸은 지세를 보고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했다. 적이 중양이라는 요지를 선점한 이점을 누리려면 저지대에 진을 쳐야 했다. 병법을 아는 자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그리할 것이다. 유리한 이점을 버리는 것은 군략가가 할 일이 아니었다.

특히 적의 역량이 뛰어나다면 더 그럴 것이다. 지장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취한 이점을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대의 욕심이 스스로를 죽이게 만든다, 그 말씀이시군요.”

“탐욕스런 원숭이는 좁은 항아리에 손을 넣고 한껏 콩을 쥐다 주먹을 펴지 못해 사람 손에 잡히고 말지. 지혜를 가진 적이라면 그 자신의 이점에 눈이 멀어 스스로가 만든 덫에 빠지고 마는 법이네.”

풍겸과 장수들은 느긋하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지의 위치 자체는 훌륭했다. 다섯 방향의 합류점을 견제할 수 있는 요로였으니, 위치 선정은 나쁘지 않았다.

이쪽 병력이 동시에 움직이지 않으면 철저히 각개 격파를 노릴 수 있는 위치다. 하지만 한꺼번에 움직이게 된다면 저 진지는 그의 무덤이 되고 말 것이다.

“하면 공격은.”

“이틀 후 밤이 좋겠지. 전군에 신호에 대해 알릴 시간도 필요하고, 또 신호를 제대로 보려면 밤이 좋을 테니까.”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좋아. 사흘 후 모두 웃는 얼굴로 개선하자.”

풍겸은 수하 장수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돌아섰다.

***

어두운 밤하늘 위로 불그스름한 빛이 떠올랐다. 기름을 흠뻑 적신 짚더미가 내는 불길이었다. 환한 불꽃을 머금은 연이 하늘을 천천히 맴돌았다.

흉신이 땅을 굽어보며 불길한 전조를 경고하듯 연은 몇 번이나 하늘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불빛은 수십 리 밖에서도 분간할 수 있었다. 그 불빛 하나만을 기다리던 수만 쌍의 눈이 연에 못 박혔다.

곧 하늘을 붉게 적시던 흉신의 별이 지면 가까이 내려왔다. 고대였다면 망조가 들었다고 할 만한 광경이었다.

“공격 신호입니다, 장군.”

다섯 갈래로 나뉜 천국 군대 중 하나를 지휘하던 천국 장수가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건장한 장정의 팔 길이보다 긴 검이 투명한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장수는 손에 든 검을 치켜든 채로 외쳤다.

“전군 공격하라.”

“공격하라!”

장수의 명령에 군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고수가 북을 쳤다. 수천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움직이는 소리에 땅이 울리고 초목이 진동했다. 횃불을 든 수천 대군이 일시에 움직이자 온 세상이 불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천왕과 천국의 이름으로 요마들의 나라를 멸하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힘차게 쏟아져 나왔다. 요마란 고대 대륙의 전승에 나오는 신비한 괴물들로 인간의 생명을 탐하는 악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제국에 빗댄 것은 그만큼 민중을 못살게 굴고 약탈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푸른 달빛을 받은 창검의 물결이 제국군의 진지를 향해 쇄도했다. 한 방향, 두 방향, 다섯 방향에서 쏟아져 나온 군세가 일시에 휘몰아쳤다. 노도 같은 물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국 군대는 단박에 제국군의 진영을 휩쓸었다. 천국 장수들은 쏟아져 내려가는 병졸들의 사기충천한 기세를 보며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어디에서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달빛이 닿지 않는 숲속에서 적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적이 그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올 줄은 몰랐다.

그는 처음부터 적을 각개 격파할 의도 따윈 없었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함으로써 적에게 각개 격파의 위험을 인식시키고, 그것이 동시에 기회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적은 그의 의도대로 다섯 갈래로 나뉜 군대를 일시에 조율하여 저지대에 위치한 그의 진영을 공격했다.

승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주변에 있던 수행원들이 불화살을 준비했다. 그것은 덫에 걸려든 불운한 먹이들이 거미줄에 걸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피잉.

하늘로 불화살 한 대가 쏘아져 오르자 저쪽에서도 불화살이 한 대 쏘아졌다. 이어 강 주변에서도 불화살이 한 대 하늘로 솟아올랐다.

“대인. 곧 제방이 무너질 겁니다. 물이 들어오면 역적들은 이곳으로 올라올 겁니다.”

“그럼 슬슬 일어나야겠군요. 병사들은 준비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제 적은 좁은 지역에 밀려들어온 채로 우리와 싸우게 될 겁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개 격파의 이점보다 더 좋은 것이 지세의 이점이다. 적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하는 전장으로 유도하여 전부 몰살시켜 버린다. 이것이 승도가 원하는 전투였다.

“적 진영이 텅 비었습니다.”

“진영이 텅 비었다고?”

풍겸은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자 당황했다. 그때 하늘로 불화살 한 대가 솟아올랐다.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공성계(空城計: 성을 비워 적을 두렵게 하는 병법)는 아니고 복병을 둔 것 같습니다. 저 불화살만 보아도 적이 뭔가 생각을 가지고 진을 비운 것 같습니다.”

“복병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네. 우린 사만 대군이야. 오천의 군세로 우릴 야습하겠다고?”

풍겸이 반문하던 찰나에 은은하게 굉음이 들려왔다.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소리. 그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 후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림이 빠르게 가까워오자 풍겸은 그제야 적의 생각을 알았다.

“수공이구나.”

적에게 허를 찔린 나머지 잠시 수공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거센 물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저지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나마 이 근방 대부분이 낮은 지대라 물이 넓게 퍼져 병사들을 집어 삼킬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수위가 올라갈 테니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병사들을 피하게 해야 합니다.”

“뒤로 되돌아가잔 말인가?”

“아닙니다. 뒤쪽은 모두 저지대입니다. 돌아가려 해도 물이 금방 차오를 겁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앞은.”

풍겸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앞쪽은 분명 이 수공을 가하고 유리한 위치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야간에, 그것도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물과 씨름하며 엎어지고 넘어지며 빠져나올 군대가 상대하기엔 너무 버거운 적이다.

“물이야, 물. 제방이 터졌다.”

물을 본 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실제로도 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이 느껴지니 시키지 않아도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고대부터 수신이 내리는 홍수를 가장 큰 재앙으로 믿던 대륙 사람들에게 물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빨리. 빨리 피해야 돼. 아니면 다 죽을 거야.”

통제는 어림도 없었다. 병사들은 명령 없이 허겁지겁 고지대를 찾아 움직였다.

제대로 부대를 집결시켜 움직이는 것은 이미 기대할 수 없었다. 천국 군대가 근대화된 군대였다면 이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통제력을 발휘했겠지만, 그들은 전근대 군대였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병졸들을 수습하도록 명을 내려 주십시오.”

“북을 쳐 병사들에게 나아가라고 명하라.”

장수가 급히 고수들을 찾기 위해 뛰어가는 동안, 풍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적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그의 의도를 깨트렸다. 고속 기동으로 집결을 방해한 것이 첫 번째였다.

이어 그것이 도리어 그들을 포위 섬멸할 기회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그의 경계심을 빼앗아갔다. 군략에서 말하는 교병계(적을 교만하게 만드는 병법)다.

그 연속된 계책 앞에 풍겸과 사만 대군은 바보처럼 놀아났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망신창이가 된 채로 적이 미리 정해놓은 전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최상의 상태로 만전을 기하여 전쟁에 임하는 것이 승리에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한다면 적은 그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천국 군대는 그럴 수 있는 요소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사기와 조직력, 전장의 이점, 그리고 체력까지.

‘내 앞에 있는 것이 진정 오승도, 그자라면. 그 명성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구나. 괴물 같은 놈.’

풍겸은 칼을 지팡이 삼아 발을 적시는 흙탕물 사이에서 길을 찾았다. 천경을 떠나올 적만 해도 위세 당당했던 서정군은 이미 없었다. 제 한 치 발 앞도 보지 못해 허우적거리며 흙탕물을 헤집고 움직이는 볼품없는 오합지졸들만 있을 뿐이다.

이 군대로 무대를 만들어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 싸우기 전에 승리를 만들어 놓고 싸운다고 말하는 병법의 천재, 육자의 말을 현실로 만든 자를.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