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62화 (162/425)

제162화. 만부부당 (1)

푸르고 흰 장벽이 늘어서 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벽이 아니라 사람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대열이었다. 엄격한 규칙에 따라 열과 오를 맞춘 병사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음에도 정면을 지향한 병사들의 총구는 가지런한 느낌을 주었다.

이것이 오승도가 길러낸 상승군이다. 당금 제국에서 그 적수를 찾기 어려운 최강의 상비군. 옛 명성만 남은 팔기나 부패한 녹기, 무장이 형편없는 단련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군대다.

장교들은 병사들의 화력 지향점을 확인했다. 총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정확히 적의 심장을 겨눌 수 있는 위치다. 이곳이 에우로페였다면 보다 높게 총구를 들었겠지만 그들의 표적은 백인들보다 신장이 작았다. 표적이 작으니 총구는 다소 낮게 잡는 것이 맞았다.

왁자지껄한 고함소리가 가까워졌다. 수공에 당해 얼이 빠진 채로 무질서하게 고지대로 기어 올라오는 적들이 내는 소리다. 올라오는 통로 자체는 상당히 협소했다. 길이 좁으니 당연히 한 번에 올라올 수 있는 수도 그리 많지 않다.

승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교들이 장갑 낀 손을 분주히 움직이며 외쳤다. 어둠 속에서 흰 장갑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한 자들도 장교의 장갑을 보고 사격 준비를 서둘렀다. 혹시나 병사들이 사격 신호를 모를까 싶어 고수들도 북을 쳤다.

“조준!”

병사들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총의 높이는 바꾸지 않았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오는 적이긴 하지만 유효 사거리에 들어오는 순간만큼은 그들이 선 곳과 높이가 같기 때문이다.

사소한 요소까지 꼼꼼하게 챙겨보고 전장을 고른 오승도의 배려 덕분에 야간임에도 상승군의 사격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한된 공간을 향해 정해진 방향으로 총탄을 퍼붓기만 하면 되었다.

횃불이 닿는 시계로 누런 군복을 입은 한 무리가 얼굴을 불쑥 내비쳤다. 통제를 받지 않고 무턱대고 고지대로 먼저 움직인 비적 출신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을 본 순간 장교들이 손을 내리며 외쳤다.

“사격!”

단 한 번의 명령에 수백 발의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오렌지 빛 섬광이 수도 없이 번쩍이며 푸른 벽 앞을 대낮처럼 밝혔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찌름과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악을 쓰는 소리와 알 수 없는 저주 섞인 음성. 부모를 찾는 목소리가 뒤엉켜 혼란스런 하모니를 이루었다. 하지만 상승군은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일렬이 사격을 마치자 바로 이열이 앞으로 나서며 재차 사격을 퍼부었다.

순차 사격의 위력은 파멸적이었다. 최초로 둔덕 위로 올라왔던 천국 병사 수십 명이 사상자가 되어 널브러졌고, 그다음 순번으로 올라왔던 자들 수십이 다시 사상자가 되었다. 사격을 피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죽거나 다치거나. 천국 군대의 운명은 그 둘 중 하나였다.

“마치 아텐 굴에서 벌어졌던 왕국과 로망스 간의 전투를 보는 듯합니다.”

아텐 굴 전투는 2만이 넘는 로망스 기병이 6천 남짓한 연합왕국 보병에 패한 희대의 전투였다. 당시 중무장한 로망스 기사들과 기병을 받쳐주는 석궁 부대의 위력을 생각하면 로망스가 패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만인의 예상을 깨트린 로망스의 패배였다. 전투가 로망스의 패배로 귀결된 것은 지나치게 좁은 지역으로 로망스 기병이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적 우세도, 기병의 이점도 살리지 못한 채로 좁은 지점에 밀집된 채 연합왕국 장궁 부대의 가공할 화살 비를 한나절이나 뒤집어써야 했다.

강한 군대라도 그 지경이 되면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도 이기는 경우는 역사에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천국 군대가 바로 그 로망스 기병들과 같은 처지였다.

승도는 마른 입술 위로 혀를 가볍게 굴렸다. 아텐 굴 전투는 그의 이야기처럼 진행되었지만 사실 생략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수적 열세가 너무 심했던 까닭에 전투 후반부에 이르러 연합왕국 군대가 하마터면 패할 뻔했다는 점이다.

일방적으로 적을 두드린 것은 좋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싸우다 보니 병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던 것이다. 거기에 적병이 너무 많이 포로로 잡혀 그들을 감시하는 인원을 떼어 적의 후발대를 감당할 전력이 없었다.

연합왕국은 불명예를 감수하고 고귀한 귀족 포로들의 목을 모두 자른 다음 포로를 감시하던 인원까지 전선으로 돌려 간신히 승리를 지킬 수 있었다.

지금 전투도 방심하다간 그 모양이 날 수 있었다. 천국 군대의 머릿수는 상승군의 여덟 배에 달했고, 전투도 피로가 쉽게 높아지는 야간에 벌어지고 있었다. 방심하면 받지 않아도 될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물론 천국 측은 중세 로망스 군대처럼 명예 의식이 확고한 자들도 아니고 군대의 조직력도 탄탄하지 않으니 그 걱정은 기우일 수도 있었다.

“사격!”

승도가 아직은 긴장을 풀지 않은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사이에도 오렌지 빛 불꽃이 연달아 터졌다. 부나방처럼 기어 올라와 하릴없이 스러지는 적병들은 벌써 백 단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수백, 아니 천이 넘는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졌는지 어느덧 통로 쪽은 시체가 겹겹이 쌓여 지대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그 바람에 강력한 살상 공격을 피해낸 적들이 더러 생겨나고 있었다.

“조준점을 올려라!”

장교들이 뒤늦게 시체로 말미암아 높아진 입구 쪽의 사정을 눈치챘는지 병사들의 총구를 조금 높였다. 다시 살상 작업은 순조로워졌다. 병사들이 열을 교대할 때마다 수백 발의 총탄이 쉬지 않고 쏟아졌다.

강주에서 수도 없이 총탄을 장전하는 연습을 한 상승군이다. 적어도 장전과 사격 준비의 동작 하나 만큼은 에우로페의 육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그들의 연사 속도는 분당 네 발. 세 개의 열이 돌아가며 쏘니 실제 분당 12번의 사격을 가한다고 볼 수 있다. 소총의 유효 사거리인 약 100m의 거리는 군대가 돌격을 한다고 해도 30초는 소요되니 6번은 두드려 맞는 셈이다.

말이 좋아 6번이다. 전열 전투에서 보통 3회의 사격만 맞아도 선두 전열은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하물며 접근을 한 상태에서는 피해가 훨씬 커진다. 6번이면 공격 제대 자체를 전멸시키고도 남는 화력이다.

무심하게 재차 총구를 당겨 기계적으로 총탄을 밀어 넣는다. 강주 병사들의 동작이 반복될 때마다 시체는 수도 없이 쌓였다. 약 10분도 지나지 않아 최초로 고지대를 향해 기어 올라왔던 천국 병사의 상당수가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시체 사이에 웅크린 겁쟁이들이거나 혹은 숨을 헐떡이는 부상자들이 전부였다.

“적은 군으로서의 조직력을 상실한 모양입니다.”

헨들릭은 모병제로 엄선한 전문 군인들 혹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복무하는 에우로페 식 군대만을 군대라고 인정했다. 그렇기에 농부와 비적, 광신도 따위를 긁어모은 적을 제대로 된 군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종교 전쟁 당시 신교 농민군이 보여준 추태에 기반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황제가 보낸 막강한 진압군이 내보낸 기사들의 돌격 한 번에 전열을 무너트리고 달아났다. 위기가 닥치면 구심점을 잃고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이 비 직업군대의 특징이었다.

“그건 아직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한 농민 반란군이라면 적은 수공 한 번에 저절로 무너지고도 남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리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종교적 열의를 가진 자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군대였다.

이런 집단은 위기가 닥쳐도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천지회만 하더라도 승도에게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는 그 핵심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천국 군대 역시 간단히 무너지진 않을 것 같았다.

둥. 둥. 둥.

멀리 북소리가 들렸다. 승도의 군대가 낸 소리가 아니라 침수가 이루어진 저지대 쪽에서 난 소리였다. 북소리와 함께 혼란스럽던 소리도 점차 잦아들더니 기도문 비슷한 소리로 바뀌었다. 현세에서의 구원과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부르짖는 외침이다.

천국이 제국 군대와 싸우기 전에 의식적으로 행하는 구호다. 천국 병사들은 조금씩 그 소리를 함께 내며 질서를 찾는 듯했다. 그 소리는 비교적 넓은 저지대 전역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면초가인가.’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면초가는 네 방향에서 고향의 노래가 들려온다는, 즉 투항을 권하는 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자성어로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쓰는 말이다.

승도 본인이 포위된 것은 아니지만 적의 소리가 귓가에 먹먹할 정도로 울리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반적들이 아직 조직력을 잃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투가 생각보다 귀찮게 될 모양입니다.”

“부대를 좀 더 뒤로 물려야겠습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승도는 적이 조직력을 회복했을 때 한 가지 가능성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적이 시체를 방패로 삼는다면 총격의 효율은 크게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니 시체를 들고 다가오기 어려울 만큼 거리를 다시 벌려야 했다. 피로가 큰 적은 시체를 들고 먼 거리를 움직이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승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국 장교는 직접 장교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천국 군대의 대부분은 낙원교에 투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열의라는 것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종교가 가지는 힘이다.

과거 대륙을 격동시킨 대규모 종교 반란군들의 경우가 그랬다. 그들은 부패한 정권에 대한 대안 세력으로서 이상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믿음을 얻었다. 그 믿음은 정권이 부패할수록, 민중의 삶이 어려울수록 강렬해지게 마련이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신이 부패했기에 강한 조직력을 가진 셈이다.

“천부께서 지상을 아끼시어 천형과 천제를 내리시니 서역과 동방이 두루 평안하고 밝아졌다. 요마의 무리를 쳐부수고 천년 왕국을 건설하리니, 이 또한 형제들의 어깨에 놓인 사명이 아닐 텐가?”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열이 된다. 누군가가 천부를 찬양하는 기도문을 외자 그 울림은 곧 어둠과 물이 주는 공포에 질식되어 삼켜지려 하던 군대를 진정시켰다.

병사들은 조금씩 차오르는 물속에서 기도문을 외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차분한 감정 속에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비록 요마의 무리들이 가한 수공에 당하기는 했으나 아직 그들은 적보다 압도적인 군세를 가지고 있었다.

고난은 곧 천부께서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내린 것이다. 이상 세계를 건설함에 있어 이 정도의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어찌 천국 건설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무질서하게 고지대를 찾아 움직이던 병사들의 물결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끊이지 않고 울리던 총성도 잠시 잠잠해졌다.

병사들이 진정되자 장수들은 부지런히 북을 치며 병사들의 움직임을 통제하려 했다.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다. 장수들은 자신들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병졸들이 일정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도록 진격을 통제했다.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한 방향으로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도록 만드는데 전념한 것이다.

제대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나마 조직적으로 무리를 지어 움직이도록 한 것은 성공적이었다. 인간 집단이 무장한 채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통일된 움직임을 가지는 것을 가리켜 군사 행동이라고 하니까.

풍겸은 장수들이 병사들을 어느 정도 군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도록 바꾸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질서하게 도륙당하는 상황은 모면한 것이다.

하지만 적은 여전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천국 병사들이 준비된 상대에게 찔끔찔끔 덤비다 학살을 당하는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병사들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듯한데 상황은 어떤 것 같나?”

“적도들이 쉬지 않고 탄환을 쏘는 통에 위로 올라간 병사들은 다 죽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물이 계속 차오르는 판입니다. 병사들에게 가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나 이렇게 좁은 길목에서 꾸역꾸역 올라가본들 적을 감당할 방법이 어디 있겠나? 전멸밖에 없어.”

풍겸은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았다. 지난 서역과의 전쟁에서 홍모귀 군대 기천을 상대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제국군 수만이 괴멸되는 꼴을 봤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수적 우세는 상쇄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저처럼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총탄을 막을 것이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총탄을 막는다.”

풍겸은 수하 장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총탄을 막으려면 상당한 두께를 가진 물체가 필요하다. 방패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방패는 오래전에 퇴보해 버렸고 있다 해도 총탄의 관통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보다 더 두꺼운 쌀가마니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장 수공을 당해 몸만 빠져나오기도 바쁜 처지에 손에 들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 있군.”

“방패로 쓸 것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풍겸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 많지 않나? 죽은 우리 병사들 말이네.”

“그들은 형제들입니다.”

기존의 질서 체계를 부정한 천국도 그것만은 금기다. 조상신에 대한 제사도, 성현의 가르침도, 기존 종교들도 부정했지만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형제들만큼은 귀하다 가르쳤다. 제국의 경계 어린 시선 속에서 핍박받으며 신앙을 공유하며 만들어진 가르침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형제의 혈육을 상하게 하는 것은 천부에 대한 반역으로 생각하는 것이 천국의 이념이었다. 하지만 군 출신인 풍겸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리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산 형제들의 목숨을 보호하는 것보다는 못 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네. 그렇기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하지. 그들도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살아 있는 형제들을 보호하길 바랄 걸세.”

“장군. 재고해 주십시오.”

“아니야. 그 방법밖에 없어. 운이 좋다면 저 사악한 요마의 무리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고 그리된다면 우리는 수적 우세를 가지고 전세를 바꿀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자넨 형제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나? 한 놈이라도 많은 적을 쳐 죽여야 천경이 안전해진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풍겸의 한마디에 장수들도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한참 만에 장수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형제들을 방패로 쓰겠습니다.”

“좋아. 명을 전하게. 적이 우리가 거리를 좁힐 수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전에.”

장수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지대로 기어오르는 병사들을 향해 돌아갔다.

풍겸은 자신의 이 마지막 한 수가 통할 것이라고 믿었다.

‘천국은 제국과 다르다. 패하더라도 무능한 제국군처럼 겁에 질려 혼비백산하진 않는다. 우리가 피를 흘리는 만큼 너희도 피를 흘리게 만들어준다. 이것이 우리의 결심이다. 이제 너희가 흘리게 한 피 값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풍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병사들의 시체를 방패로 삼아 거리를 좁힌다면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적의 수가 만만치 않다면 몰라도 이쪽 군대의 1할을 조금 넘는 숫자라면 싸우다 피로가 누적되게 마련이다.

전투가 길어지면 적은 수적 열세를 절감하고 뒤로 물러날지도 모른다. 상대가 그런 판단을 보인다면 천국 군대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날 기회를 얻게 된다. 운이 좋다면.

“와아아!”

풍겸이 생각에 잠긴 사이 한 무리의 병사들이 재차 시체가 쌓인 곳으로 올라섰다. 그들은 죽었거나 혹은 죽어가는 동료들의 육체를 안아 들었다.

피로한 상태에서 자신의 몸무게만큼 무게가 나가는 유기체를 들고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시체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수십 킬로그램이 넘는 쌀가마를 지고도 몇 리를 수월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게 중심을 앞에 두고 자신의 몸을 가리는 불편한 자세로 시체를 들고 가니 일이 쉬울 턱이 없었다. 더구나 몸은 지치고 물속에서 부르튼 발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병사들은 수십 걸음을 힘겹게 움직였지만 엄폐는 무의미한 헛수고였다. 상승군은 그들의 수고를 알기라도 하듯 뒤로 백 미터 이상 물러난 지 오래였다.

천국 병사들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동안 총성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을 염려하여 막대한 체력을 소모하며 움직였다.

마침내 적의 코앞에 이르렀을 때는 병사들은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시퍼런 달빛이 검은 구름을 뚫고 상승군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제야 적을 마주한 천국 병사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적은 날카로운 쇠붙이를 총신에 꽂은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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