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63화 (163/425)

제163화. 만부부당 (2)

“돌격.”

승도의 손이 내려가자 장교들이 그 명령을 복창했다. 푸른 달빛을 받아 시퍼런 빛을 머금은 총검이 살기를 풀풀 흩날렸다. 다음 순간 푸른 군복들이 총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월비(천국을 비하하는 말)를 토벌하라!”

칼을 뽑아든 장교가 선두에 서 있음과 동시에 총검을 쥔 병사들이 노도처럼 쏟아졌다. 푸른 강물의 호호탕탕한 흐름이 밀려오자 천국 병사들이 급히 손에 쥔 시체를 놓았다. 하지만 시체를 들고 다가오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그들은 무기를 제대로 쥘 힘이 없었다.

급히 창과 칼을 뽑아들었지만 기계적으로 총검을 내질러오는 상승군의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지친 병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푸른 군복들은 파죽지세로 천국 병사들을 쪼개며 앞으로 나아갔다.

일부 용맹한 자들이 칼을 휘둘러 저항해 보았지만 집단으로서 완성된 군대의 적수가 될 턱이 없었다. 체력도 조직력도 무기의 이점도 모두 상승군이 쥐고 있었다.

푸른 군복의 병사가 군홧발로 무릎을 걷어차자 한 천국 병사가 몸을 구부렸다. 이어 푸른 군복들이 일제히 총검을 찔러오자 천국 병사는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시체를 들고 돌격하던 첫 전열이 무너지자 비장한 각오로 뒤를 따르던 천국 병사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총검을 휘두르며 자기편 병사들을 개돼지처럼 도살하는 적이 주는 압박감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하나둘 두려움에 휩쓸려 엉거주춤 물러나자 뒤에서 올라오던 무리들과 뒤엉켜 전열은 엉망이 되었다. 상승군은 상대가 밀집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보며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렀다.

병사는 무기를 쓰기 위해 동료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그 자신이 무기를 쓸 수 없도록 공간을 채워 버린다면, 싸움은 불가능하다.

고대의 포위전에서 전투 말미에 흔히 벌어지곤 하는 학살 양상이 바로 이런 국면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몸과 몸이 뒤엉킨 천국 병사들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 상승군의 총칼을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몸으로 받아야 했다.

무의미한 죽음으로 점철된 일방적인 학살이다. 종교적 열의가 충만한 자들이라도 개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앞에서 허망하게 죽어갈 때마다 뒤돌아서 달아나려는 자들이 나타났고, 그때마다 혼란은 가중되어 갔다.

“장발적(긴 머리를 기른 도적)은 이걸로 끝이다. 오 대인 천세!”

푸른 군복들은 기세를 탔다. 전장에서 기세를 탄다는 것은 승리의 여신이 보낸 초대장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 승리가 눈앞에 보이자 병사들도 기운이 났다. 총검을 휘두르는 손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으악.”

곧바로 찔러온 총검을 피하지도 못한 병사 하나가 눈을 부릅뜬 채로 쓰러졌다. 붕괴가 이어지는 와중에 시체는 몇 겹이나 더 깔렸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깔린 시체 때문에 상승군의 진격이 방해받았다.

장씨의 총검이 재차 적병의 복부를 찔렀다. 막 총검을 찌르던 그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몇 번을 쑤셨던 총검에 기름이 많이 끼었는지 검 끝이 시원스레 파고드는 감촉이 들지 않았다.

한 번에 적을 죽이지 못하면 이쪽이 죽는 것이 싸움이다. 장씨가 서늘한 느낌을 받던 차에 적병이 칼날을 마주 휘둘렀다. 장발적이 휘두른 칼이 시린 빛을 뿌리며 장씨의 앞을 스쳤다.

공격은 예리했지만 적의 무기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장씨는 급히 적의 배를 찌른 총검을 비틀었다. 체내에서 칼날을 비틀면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장발적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장씨가 상대의 배 속을 휘저어 그를 주저앉히자 동료들이 다가와 총검으로 마무리를 했다. 붉은 핏물이 확 튀더니 생명을 잃은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더러운 장발적 같으니.”

장씨는 침을 퉤 뱉었다. 목을 만져보니 살짝 스친 칼날에 베였는지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으니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장발적은 머리가 긴 도적을 의미했다. 천국 병사들이 기존의 관습을 부정하고 머리를 단정히 묶는 대신 길게 늘어트린 장발을 하고 있어 붙여진 별명이기도 했다.

조정의 공식 문서에서는 장발적이라는 호칭 대신 발역(발호한 역적)이나 월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상승군은 거의 반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좁은 지역에 몰려 있던 천국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쑤시고 베며 죽였다. 얼마나 많은 적을 죽였는지 강주 병사들의 푸른 군복이 불그스름한 빛을 띨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적을 죽였음에도 그들의 앞에는 아직도 많은 적병이 남아 있었다. 잔혹한 학살이 끝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장군.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지금 적도들이 우리 병사들을 도륙하며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한 줌도 안 되는 적들이 우리 군을 상대로 근접전이라도 펴고 있단 말인가?”

풍겸은 수하 장수의 말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수적으로 열세한 군대가 근접전을 걸어오는 것은 상리에 맞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가 비슷하다면 모를까, 수적으로 비교도 안 되는 소수라면 그런 선택을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총검을 들고 우리 병사들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병사들이 밀릴 이유가 없을 터인데, 어째서!”

풍겸은 전투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적은 근접전을 허용한 순간부터 극심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며 피로와 손실이 누적되어야 했다. 그것이 상식적인 전투 전개에 부합했다.

하지만 적은 그의 예상을 벗어난 전투 결과를 보여주었다. 풍겸으로서는 믿을 수도, 믿기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정말 저들은 우리 천국 군대가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란 말인가? 10배에 달하는 대군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여서 밀어붙이다니. 오승도 그자가 전설의 패왕이라도 된단 말인가?’

풍겸은 어처구니가 없어 고대 대륙 최강의 군신으로 군림한 패왕을 떠올렸다. 패왕은 정치, 외교적 역량은 최저의 평가를 받는 군주였지만 전투 하나는 그 적수를 찾을 수 없는 무적자였다. 패왕은 단 오천의 군마만 있다면 백만 대군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역사 기록을 눈으로 의심하게 하는 괴물이나 보여줄 법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장군. 이대로 가다간 우리 병사들은 모두 도륙당하고 말 겁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전멸할 수는 없습니다!”

풍겸도 점점 가까워지는 비명 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전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수 없었다. 전투는 완전히 일방적인 학살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질 않나. 방법이.”

풍겸이 이를 으득 깨물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몇 만의 군대가 더 있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좁은 지역에 내몰린 채로 일방적으로 총검을 받는 입장이라면 머릿수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상제시여. 천병을 구원하소서.”

일부 장수들은 절망한 나머지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공포와 두려움조차 거세된 자들이 아닌 다음에야 머릿수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풍겸은 문득 생각하다 ‘공포와 두려움이 거세된 자들’을 떠올렸다. 그의 군대에 그런 자들이 없진 않았다. 가장 광신적인 천국의 신도들. 바로 여자들로 이루어진 군대다.

그들은 여영(女營)이라 불린 이들로, 그 용맹함은 천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천경을 공격할 때 그들이 보인 전투력에 겁을 먹은 양주 부사 유운이 그녀들을 가리켜 대각만파(大脚蠻婆)라 칭할 정도였다.

대부분의 여영이 천경에 머문 탓에 서정군에 속한 여영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삼백. 적다면 적은 숫자지만 절망에 질식할 것 같은 천국 군대에 희망의 불꽃을 피워볼 만한 수는 되었다.

남자들보다 용맹한 그녀들이 나서 흐름을 바꾸어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비장한 죽음으로 겁에 질린 사내들에게 수치를 일깨울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개죽음은 면할지도 모른다.

“여영은 어디에 있나?”

“여영이라 하시면.”

“부연화가 이끄는 군대 말이야.”

서정군에서 워낙 비중이 작은 집단이라 장수들도 그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은 풍겸이 말을 덧붙이고서야 뜻을 이해했다.

“부연화의 병사들이라면 지시에 응하여 둔덕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장 신앙심이 투철한 자들로 이루어진 군대답게 수공을 당한 상태에서도 그들은 견고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천부와 천제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원한 여자들다웠다.

여자들이 천국에 이처럼 절대적인 희망을 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천국은 역대 왕조들과 달리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사유 재산의 소유 및 사회적 진출을 용인하였다. 천부 아래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 그 하나의 교리가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 목숨을 바칠 수 있게 하였다.

“부연화를 불러오게.”

“장군. 이 상황에 그녀를 불러 무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당장 뒤에 남은 병사들이라도 조율하여 이 학살을 막는 것이 시급합니다.”

“아니야. 지금 상황에서 그들은 아무 쓸모가 없어. 상황을 바꿀 열쇠는 하나. 부연화뿐이네.”

“하오나 부연화에겐 삼백의 병사밖에 없습니다.”

“맞네. 그리고 그들은 여자들이지.”

풍겸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

붉은 핏물이 땅을 적셨다. 탐욕스런 대지에 수많은 인간의 시체와 피를 거름으로 바친 상승군이 진득한 기름을 머금은 총검을 늘어트렸다. 전투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지만 약간의 수고만 더한다면 적은 곧 전부 죽은 자들의 뒤를 밟게 될 터였다.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살아남은 적에겐 특별히 반전을 위해 내밀 카드 따윈 없을 겁니다.”

헨들릭은 전투 국면이 유지될 것이라 예단했다. 이 정도까지 오면 전술 레벨에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지휘관이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적에게 이 전국을 뒤집을 카드가 없다면 그렇겠지요.”

“없을 겁니다. 그런 전력은 에우로페에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승도도 연대장의 견해에 반대의 뜻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확실히 연합왕국이 자랑하는 붉은 코트나 로망스의 근위대 정도의 강병이 아니고서는 이 위기를 극복할 길이 없었다. 공포가 완전히 거세된 강철 같은 군대가 아니라면 말이다.

우르릉.

무수한 인간의 덧없는 죽음을 슬퍼하는지 하늘이 울었다. 언뜻 세상이 희미하게 밝아지는가 싶더니 새하얀 번개가 어두운 세상을 잠시 밝혔다.

냉정한 연합왕국 사내는 벼락을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큰 변수가 되진 않겠지만 총을 쓸 수 없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장식 소총은 총구를 하늘로 향하고 총탄을 장전해야 한다. 그럴 경우 빗물이 스며들어 화약이 쉽게 젖는다. 비가 오는 상황에서 총기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큰 문제가 될 리는 없었다. 총검으로도 일방적인 학살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전열을 한 번 물려 재정비를 하는 대신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잔 말이군요.”

승도의 대답에 연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을 쓸 수 있다면 잠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한 다음 체력을 가급적 아끼는 전투로 전환했을 것이지만 총기를 쓸 수 없는 이상 그런 선택은 할 수 없었다. 적이 정신을 못 차릴 때 총검으로 계속 밀어붙여야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인께서는 한 번 물리셨으면 하십니까?”

“원래라면 그럴 생각이었지만 총을 쓸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병사들이 슬슬 지쳐 피해가 늘 수도 있지만 감수할 수밖에요.”

승도로서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다. 상승군의 피해는 그 자신의 위상과 힘의 감소를 의미한다. 공들여 기른 병사들을 대체할 인원을 보강하려면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용병 등의 대체 자원을 감안하면 보충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다.

“보병을 계속 전진시킨다. 적 부대가 완전히 괴멸될 때까지 공격을 계속해. 기회가 왔을 때 놓치면 피로 대가를 지불할 뿐이다.”

헨들릭은 지휘관들을 불러 전투 지속 명령이 내려졌음을 알렸다.

“제길. 언제까지 싸우란 거야.”

장씨는 총검을 휘두르던 손을 잠시 늦추었다. 총검을 쉬지 않고 놀려댄 탓에 팔이 저린 느낌이 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만큼 심력과 체력의 소모는 적지 않았다.

이 정도 싸우면 조금은 휴식을 줄 법도 했는데 그런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진격의 북소리뿐이다.

장씨는 피와 섞인 끈적끈적한 땀방울을 닦아냈다. 푸른 코트 안은 이미 습기로 가득 차 조금만 움직여도 불쾌감이 더해졌다.

“죽어!”

총검을 재차 쑤셔 넣자 적병 하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젊디젊은 소년의 멍청한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에서 동정은 사치나 다름없는 감정이다.

장씨는 쓰러진 소년의 가슴을 밟고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움직였다. 그때 차가운 무언가가 얼굴에 와 닿았다. 조금 전까지 전투의 흥분으로 느끼지 못했던 축축한 감촉이었다.

“어?”

그가 고개를 들자 옆에 있던 동료들도 잠시 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들었다.

“비다. 비가 온다.”

“비가 온다고?”

장씨는 그 말에 적잖이 놀랐다. 비가 오면 총을 쓸 수 없다. 총을 쓸 수 없다는 말은 수적으로 열세한 그들이 계속해서 총검으로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비가 오는 게 맞는 것 같네.”

“비가 오면 총을 쏠 수 없잖나.”

“그야 그렇지.”

“하면 저 많은 놈들을 총검으로 다 죽여야 한단 건가?”

장씨의 반문에 병사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미 지친 그들에게 그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처럼 들렸다. 하지만 못 할 일처럼 보이진 않았다. 일방적으로 죽이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장발적들은 우리 손에 개돼지처럼 죽어나갈 뿐이네. 저항도 제대로 못 하는 적들을 죽이는 일이야.”

한 병사가 던진 말에 나머지들도 수긍했다. 그들은 재차 총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앞으로 움직였다. 그들 발아래 깔린 무수한 시체와 핏물이 그 말에 힘을 보태주었다.

장씨도 힘을 얻었다.

“그 말이 옳아. 총을 못 쓰면 총검으로 죽이자고.”

그들은 용기를 얻기가 무섭게 처음과 같은 기세로 총검을 휘둘렀다.

장씨는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의 앞에서 달아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적병을 향해 다시 총검을 힘껏 밀어 넣었다. 핏물이 확 튀었다. 장발적은 아무리 수가 많아도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장씨가 희죽 웃으며 총검을 빼내던 차였다.

뒤엉켜 있던 적의 전열에서 갑작스레 작은 신형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장씨를 향해 쇄도했다. 장씨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 총을 자신의 머리 앞으로 세웠다. ‘챙’ 소리와 함께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총신과 검이 부딪치며 낸 소리에 장씨의 얼굴에 얼떨떨한 빛이 떠올랐다. 전열이 무너진 상태에서 도륙당하며 함몰되어 가던 적 사이에 싸울 투지를 가진 놈이 남았다고?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작은 신형을 가진 적이 손을 비틀더니 검을 모로 틀어 찔러왔다. 섬세한 손짓에 장씨는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뒤늦게 그의 위험을 깨달은 동료들이 급히 총검을 찔러왔다.

조직력 하나만은 서역 군대에 버금갈 정도로 단련된 상승군이기에 반응은 신속했다. 세 방향에서 찔러온 총검에 작은 신형이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그 비명 소리는 조금 뾰족하고 앳된 것이었다.

남자의 거친 음색과는 다소 다른, 부드러운 톤의 것이었다. 장씨는 총검에 찔린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희고 말쑥한 살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고 갸름한 얼굴형에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것이 꼭 여자를 연상시켰다. 머리를 풀어 헤친 장발적들의 특징 때문에 남녀를 구분하기 어렵다지만, 정말 여자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장씨는 여자를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대륙에서 여병(女兵)을 쓴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기록도, 전례도 없었다.

장씨가 의외의 상대와 마주하고 있던 순간 전열 곳곳으로 기이한 적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광신으로 뭉쳐진 천국의 정예, 여영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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