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64화 (164/425)

제164화. 만부부당 (3)

“천국의 이름으로 요마들을 치고 형제들을 구한다!”

여군 장수 부연화의 외침에 수백 명의 여자들이 칼을 들고 전선에 참가했다. 겉보기엔 호리호리한 여자들이지만 내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전족을 하지 않은 객가 출신의 농촌 여성들로 규방에서 수를 놓는 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친 농사일을 할 수 있는 튼튼한 다리, 억척스러운 북방인의 기질, 여성으로서 받아온 억압기제에 대한 반발. 그 모든 것을 가진 여영의 역량은 무질서하게 뒤로 밀리던 남자들을 압도했다.

그들은 모두 흰옷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흰옷은 천국의 이상을, 붉은 띠는 이상에 바칠 수 있는 희생을 의미했다.

굳은 각오로 다져진 여자들이 덤벼들자 일방적이던 흐름이 잠시 끊어졌다.

“악.”

완력의 차이를 당해내지 못하고 가슴을 찔린 여자가 뾰족한 비명을 냈다. 그 옆에서 달아나기에 급급하던 천국 병사들이 그 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남자와는 확연히 다른 그 비명 소리는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여병이 뒤를 막고 있다.”

한 병사가 입을 열자 그 주변의 장정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군가가 뒤를 막아주는 것은 확실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연약한 여인네에게 뒤를 맡기고 달아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천국이 들어서긴 했지만 지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가부장제 문화가 존재해왔다. 그 문화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전쟁에 나가는 것은 남자라고 말이다.

천국이 들어섰음에도 그 무의식적인 기제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하니 여자에게 뒤를 맡기고 달아나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가 뒤를 막고 있다고. 이 자라 새끼들아.”

자라는 대륙 문화권에서 가장 심한 욕이다. 하지만 그 욕을 먹고도 천국 병사들은 화를 내지 못했다. 그들 스스로도 이 상황에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형제들. 개돼지처럼 죽는 것은 분명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뒤를 맡기고 생을 부지한들 그 목숨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맞소이다. 나 장평, 이 자리에서 개돼지처럼 죽더라도 여자들에게 뒤를 맡기고 달아나는 비겁자가 되진 않겠소.”

장평이 이를 으득 깨물며 돌아섰다. 한 사람이 돌아서 적을 향해 달려가자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뒤로 달아나기만 하던 병사들의 분위기도 일변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열이 된다. 달아나기 위해 이쪽으로 몰려오던 병사들의 물꼬를 막고 있던 이들이 돌아서자 천국 군대는 적을 향해 하나의 대오를 이루어 도도한 흐름을 이루어냈다.

군대는 단일한 대오를 이루어 움직일 때 비로소 그 조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천국 군대는 파멸의 끄트머리에서 비로소 군대로서의 면모를 회복했다.

수많은 남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것을 겨우 몇 백의 여자들이 해낸 것이다.

비명 소리가 잦아들자 풍겸이 품에서 쌈지 하나를 꺼냈다. 그가 그것을 입에 물자 수하 장수가 부싯돌로 불을 붙여주었다.

“전황은 어떻게 돌아가나?”

“부연화가 해냈습니다. 병사들이 다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장졸들이 하나가 되어 적도들에게 달려든 덕분에 적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비명 소리는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멀어지는 만큼 적이 밀려나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니까.

“부연화가 해냈다면 그나마 희망이 없진 않군. 적도들의 군세가 그리 크지 않으니 이대로 밀어붙일 수만 있다면 적에게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거야.”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까?”

“이기는 것은 어렵지.”

풍겸은 쓴웃음을 지었다. 적의 연환계에 걸려 망신창이가 된 군대다. 수적 우세가 있다 해도 승리는 그의 손을 벗어나 있었다.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단지 어떻게 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하오나 장군, 지금 이렇게 밀어붙인다면 적이 무너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장에서 밀리는 군대는 어느 순간 무너지게 마련이다. 한 발 물러설 때 동료가 두 발을 물러설까 봐서 말이다.

혹은 적의 기세에 겁을 먹고 두려움을 품는 순간에도 무너지게 된다.

이쪽이 꾸준히 밀어붙일 수 있다면 적이 무너질 가능성은 분명 점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는 전장을 선점한 기동력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처럼 강고한 통제력을 가진 군대라면 이 정도 위기에 무너질 리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천국 군대가 먼저 무너질 것이다.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풍겸은 전황을 냉정히 판단했다. 비는 병사들의 체력을 빠르게 갉아먹는다.

적은 수는 적어도 유리한 위치에서 싸우고 있고, 이쪽은 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심리적으로 쫓기는 입장이다. 양쪽의 체력이 동시에 떨어졌을 때 심리적으로 위축된 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일걸세. 근처에 남은 병사들은 얼마나 되나?”

“얼추 만은 될 겁니다.”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벌써 이만이 넘는 병사가 죽어나갔다. 천국 군대가 제국과 싸운 이래 이토록 심한 패배를 겪은 적은 없었다.

풍겸은 만 정도라는 말에 시계를 꺼냈다. 서역인들이나 들고 다니는 회중시계다. 서역인들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후 그들의 문물을 배우기 위해 나름 흉내를 내다보니 손에 넣게 된 기물이었다.

그는 시계를 보고 시간을 대충 가늠했다. 전투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대략 한 시진(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한 시진은 짧지만 한편으론 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이만이 넘는 병사들이 죽었다. 적은 분당 백 단위의 병사들을 죽인 셈이다.

그렇다면 반 시진 정도면 남은 병사들도 거의 다 도살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학살을 당하던 상태에서 벗어났으니 좀 더 버틸지는 모르지만.

“이 각 안에 병사 오백만 모아서 오게.”

“이 각(30분) 안에 말입니까?”

“서두르게.”

장수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시하고는 첨벙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병사 오백이면 지금과 같은 싸움에서 적은 전력은 아니었다.

혼란스런 싸움을 벌이는 부대가 괴멸된 순간, 마지막 카드로 쓰기에 알맞았다.

풍겸은 부연화로 하여금 일방적인 흐름을 끊게 했지만 그것만으로 강주군대에 피해를 제대로 입히긴 어려웠다. 그렇기에 그는 그 자신의 무용을 마지막 카드로 내세우려 했다.

그는 검집을 가만히 손으로 쥐었다.

풍겸은 산동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먹고사는 것에 지장이 없는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평탄한 삶은 그의 인생에 걸맞지 않은 옷이었다. 유협들과 어울려 다니며 주먹을 쓰지 않고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망나니로 살아가는 아들의 모습에 근심을 한 부친은 그를 한적한 산의 도관에 보내 심신을 단련하게 했다. 그곳에서 스승을 만나 무술을 배우게 되며 무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지주 집안의 자제로서 기구한 인생을 걷게 된 셈이다.

그는 스승의 밑에서 무술을 배우며 마음을 바로잡았으나, 시대는 무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배운 무술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가문의 도움으로 조그만 무관 하나를 열어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수입은 변변찮았다. 하는 수 없이 사촌 형의 도움을 받아 군관 자리 하나를 얻었다.

군관 자리는 그의 적성에 맞았다. 병사들을 다루고 지휘하는 일은 무술을 익힐 때만큼 보람차고 즐거웠지만 보람도 잠시, 홍모귀들이 제국을 침범하며 그의 일상도 무너졌다.

강대한 양이들은 몇 번의 싸움을 통해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그때마다 제국군은 무력하게 도주하기에 바빴다. 제대로 싸울 용기를 가진 자는 거의 없었다.

오직 풍겸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로 한 부하들만이 제대로 싸웠을 뿐이다. 그들은 양이들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값비싼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살아남아 내일의 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풍겸 자신밖에 없었다. 그 아수라장을 겪으며 제국군에 환멸을 느끼고 비적 떼에 투신했다. 비적이 되어 제국군과 싸우고 때로는 이익을 탐하는 다른 비적 무리들과 싸웠다.

그렇게 살아온 삶이었다.

그 처절한 인생 여정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싸움은 결국 사람이 한다는 사실이다.

죽고자 각오한다면 오합지졸의 잡병들이라도 개죽음보단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책상 위에서 붓이나 굴리는 책상물림들은 알 수 없는 교훈이다.

과연 젊디젊은 적장에게 그와 같은 인생 경험이 있을까?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푸른 검신이 시원스레 뽑혀 나왔다.

***

고함 소리, 비명 소리가 울린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충돌하며 내는 불규칙적인 소음이 어두운 대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조금 전만 해도 들리지 않던 강주 사투리가 섞인 비명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학살이 아닌 전투로 전국이 바뀌고 있었다.

일방적이던 전황이 일변했다.

물론 상승군이 패배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흐름이 변했군요.”

승도의 장포자락이 바람을 받아 펄럭였다. 낮과 밤에 풍향이 바뀌듯 전투의 양상도 달라져 있었다. 비명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이 벌써 기진맥진할 리는 없을 것이고 비가 생각보다 큰 변수가 된 모양입니다.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조금 전까지 무력하게 달아나던 자들이 무기를 마주쳐 온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승도는 그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가 그렇게 큰 변수가 되진 않았을 겁니다. 비를 맞는다면 그건 적도 마찬가지. 오히려 물을 걱정해야 하는 저들이 심리적으로 더 어려워야 정상입니다.”

승도는 전장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했다. 잘 훈련된 병사들과 준비된 전장 조건을 감안하면 비 정도의 요소에 분위기가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무언가가 판을 흔들었다.

승도는 자신의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수가 되었을 거라고 보십니까?”

승도는 대답 대신 장포를 벗었다. 차가운 빗방울을 무시하고 겉옷을 벗자 헨들릭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인?”

승도는 장포를 건네며 답했다.

“전장에 변수가 발생한 이상 직접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이 자리에서는 변수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순히 머리로만 싸운다면 병법의 이론에 통달한 자들이 전장을 지배했을 것이다.

하나 이전의 역사가 증명하듯 전쟁은 이론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없이 싸워본 승도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전이 벌어지는 상황이라 직접 들어가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전장의 눈 먼 총알은 신분을 가리지 않으니까.

그가 총애했던 원수들 중 몇은 일선에 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다 대포알에 맞아 죽었다.

하지만 죽음을 겁낸다면 전장을 지휘할 자격이 없다.

“그 또한 감수해야 할 몫입니다. 지휘관으로서 일선에 서지 않은 자, 전장의 주역이 될 자격이 없다는 프레드릭 대왕의 격언도 있지 않습니까?”

승도는 프레드릭 대왕의 말을 인용했다. 지휘관은 전장의 공기를 직접 맡고 병사들의 죽음을 귀로 들어야 비로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법이다.

낮이라면 굳이 전장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겠지만 지금처럼 시계가 제약된 야간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제가 가겠습니다.”

헨들릭은 직업 군인인 자신이 아무래도 전장에 익숙하리라고 여겼다. 승도는 전략가로서는 완성된 사내이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였다. 그런 그를 백병전이 벌어지는 곳에 내던지는 것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승도가 백병전 경험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고용주를 위험한 곳에 보내 죽게 하는 것은 고용인이자 용병된 입장으로 용납되지 않았다.

“아닙니다. 경은 현 위치에서 부대를 조율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휘관이 모두 자리를 비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군 전체의 눈과 귀가 되어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대인. 대인께서 전장에 들어가셨다가 변이라도 당하시면 우리 군은 구심점을 잃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점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왕국 출신 장교들을 부리기에 누가 유리한지 말입니다.”

당연히 연합왕국 장교들은 연대장 출신의 장교인 헨들릭이 다루기 쉽다. 현재 상승군의 등뼈는 바로 그들이었다.

“대인께서도 그들을 다루실 수 있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문제는 그 역량을 백 퍼센트 활용할 수 있느냐. 그 부분입니다. 용병술에서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을 배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경은 내 용병술을 의심하는 겁니까?”

승도의 용병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하느냐는 물음은 전략가로서의 자존심을 건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 감히 노를 대답할 수는 없다.

노련한 베테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남겠습니다.”

“하면 잘 부탁합니다.”

승도가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상승군은 이번 전쟁에 강주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비싼 판돈이다. 그 자산을 이번 한탕 싸움에서 필요 이상으로 소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승도는 왕국 장교 하나가 건네준 곰 가죽 모자를 세로돛 스타일로 눌러쓰고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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