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성명작기 (2)
백마를 탄 젊은 사내가 찬란한 햇빛을 후광처럼 두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수천의 장병들이 질서정연하게 열과 오를 맞추어 들어왔다. 군중들은 그 화려한 입성에 모두 입을 딱 벌렸다.
일부러 일출 시간을 골라 현에 입성한 그의 연출 솜씨는 실로 인상적이었다. 에우로페에서 몇 번을 써먹었지만 그것이 먹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연출과 무대, 분위기. 모든 것이 정확했다. 오승도와 그의 군대는 천장이 이끄는 하늘의 군대처럼 강렬한 인상을 던졌다.
“저게 열 배가 넘는 도적들을 간단히 쓸어버린, 그 유명한 상승군이라고 하는구먼.”
“열 배가 넘는 도적들을 쓸어버렸다고?”
“그럼.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네.”
실제로 상승군이 물리친 천국 군대는 열 배가 되지 않는 규모였지만 소문은 원래 과장되게 마련이다. 그나마 이곳은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멀지 않아 과장의 정도가 덜할 뿐이다.
“보기에도 반듯한 것이 대단하이. 천자께서 거느린 친군영의 병사들이 저럴까?”
“그야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저들만큼 강한 군대를 본 적이 없단 거야.”
“과연.”
백성들의 눈을 의식하듯 병사들은 프리지아 식으로 손과 발을 높게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제식 훈련을 했던 상승군인지라 그들의 움직임에는 절도가 있고 전체 동작에 통일성이 있었다.
“오 대인 천세!”
오승도의 입성을 구경하러 온 민중들도 환호를 보냈다. 그들은 제방을 터트린 자가 그라는 사실도 몰랐다. 막연하게 월비들이 몰려와 싸우는 와중에 그 사악한 것들이 제방을 터트렸다 생각할 뿐이었다.
승도의 백마가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늠름하게 생긴 분이다.”
“도적을 토벌하고 제국에 평안을 가져다주소서.”
일부 백성들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기도 했다.
“얘야, 잘 보거라. 저분이 월비들을 토벌하고 제국을 반석에 세우실 영웅이란다.”
인파 속에 섞여 있던 노인이 손자의 고사리 같은 손을 꽉 쥔 채 백마를 탄 젊은 사내를 가리켰다. 대륙에서는 유명한 인물들을 어릴 때 보면 그 운명을 훔쳐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유명인이 행차하면 부모들은 아이들의 손을 쥐고 몰려와 그 얼굴을 기억하게 하려 애를 썼다.
“저분이 영웅이라고요?”
할아버지가 영웅 이야기를 하자 소년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는 이야기 속 영웅들을 무척 좋아했다.
“네가 좋아하는 소설에 나오는 영웅들만큼 빛나는 분이란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글 속의 영웅은 대리만족을 주는 그들의 꿈이요, 이상이요, 희망이다. 그런 비현실적인 젊은 영웅이 눈앞에 있으니 어른들은 더욱 아이들에게 그 인상을 넣어주고 싶어 했다.
노인도 그런 어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제국을 젊은 나이에 떨어 울리는 오승도의 운명을 소년이 나누어 받기를 바랐다.
“저분이 악운만큼 멋진 영웅이라고요?”
아이는 자신이 소설에서 읽었던 협의 상징 악운과 비교했다. 악운은 민중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으로 이민족 왕조 말기 검 한 자루를 차고 대륙을 횡행하며 탐욕스런 관리들과 이민족 장수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한 협객이었다.
물론 악운이 실존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악운이 실존했다 믿으며 그의 사당을 세울 정도로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 저분이 이 시대의 악운이라고 해도 좋단다.”
노인은 승도를 악운에 비유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승도는 악운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거하는 강주에서 널리 구휼을 행하고 공정하고 청렴한 정치를 펴며, 밖으로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월비를 토벌하니 그만큼 악운의 이름에 어울리는 이도 없었다.
“와, 그럼 오늘부터 저분의 이야기를 들을래요.”
손자의 대답에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반쯤 썩고 닳아빠진 잇새로 조금 불분명한 발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러니 저분을 잘 기억해두고 커서 저분처럼 되어야 한단다.”
영웅의 족적을 기억하고 그 발자취를 쫓는 것.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네!”
아이의 씩씩한 대답에 노인은 웃으며 손자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의 손자가 저 젊은 거인처럼 될 수 있다면.
소년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크게 떴다. 이야기 속 영웅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니 백마를 탄 사내가 더욱 크게 보였다.
승도는 백성들의 환호를 들으며 손을 가볍게 들었다. 그의 화답에 백성들이 더욱 큰 소리로 그 이름을 연호했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복장도 그렇지만 그가 입성하기 전 행상에서 그의 초상화와 승전 관련 풍경화를 뿌려두어 그 얼굴을 볼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사람들이 대인을 흠모하나 봅니다.”
“겉으로 만들어진 외양은 저들이 바라는 이상에 부합하는 영웅의 상이니까요.”
승도는 손을 저어 화답했다. 그는 민중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이야기 속의 진정한 영웅이 아니었다. 적당히 민중을 기만하고 기만당한 이들의 지지를 밑천 삼아 야심을 키우는 사악한 정치가다.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는 깨끗하고 고결한 영웅은 없다. 있다 해도 그런 영웅은 사람을 죽이고 기만하는 군인이나 정치가는 아닐 것이다.
“대인께서 원하시던 것을 얻었습니다. 한데 기쁘지 않으신 목소리이십니다.”
헨들릭이 의아스럽다는 듯 살짝 말을 건네자 승도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좋은 일이 마냥 좋기만 하다면 그도 속이 편하고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란 인간은 야심 하나만을 지향하던 과거의 황제가 아니었다.
“기쁩니다. 하지만 기쁘지 않기도 합니다.”
승도가 속내를 털어놓자 연대장이 고개를 돌렸다.
“기쁘지만 기쁘지 않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기 아이들이 보이십니까?”
승도의 눈짓에 헨들릭이 고개를 돌렸다. 늙은 노인의 손을 쥔 꼬마 아이가 보였다. 그 주변으로도 부모의 손을 잡고 그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주 평범한, 전형적인 신의 농촌 아이들이다. 그리 특별할 것도 대수로울 것도 없는 눈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잘 보입니다.”
특별함은 보이지 않았다. 하니 승도의 부연 설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눈에서 내 딸아이를 보았습니다. 민중을 속이고 필요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나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눈에서 말입니다.”
한없이 냉정한 군인, 교활한 정치가의 면모를 가진 괴물도 결국 평범한 아버지의 일면이 있었다. 아버지들은 어린 자식 앞에서만큼은 정직해지고 싶고 부끄러운 면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다.
“오 대인 천세!”
“천세!”
천세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승도는 그 환호에 답하며 말을 재촉했다.
***
희미한 바람결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나뭇잎이 흐느적거리는 소리에 천국 병사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머나먼 강주 태생의 강씨가 죽창을 지팡이 대용으로 땅에 박고는 숨을 골랐다. 언제나 습한 남쪽과 달리 대하 이북은 공기 자체가 조금 달랐다.
“물 좀 드시오.”
옆에 있던 중년 사내가 물주머니를 건네자 강씨는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돼지 방광으로 만든 주머니에는 시원한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조금은 살 것 같군요. 잘 마셨습니다.”
강씨가 주머니를 돌려주자 사내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주머니를 허리춤에 다시 동여매고는 강씨를 보았다.
“말씨를 보니 남쪽 사람 같소만, 객가 출신이요?”
“아닙니다. 저는 강주 태생입니다.”
“강주. 그곳은 좋은 곳이지요.”
사내는 껄껄 웃었다. 강주는 제국 남쪽의 보물 창고로 일종의 이상향과 같은 신비감을 주었다. 물론 그곳에도 빈민과 거지는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개도 금화를 물고 다닌다는 말처럼 돈과 일자리가 넘치는 것은 사실이다.
사내는 기분 좋게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좋은 곳에서 살던 사람이 왜 이곳까지 온 거요?”
“강주에 살 때에는 빈민으로 살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 흉흉한 세상에 거기보다 좋은 곳은 없다 들었소이다.”
사내의 물음에 강씨는 고개를 저었다.
“날품팔이 임노동자로 먹고살다 보면 하루걸러 하루를 굶게 마련입니다. 괜찮은 일자리는 인맥이 없으면 구할 수도 없으니 거기가 꼭 좋지만은 않습니다. 천국에선 밥은 굶기지도 않고 두 끼 꼬박 챙겨먹을 수 있으니 오히려 여기가 좋습니다.”
관시란 인간관계를 이르는 말로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인맥을 말한다. 빈민이라면 이런 관계를 얻기 어려우니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관료 사회도 인간관계가 중요하지만 상계에서도 그것은 중요했다. 물론 상계에선 재능만 있다면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재능을 타고나는 자는 소수다.
“하긴 칼 밥이라도 제때 먹을 수만 있다면 우리 같은 인생에는 더없이 좋은 일이긴 하오.”
사내의 말에 강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민초들에게 바라는 것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는 것.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을 바라기엔 당장의 현실이 너무 팍팍했다.
“잠시 쉬어간다!”
그때 백장이 큰 소리로 휴식을 알렸다. 병사들이 지친 표정으로 여기저기 주저앉자 둘도 적당한 나무 등걸을 골라 몸을 기댔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어디까지 올라간다고 합니까?”
“듣기론 북경까지 간다고 하더이다.”
“북경이면 여기서 오천 리는 족히 떨어진 곳이 아닙니까?”
강씨가 놀란 얼굴로 반문하자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오천 리지 걷기만 해도 석 달은 족히 가야 할 거리요. 싸우지 않고 걷기만 해도. 정말 거기까지 간다고 하면 1년은 넘게 걸어야 할 거요.”
“정말 터무니없는 거리인데 거길 정말 노린다니.”
“하나 세상을 바꾸려면 거기로 갈 수밖에 없을 거요. 제국 수도를 깨부숴야 뭔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겠소?”
강씨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이 비루한 세상이 바뀌려면 왕조가 바뀌어야 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도 있지만 적어도 신생 왕조가 들어서면 수십 년은 태평성대가 이어지게 마련이다.
“정말 제도까지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겠지요.”
“사실 나도 우리가 거기까지 가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소이다.”
북벌군 사이에서는 이번 북벌이 실패할 것이라는 말들이 종종 떠돌고 있었다. 강주 관리사 오승도가 천경을 위협하는 판이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천국이 전력을 다해 북벌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한단 말입니까?”
“분위기를 보면 그렇소이다. 하지만 북벌군을 이끄는 상장이 천국 제일의 용장이라 하니 아직 모를 일이요.”
사내는 북벌에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천국이 북벌에 내세운 회심의 패, 서익이 있는 한 원정이 간단히 실패할 리는 없었다. 그는 지금껏 제국을 상대로 불패의 전적을 쌓아오며 놀라운 무공을 떨쳤다. 불패의 상승장군이 있는 한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배식이요.”
광주리 하나를 든 병사가 다가와 식은 감자를 나누어 주었다. 진군 중에 밥을 할 형편은 되지 않아 미리 쪄둔 감자를 주었다. 감자는 식사대용으로 훌륭한 식품이라 문제될 것은 없었다.
강씨는 큼직한 감자 두 알을 받아 들었다. 그는 감자를 조금씩 아껴서 씹었다. 포만감을 느끼려면 가능한 느리게 식사를 해야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도 감자 한 알을 아껴 아주 천천히 먹고 있었다. 제국군이 도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장수들도 병사들의 식사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리 늦게 음식을 먹으면 어떡하오?”
사내는 벌써 감자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손을 옷자락에 닦고 있었다.
“떠돌이로 살다 보니 식사를 아껴 먹는 습관이 들어 그렇습니다.”
“정말 궁하게 살았나보오. 하지만 군대에선 가능한 빨리 먹어두는 편이 좋소이다.”
강씨는 감자를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물을 건네주겠다며 주머니를 뒤졌다. 그때 휙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는 잠시 그륵 소리를 냈다.
“왜 그러십니까?”
강씨가 그의 어깨를 쥐자 사내가 창백한 표정을 짓더니 모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화살대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화살이었다.
“공격이다!”
강씨가 막 화살 공격을 알리려던 찰나, 함성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월비들을 토벌하라!”
고함과 함께 숲속에서 수백이 넘는 흰옷 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을 본 천국 병사들이 마주 무기를 뽑아 쥐었다. 총을 가진 병사도 있었지만 그들이 손에 쥔 것은 총이 아니라 칼이었다.
총은 장애물이 많은 숲에서 효용성이 낮은 무기였다.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근접전에 쓰이는 칼과 창이었다.
강씨도 급히 무기를 손에 쥐었다. 죽창을 쥔 그의 앞으로 보기에도 섬뜩한 대도를 쥔 사내가 달려왔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곧바로 도를 휘둘러왔다. 섬뜩한 감각이 든 순간 머리 위로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까만 머리카락이 공기 중으로 흩날렸다.
운 좋게 공격을 피한 강씨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그러곤 그대로 비탈진 경사를 굴러 대도 사내의 공격권을 벗어났다. 몇 번을 데굴데굴 구른 끝에 강씨의 몸이 멈추었다.
고개를 들자 멍청한 눈으로 그를 보는 천국 병사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눈에 생기가 없는 것이 이미 죽은 자였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 죽음은 대부분 천국 병사들의 것이었다.
“천제께서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큼직한 호통 소리가 들렸다. 강씨가 속한 백인대의 백장이었다. 젊고 담력이 뛰어나 지난 천경 전투에서 제국의 군관 하나의 목을 베어 백장이 되었다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운이 화가 된 듯싶었다. 백장이 되었기에 사내는 책임감을 가지고 자리를 지키다 적병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었다.
백장 주변에는 이미 스물도 넘는 천국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백장 주변에 남아 있는 천국 병사는 셋이 고작이었다. 그들을 둘러싼 적병은 자그마치 서른이 넘었다.
저들은 살아날 길이 없어 보였다.
강씨가 백장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니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월비들을 주살하고 제국의 존엄을 회복하자.”
칼을 든 사내가 막 장발 머리의 목을 치며 외쳤다. 이제 근처에 보이는 자들 중 천국 병사로 보이는 자는 거의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개죽음을 당한다.’
강씨는 엉금엉금 기어 적당한 덤불로 몸을 감추었다. 평소 거미라면 질겁하던 그였지만 목숨이 달린 문제 앞에 그런 사소한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천국에 충성을 말하기엔 그의 충성심은 그리 깊지 않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하루 두 끼 꼬박 먹기 위해 자원한 것이 고작이다. 그런 그에게 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란 요구는 무리한 것이었다.
강씨는 덤불 안에 몸을 숨긴 채로 침을 삼켰다.
그 앞에서 살아남은 천국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마침내 달아나려던 자들까지 모두 쓰러지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싹 그쳤다. 강씨는 웅크린 채 상제, 천부와 천제 등 빌 수 있는 모든 대상을 향해 자신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빌었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을 빌었을 것이다. 날이 어둑해지고 풀벌레들이 울 때가 되어서야 강씨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덤불에서 나왔다.
***
“목숨을 부지한 비겁자가 장군을 뵙습니다.”
강씨가 땅에 머리를 대고 부복하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젊은 사내가 손짓을 했다.
“일어나라고 하신다.”
장수의 말에 강씨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비로소 그 앞에 있는 젊은 사내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사내는 그리 체격이 크지 않았지만 태산처럼 커다란 거인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가 가진 범 같은 눈빛 때문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사내가 바로 천국 제일의 용장이요, 제국을 두렵게 하는 북벌군의 수장, 천국 원수 서익이기 때문이다.
서익은 강씨를 이리저리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천천히 강씨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분이라 들었습니다.”
서익의 이야기에 강씨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비겁자로서 살아남은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자신의 목숨을 바칠 의리는 없다 생각했지만 동료들을 모두 사지에 남기고 온 것에 대해 부끄럼이 없을 수는 없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서익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그는 의자를 향해 되돌아가며 물었다.
“형제께서는 이번에 왜 적들에게 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물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는 것 같았다. 답을 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적이 우리가 갈 길목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강씨가 조심스레 제 생각을 입에 올리자 서익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이유는 되겠지요. 하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서익의 말에 강씨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다른 이유라 하시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개가 저절로 올라갔다. 방금 귀로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알고도 그들을 범 아가리에 밀어 넣었단 말인가?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 앞에 있는 사내는 영웅이다. 영웅이 그런 간사한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어떤 영웅이 형제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태연하게 그 죽음을 입에 올리겠는가? 아닐 것이다.
강씨의 놀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익이 천천히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우리는 형제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큰 승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형제들을 제물로 바치다니요?”
강씨는 눈앞의 사내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떠받드는 천국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서익은 말을 이었다.
“그 패배는 적을 교만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형제들이 죽어야 적들은 이길 수 있다 여기고 우리에게 도전해오게 됩니다. 그래서 제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곳에서 개죽음을 당한 이유가 처음부터 짜여 있던 각본대로였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걸 위해 적에게 이동할 시간과 장소까지 모두 알려 주었습니다.”
강씨는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국에 특별한 충성심도 이상도 품고 있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는 너무나 큰 배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은 천국의 이상과 대의에 목숨을 내걸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형제라고 말하며 같이 이상 세계를 건설하자 말하던 천국이다. 그런 천국에서 형제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그것을 계책이라고 말한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장에선 정도 의리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휘관은 냉정하고 비정해질수록 많은 병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어제 형제들의 희생 덕분에 북벌군 전체가 살아날 길이 열렸습니다. 형제들의 희생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서익의 대답에 강씨는 주먹을 쥐었다.
“그럼 이 이야기를 왜 제게 해주시는 겁니까?”
일개 생존자 따위에게 장군이 직접 숨겨진 속사정을 다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서익은 그렇게 했다. 배신감이 치밀어 오르도록.
“형제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선봉 부대가 적의 비열한 덫에 빠져 전원이 목숨을 바쳤다. 이 정도의 이야기는 되어야 병사들의 사기에 도움이 됩니다. 한 사람이 살아나왔다고 하면 감동은 그만큼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죽어야 할 분에게 사실이라도 정확히 알려드려야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대답에 강씨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과 대의를 꿈꾼다고 말한 천국도 역시 인간이 사는 세상이었다. 더럽고 치졸하기는 제국 못지않은 자들이었다. 형제라고 말한 자들을 사지로 밀어 넣고 그 피 값으로 이익을 탐하려 하다니.
“이게 우리들을 위해 이상향을 세우겠다는 천국입니까?”
서익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서 이상향은 없습니다. 괴물은 괴물을 닮게 마련이니 제국을 쓰러트리려면 제국을 닮는 수밖에요.”
서익은 그리 답하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좌우에 있던 장수들이 달려와 강씨의 팔을 잡았다.
강씨가 장수들에게 끌려 나가자 군막 안에 있던 장수들이 물었다.
“굳이 저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었습니까? 차라리 모르고 죽는 것이 저자에게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장수들의 말에 서익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민중을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형제들을 마음대로 배신하고 그 목숨 값으로 천하를 노리려 하는 입장입니다. 알량한 진실이나마 알려주고 훗날 저승에서 죄를 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군.”
“틀립니까?”
“전쟁에는 소의 희생이 필요한 법입니다.”
“희생은 필요한 법이지요. 하지만 희생에도 넘지 않아야 할 경계는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선을 넘었습니다. 절대 배신하지 않아야 할 형제들의 목숨을 배신하면서.”
서익은 장수들의 청을 받아들여 고육지책을 쓴 것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구태여 악역을 자처하여 강씨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저주 어린 시선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장군. 장군의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가 애송이 놈을 보십시오. 그자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 말처럼 오승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전략가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필요하면 자기편 머리 위에 대포알을 퍼붓고 아군의 일부를 적의 아가리에 던져 넣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압니다. 알기에 여러 제장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겁니다.”
“한데 왜 이리 불편한 기색을 하고 계신 겁니까?”
“악어의 눈물입니다.”
서익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어의 눈물은 위선자의 거짓된 참회를 일컫는 말이다. 먹이를 먹고 소금기를 배출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비정한 파충류의 거짓된 행위다.
“장군은 위선자가 아니십니다. 수만 장병들을 위해 결단을 내리신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을 버렸다는 것만큼은 변치 않을 겁니다. 하니 선망의 시선도 원치 않습니다.”
서익은 형제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좋은 장수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략가로서의 모순된 입장을 맛보았다.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한 그로서는 좀처럼 좁힐 수 없는 크나큰 간격이었다.
서익은 두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결정으로 죽어간 병사들의 명복을 빌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