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수륙병진 (1)
상승군은 요수가 패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강북 대영의 참혹한 패전 소식을 접했다. 승도는 패전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그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도리어 제국군이 전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각개 격파를 하며 승세를 탔고 남은 적도 지쳐 있었다. 조금만 더 기회를 잘 잡았다면 제국군을 몰살시켜도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천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략적인 성과로 연결 짓지는 못한 것이다.
어차피 제국군은 십만이 박살나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만한 군세를 모을 저력이 있었다. 십만이 아니라 이십만을 박살내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일거에 쓸어버리고 재기불능의 타격을 가하는 것이 전략적 승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저들은 이쪽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어. 바로 그 점이 저들의 족쇄이자 한계지만.”
승도는 거대한 대륙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천경 옆에 다가선 그의 비수, 상승군의 압박이 있기에 상대가 다급해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조급함만으로 할 수는 없었다. 조급하게 움직인다 해서 상승군이 격퇴당할 가능성이 높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위기가 심화될 뿐이다. 차라리 이번에 거둔 승리를 발판 삼아 북쪽으로 세를 넓혔다면 천국 입장에선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천국 제일의 장수 서익과 사기가 가장 높은 북벌군 전력을 소환하여 시급한 천경 방어에 돌리기로 한 것이다. 과거 범용한 지도자들이 자신의 한 몸을 지키려다 나라를 망친 전례를 떠올리게 하는 반응이다.
일부 뛰어난 지도자들이 자신의 몸과 수도를 미끼로 던져가며 상대의 관심을 끌고 전세를 바꾸었던 대역전극과 비교하면 너무 범용하다.
“상승군을 박살낸다면 저들의 숨통이 트이는 것도 맞아.”
상승군만 격파할 수 있다면 저들의 선택도 그리 범용한 것은 아니다. 불세출(?)의 명장으로 연전연승을 거듭해온 제국 제일의 명장과 그 군대를 박살낸다면 제국의 사기는 땅을 칠 것이고, 천국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천경이 받는 압력을 경감시키면 주변으로 확장이 용이해질 테니 정치적으로나 세력 면으로나 안정성이 높아지게 된다. 격파만 한다면 누릴 만한 이점은 상당했다.
하지만 저들이 상승군을 격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태여 적을 유인할 필요가 없는 승도는 충분히 유리한 위치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간 싸움도 없어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도 주었고, 일부 모자랄 수 있었던 보급품도 보충할 수 있었다.
만전의 준비를 갖췄기에 상승군은 그 막강한 전투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거기에 전력도 크게 보강한 참이다. 연전연승에 속속 가담한 단련과 제국의 잔병만 수천이다. 물론 이 잡병들이 전력에 큰 보탬은 되지 않겠지만 상승군의 방패막이는 될 수 있었다.
제때 용병까지 데려온다면 상승군의 핵심 전력은 도합 육천 정도. 형편없는 적의 전력을 감안하면 정예 육천은 적 육만 이상을 도륙할 만했다.
“문제는 적당히 싸워야 한단 거지.”
이게 승도의 가장 큰 제약이었다. 적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면 천국과 제국의 균형이 무너진다. 당장은 강북 대영이 무너져 천국이 우세해 보이지만 제국은 이만한 전력은 쉬이 재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국 쪽은 달랐다. 지배 영역이 협소하다 보니 어지간한 타격을 입으면 쉽게 재건할 여력이 못 되었다. 기세는 꺾되 타격을 심각하게 줘선 곤란했다.
그렇다고 적당히 소모전으로 가주면 상승군의 피해가 너무 컸다. 상대는 제국군을 상대로 연승하며 상당한 장비를 노획한 상태였다. 무장만 놓고 보면 정규군 이상이다. 이런 적을 상대로 소모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나주는 것도 문제가 돼.”
승도가 여기서 스스로 물러날 경우 그 자신의 명성에 흠이 되었다. 상승장군으로서의 명성이야 그리 아까운 것이 아니지만 정적들이 그것을 빌미 삼아 물고 늘어지면 애써 구축한 이미지가 상당히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하니 물러나더라도 이기고 물러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했다.
지금 물러난다면 적의 북벌군이 두려워 대결을 회피한다는 인상을 줘버리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야.”
승도가 고민을 하는 사이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향료에 침향을 넣고 피워두고 있던 승도는 향이 옅어지는 것을 느끼자 고개를 돌렸다.
“서방님, 저예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의 아내였다. 승도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고 자신도 지도를 편 탁자를 뒤로 하고 침상에 털썩 앉았다.
“부인께서 이 먼 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아내는 강주에 남겨놓고 원정에 오른 그였다. 이번 원정은 기동이 중요했던 까닭에 여성의 몸으로 쉬이 따르기 어려운 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승도의 군대가 한차례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강주를 출발하여 뒤를 따랐고, 그가 이곳에 진을 치고 멈추어 섰다는 소식에 여기까지 따라왔다.
“서방님이 이곳에 계신데 여기 오지 못 할 이유라도 있나요?”
“그건 물론 아니지만 전장은 위험한 곳이 아닙니까?”
“이역만리 서역도 다녀온 몸입니다. 그리 멀지도 않고 서역보다 위험하지 않은 이곳이라면 오지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녀의 당찬 대답에 승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이곳은 서역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거리였다. 위험도 낯설고 물선 그곳에 비하면 훨씬 덜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조만간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강주로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기다리고 계시면 금의환향하겠습니다. 반드시.”
승도는 아내에게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의 상대가 세계 최강대국 연합왕국이라 해도 그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반란군은 그의 역량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물론 서방님이 염려하시기 전에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 정도로 부담을 드리고 싶진 않으니까요.”
승도는 아내의 대답에 조금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가족과 가문의 이익을 위한다고 말하며 전장을 전전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경은 어떠할 것인가?
그가 그녀의 입장이라면 결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해주었다. 그의 동반자로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승도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녀는 승도의 체온을 느끼며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었다.
“서방님,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지요.”
“이번 전쟁이 끝나면 더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시겠지요?”
“그리하고 싶지만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운명이란 그렇다. 전쟁을 피하고자 해도 전쟁의 여신이 점찍은 자에게는 전란의 불길이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 운명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대가, 세상이 원하는 전쟁이다. 물론 그 자신의 야망도.
“한 가지만 약조해 주세요.”
“무엇을 약조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싸움터에 계속 나가신다면 절대 패해선 안 돼요. 제가 허락할 때까지.”
아내의 눈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전쟁에 패한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마련이다. 부와 명예, 심지어 재산까지. 그 파멸의 구렁텅이에 휩쓸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니 져선 안 된다. 강주를, 아니 그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만에 하나 내가 패하는 대상이 있다면 당신 한 사람으로 해두겠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무엇도.”
그는 천국과 그 너머에 있을 모든 적을 향해 불패를 선언하며 아내를 힘주어 안았다.
***
예로부터 고산 민족들은 폐활량이 크고 체력이 좋았다. 그들은 어지간해서 지치는 법이 없었다. 수백 마일의 거리도 불만 없이 주파할 수 있었고, 거친 지형도 간단한 장비만 가지고 답파했다.
병사가 가진 무기 중 가장 위대한 것이 그들의 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은 그 자체로 일류였다.
전근대 전쟁이었다면 분명 그들은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고도 일류로 군림했을 것이다. 무기야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형도만 써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시대는 달라졌다. 시대는 칼이 아니라 총을 요구하고 있었다. 모두가 총을 쓰는 세상에 칼만 쓸 수는 없었다. 그들의 안방이라면 칼만 써도 충분한지 모르지만 바깥세상은 달랐다.
그들의 고용주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용주는 용병 모집소를 통해 고용한 용병들에게 총기 훈련을 받게 했다. 훈련에 필요한 장소와 물자는 행상과 협력 관계에 있는 동방 무역 회사의 협조를 받았다.
모두 4,500명에 달하는 용병들이 힌디아 동북부의 황무지에서 1년 이상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에 필요한 교관 역시 동방 무역 회사가 제공했다. 비용을 행상이 내기로 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모집된 용병 중 모두가 훈련을 이수한 것은 아니었다. 자질은 충분했지만 근대 전열 전투에 부적합한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중도에 용병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클레망소는 왕국 장교들과 논의한 끝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된 1,000명을 조기 탈락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강주는 3,500명의 훈련된 굴카 용병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훈련받은 괴물들이 신에 왔다. 그들을 살인 기계로 조련한 오승도의 부름을 받고.
행상은 이들의 통관을 위해 상당한 돈을 썼다. 총독에게 사람을 보냈고 아문 해관에도 기름칠을 했다. 오승도의 힘을 절감한 해관 감독이 군말 없이 통관 절차에 동의한 것은 물론이다.
토를 달 가능성이 있었던 주변 군현의 관료들도 제 코가 석 자가 되자 당면한 위기를 경감하기 위해 용병 투입을 승낙했다.
큰 그림으로 보자면 오승도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진 셈이다. 외국에서 마음대로 병력을 들여올 수 있다면 강주라는 작은 기반만 가지고 있더라도 능히 대륙 전역을 위압할 만한 군세를 가질 수 있었다. 즉, 삼천 남짓한 용병의 등장은 강주가 막강한 대군벌이 되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은 알면서도 그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도 없이 병력을 가져왔다면 비난할 일이었지만, 천국을 상대로 충분히 전공을 세우면서 병력 증원을 한 것이니 이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천국이 제국을 상대로 한판 대승을 따낸 마당이니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병력 증강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오 대인. 관리사 대인이 바라는 군대가 갖추어졌는데 왜 표정이 그리 편치 않으십니다.”
총상 노진승은 오유도의 얼굴빛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미 강력한 용병을 제국 내에 들여온 터라 월비 토벌에서 더한 공을 세울 수 있다. 그런 차에 무슨 걱정이 있어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오유도의 손이 앞에 놓인 술잔을 잡았다. 반쯤 채워진 맑은 액체를 단숨에 비운 거상이 수염을 매만졌다.
“조금은 걱정되는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염려되시는 것이 계시다니요?”
“강한 군마를 주었으니 상승군이 승리할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모난 돌은 정을 맞게 마련입니다. 그간 은인자중해 오던 우리 강주가 지나치게 눈에 띄게 되었다는 것이 걸립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노진승도 술잔을 잡았다. 그 말은 그르지 않았다. 상인들이 언제나 몸을 낮추는 것은 그 이유가 있다. 부로 따지면 황제조차 부럽다 할 만한 재부를 가진 거상들이 황궁의 사치를 흉내 내지 않는 것은 시기심을 가진 인간의 속성을 알기 때문이다. 힘도 그와 같다. 권세와 힘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경쟁자들의 이목을 끈다.
“하니 승리 이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정이 어찌 나올지 생각해봐야 하고. 우리 행상의 경험과 식견을 십분 발휘해야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 행상이 뒷방 늙은이들은 아니니 말입니다.”
총상도 오유도의 말에 긍정의 뜻을 보였다. 천하를 주무르던 거상들이 뒷방 늙은이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우습다. 천하제일의 재력을 가진 그들이 손을 놓고 떠먹여 주는 것만 먹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염려하는 것은 용병 투입을 빌미로 삼아 조정이 트집을 잡는 겁니다. 모양새를 맞추기 위해 강북 대영과 해관의 손을 빌렸지만 조정에서 각오만 한다면 탄핵의 빌미로 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요수와 해관 감독의 옷만 같이 벗겨낸다면.”
“조정의 능구렁이들이라면 고육지책을 쓸 만하지요. 그자들에게 요수는 이미 버린 패일 것이고 해관 감독은 태후의 파벌이니.”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비정한 관료 사회의 생리를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적을 쳐내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수족도 버릴 수 있는 것이 권력자들이다. 그 냉혹한 자들의 속성을 안다면 적당한 안전장치 정도로는 후일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하니 고육지책을 쓰더라도 강주와 우리 입장을 확실하게 보호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능구렁이들이 쳐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조정에 줄을 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니 그보다 강한 자들과 손을 잡아야겠지요.”
“그보다 강한 자들이라면.”
“양이들 말입니다.”
노진승의 말에 거상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라면 양이들과 손을 잡는 일을 쉽게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나 요 몇 년간의 경험이 이 정도 이야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간담을 주었다.
“하긴 양이들이라면 조정보다 확실히 강하지요. 하지만 양이들은 이문을 주지 않으면 우리 손을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지난번에도 이문이 눈에 보였기에 우리 손을 들어준 것일진대.”
“굳이 손을 잡을 필요는 없지요. 통상 무역처럼 거래하는 관계만 되어도 족합니다.”
“거래라면 저들에게 줄 것이 있단 말입니까?”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강주의 재부는 상당하니. 하지만 국가 단위의 이문 추구로 보면 제국에 압력을 넣는 대가로 받는 금액치곤 작다. 하니 돈은 이유가 못 된다.
거상인 오유도가 얼른 정답을 내놓지 못하자 노진승의 입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나왔다. 역시 자식과 가문이 달린 문제라 천하제일의 상인이라 불리는 오유도도 그 명석함이 십분 발휘되지 않는 모양이다.
“명분 말입니다.”
“명분을 주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난번에 양이들은 사소한 구실 하나를 손에 쥐자 바로 움직였습니다. 하니 명분만 쥐여 준다면 그들을 움직일 만하지요.”
“하나 명분은 우리 행상이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지난번처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총상의 말에 오유도가 입맛을 다셨다. 지난번과 같은 방식이라면 양이들에게 신을 압박할 거리를 만들어줄 수 있긴 하다. 문제는 제국의 입지가 지난번보다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할 경우에는 우리가 저들의 욕심을 제어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내전이 터진 제국에 양이들이 끼어들 발판을 만들어주면 저들은 무한대의 욕심을 드러낼 것이다. 그 탐심은 어지간한 이익으로는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제어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하면?”
오유도도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제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날뛰게 두는 것도 강주에 이익이 된다는 말이다.
“늙은 호랑이의 기력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빼놓는 겁니다. 이빨과 발톱을 모두 뽑아버리면 저들은 결코 강주를 팽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없이 열강을 상대로 종묘사직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강주의 성장을 묵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노진승도 총상을 지내며 외부의 문물을 보고 듣고 견문을 키운 거상이다. 그의 정치적 감각도 다른 행상들에 뒤지지 않았다. 자식의 일이 얽혀 잠시 생각을 깊게 하지 못했던 오유도도 생각을 해보고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 여겼다.
“문제는 양이들이 끼었다 월비와의 균형이 깨질 수 있다는 점이요. 승도가 그것을 염려하고 있을 터인데.”
“그 부분은 열강들과 미리 교섭을 해두어야지요. 저들도 나름대로 전쟁에서 이문을 보고 있을 테니 지나치게 균형을 깨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상당한 이익을 보고 있는 열강이다. 괜히 상황을 바꾸면 애써 얻은 이권이 위험해질 여지가 있다. 제국이 조약에서 인정한 것 이상을 내놓고 열강에 구원을 요청한다면 모를까, 그 이외의 경우라면 상황을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적당히 이익을 챙길 생각만 할 승냥이들이 새삼 태도를 바꿀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유도는 거기까지 계산을 했다. 셈을 해보니 노진승의 이야기에 구미가 당겼다.
“한 번 동방 무역 회사와 선을 대어 이야기를 해봅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쳤는지 거상의 표정이 아까보다 밝아졌다. 총상은 다시 잔에 술을 따라 그 앞으로 내밀었다. 거상들은 잔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행보를 준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