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위위구조 (1)
조가촌으로 올라오는 왕씨의 선단은 협곡을 지나야 했다. 이 협곡이 대하에서 제일 유명한 등룡곡이다. 이곳은 평소에도 물살이 거세 아차 하는 찰나에 사람이 수 리를 떠내려간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다.
물살이 거세다 보니 이곳에 얽힌 전설도 많았다. 그 전설 중 하나가 잉어에 얽힌 것이다. 등룡곡 아래에는 잉어가 많이 살았는데 때가 되면 잉어들이 강물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잉어들 중 등룡곡을 거슬러 올라간 경우는 전무했다. 이 때문에 잉어가 이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생겼다. 잉어가 용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관문. 용과 잉어의 격차를 생각하면 그 관문의 험난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등룡곡은 그 정도로 가혹한 곳이다.
“등룡에는 용왕이 계셔 잉어들을 굽어보니, 한 마리 잉어가 등룡문 앞으로 나서더라.”
노를 젓는 사공들이 운율에 맞추어 등룡가를 읊조렸다. 하잘것없는 잉어가 용이 되는 것은 노 젓는 사공이 왕공 귀족이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공들은 등룡가를 흥얼거리며 자신들이 잉어가 된 듯 감정을 실었다.
“어이여. 어이여. 고기야. 비늘을 찢는 고통을 참으며 등룡곡에 도전한 이유가 무엇이냐?”
사공들은 노래에 맞추어 노를 일사불란하게 저었다. 이런 노래들은 일정한 운율을 담고 있었는데 그 운율은 노를 젓는 호흡과 정확히 일치했다. 배를 모는 사공들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데에는 좀 더 손발을 정확히 모으자는 의도도 있었다.
“등룡곡을 넘은 잉어는 용이 되고 등룡곡을 넘은 우리는 왕공이 된다. 과연 등룡곡이란 이름은 아깝지 않다.”
왕경의 말에 왕고가 뱃전에 다가섰다.
“물살이 무척 거셉니다. 여기 빠지면 하류까지 그냥 쓸려 내려갈 것 같습니다.”
“그럴 게다. 이 등룡의 물살에 비할 것이 천하에 없으니 그럴 만하지.”
“예.”
왕경은 기꺼운 웃음을 흘리며 조카의 곁으로 다가갔다. 거센 물결을 따라 튀어 오른 물방울이 그의 옷소매를 적셨지만 거상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상경에 웅크리고 있던 우리 왕씨라는 잉어가 등룡을 지나 용이 되는 순간이다. 저 협곡만 지나면.”
왕경이 손을 펼쳐 협곡을 향해 펼쳤다. 이 순간만 지나면 그들은 천하를 향해 날개를 펴고 한껏 비상할 것이다. 천하는 여씨 대신 왕씨의 이름을 기억하리라. 비참하게 죽어간 형님의 이름도 세인들이 입에 올리게 되리라.
왕씨의 한이,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불과 촌각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때 선두에 선 배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북소리에 감상이 깨지자 왕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한참 즐거운 생각을 하던 차에 눈치 없이 구니 기분이 좋을 턱이 없다.
“무슨 일인데 시끄럽게 북을 치는 것인가?”
그가 성난 목소리를 냈지만 등룡곡의 거친 물소리가 그의 음성을 집어 삼켰다. 왕경이 재차 짜증을 내려던 차에 왕고가 나섰다.
“숙부님,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왕고가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품에서 서역의 천리경을 꺼냈다. 비싼 돈을 주고 산 물건인 만큼 이럴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왕고는 천리경에 눈을 가져다 댄 채로 북을 친 배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한참 배를 보다 눈을 크게 부릅떴다.
거친 포말 소리에 가려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뭔가가 선두에 있는 배에 부딪치고 있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부딪치는 것이 틀림없었다. 왕고는 눈을 끔뻑이며 몇 번을 확인했다.
이내 선두의 배에서 물기둥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배가 옆으로 기우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5도 정도. 순식간에 10도 이상 배가 기울어졌다.
선두에 있던 배가 급속히 기울어지자 뒤를 따르던 배들도 연달아 북을 치며 기를 세웠다. 사고가 났다는 표현이다. 공격이라도 받은 것일까? 당장은 확신할 수 없었다. 물살이 거센 협곡에서 무언가와 부딪치는 일은 종종 있으니까.
“뭔가가 우리 배에 부딪쳤습니다, 숙부님.”
천리경으로 상황을 보던 왕고는 배에 무엇인가 부딪쳤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맨눈으로 상황을 보던 왕경도 상황을 알았다. 떠내려온 나무 같은 것이 부딪치지 않고서는 이만한 피해가 나지 않는다. 왕고가 천리경으로 상황을 보는 사이 왕경이 뱃전 너머로 흘러가는 뾰족한 나무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왕경은 자신들이 공격을 받았음을 확신했다.
“치, 침뢰다.”
왕경의 말에 왕고의 눈이 커졌다. 침뢰라면 통나무의 끝을 뾰족하게 깎아 만든 무기다. 고대의 명장 육감이 수상에 구축된 오의 선단과 수상 진지들을 격파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시초로 수상에서 여러 차례 사용된 바 있었다.
무딘 나무에 무딘 구조로 만들어진 선박에 침뢰는 충분히 위험한 병기였다. 등룡곡처럼 물살이 빠른 곳에서 강을 거슬러 오르려는 배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등룡곡이 아닌 곳에서 맞았다면 나았겠지만 이곳에서는 침뢰 한 방만 맞아도 배가 침몰할 수 있었다.
“침뢰라면 당장 배를 돌려야 합니다. 숙부님!”
왕고는 침뢰라는 말에 재빨리 물러서자고 말했다. 이대로 상류를 향해 전진하는 상태에서 침뢰를 맞으면 선단은 전멸하고 만다. 대포를 실어 무거운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적은 이쪽의 의도를 철저히 알고 있었다.
“나도. 나도 알고 있다.”
왕경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거렸다. 이쪽 선단이 등룡곡을 거슬러 오를 것을 알고 정확히 침뢰를 뿌린 적의 안목에 소름이 돋았다.
“당장 배를 돌리라고 전하라, 당장!”
왕고가 급히 목소리를 높였지만 거친 포말 소리에 묻혀 그 목소리는 멀리 퍼지지 못했다. 왕고가 천리경을 내려놓고 선장을 찾아 움직이는 동안 왕경은 멍청한 얼굴로 뱃전 옆으로 스쳐가는 통나무들을 보았다.
‘침뢰라니. 어떻게 우리가 등룡곡에 들어오자마자 침뢰를 날린단 말인가? 처음부터 우리는 오승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았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왕경은 뱃전을 움켜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오승도가 그들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면 이번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승부였다. 침뢰로 선단을 박살내면 수륙 병진의 한 축이 무너진다.
선단을 무너트리면 천국 군대는 기동력과 화력을 모두 잃고 적의 의도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한 줌도 안 되는 적에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천국 제일의 명장과 천국 군사력의 태반을 동원한 싸움인데 일만도 안 되는 적을 이길 수 없다니?
쿵.
뱃전에 무언가 와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왕경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마가 깨졌는지 핏물이 철철 흘렀다. 왕경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기었다.
조금 전만 해도 왕씨의 천하를, 비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오승도의 간계에 빠져 부서진 배 위에서 비참하게 바닥을 기고 있었다. 화려한 내일을 꿈꾼 순간에.
“물이 들어온다!”
“당장 물부터 퍼내!”
“물이야, 물이야. 내 사슬 풀어줘. 이 자라 새끼들아!”
선내에서 비명이 메아리쳤다. 근무 중 사공들이 자리를 비우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에 사슬을 매어 두었는데, 물이 들어오니 비명이 터지는 모양이다. 침뢰 한 방의 위력은 대단했다.
“열쇠 내놔! 열쇠!”
하지만 제 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타인의 목숨을 챙기려는 자는 드물다. 열쇠를 가지고 있던 감독관은 사공들의 사슬을 풀어주는 대신 열쇠를 지고 하 갑판에서 탈출했다.
“무, 물이야. 목까지 찼어.”
“살려줘!”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이 왕가 놈들아!”
비명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왕경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음과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 그의 화려한 미래도 함께 침몰하고 있었다.
“숙부님, 피하셔야 합니다.”
어느새 선장과 함께 돌아온 왕고가 왕경의 팔을 붙들었다. 급속히 기울어가는 배의 옆으로 다른 배 하나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사이 용케 불러온 모양이었다.
왕경은 비틀거리며 조카의 부축을 받았다. 그는 조카의 어깨를 쥔 채로 선단의 앞쪽을 바라보았다. 많은 배가 침뢰의 습격을 받았는지 기울어가는 것만 열 척도 넘어 보였다. 무거운 대포를 실은 상태에서 배에 구멍이 뚫렸으니 물을 퍼낸다고 해도 침몰을 면할 방법은 없었다.
“왕 대인.”
선장이 그의 팔을 당겼다.
왕경이 멍청한 얼굴로 돌아보자 왕고가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숙부님.”
“여기. 여기만 지나면 잉어가 용이 될 수 있는데. 우리가 용이 될 수 있는데.”
“숙부님, 미련을 버리셔야 합니다.”
왕고가 힘주어 팔을 당겼다. 왕경은 조카의 손에 끌려가며 빠르게 침몰하는 그의 꿈에 마지막 미련의 시선을 남겼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승도는 작은 단서만 가지고도 큰 그림을 추리할 줄 아는 전략가였다. 그는 상대의 움직임 혹은 그들이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약간의 실수에서 적의 의도를 정확하게 추리해냈다. 전장에서 보낸 시간이, 그의 천재성이 가져다준 무시무시한 통찰력의 힘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그는 상대가 던진 수상쩍은 움직임에서 선단의 존재를 간파했다. 이어 적의 합류 시간을 보고 적 선단의 도착 일자를 계산해냈다.
선단의 도착 일자를 알아내자 그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균적인 정크의 이동 속도를 넣어 역산해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지휘관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전장의 공기만 맡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자처하는 괴물, 로망스 황제 필립의 화신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장에서 그의 허를 찌르는 것은 웬만한 천재들도 감히 꿈꿀 수 없었다. 그 허를 찌를 수 있는 상대는 오직 하나. 압도적인 경제력으로 상식을 부수는 초강대국, 연합왕국뿐이다.
그 괴물의 압도적인 통찰력에 의도를 간파당한 천국 군대는 전투 시작 시점부터 만신창이가 되었다. 기동력과 화력을 고스란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적과 싸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관도 위로 내달리는 한 필의 준마가 있었다. 거친 숨을 토해내는 붉은 말은 쉴 새 없이 땀을 흘렸다. 하루에 천 리를 간다는 한혈마다. 전령은 말고삐를 쥔 채 몇 번이고 말의 배를 걷어찼다.
조금의 지연이 수천수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전령은 말에서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말발굽이 연거푸 뽀얀 먼지를 일으켰다. 이내 한 굽이를 돈 말이 수풀이 우거진 등성이 쪽으로 들어섰다.
이제 산을 세 개만 더 넘으면 서정군과 접촉할 수 있었다. 명을 완수하면 그의 말도 쉬게 하고 그도 쉴 수 있었다. 임무만 완수하면 고된 노동은 끝이다. 전령은 이를 악문 채 앞을 보았다.
그때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풀 속이었는데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거울처럼 보였다. 전령은 거울이란 생각에 안도하려다 심장이 내려앉는 감각을 맛보았다. 이 산중에 거울 같은 것을 지고 다니는 자가 평범할 리 없다. 필시 그가 본 것은 거울이 아니라 빛을 반사할 만한 금속일 것이다.
그의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단발의 총성이 울렸다. 몸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말고삐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전령은 자신도 모르게 땅이 가까워진다고 느꼈다. 그는 그대로 땅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몇 번을 데구루루 구른 끝에 그의 육체가 멈추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전신에 아무 감각이 없었다.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힘을 주려 한 순간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전령은 입을 딱 벌린 채 혀를 꿈틀거렸다.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당장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웠다.
피가 울컥울컥 나왔다. 입에서 핏물을 한 모금 토해냈다. 내장이 상했는지 검붉은 빛을 띤 핏물이다. 그것을 토해내자 가슴이 시원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 주변을 적신 액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슴에는 손을 가져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마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머리 뒤로 슬며시 흘러나오는 찐득한 액체가 그것을 알려주었다. 전령은 피가 섞인 기침을 한 번 했다. 폐에 고이려는 액체를 한 번 뱉어내자 조금은 호흡이 편해졌다.
잠깐 호흡을 할 수 있게 된 동안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보니 유난히도 창백한 색감이 들어왔다. 동공에 맺힌 하늘은 아름다웠다.
전령은 그것을 손에 쥐어보려 팔을 들어 올리려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다. 점점 희미해지는 그의 의식 너머로 군화를 신은 자들이 얼핏 비쳤다. 그것이 그가 기억한 세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죽은 전령의 시체는 참혹했다. 머리가 깨지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데다 갈비뼈가 폐를 부수고 나왔는지 구멍 사이로 희미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병사들은 죽은 전령을 내려다보다 그의 시신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몇 번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령의 이곳저곳을 뒤지다 가죽 주머니로 밀봉된 서찰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자 병사들의 얼굴에 만족스런 빛이 맴돌았다.
“서찰입니다.”
“이리 가져오게.”
병사들이 서찰을 가져오자 장교는 그것을 펼쳤다. 연합왕국 출신이었지만 그는 신의 문자에 빠르게 익숙해져 그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장교는 서찰을 쥔 손에 힘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며 글을 읽었다.
에우로페에서는 군의 전달 사항을 주로 질 좋은 크라운 종이나 양피지에 썼다. 별나게 질긴 재질의 것들을 쓰다 보니 어지간히 힘을 주어선 손상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곳 신의 한지는 달랐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종이가 찢어져 버리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종이도 종이라고 쓰는 동방인들이 딱했다.
장교의 눈은 몇 번이고 아래위를 오갔다. 위에서 아래로 쓰는 신의 문장법 때문이다. 그는 글자를 읽고 입속으로 곱씹기를 반복했다. 외국인이다 보니 한 번 읽는 것으로 바로 해석이 되지 않았다. 한 번 자국어로 생각해 보아야 해석이 제대로 되는 것이 외국인의 한계다.
그는 한동안 중얼거리기를 반복하다 대충 해석을 마쳤다.
‘이놈들이 후퇴를 결심했어? 아직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상당히 놀랄 만한 정보였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무라도 벤다고 말하는 동방인들이다. 그런 이들이 대군을 동원하고도 싸워 보기 전에 스스로 물러날 결심을 하다니.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소식이다.
이 정보를 그들의 고용주 오승도가 손에 넣는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추격할까? 아니면 내버려둘까?
그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장교는 서찰을 품에 밀어 넣고는 병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병사들은 죽은 전령의 시체를 관도 밖으로 옮기고 핏자국 위에 흙을 뿌렸다. 사람 하나의 죽음을 은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리 파둔 구덩이에 전령의 시체를 던져 넣자 일은 깨끗이 끝났다. 적은 사람 하나가 실종되었다는 것도 제대로 모를 것이다.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것도.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전령을 여럿 보낼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그들이 손에 넣은 정보는 적의 서정군에게도 분명히 전달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할 일은 손에 넣은 정보를 신속하게 보고하는 것이다.
전장에서 정보의 가치는 ‘신속성’과 ‘정확성’에 의해 좌우된다. 현재 적의 행동을 결정짓는 명령을 제때 전달한다면 아군은 일시적으로 적의 행동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며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전쟁을 해본 자만이 안다.
과거 참혹했던 반도 전쟁의 이야기를 들어본 장교는 정보의 가치를 잘 알았다. 반도 전쟁에서 왕국 해군은 로망스 해군의 기밀문서를 실은 프리깃함을 나포했고, 그 정보 하나로 로망스 군대를 무너트렸다.
육상에서 무적으로 군림하던 로망스 육군을.
정보의 가치는 그처럼 중요했다.
만약 로망스 해군의 프리깃함이 나포당하지 않고 무사히 정보를 전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손발을 맞추어 나아온 로망스 육군의 유기적인 공격에 붉은 코트들은 수적 열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도륙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장의 기밀문서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적의 작전 계획을 손에 넣은 왕국 해군은 육군에 그 전보를 전달했고, 왕국 육군의 명장 알링턴은 그것을 보고 무지막지한 전략을 짰다. 그는 적의 계획을 역이용해 적의 간격 사이로 파고들어 로망스 육군을 멋지게 각개 격파했다.
정보의 가치란 그런 것이다. 적에게 의도를 간파당하고 이길 수 있는 군대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후퇴(무승부)를 생각하는 군대라 하더라도 그 의도가 들킨 상태에서는 무승부조차 기대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말을 준비해라.”
장교는 병사에게 말을 가져오라 시키고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기름 라이터가 멋진 불꽃을 만들었다. 쌈지가 타들어가며 맛 좋은 연기를 내놓았다.
인간이 만든 세 가지 마약, 아편과 술, 그리고 담배. 그 세 가지 기호품 중 하나를 맛보며 장교는 한 사내의 죽음을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전장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한 방울의 잉크가 고작이다. 비정한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전장에서 한 인간의 죽음을 알리는 데에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장교는 회백색 연기를 들이켜며 구덩이를 쓸어보았다. 언젠가는 그도 죽음을 벗하게 된다면 저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최후를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것이 전장에 목숨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는 자들의 운명이다.
장교는 병사가 말을 가져오자 파이프를 툭툭 털고는 구덩이로부터 등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