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위위구조 (2)
‘정보를 가진 자는 주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승리의 여신은 미소 대신 싸늘한 등을 보여줄 것이다.’
승도는 자신의 참모장을 지냈던 로망스 육군 대장 반 헬의 격언을 떠올렸다. 반 헬은 기회를 잡으면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주장한 적극 전법의 신봉자였다.
승도 본인과도 성격이 잘 맞아 그의 근위대 연대를 지휘해 몸소 전장에 나선 일도 많았다.
승도는 지도를 보다 보니 반 헬의 기억이 절로 났다. 지금 그에게 주어진 상황도 적극 전법을 쓸지 말지를 묻고 있었다. 그의 곁에 반 헬이 있었다면 당장 적의 허리를 분질러 놓자고 말했을 것이다. 그가 있었다면.
승도는 지도 위에 놓인 적의 포진 상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수색대가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적의 북벌군은 즉시 후퇴를 결심했고, 서정군도 조만간 후퇴 행보를 보일 것이 자명했다. 명령을 이렇게 내려두고 다른 움직임을 보일 여지는 전무했다.
하지만 적이 이토록 간단하게 자신들의 전략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적은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수륙 병진 작전을 준비했다. 비록 그 날개가 부러졌지만 총 한 번 쏴보지 않고 물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이만큼 준비하고 총도 못 쏘고 후퇴했다간 지휘관은 옷을 벗어야 했다.
스스로 실각할 생각이 아니라면 총퇴각은 있을 수 없다. 하니 후퇴 명령은 모순된 부분이 있다. 일전에 본 적장의 성정을 고려하면 다른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서정군을 미끼로 던지는 것이다. 후퇴 계획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놓고 승도의 상승군이 그 뒤를 치게 만든다. 그리고 후퇴한 줄 알았던 북벌군이 추격하여 뒤를 친다. 이쪽의 기동력이 우세하다지만 무엇을 목표로 움직일지 알면 그 뒤를 칠 여지는 충분하다.
‘정말 이런 생각을 했다면 적은 에우로페를 기준으로 봐도 일류가 될 자질이 있다. 일류가 될 자질이. 하지만 이런 계획을 실제로 옮긴다고 해도 문제가 많지.’
급조한 계획이 그렇듯 임기응변으로 만든 계획은 언제나 허점을 보이게 마련이다. 수륙 병진을 포기하고 후퇴를 하는 척하며 짜낸 유인계라면 북벌군이 그만큼 오랜 시간을 걸으며 뒤를 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들에게 그 강행군을 견딜 체력이 있는가는 미지수다.
두 번째로 각 군의 후퇴 속도를 제대로 조절할 수 있느냐다. 계획은 언제나 탁상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원거리에서 이루어지는 부대의 개별 행동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지휘관은 거의 없다. 그것이 쉽다면 패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일부러 허점을 보였다 해도 진짜 약점이 될 수 있는 거지.’
승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적이 진정 생각하지도 못한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는 불의의 일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적의 서정군에 이어 북벌군까지 제한된 전력으로 상대해야 했다. 그건 천하의 강군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없이 좋은 기회지만 그렇기에 그 달콤한 유혹을 무는 것은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달콤한 미끼가 내포한 위험은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갈 위험이 있었다.
‘찌른다. 찌르지 않는다. 어느 쪽을 택해도 내게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냥 적을 내보내는 것은 마음에 걸린다. 적장이 이번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 다시 도전해올 때는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올 것이 자명해. 그땐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 그렇다면 이번에 확실히 호된 맛을 보여주는 편이 향후를 위해서라도 좋을 것인데.’
최소한 서정군은 박살을 내놓아야 했다. 그 정도 전력은 부숴두어야 천국이 다시 도전할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고, 제국 내에서 승도 본인의 입지도 다시 한 번 다질 수 있게 된다.
적장 서익에게 불패의 수식어를 남겨둔 채 승부를 무승부로 마치는 것도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불패, 대륙 제일의 상승장군은 하나로 족하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박살을 낸다면 결국 서정군을 따라간다는 것이고 위험을 감수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한다고 하면 위험을 감소시킬 수가 없을까?’
위험을 감소시킬 방법은 먼저 기동력이 있다. 소수 정예의 탁월한 기동성이라면 적이 예상한 것보다 빨리 싸우고 이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싸움에는 언제나 변수가 있게 마련이다. 조금만 싸움이 길어져도 전군이 위험해진다.
두 번째는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그의 예비대, 굴카 용병이다. 그들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추격해올 적의 북벌군을 치는 것이다.
적이 정말 뒤를 친다면 북벌군을 박살내면 그만이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적을 쫓아낸 정도에서 명예를 얻고 돌아온다. 안전하지만 이익이 감소할 가능성이 있었다.
세 번째는 역 정보다. 적의 정보를 입수하고 승도가 고민에 빠졌듯 그 역시 적에게 정보를 주고 적을 이쪽의 계산대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있다. 문제라면 적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것이다.
이상의 가능성들을 생각해보며 승도는 미간을 좁혔다.
“침뢰를 사용해 이쪽의 선단을 쓸어버린 수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습니다.”
군막을 가득 메운 장수들의 얼굴빛은 과히 좋지 않았다. 전날까지 승리를 확신했던 북벌군의 장수들이었지만 일은 그들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적장은 그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계산하고는 무시무시한 한 수를 선보였다. 그 한 수에 수륙 병진 작전은 끝장이 났다.
천국의 국력을 다한 회심의 작전이 이렇게 어이없이 결딴날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되어버렸고 북벌군은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야 했다. 이대로 성과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괴물입니다. 오승도 그놈은.”
“한낱 약관의 애송이가 우리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움직일 줄이야. 양이들을 가지고 놀았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장수들은 오승도의 계교에 입술을 깨물었다. 싸워보기도 전에 이쪽을 흔들어 버리니 싸울 의욕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수륙 병진이 무너졌다 해서 그들의 패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여 서익이 구상해둔 두 번째 계책, 살을 주고 뼈를 치는 고육지책이 남아 있었다.
“괴물의 역량이야 이번에 싸움을 걸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바가 아닙니까? 우리 측 계교를 눈치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장군. 적이 수륙 병진을 눈치채었다면 이쪽의 두 번째 계교를 눈치채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물론 그럴 겁니다.”
서익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적장은 제국 제일의 명장이자 양이들조차 두렵게 여기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의 안목이라면 이쪽의 수를 뚫어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바로 그렇기에 서익은 이번 계교가 가능성이 있다 여겼다.
괴물이라면 시간을 정밀하게 짜 이쪽의 허를 찌를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에 대한 자만심이 괴물을 덫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눈치챈다면 오승도가 걸려들지 않을 것 아닙니까?”
“눈치를 채기에 걸려들 겁니다. 이 계책은 그 능력에 자신이 있는 자들을 위해 만든 통문 같은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자만이 걸려드는 덫이라.”
“말씀을 들으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만, 적장이 쉬이 걸려들지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수들이 묻자 서익은 수염을 매만지며 설명을 덧붙였다.
“적장은 명성과 공적에 목이 마른 자입니다. 상인이 정2품의 관품에 고위의 관직을 가졌습니다. 명예는 어떻습니까? 제국 전체를 떨어 울릴 정도로 대단합니다. 그만큼 명성을 가지면 장군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족하지 않겠습니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권력과 명예는 가지면 가질수록 부족함을 느낍니다. 선망에 찬 시선을 받을수록 더 얻길 갈망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명예를 가졌으니 더 높은 곳을 바랄 수밖에요. 하니 공적을 세울 이 기회를 놓치려들지 않을 겁니다.”
“공적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오승도, 그 사내의 욕망. 그 욕망이 괴물을 덫으로 데려올 친구가 되어줄 테니까요.”
서익은 승도를 명예욕에 찌든 사내로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상인이 위험을 감수하며 권력과 군사력, 명예까지 탐하려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승도가 자신의 덫에 걸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승도의 심리는 일부 이해하였으나 몇 가지 면에서 중대한 오판을 저질렀다. 승도가 명예욕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그는 그것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황제까지 해본 자가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둘째, 승도는 명예욕이 아니라 보다 큰 그림에서 천국의 세를 조율할 목적에서 천국 군대를 노리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천국 군대를 전부 살려주는 선택도 가능했다.
셋째, 승도는 불리한 싸움에서 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는 전장의 승부사였고 아내에게 패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불패의 사내였다. 그런 그를 덫으로 끌어들인다고 해서 승리를 따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서익은 자신이 간과한 간극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다.
***
천국의 서정군을 이끄는 장수는 풍석이란 사내였다. 그는 천국의 양대 기둥으로 군림했던 대장군 풍겸의 사촌 동생으로 그 후광을 등에 업은 자였다. 그는 풍겸이 전투에 참패하고 실종되었음에도 천국에서 요직을 맡았다.
종교 집단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천국에 식견 있는 군 지휘관이 거의 없었던 데다 병사들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풍석은 이런 조건을 배경으로 삼아 천국의 서정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서익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것은 이름뿐이었다. 수백 리의 거리를 두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군대를 서익이 통제할 리 만무했다.
풍석은 제 뜻대로 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사촌 형의 설욕을 하겠다고 떠들었다.
하지만 풍석의 호언장담은 며칠 가지 못했다. 북쪽으로부터 달려온 전령이 그에게 전한 서신 때문이었다. 수륙 병진 작전을 위해 동원된 선단이 전몰되었으니 군세를 물리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거창하게 군을 몰아 진군하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후퇴라고 하니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입은 석 자나 나왔고 장수들만 보면 욕이 절로 쏟아졌다. 풍석은 별의별 불만을 다 쏟아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주장이 서익인 이상 그의 명을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왕조 국가에서 항명은 곧 반역죄로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천국과 등을 질 생각이 아니라면 명은 받드는 수밖에 없었다.
풍석은 하는 수 없이 군을 몰아 천경으로 회군을 서둘렀다. 하지만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오승도, 그놈이 벌써 우리 군대를 추격해오고 있단 말인가?”
“그러합니다, 장군. 후위를 맡은 전 장군께서 그리 보고를 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놈이.”
후퇴 작전에서 적의 추격은 왕왕 있는 일이다. 후퇴하는 적을 추격할 때 가장 많은 전과를 얻기 때문이다. 병법에 정통한 자라면 후퇴하는 아군을 적이 그냥 내버려둘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장군. 전 장군께 어찌 비답을 내리시겠습니까?”
전령이 답을 독촉하자 풍석이 손바닥을 문질렀다. 긴장감에 땀이 배여 나와 손바닥은 몹시 미끄러웠다. 뒤를 잡힌 상태에서 후퇴를 계속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하다. 한 번 정도는 호된 맛을 보여주어야 뒷덜미 걱정을 하지 않고 갈 수 있다.
“전 장군에게 가서 동북쪽 방향으로 적세를 유인하라 전하라. 그곳에서 적과 일전을 치를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군.”
전령이 비답을 받아들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 힘찬 투레질과 함께 전령이 뽀얀 먼지구름 사이로 사라져가자 그 곁에서 말을 듣고 있던 장수들이 불안한 빛을 보였다.
“장군. 상승군과 한 판 승부를 벌일 생각이십니까?”
“물론. 우리가 놈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나? 수로 따져도 우리는 놈들의 배가 넘어.”
그 말은 사실이다. 단지 수적 우세가 전력의 우세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하나 저들은 몇 배의 격차도 우습게 여기는 강병입니다. 저들과 대전을 벌이는 것은 너무 무모합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도망갈 수도 없지 않나? 놈이 우리를 따라잡았다는 것은 이백 리가 넘는 거리를 며칠 새에 좁히고 따라왔다는 의미일세. 그 정도로 빠른 적을 따돌리고 달아나려다간 자멸하기 십상이지.”
“싸우는 것도 부담이 크지 않습니까?”
장수의 물음에 풍석은 고개를 저었다.
“이백 리를 나는 듯이 달려온 놈들일세. 그놈들이 지금 정상이겠나?”
풍석의 물음에 장수들은 비로소 그가 싸우자고 말한 의미를 알았다. 그것도 들판에서. 적이 지친 상태라면 들판에서 전군을 휘몰아 한번 싸움을 건다면 승부는 할 만했다. 아무리 적이 천하에 다시없는 강군이라도 지친 상태에서 몇 배의 군대를 대적하진 못할 것이다.
“아닐 겁니다.”
“적이 지친 지금이 바로 기회일세. 오승도 그 애송이 놈이 군공에 갈증을 느꼈는지 스스로 독배를 들려 달려왔어. 이때 우리가 아니면 누가 놈에게 독주를 건네주겠나? 응?”
“옳으십니다.”
풍석이 긴 장포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그는 어느새 위엄 있는 얼굴로 장졸들을 보았다.
“명을 내리겠다.”
“하명하십시오.”
“삼군에 명하나니 장졸들은 무기를 손질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요마를 토벌할 준비를 하도록 하라. 이 싸움에 이긴다면 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알겠는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군.”
“좋아.”
풍석은 장포를 끌며 전마에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