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위위구조 (3)
푸른 군복들의 대열이 길게 늘어섰다. 무표정한 얼굴로 움직이는 병사들의 팔다리가 규칙적으로 위아래를 왕복했다. 그들은 흡사 감정이 없는 병정 인형을 연상시켰다.
프리지아 식으로 조련된 군대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승도는 백마에 탄 채로 대열을 따랐다.
말을 타고 대열의 앞뒤를 정신없이 오가는 장교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말을 몰아가니 여유마저 느껴졌다.
미미하게 부는 미풍에 흔들리는 제국의 황룡기 너머로 흐릿하게 태양이 얼굴을 비쳤다.
승도는 눈부신 하늘에 눈길을 주다 자신의 말 옆으로 다른 말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승도가 고개를 돌리자 연락 장교가 보고했다.
“대인. 조금 전 선발대가 적과 접촉했습니다. 우리 군과 적의 거리는 약 육십 리입니다. 행군 속도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하루 안에 적과 교전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육십 리 거리인데 하루가 걸린다면 저쪽도 움직이고 있단 뜻이겠군요.”
승도의 군대는 시속 4킬로미터 내외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정도 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하루가 꼬박 걸린다면 적 역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승도의 말에 장교는 긍정의 뜻을 보였다.
“예, 대인. 적은 북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천경 방향이면 계속 정동진을 해야 할 것인데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적의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동쪽의 천경으로 향하는 지름길과 북동쪽 대하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궁극적으로 천경으로 가긴 하지만 거리를 따지면 동쪽이 훨씬 빠르다.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지도 갖고 있습니까?”
승도가 묻자 연락 장교가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그가 지도를 건네주자 승도는 그것을 받아들고 눈 가까이 가져왔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들을 유심히 살피던 승도의 검지가 관도를 따라 쭉 움직였다.
그 손가락은 갈림길에 접어들어 북동쪽으로 틀었다. 거기서 천천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 가 멎었다. 승도는 그곳의 지형을 유심히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범람원이 있는 곳 같은데.”
삼십 년에 한 번 대하는 크게 범람을 한다. 그때마다 대하는 열 배 이상 팽창하여 모든 것을 집어삼키곤 했다. 대홍수의 시기에 물은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곳까지 나아와 커다란 호수를 만들곤 한다.
물이 고이는 곳은 그만큼 지대가 낮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 범람호 주위는 저지대의 들판이라는 말이다.
“범람원이 있다면 지대가 평탄하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군대를 넓게 포진시키기에 좋겠지요.”
승도는 꺼칠한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북벌군과 서정군도 모자라 수륙 병진 작전을 세울 만큼 부담을 느낀 그의 군대다. 그런 군대를 서정군 하나만 가지고 대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적은 분명 그럴 의사를 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길 자신이 보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회전을 거는 것은 승산이 있으니 하는 행동이다.
‘적에게 승산이 있다. 있다면 무엇일까?’
있다고 하면 먼저 함정이다. 적이 처음부터 서정군의 패퇴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들판에 덫을 쳐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저 악명 높은 연합왕국의 영웅 군주 에드워드가 그러했다.
그는 무려 열 번을 거짓으로 패하며 상대를 자신이 정한 전장으로 끌어들여 한 번에 확실히 박살을 내놓았다.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열 번도 패할 수 있는 지독한 인내심. 적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면 불가능하진 않다.
적에게 그런 역량이 있다고 믿어지진 않았다. 그런 안목이 있다면 애당초 수륙 병진 작전에서 이쪽의 선단 공격을 예상했어야 했다. 적은 그 정도까지 함정을 팔 재주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렇다면 적 북벌군의 합류가 예상보다 빠른 경우다. 이 부분은 있음 직했다.
예상치 못한 승마 전력을 준비했다거나 한다면 예기치 못한 시점에 뒤를 찔러 올 수천 군대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강남에서는 그만한 마필의 확보가 쉽지 않았다. 패전한 제국군으로부터 노획한 마필도 적으니 기마 전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있다 해도 수천 마필을 움직이려면 대량의 건초가 필요했다. 그런 준비를 적이 해둘 수 있을까?
희박한 가능성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생각해 본다면 이쪽의 체력이다. 일일 백 리 행군이 체질화된 상승군에 이 행군은 부담스럽지 않지만, 대륙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이 속도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하니 이 행군 속도를 보고 상승군이 초죽음 상태가 되어 따라왔을 거라고 ‘착각’했을 수 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덤빌 정도로 적이 멍청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에 불과한데다 그간 상승군이 보여 온 기동력을 생각하면 지친다고 단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승도는 도무지 적의 속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마 그가 계산하지 못한 다른 속셈이 적에게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일대 장관이 눈에 들어왔다. 수만의 군대가 들녘을 가득 메우며 펼쳐져 있었다.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잔류시키려던 병력도 퇴군 과정에 모두 합류한 까닭에 천국 군대는 자그마치 칠만을 헤아렸다. 숫자로 보면 상승군의 열 배에 달했다.
그나마 서정군이 전진하고 후퇴하는 와중에 질병과 탈영 등의 이유로 인원이 빠져서 이 정도다. 그 머릿수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계속해서 흡수한 단련을 포함해도 칠천을 넘지 못하는 상승군의 기를 꺾어놓을 만한 대군이다. 들판을 채운 적세를 둘러보던 승도가 팔짱을 꼈다.
그의 곁에서 적세를 함께 관망하던 장교들이 저마다 한두 마디씩 주고받았다. 적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말로는 쉽게 십만 대군 운운한다.
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숫자를 실제로 마주하면 십만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소름이 돋을 것이다.
십만은 대륙의 웬만한 대도시 하나의 인구에 버금간다. 수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도시를 채우고도 남을 숫자인 것이다. 그 정도의 군대가 들어섰으니 들판이 좁다 말할 수밖에 없다.
이만한 적과 제대로 싸운다면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승도는 적세를 대충 훑어보고는 말에서 내렸다. 망원경으로 멀리서 본 적의 위세는 가벼이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싸운다면 패할 수도 있었다. 압도적인 질적 격차가 있음에도. 그 정도로 적의 규모는 대단했다.
상승군은 들판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진을 쳤다. 늪지가 방벽이 되어 전면을 좁혀주는 지점이라 대군이라 해도 한 번에 달려들기 어려운 곳이었다.
적이 정한 전장에 들어와 주긴 했지만 싸움의 방식까지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교전은 어떻게 진행하면 좋겠습니까?”
헨들릭이 물었다. 노련한 왕국 연대장은 적의 압도적인 규모를 보고 통상적인 전투 방법은 피해가 클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승도 역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적의 정확한 의도를 알지 못하니 이쪽으로 끌어들이면서 우리군의 포진을 바꾸는 형식으로 전투를 진행하려 합니다.”
승도는 연대장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 들판에 들어오기 전에 지도를 한 번 보고 눈으로 지형지물을 다시 한 번 보며 임기응변으로 세운 작전이었지만 적에게 충분히 먹힐 수 있는 것이라 그는 자신했다.
“합류한 단련들을 앞에 내세울 겁니다.”
“대인. 단련을 보내면 쉽게 패할 겁니다.”
정신무장이 덜된 군대는 심리적 요소에 크게 흔들린다. 대군을 상대로 홀로 나아가는 것은 대단한 불안 요소를 지고 가는 것. 그 상태에서 적과 싸우다 조금이라도 불리한 부분이 보이면 단련들은 뒤로 물러설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단련들은 상승군과 달리 체력 부담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강행군에 익숙하지 못해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나도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하면 적은 단련을 밀어붙인 다음 이쪽으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진영이 함몰될 위험도 있습니다.”
연대장은 패잔병의 물결에 상승군이 휩쓸릴 가능성을 입에 올렸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다면 전쟁의 신이라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은 통제할 수 있습니다. 단련이 후퇴할 위치에 우리 상승군은 두지 않습니다.”
승도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후퇴하는 군대에 상승군을 휩쓸리게 하지 않겠다.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나 승리를 자신하지 않고선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 맞서면서 도망갈 병력의 퇴로를 고려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하면 우리 군 전력은 크게 줄어들 텐데요.”
“그만한 손해를 감수하면 지형적 이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승도는 그렇게 답하며 검지를 들어 군의 우익에 위치한 늪지를 가리켰다. 그는 늪지를 가리키며 빙글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적이 단련을 추격해 와서 이 위치에 서게 되면 우리는 압도적인 이점을 누리게 될 겁니다.”
“전투 면적을 좁힌 상태로 적과 싸우게 되겠군요.”
헨들릭이 승도의 의도를 알아차리곤 씩 웃었다.
“화력이 우세한 군대가 싸우는 면적을 좁히고 싸운다. 그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승도의 물음에 연대장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학살이 될 겁니다.”
연합왕국의 붉은 코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전근대 군대에 공간을 허락하지 않고 철저히 화력 우세만을 살림으로써 적의 강점을 빼앗아 일방적인 전투를 펼치는 것. 승도는 그런 방식의 전투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식의 전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경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대인의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일 겁니다. 상승군의 피해를 줄이면서 적 부대에 괴멸적인 피해를 주는. 다만 불안한 요소가 없잖아 있습니다. 적이 늪지를 건널 가능성이 있으니.”
연대장은 아까 살핀 지형의 문제를 입에 올렸다. 승도 역시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변수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허를 찔리면 크게 당할 수 있었다.
“그 점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수가 적은 군대가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해 고안한 방식인 만큼 승도는 이 전술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대인께서는 단련들을 전투에서 완전히 배제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지 않고선 버린 패처럼 도망갈 구멍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연대장의 추론은 타당했지만, 승도의 의도는 달랐다. 그는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들도 적당한 역할을 줘야지요.”
가용 가능한 자원의 역량은 최대한 짜낸다. 그 역량을 정확히 한계까지 쥐어짜는 자를 가리켜 일류라고 부른다.
승도는 제 부하들의 한계를 파악하고 그 능력을 마른 수건 쥐어짜듯 짜내는데 능숙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단련이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경이 그들의 지휘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그들을 맡아서 뭔가 해야 할 몫이 있는 겁니까?”
“흩어질 군대를 수습하여 적을 놀라게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복어처럼.”
복어는 자신의 덩치를 크게 키워 천적들에게 만만치 않다는 인상을 주는 물고기다. 승도의 주문에 연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장성세를 펴란 말씀이시군요.”
“적이 끝까지 버티면 우리 군의 피해도 커지게 될 테니까요. 경이 할 일은 후퇴하는 단련을 잘 수습해 적당한 시점에 다시 끌고 와 전장에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물론 규모가 아주 커보이도록.”
요컨대 대규모 증원군이 오는 것으로 위장해 달라는 것이다. 전사에서 이런 속임수는 종종 있었다.
동 루미의 유명한 황제 테오도르가 이런 종류의 속임수를 구사하는 대가였다. 그는 전장에서 열 배나 우세한 적과 대치하며 이 같은 속임수로 위기를 여러 번 모면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예비대를 여럿으로 쪼개어 숨겨 두었다가 적이 기세를 올리며 공격하려 할 때마다 소규모의 예비대를 합류시키며 수성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의 사기를 떨어트렸다.
그 예비대가 합류할 때마다 군세를 수십 배나 과장한 것은 물론이다.
이 같은 속임수는 상대의 기세를 꺾는데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근대 군대라면 그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전근대 군대는 이런 기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기세를 타면 군대가 승승장구하고 기세를 잃으면 맥을 못 추었다.
숫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기세이다 보니 어느 순간 대군이 합류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면 적은 자신들이 불리하다 여기고 기세를 잃고 만다.
그리되면 상승군을 향한 공격의 동력은 자연히 약해지고 저절로 무너지고 만다. 그다음은 적의 파멸이다.
“계산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그리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전장에는 언제나 변수가 존재한다. 계획은 첫 총성이 울린 순간부터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려지게 마련이다.
“그 점은 항상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그게 내가 할 일입니다.”
승도가 미소를 지으며 연대장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