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철의 군대 (1)
망원경을 쥔 채 적진을 바라보던 풍석의 얼굴에 묘한 빛이 번졌다. 번듯한 군복을 입은 적 사이에서 모습을 내보인 자들은 지긋지긋하게 마주친 바 있던 단련들이었다. 누런 군복을 입고 줄도 아무렇게나 선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열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둔하게 느껴졌다. 무리한 강행군으로 적이 지친 것이 틀림없었다. 저 꼴을 보자 오승도가 천하에 다시없는 명장이라는 이야기도 의심스러웠다. 자기 병사들의 체력도 모르고 전장에 내보내다니.
전장은 만전을 기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장이다. 그 도박장에 들어오면서 제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체력을 소진한 채로 서 있는 적을 보니 패도 만지지 못하는 호구가 생각났다. 소싯적에 도박장을 들락거렸던 풍석은 적을 보고 호구를 떠올렸다.
‘천하의 오승도도 결국 소문뿐이었나. 어이가 없군.’
풍석은 코를 팽 풀었다. 이 정도로 한심한 상대라면 걱정할 것도 없었다. 적은 운 좋게 승리를 몇 번 거머쥔 혈기 왕성한 애송이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방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운이든 실력이든 놈의 전공은 만만하지 않았다. 풍석은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처럼 싸움에 임하기로 했다.
적의 전열이 가까워지자 풍석이 손을 들었다. 기수들이 그것을 보고 힘껏 기를 흔들었다. 기수의 신호에 깃발 하나를 앞세운 대열이 앞으로 나섰다.
대열은 험상궂은 얼굴에 살기 가득한 분위기를 띤 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종교적 열의와는 다소 다른, 사람을 죽여본 자들이 내는 공기가 느껴졌다. 그들은 흡사 도적 떼를 연상시켰다. 엄격한 종교적 규율로 무장한 천국 정규군과 냄새부터 달랐다.
그들은 천국 군대에 투항한 비적들이었다. 문자 그대로 진짜 도적들인 셈이다. 도적을 군의 선봉에 세우는 것은 쉬이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상대가 핵심 전력을 아끼는 상태에서 천국도 주 전력을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돌격 앞으로!”
장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비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적이 다가오자 단련들도 무기를 들고 고함을 마주 질렀다.
“요마들의 목을 뽑아버리자.”
“역적들을 죽여라.”
무기를 든 두 무리는 서로를 향해 거친 욕설을 던지며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단련들 사이에 낀 천씨도 적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육중한 충격음과 함께 양쪽의 병사가 뒤엉켰다. 비명 소리와 무기 부딪치는 소리, 욕설이 뒤섞여 바로 옆의 동료가 외치는 소리도 먹먹하게 들렸다.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주와 성의 경계만 넘어도 동족 개념이 희미한 대륙이다. 상대를 향한 손속에 사정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싸움은 치열했다. 오승도의 군대에 끼어 승리를 맛본 단련들이 쉽게 밀리지 않은 탓이다. 체력 부담이 있어 동작이 둔하긴 했지만 승리의 기세를 탄 군대이니 만큼 쉬이 무너지진 않았다.
천씨는 바로 앞의 적을 있는 힘껏 밀어내며 숨을 골랐다. 체력 부담을 지고 싸우는 싸움인 만큼 전투는 수월하지 않았다.
천씨가 적병 하나를 밀어내고 숨을 고르던 차에 누군가 고함을 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에 핏발이 선 거한이었는데 그 박력만 보고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천씨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있는 힘껏 칼을 마주 휘둘렀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손아귀가 찢어지는 충격이 전해졌다. 천씨는 자신의 발끝이 한 치는 붕 떴다고 느끼며 두 걸음이나 밀렸다.
천씨는 숨을 헐떡이며 재차 칼을 바로 세웠다. 수평으로 그어 들어오는 상대의 칼을 막기 위함이었다. 잘 담금질된 칼은 무시무시한 충격을 견뎠지만 칼을 쥔 주인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반쯤 찢어진 손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손잡이가 미끄럽게 느껴졌다. 이 상태로 부딪친다면 위험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장사급의 괴물을 마주했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제법이군.”
거한은 칼날을 혀로 가볍게 핥았다. 한 번은 버텨도 두 번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천씨는 그 순간 죽음을 생각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먼저 떠올랐다. 춘궁기가 찾아올 때마다 풀죽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어머니, 언제나 고생만 시킨 아내, 퀭한 얼굴로 그의 반찬을 보며 입맛을 다시던 아이들.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냥 죽는 것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씨는 고통을 참으며 손에 쥔 칼을 있는 힘껏 거한을 향해 던졌다. 거한은 그가 던진 칼을 쳐내느라 잠시 공격을 늦추었다.
그사이 천씨는 부리나케 몸을 돌려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쥐새끼가.”
그가 달아나자 거한은 성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사냥감은 천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전쟁터에 있는 적은 모두 그의 사냥감이 될 자격이 있었다. 거한은 다음 상대를 찾아 눈을 돌렸다.
전쟁터에는 분위기란 것이 있었다. 모두가 용맹하게 싸울 때는 죽음을 불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이 달아난다면 살고자 하는 욕망이 커진다.
그러면 대열은 무너지고 군대는 자멸의 길을 밟는다. 이 때문에 군대에서는 후미에 독전대를 세워 군의 붕괴를 예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승도는 단련들의 후미에 독전대를 세우지 않았다. 이탈자가 생겨도 이를 막지 않겠다는 것이다.
천씨는 대열을 가로질러 뛰었다. 처음에 그 뒤를 따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곧 그를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 생겼다. 천씨와 안면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와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유대감이란 것이 있었다.
그들은 천씨가 달아나는 것을 보자 위험이란 신호를 크게 받았다. 천씨가 달아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웃들이 천씨의 뒤를 따라 몸을 돌렸다. 한 사람의 이탈이 열 사람의 이탈을 부른 것이다.
여기저기서 불쑥 달아나는 자들이 생겼다. 누군가 움직이면 먼저 움직여 주기를 기다리던 소극적인 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탈자가 서서히 늘어가기 시작하자 단련의 대열 전체가 뒤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단련이란 군 조직은 우연히 모인 농민들의 집단일 뿐이었다.
둥. 둥. 둥.
연대장은 상황을 인식하기가 무섭게 북채를 쥐고 퇴각을 명령했다. 짧고 빠른 운율을 담은 북소리가 울렸다.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자 단련들이 기다렸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몇몇이 등을 돌려 달아날 때부터 싸울 의지가 꺾여가던 그들이다. 퇴각 명령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단련들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풍석은 적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천하의 상승군이라 해도 전면 패주 상황에 휩쓸리면 도저히 수습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패주하는 패잔병들에 휩쓸려 후미 대열까지 엉망이 되는 것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총공격 명령을 내리겠소.”
풍석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명령을 입에 올리자 그 옆에 있던 자 몇이 이견을 보였다.
“아직 적의 주력이 건재한데 전 병력을 일시에 투입하는 건 위험합니다.”
“적은 자기편의 후퇴에 휩쓸려 통제력을 잃어버릴 테니 이걸로 끝난 거나 진배없는 거요.”
풍석은 길게 볼 필요가 없는 싸움이라 여겼다. 단번에 전군을 투입해 쓸어버리는 것이 최선이다. 기수들이 깃발을 들고 흔들었다. 세 개의 별이 힘차게 펄럭였다. 천부와 천형과 천제의 이름으로 요마를 멸하라는 명령이다.
“공은 우리가 차지한다.”
“와아아.”
칼을 뽑아 쥔 장수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병사들도 거센 함성 소리로 호응했다. 수만 대군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들판이 좁다하며 대군이 터져 나오자 세상이 누런빛으로 물들였다.
단련은 자신들의 뒤를 새카맣게 메우며 몰려오는 적을 보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상승군의 진영을 통과해 패주하는 단련들의 모습만 봐도 전세는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무질서하게 달아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천국의 대군이 일시에 상승군의 진영으로 들이쳤다.
상승군은 그 해일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좁은 늪지 사이로 물러섰다. 그들은 전멸을 눈앞에 둔 것 같았지만 승리를 확신한 그 순간 천국 병사들은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적장 오승도가 마련한 무대 위였다.
***
승도는 상승군의 좌익에 섰다. 적의 압력이 가장 강한 곳에 서서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이라도 심리적으로 동요할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병사들이 안정을 찾은 것을 보자 장교들도 평정을 찾은 얼굴로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사격 준비!”
장교들의 명령에 병사들이 종이포를 입에 물었다. 조금은 동요할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사령관이 전방에 서서 그들과 함께한다는 생각에 불안은 싹 가신 지 오래였다. 병사들은 능숙하게 사격 준비를 마치고 총구를 전방으로 겨누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인 만큼 사격 준비에 걸린 시간은 짧았다. 제국군에서 가장 뛰어난 병사들도 분당 두 발은 쏘기 어렵다. 하지만 상승군은 분당 네 발 이상을 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발사!”
총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단박에 쏟아진 수백 발의 납탄이 쇄도하는 병사들을 휩쓸었다.
“요마들의 술수다!”
“천부시여!”
워낙 사람이 밀집한 까닭에 살상 율이 엄청났다. 아무 곳에나 쏘아도 빽빽이 들어찬 누군가가 총탄에 맞았다. 백 명에 가까운 사람이 한 번에 죽어 나자빠지자 기세 좋게 달려들던 천국 병사들도 주춤했다.
유리한 위치에 자리한 상승군이라도 압도적인 수의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기계처럼 덤벼든다면 접근을 허용할 여지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죽으면 두려움도 가지고 행동도 소심해지게 마련이다.
일시에 백 명 가까운 사람이 죽어나가면 그 공포는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 천국 병사들의 발길이 주춤했다.
“이 자라 새끼들아. 시간을 주고 또 총격을 맞고 싶나?”
일부 군관이 정신을 차리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제야 적이 무한정 사격을 퍼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내달렸다. 그때 사격을 가한 적의 전열이 뒤로 물러가더니 다음 전열이 앞으로 모습을 내비쳤다.
그것을 본 천국 병사들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맴돌았다.
요란한 총성이 귓가를 때렸다. 매캐한 화약 연기 사이로 오렌지 빛 불꽃이 수도 없이 번뜩였다. 죽음의 불꽃을 본 병사들은 서늘한 무언가가 자신의 살을 뚫고 들어오는 불쾌한 감촉을 느꼈다. 뜨겁게 달구어진 탄환은 인체를 관통한 순간 혈관을 지져 출혈마저 막았다.
백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짚단더미처럼 쓰러졌다. 단 두 번의 순차 사격에 이백 명에 달하는 병사가 죽어나가자 선두에 섰던 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선두에 서면 확실히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해서다. 하지만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동료들 때문에 자꾸만 앞으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주춤거리며 밀리던 그들의 앞에 재차 사격을 준비하는 적이 보였다.
적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 정도로 공간이 넓은 것도 아니니 적을 향해 거리를 좁히는 동안 선두에 선 자들은 다 죽었다고 봐도 좋았다.
이 죽음의 공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적이 총구를 겨누는 것을 본 순간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죽음의 섬광이 번뜩인 찰나에 다시 백 명에 달하는 인간이 생명을 잃은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상승군의 입장에서 굳이 엎드린 자들을 조준할 필요는 없었다. 쏘기만 하면 다 맞는 상황이니 구태여 명중률이 낮은 자들을 겨눌 필요가 없었다.
수백 명의 시체가 전장에 즐비하게 깔리자 상황을 눈치챈 자들은 눈치껏 바닥에 엎드렸다. 멋모르고 앞으로 내달린 자들은 차례로 순차 사격을 퍼붓는 상승군의 압도적인 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벌집이 되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한 번에 달려든다면 수백의 희생을 발판 삼아 거리를 좁힐 수 있었겠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많은 수가 엎드리는 통에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적이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사격을 계속 퍼부으면 일방적인 싸움이 될 겁니다.”
전열을 지휘하는 대대장이 한마디를 건넸다. 상황은 낙관할 만했다. 적이 달려들기 쉬운 좌익에서 전투가 이렇게 진행된다면 전체적인 국면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중앙과 우익 쪽은 상황이 훨씬 좋을 것이다.
하지만 승도는 이제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전투는 이제 시작이고 변수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으니 상황을 마냥 낙관할 수는 없습니다.”
승도는 역대 전사에서 초반에 승세를 타다 뒤집힌 전례가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전투는 가변적인 부분이 많아 방심하면 전세가 뒤집히기 일쑤였다.
그에게 포병 전력이 있다면 방심을 해도 좋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황을 만들었겠지만 아직 그런 여유를 부릴 전력은 없었다. 장교는 승도의 대답을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승도는 장교에게서 고개를 돌린 다음 적병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적은 아직도 상승군을 향해 거리를 거의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좌익을 흔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한 가지 발상만 떠올린다면. 적도 바보는 아니니 머지않아 이 생각을 해내고 말 것이다.
‘적이 늪지에 병사가 빠지는 것을 감수하고 공격 면적을 넓히면 좌익이 감당해야 할 전선은 세 배로 늘어난다.’
좁은 지역에서의 싸움이라면 취약한 좌익도 적의 공격을 견딜 만했지만 적이 공격 면적을 넓히면 상황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다. 병사가 익사하는 것을 감수한다면 할 만한 도박이다. 무익하게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을 테니.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적이 한 번에 대군을 투입한 상황 자체는 반길 만했다. 예비대 없이 전 병력을 쏟아부은 적 지휘부는 이쪽의 약점을 간파하더라도 그것을 찌르려면 상당한 시간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투에 들어간 부대를 다시 재배치한다는 것은 그런 문제가 있었다. 하물며 어마어마한 병사들의 홍수가 들판을 가득 채운 형편이니 명령을 전달할 전령이 오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적이 반응을 보인다면 단위 지휘관들이 내리는 임시방편의 명령이 고작이다.’
늪지를 공격하라고 명하더라도 단위 지휘관의 명령 정도라면 좌익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일 것이 뻔했다.
승도는 적이 위험한 선택지를 가능하면 꺼내지 않기를 바라며 적진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이 닿은 전장에서 천국 병사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맞으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상승군과 맞대응할 사수들이라도 있었다면 사정이 나았겠지만 총기를 든 병사들은 한참 뒤에 처져 있었다. 전투가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오판하고 냉병기를 든 병사들을 앞세운 것이 실책이었다.
천국 장수들은 뒤늦게 상황이 고약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적은 전혀 동요하지도 않았고 겁을 먹지도 않았다. 도리어 궁지에 몰린 생쥐가 고양이를 물듯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의 이빨이라기에는 너무 억세고 강인했다. 이 강철 같은 이빨 앞에 손가락을 하나씩 들이미는 형국이니 천국만 피해를 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고 군대를 물릴 수도 없었다. 일이만도 아니고 십만에 육박하는 대군이다 보니 단순한 명령을 다시 내리는 데만 한참 걸렸다. 기분대로 전 병력을 내보낸 대가는 값비쌌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휘부가 이 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십만에 달하는 대군이 평지를 메우고 있으니 후방에 있는 풍석이 전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턱이 없었다.
병사가 어지간히 죽어도 표가 나지 않을뿐더러 빽빽이 들어찬 기치창검이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임의로 후퇴할 수도 없고 명령에 불복하려 해도 아군 때문에 후퇴할 수가 없다. 앞은 적이고 뒤는 물러날 수 없는 인간의 벽이다.
천국 장수들은 이 악조건 속에서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낸 적을 잡아내야 했다. 고작해야 몇 겹의 전열 보병이 전부지만 그들은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았다.
천국 장수들은 그 강고한 전열 보병의 벽을 보고 절망 섞인 침음성을 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